〈 289화 〉1부 13장 6
괴인이 되면 코어를 통해 이론상 무한히 성장이 가능하다.
히어로는 그게 불가능하다.
서로 똑같이 한계가 정해져있었는데, 괴인은 성장하고 히어로는 정체되어있다면 히어로의 박탈감은 장난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백희아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브릿지로 들어갔다. 승선 정원이 고작 10명도 되지 않았기에, 백희아는 함장석에 앉아 비행정을 운항하면서도 아주 여유롭게 나를 응대했다.
"무슨 일이세요?"
"흠흠."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운사와 우사에 대해서 마력 스캔을 갱신한 적이 언제지?"
"......그건 갑자기 왜요?"
백희아는 삼사 중 둘을 콕 찝어 묻는 내 질문에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히어로들에게 보고를 받은 것 같았다. 아마도 풍백이 아닐까.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알려주면 좋은 거 하나 알려주지."
"......이틀 전이에요. 인도 가신다는 말 듣고, 지금 배에 올라탄 히어로들 바이탈 체크 하면서 같이 검사했으니까요."
"그렇군. 그럼 이제 두 명의 S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나른하게 앉아있던 백희아가 자세를 고쳐잡고 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백희아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정령이라는 존재는 마력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건 알지?"
"예. 그 속성이라는 걸로 말씀하셨잖아요."
"그리고 석하랑에게는 수속성 정령의 힘이 있어. 그래서 이런 것도 가능하지."
나는 내 마력을 온기를 통해 백희아의 안으로 밀어넣었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뜨거운 감각에 백희아는 화들짝 놀라서 입술을 떨었다.
"하으...."
백희아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가 한번 더 깜짝 놀랐다. 도끼눈을 뜨며 나를 노려봤지만, 나는 백희아의 체내에 굳어있는 화속성 마력을 일깨우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너도 화속성 재능은 낮아."
"그게 무슨...히얏."
"수속성 정령이 20년동안 숨쉬고 살면서 물의 기운이 충만해졌어. 덕분에 불의 기운은 사람들의 몸속에서 아아아아주 적어졌지."
나는 내가 각성시켜줄 수 있는 만큼의 마력을 최대한 활성화시켜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희아의 화속성은 C급-50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끝났다."
"......? 이걸로 끝이에요? 뭐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사우나 80도까지는 안에서 1시간 버틸 수 있게 됐을 것다."
"......좋은 것 같으면서도 엄청 미묘하네요."
백희아는 몸안에서 흐르는 내 마력을 전신으로 돌리며 기꺼워했다. 온몸에 온기가 감도는 느낌은 추운 겨울날 온돌방에서 뜨뜻하게 몸을 지지는 느낌일 것이리라. 이건 미래의 백희아가 직접 말했던 표현이다.
"좋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이능력자를 강화할 수 있다?"
"그래. 그래서 둘을 강화시켰다. 운사랑 우사, 둘이 눈치채지 못하게 석하랑과 악수를 시켜서 말이야."
"아.... 그 행사가 그런 의미셨구나."
백희아는 자신이 준비를 했으면서도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진짜 남들에게 알려주면 안 될 이능이네요. 이거, 저한테 알려주시는 이유는...?"
"귀찮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의미다."
단순한 악수 만으로 이능력자의 스펙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너도나도 석하랑을 찾아 무수한 악수를 요청할 게 뻔했다.
"물가촉천민이라는게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잖냐. 그만큼 수속성의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고, 전국민 악수회라도 했다가는 수속성 이능력자들 만으로 도시 하나를 만들 수 있을거다."
특히 한국은 더 그러했다. 서울 6만 주민 중 1/10 가량이 석하랑에 의해 수속성 이능력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럼 수속성 이능력자 백만 대군을...."
"아서라. 전세계에서 석하랑 찾으러 다닐테니."
덧붙여서 나도, 그리고 환룡도 찾으러 다닐 것이다. 그런 귀찮음은 사양이다.
"그래서 운사랑 우사를 강화했는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문제요?"
"그래. ......마력을 불어넣는 과정에서 우사에게는 실패했고, 운사에게는 성공했다."
"아...."
백희아는 한숨과 함께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면 S급은 한 명이네요."
"아니, S는 둘이다."
"...?"
"운사가 SS급이 되어버렸거든."
"꺄아아아악!!"
백희아는 비명을 지르며 나를 끌어안았다. 함장석에서 일어나 방방 뛰는 바람에, 백나로 호의 비행 속도가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하, 함장님!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비행 괴수가 붙었나요?!"
