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1부 13장 4
출정식이라는 악수회가 끝난 뒤, 우리는 흑염룡이 등에 올라타 영종도에 상륙했다. 옛 국제공항 터에는 잘 닦인 활주로에 백나로 호가 말끔히 정비되어 있었고, 제복을 차려입은 서해무기가 헬멧을 쓰고 마중나왔다.
"영종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평안히 다녀오시길."
영종도의 주인은 백나로 호의 외관을 아주 말끔히 정리했다. 때 한 점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닦아놓아, 흑염룡에서 내린 백희아가 입을 쩍 벌리고 놀랐을 정도였다.
"고생했어요. 혼자서 정비하기 힘들었을텐데."
"출항하기 전에 관리하는 건 제 전문입니다. 함장님, 말씀하신 물건들은 전부 다 실어뒀습니다. 보급에 확인을."
서해무기는 정중한 몸짓으로 백희아에게 리스트를 건넸다. 비행정에 들어간 물품들을 꼼꼼히 체크하던 백희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요구한 건 충분히 들어갔는데, 다 유성 제품이네요…."
서해무기는 침묵했다. 우리의 유일한 거래처는 유성이었고, 유성의 우두머리는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물건을 준비해 백나로 호에 보급했다.
"어쩔 수 없군요. 수입산 쓰는 것보다 국산 쓰는게 훨씬 낫죠."
"......그래도 최근에는 조금 좋아지고 있을텐데요."
내가 은유하와 거래를 튼 이후, 은유하는 배짱 장사 노선을 버리고 품질을 향상시키기 시작했다. '유성말고 다른 거 살 거 있냐?'라며 유성포비아를 양산하던 은유하는 이제 사라졌다.
"...청화 씨. 유성은 유성이에요."
하지만 백희아처럼 아직까지도 유성에 대한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이들이 많다. 나도 더이상 유성에 대해 좋은 말을 해줄 필요는 없었다. 내가 신경쓰고 있는 제품들은 오로지 항공우주 분야와 코어 산업 부문이지, 일상 생활의 제품은 아무래도 좋았다.
"청화 씨도 머리 감고 난 다음에 샴푸 덕지덕지 묻어있으면 기분 찝찝하시잖아요."
"......? 나 물로 안 씻는데요."
백희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게 꼭 불결한 것을 보는 것 같아, 나는 절로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아무리 이능력자들의 몸에서 이물질이 적게 나온다고 해도, 주기적으로 몸은 씻으셔야-"
"아니, 물로 안 씻는다고요."
나는 내 머리칼을 한 쪽으로 쓸어내린 뒤, 불꽃을 피워 먼지를 소멸시켰다.
"이러면 되는 걸요."
"......실례했습니다."
"다음에 해드려요?"
"......거기까지는 좀."
백희아는 얼굴을 붉히며 쑥쓰러워했지만, 자꾸 눈을 내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바라보는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백희아와 함께 가장 먼저 백나로 호에 승선하며 팀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타는 사람이 얼마 안 되니까, 각자 방 하나씩 잡으면 돼요."
"알았어."
"실례하겠습니다."
청화단의 탑승자, <팬텀>, <궁성>, <청화>. 그리고 러시아에서 한창 수보르프와 이런 저런 조율을 하고 있을 세 명의 남자 간부를 제외하고, 두 명의 괴인이 코어 상태로 내 귀에 걸려있었다.
"장신구 싫어하던 애가 갑자기 왠 귀걸이야? 그것도 조덕배랑 흑염룡 코어로."
"패션이에요, 패션."
내 귀에는 아주 얇은 마력의 선으로 코어 두 개가 귀걸이로 걸려있었다. 하나는 비늘같은 외양으로 흑색과 청색이 섞인 흑염룡의 코어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투박한 외형의 청회색 조덕배의 코어가 자리잡고 있었다.
"나중을 위한 거니까 신경쓰지마요."
지름 2cm짜리 통짜 보석같은 코어를 달고 있으니 괴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걱정마요. 그렇다고 안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네."
"어쩔 수 없군요."
조덕배와 흑염룡을 내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건 나도 극구 사양이다. 나는 괴인들을 안으로 밀어넣은 뒤, 입구에 서서 승선하는 이들에게 한 명 한 명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템페스트 레이디? 예전에는 스톰 걸이었죠?"
"......."
가장 먼저 승선한 A급 풍술사, 템페스트 레이디가 내 악수를 경계했다.
"왜요?"
"......흥."
템페스트 레이디는 나를 한 번 쭉 훑더니 악수도 없이 들어가버렸다. 나는 허공에 뻗은 손이 무안해졌지만, 그래도 별 내색하지 않고 템페스트 레이디를 넘겼다.