이승형이 브릿지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나를 끌어안는 백희아를 보고 표정이 굳어버렸다. 백희아는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심하게 기뻐했다는 것을 깨닫고 내게서 떨어졌다.
"......바퀴벌레가 나와서요."
백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뒤.
백희아는 간신히 정신을 되찾았고, 헛기침을 하며 함내 전체에 급가속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사과했다.
"잠깐 흥분했어요. 죄송해요. 별 일 아니니까 하던 일 하시면 됩니다."
히어로들은 너나할 것 없이 브릿지로 달려오고 있었고, 백희아는 그들을 진정시켜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승형도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추태를 보여서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다. 그만큼 놀랄 일이기는 하지."
하루 아침에 SS급이 생겨버렸다.
국적은 한국에 두고 있지만 청화단의 빌런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토종 한국인이지만 반은 외계인인 원탁의 히어로도 아닌, 순수하게 인간이면서 한국 협회의 히어로가 SS급이 되었다.
"아.... 혹시 괴인으로 만드실 생각은?"
"안 만들어. 혹시나 죽으면 모를까, 애초에 죽일 생각도 없다."
이미 두 명의 히로인이 괴인이 되어버렸지만, 여기서 더 히로인이 괴인이 되는 건 사양이다.
"그러면 혹시 원탁에 집어넣으실 계획인가요?"
"원탁에 자리도 없는데 무슨."
이미 원탁은 만원이며, 박라온을 원탁에 밀어넣을 생각도 없다. 나는 백희아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내가 네게서 운사를 데려갈까봐 겁나나?"
"......그러려고 S급으로 강화시킨 거 아니셨어요? SS급이 되었지만."
"아니야."
나는 백희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지휘해라. 운사는 협회의 히어로로 있을테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백희아는 어깨에 올려진 내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이걸로 신서울에도 SS급이 생기겠네요. 후후."
"...그럴 의도로 이용해도 좋기는 하지."
서울과 부산에 SS, 신서울에만 S가 대표 히어로였던게 백희아는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본인은 별 문제가 없지만, 신서울의 주민들은 심정적으로 불안해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만약에 피닉스가 홱 돌아서 신서울 불바다로 만들러 내려오면, 과연 부산에 있는 설화령께서 금방 날아와서 신서울을 지켜주실 수 있을까 하고."
"속도로 따지면 이미 불바다가 된 뒤겠지."
화권은 피닉스에게 안 된다는 걸 사람들도 알고 있을테니, 신서울의 주민들은 적어도 동급의 존재가 신서울을 지켜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게 의도치 않게 운사가 되어버렸지만.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다."
"또 어떤 문제요?"
"A급에서 SS급이 되어버렸으니,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해. 단련이 필요하지."
나는 그래서 백희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혹시 이 배에 훈련실이 갖춰져 있나?"
***
히어로들은 때아닌 소집에 당황했고, 그 장소가 훈련실이라는 것에도 당황했다. 집행관 백희아는 다섯 히어로 뿐만 아니라 청화단까지 소집했고, 함내에 있던 모든 이능력자들이 훈련실에 모였다.
"어서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훈련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당연히 나. 나는 백희아의 이름을 빌어 훈련실에 모두를 소집했고, 히어로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하는 거야?"
팬텀은 여전히 가면을 쓴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미리 가을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고, 청화단 또한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불려온 셈이 되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고, 가는 동안 멍하니 쉬기는 그렇잖아요."
나는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마력까지 끌어올리니 그제서야 이능력자들은 내 의도를 눈치챘다.
"......이거 그거네, 그거."
풍백은 항상 휴대하고 스틱을 꺼내들었다. 역시 연륜이 있어서 그런지 눈치가 빠르다.
"그래, 1:1 차륜전을 펼칠 셈인감? 아니면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요?"
나는 왼쪽 귀걸이를 뽑았다. 마력이 활성화 됨과 동시에 조덕배 특유의 회갈색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고, 내 손에는 찰진 감촉의 덕배트가 들려있었다.
"우애를 다질 시간입니다. 운사 빼고 다 덤벼요."
"......내 이럴까봐 스틱 들고왔지. 그런데 말이오."
풍백은 다른 히어로들을 가리켰다.
"적어도 이런 이벤트를 벌일 거면 장비는 챙겨오라 해야하지 않겠는가?"