'이게 정상이기는 하지.'
"광검 죽인 사람이니까요."
톡 까놓고 말해 나는 광검이라는 대들보를 뽑고 그 자리를 꿰차버린 악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템페스트 레이디에게 추파를 던질 생각도 없다. 연인이 있는 여자였고, 풍속성 이외에는 특출난 것이 없었다. 히로인도 아니다. 까놓고 말해 궁성이 상위호환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다음 올라오는 이를 맞이했다.
"잘 부탁해요, 풍백."
"허허, 악수는 윗 사람이 청하는 거네만…."
다음 순번, 풍백이 입꼬리를 비틀며 손을 맞잡으려다가 난감한 듯 웃었다. 운사의 스승격인 그와 척을 질 수는 없으니, 나는 풍백이 혹할만한 제안을 하나 했다.
"혹시 삼매진화 아세요?"
"......!!"
역시 연식이 있는 노인이라 그런지, 풍백은 내 말을 대번에 이해했다.
"가르쳐드려요?"
"...흐음. 하긴, 손주 놈이 하던 말이 있기는 했지."
풍백은 나와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 틈을 타서 그의 마력을 빠르게 훑었다.
"대 이능력자 시대에는 등급 높은 사람이 형이라고 하더군. 껄껄, 그럼 나는 자네에게 누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으하하!"
"......청화라고 불러요."
최종 대전에도 막걸리 병을 놓지 않던 성격은 5년 전인 지금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광검을 죽인 내게 이렇게 대하는 풍백의 유들유들함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지잉. 내 마력스캔이 끝나자, 풍백은 흰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A급이라서 그런지 내 마력의 흐름을 눈치챈 것 같았다.
"흐음…?"
"바이탈 체크에요. 정정하시네요."
"......흐허허. 참 별난 재주를 가지고 있으시구만."
풍백은 너스레를 떨면서도 악수를 풀었다. 양해를 구하지 않고 상대의 마력을 훑은 건 무례한 행위였지만, 나는 이미 예의따위는 말아먹은 존재였다.
"아쉽네요. 저랑은 상성이 안 좋아서."
"상성이 좋으면 S급이라도 되는감? 흐허허."
"아뇨. SS급도 되는데. 푸흐흐."
"......."
풍백은 인상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내 말을 농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다.
"윽."
"엑."
나는 다음으로 승선하는 이를 보자마자 손을 뒤로 빼버렸다. 이승형 또한 나를 보자마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고 칠 생각하지 마요. 지금 나는 어디까지나 <비스트 테이머>로서 승선하는 거니까."
"어차피 나중에 수틀리면 불사조 될 거 아닙니까?"
"......."
정곡을 찔렸다. 나는 할 말이 없었지만, 이승형은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뭔데요? ...칫."
물어본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반색하고 말았다. 나는 혀를 찼으나 이미 말은 되돌릴 수 없었고, 이승형은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말로 당신의 목적은 세계 평화입니까?"
"이걸로 몇 번을 얘기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말했잖아요?"
"그래도 굳이 다시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이승형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내 진심을 담아서 답했다.
"네. 세계 평화. 성주 죽이고, 겸사겸사 이계신도 쓰러뜨리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알콩달콩 살아가고 싶네요."
"......그렇습니까."
이승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스쳐지나가는 그의 얼굴에는 '확신'이라는 감정이 얼핏 보였고, 그에 괜시리 내가 더 불안해졌다. 혹시나 진짜로 사고를 치는게 아닐까 싶어서.
"강해지기는...했나?"
내가 그의 심장에 박아넣은 창염은 이승형과 함께 무럭무럭 성장하여 95, S+의 경지에 이르렀다. 계기만 있다면 스스로 SS급에 이를 수도 있게 될 정도로 이승형의 성장 속도는 압도적이었다.
"하여튼 주인공 놈들은 죄다 사기캐에요, 아주."
물길만 살짝 비틀어서 물이 잘 흐르게 만들어줬을 뿐인데, 어느새 이승형은 알게 모르게 폭풍성장을 한 지 오래였다. 그가 마음을 바꾸어 내 아래로 들어온다면 얼마든지 힘을 키워줄 수 있지만, 스스로 먼저 굽히고 들어올 때 까지 이승형을 성장시키는 것을 유보했다.
"그럼 이제부터가 메인인데...."
"아까부터 뭘 자꾸 씨부렁거리는 거요?"
헝클어진 더벅머리의 중년 남자, 우사가 내 앞에 서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법도 했지만 우사도 내게 무언가 묻고싶어 하는 듯 했다.
"혹시 뭐 궁금한 거 있어요?"