지팡이와 창을 지참하지 않은 우사와 운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별다른 무기가 필요없는 화권과 템페스트 레이디는 아닌척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었으나, 분명 이런 이벤트를 생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히어로가 언제 어디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전직 빌런들보다 못하면 되겠어요?"
"그거야 네 행동패턴을 처음 겪어보니까 그렇지."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팬텀은 가면에 손을 올리고 언제든지 변신할 준비를 마쳤고, 궁성은 휴대에 용이하게 접어둔 자신의 활을 꺼냈다. 결국 당장 전투가 불가능한 사람은 운사와 우사였다.
"청화 씨. 이건…."
백희아가 둘의 앞에 나섰다. 히어로들이 민망하지 않게 자신이 나서려는 행동일 테지만, 굳이 장비가 없다고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괜찮아요. 제가 공격력은 딱 B급 수준으로 맞춰놓을 거라서 한 방에 나가떨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몸으로 때우는 거지? 방어력 믿고 버텨라?"
"아무렴 대련인데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위협적으로 덕배트를 휘둘렀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릴 파괴력이지만, 이능력자들은 이 정도 힘은 견뎌낼 능력이 충분할 것이다.
"운사는…. 나중에. 따로 한 판 붙어봅시다. 우사는 스태프 가져와요. 그동안 작전회의도 좀 하시고."
나는 덕배트를 이능력자들에게 한번씩 겨눈 뒤 어깨에 걸었다.
"지금부터 피닉스 레이드 1차전, 모의전을 시작해봅시다. 준비 끝나면 얘기해요."
** *
"이거 내가 보기에는 딱 그거 같은데. 같이 싸우면서 동료애를 다지라는 얄팍한 수지."
풍백은 피닉스의 얕은 꾀를 금방 파악해냈다. 백희아도 따로 부정할 생각은 없었고, 피닉스의 계획을 실토했다.
"자기가 가상의 적이 되어줄테니 합을 맞춰보라고 하더군요. 지휘는 제가 하되, 이 전력으로 어디 한 번 이겨보라고."
"보통 이런 건 패배가 확정된 전투던데?"
지팡이를 들고온 우사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멀찍이 떨어진 피닉스-청화는 덕배트를 풀스윙으로 휘두르며 허공에 배트질을 연습하고 있었다.
"무기가 B급이라도 휘두르는 사람이 SS급인데 의미가 있나?"
"알아서 출력 조정하겠다는 거니까 걱정마십시오. 설마 일부러 데려왔는데 당신들을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궁성은 활을 이리저리 살피며 전의를 불태웠다. 모처럼 윗사람을 향해 합법적으로 활을 겨눈다는 생각에, 궁성은 그 어느때보다도 열의가 넘쳤다.
"그러니 잘부탁드립니다, 집행관 님. 부디 멋진 지휘로 제게 피닉스 님의 미간에 화살을 박는 영광을."
"걱정마. 얘 화력으로 저거 절대 못 죽이니까. 전력으로 쏴도 어린애가 손가락 이마에 튕긴 정도일테니."
의욕에 찬 궁성에 팬텀이 찬물을 확 끼얹어버렸다. 궁성은 입술을 삐죽내밀었지만, 팬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쟤가 죽을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마음껏 작전을 펼쳐봐. 오히려 저거 지가 얻어맞으면 더 기뻐할 걸?"
"혹시 저 아가씨 그쪽 성향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순수하게 이능력자들이 성장하는 걸 기뻐하실 분입니다. 적이 되면 가차없지만, 적어도 적이 아니라면 직접 성장시켜주실 넓은 아량을 가진 분이시죠."
궁성의 은근한 눈빛이 화권에게 스쳤다.
"만약에 이기면 어떤 보상을 주실지 모릅니다. 막말로 한 번에 SS급으로 만들어주실지도 모르죠."
"그렇긴 하지. 나도 원래 A급이었어. S급으로 성장한 것도 쟤 덕분이야."
피닉스는 이제 덕배트를 앞뒤로 움직이며 본격적인 스트레칭에 들어갔다. 백희아는 이능력자들의 전력을 전부 살핀 뒤, 마지막으로 운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전력 외로 빠진 건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운사는 담담히 웃었지만 표정에는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제가 여기서 제일 약하기 때문이니, 멀리서 조용히 관전하겠습니다."
"......."
백희아는 침묵했고, 팬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무엇이요?"
"쟤, 딸기케이크에서 딸기는 빼놓고 먹는 타입이거든."
멀찍이 떨어진 피닉스는 운사를 향해 음흉한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