"엄청 많지. 근데 그랬다가는 시간이 모자라서 안 될 것 같고, 딱 두 개만 물어봅시다."
우사는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화권, 당신 작품이요?"
"작품까지는 아니고 도화지에 물감 정도는 준비해줬어요."
"그렇군. 그럼 혹시 나도 가능한가?"
"당연하죠. 손 좀 줘볼래요? 대화가 참 잘 통해서 좋네요."
나는 우사에게 악수를 청했고, 우사는 겸연쩍어 하면서도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우사의 손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계획대로라면 그는 이미 S급이 되어야-
"......여기서는 바로 안 되고, 인도 갔다오고나서 도와드리죠. 혹시 은하대학교 들어오실 생각 있어요?"
"내가 이 나이에 대학 들어가면 염치가 없지. 쯧, 됐수. 거 손은 되게 말랑말랑하시네. 앞으로 자-알 해봅시다."
우사는 복잡한 얼굴로 짐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복잡한 얼굴로 안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석하랑...."
방법을 알려줬더니 아주 제대로 사고를 쳐놨다. 나는 당장에라도 석하랑을 부르고 싶었으나, 연이어 승선한 이를 보고 화를 삭혔다.
"다시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히어로 <운사>, <비스트 테이머> 청화 님의 인도행 지원에 지명을 받았습니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 빌런인데요?"
"지금은 청화 님으로 오신 거 아닙니까?"
"......그럼 만약에 <피닉스>로 오면 어쩌실 거예요?"
운사는 뭘 그럴 걸 묻냐는 얼굴로 내게 반문했다.
"전력을 다해 체포할 겁니다."
"......당신도 참 알기 쉬운 타입이라서 좋네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운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확인을 위해 손을 내밀었다.
"......."
그에 운사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조심스레 뻗었다. 내 손가락만 잡으려 하자, 나는 내가 답답해서 운사와 손을 맞잡았다.
"...흠흠."
"......."
석하랑 죽일까. 나는 운사로부터 느껴지는 마력의 패턴에 속에서 열불이 끓었다. 전력적으로 큰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운사는 강해져도 너무 강해져버렸다.
"그럼 잘 부탁해요, 당신이 이번 인도행의 에이스가 될 지도 모르니."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당연히 에이스가 될 것이다. 악수 한 번으로 백나로 호에 승선한 이능력자 중 최강이 되어버렸으니.
"저기요, 아까 석하랑이랑 악수할 때 뭐 이상한 거 없었어요?"
"......음."
운사는 눈을 깜빡이며 발그레 웃었다.
"비밀입니다."
"아, 귀여웠다고."
"......!!"
운사 박라온.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여자. 원작 주인공보다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박라온의 취향은 핑크빛이 넘실거리는 소녀감성이 풍부했다. 나는 은근한 얼굴로 박라온에게 슬쩍 다가갔다.
"그럼 저는 어때요?"
"흡...!"
박라온은 도망쳤다. 나는 부리나케 도망가는 박라온의 짐칸에서 나를 미니피닉스를 형상화한 듯한 인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날개 아래의 태그에는 'USTOY'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역시."
미니피닉스의 귀여움은 유성포비아도 굴복하게 만드는 건가. 나는 박라온의 성정이 변한 것에 놀랐고, 인형임에도 불구하고 귀여운 미니피닉스의 파괴력에도 놀랐으며, 나 몰래 또 언제 미니피닉스를 인형으로 만들어 판매한 은유하의 상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마지막으로-
"석하랑 얘는 S급 둘을 만들라고 했더니...."
내 부탁대로 S가 둘이 되었지만, 나는 S 둘이 이런 식으로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원활한 괴수 레이드를 위해 스캔한 히어로들의 스펙을 기억과 대조하여 대충 정리했다.
<집행관> 백희아, A급, 암속성 80.
<템페스트 레이디> 양춘자...가 아니고 양선우, A급, 풍속성 아마도 80 전후.
<풍백> 천현택, A급, 풍속성 84.
<화권> 이승형, S+급, 내 덕분에 현재는 화속성 95.
<우사> 강하백, A+급, 석하랑에 의해 '1' 늘어난 수속성 89.
그리고 <운사> 박라온.
"SS...."
석하랑이 자신의 마력을 너무 많이 부어버렸다.
"최대 레벨 99라니.... 홍수 터졌다...."
운사는 악수 한 번에 수속성 SS급이 되어버렸다.
2 정도만 올리면 될 우사에게는 마력을 1만큼 넣어버리고, 20정도만 넣어야 할 운사에게는 꽉 찰 때까지 가득 부어버린 것이다.
"석하랑.... 하아."
나는 당장이라도 뱃머리를 신서울에 있을 석하랑에게로 돌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