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화 〉1부 13장 3
은유하가 제법 건방진 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건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발언이기도 했다.
미래, 그러니까 원작에서 은유하는 절대 한국 땅을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자신의 인형으로 처리하는 흑막같은 히로인이며, 해외로 나갈 일이 있어도 인형을 보내고 따라가지는 않는다.
그런 은유하가 자신이 직접 가고 싶다고 어필을 했다.
나는 은유하의 성향을 생각하여, 그 속에 담긴 말뜻을 곰곰히 살폈다. 그리고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얘 이번에는 꼭 자기한테 개천광 달라고 시위하는 거네 지금.'
내가 공수표를 막 집어던지고 줬다 빼앗아간 것이 상당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 문제에 대해 은유하에게 약간의 미안함이 있었고, 적어도 이번만큼은 꼭 개천광을 은유하의 파트너로서 두기로 다짐했다.
"은유하."
"네."
"약속하마. 개천광을 잡으면 네게 인도하기로."
"......약속하신 거예요?"
은유하는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며 내게 확답을 요구했다. 은유하 답지 않게 계약서를 들이민다거나 하지않고,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찌르게 만드는 약속에 나는 더욱 미안해졌다.
"그래. 약속이다."
그래도 이게 은유하의 계책이라면 그대로 따라주기로 했다. 천가을과 환룡의 콤비가 속성적으로 가장 걸맞듯, 은유하와 개천광의 콤비는 광속성에 있어서 국룰이라고 불리우는 조합이니까.
꾸욱.
나는 은유하와 새끼 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지장까지 찍었다. 은유하 덕분에 광검도 살리고 루살카도 살려 러시아의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내가 은유하를 챙기지 않으면 도의적으로 옳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직접 오는 건 위험해. 나는 네가 제 2의 천가을이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끄응…."
천가을이 어쩌다가 괴인이 되었는지 익히 알고 있는 만큼, 머리가 똑똑하니 내 말을 금방 이해할 것이다. 은유하는 커피를 홀짝이며 아쉬움을 달래는 듯 했다.
"전용기는 신서울로 도착하도록 했어요. 아, 그리고 우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데…."
은유하는 비행기에 장착된 도청장치를 통해 우사와 풍백이 나눈 이야기를 내게 전했다. '은하대학교'의 신입생 모집 요강의 실체를 꿰뚫어보는 우사의 눈썰미는 상당히 날카로웠다.
"역시 준S급."
"우사가요?"
"그래. 친화율로 따지면 수속성 88이다."
한국 내 수속성 남자 히어로 중에서 가장 높은 포텐셜을 자랑하던 남자였다. 후에 사고로 인해 친화율이 깎여나가 평범한 A급으로 전락하지만, 지금은 쌩쌩 날아다니는 양반이다.
"맞는 말이긴 해. 은하대학교를 통해 모집하는 사람들은 결국 미래에 엄청 활약하는 존재들이니."
"한 마디로 당첨이 확정된 복권만 긁는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미래에 누가 S급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지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비단 히로인 뿐만 아니라, 다른 조연급 캐릭터들도 대부분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꼭 확정된 복권만 긁는 것도 아니야."
"복권 자체를 당첨으로 바꿔버리실 수도 있다? 정령의 속성만 맞으면?"
"그렇지."
A급 잠재력을 가진 히어로가 자신의 한계까지 성장한 뒤, 그 인성과 심성을 테스트하여 S급으로 올릴 지 말 지는 내가 결정할 일이다. 재능있는 존재를 키웠는데 나중에 내 적이 되어 나타나는 건 죽어도 사양이었다.
찌릿.
나는 동남쪽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마력에 몸서리를 쳤다. 은유하가 준비한 딸기라떼를 전부 마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오는군."
"어차피 대외적인 일은 가을 언니가 고객님으로 변신해서 하고 있잖아요. 좀 더 있다 가시지."
"......."
은유하는 자신의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초조해했다. 마침 타이밍이 공교롭게도 유하가 커피를 다 마시는 순간, 석하랑이 신서울로 진입했다.
"......석하랑한테 이쪽으로 오라고 전해."
"네!"
은유하는 싱글벙글 웃으며 석하랑에게 연락했다. 나는 비어버린 컵을 만지작거리다 은유하에게 건넸다.
"한 잔 더."
"당연히 준비해드리죠. 후훗."
"그리고 캬라멜 마키아토 한 잔 가능한가?"
"......알았어요."
나 대신 일하고 있을 천가을에게 조금 미안했다. 자신이 내 시간을 빼앗은 걸 알기에, 은유하는 투정을 부렸지만 군말없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은유하."
"네."
"나도 커피 한 잔."
"......고객님 제가 혹시 딸기라떼 잘 못 만들었나요?"
커피를 내리던 은유하는 사색이 되어 나를 바라봤고, 나는 손을 흔들어 은유하의 오해를 금방 풀었다.
"내가 365일 딸기만 먹어대는 귀신이 아니잖냐."
"아니었어요?"
"......364일 정도로 정정하지. 하루 정도는 나도 다른 거 마셔도 좋잖나. 특히 오늘 같은 날은."
나는 대전을 향해 날아가는 유성의 전세기를 보며 호흡을 골랐다.
"원래 출발하기 전에 맛있는 커피 한 잔은 의식같은 거라서 말이지."
빌런 집단이 아닌 헌터 길드 청화단의 출격이니만큼, 그 마음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은유하가 내온 커피의 향을 즐기며, 석하랑이 도착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좋네요.... 고객님이랑 같은 커피 마시고. 아, 다음에는 커피에 딸기과즙 넣어드릴까요?"
"그건 아니야."
"......."
그건 나도 창염도 싫었다.
잠시 뒤.
나는 석하랑이 도착하자마자 출정식에서 해야할 일에 대해 알려줬고, 석하랑은 두 명의 S급을 만든다는 생각에 붕 떠있었다.
"물조절 잘 해라."
"아무렴 내가 그 걸 못 할까봐? 밥 짓는 거랑 똑같더구만! 흐흐, 이걸로 S급 늘어난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 * *
<오전 9시 44분, 대전 임시 활주로.>
"여기에 내리라고?"
우사는 X로이드 승무원의 지시에 기가 막혔다. 전용기는 옛 대전 연구 단지의 터에 안착했고, 그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검은 비늘을 반짝이고 있는 흑염룡이었다.
"흑염룡을 타고 행사장에 들어오시라는 집행관 님의 명령입니다."
"아니, 행사장?"
"예. ...총리 님께서 인도로 가시는 분들께 격려차 인사라도 나눕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선의철이 하야하며 권한대행을 하고 있으나, 그 누구도 그를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았다. 앞으로 열흘 정도가 지나면 그는 권한대행으로서의 역할이 끝나게 될 것이므로.
"영감, 어찌 생각하시우? 집행관 님 말씀에 따르면, 청화는 갑자기 인도에 가고싶다고 떼쓰는 아이가 되어버렸는데."
"그럴 리가 있나. 집행관 님이 사전에 준비를 안했을 리가 없잖냐. 화권아, 너는 뭐 들은 거 없느냐?"
"......전혀요."
오히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다가 납치를 당해 러시아로 강제로 보내지더니, 러시아에서 크게 소란을 겪고 어떻게 좀 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바로 전용기에 몸이 실려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제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심적으로는.... 하아."
화권은 마음의 평안이 필요했고, 결국 라스푸틴과의 어둠 속 랑데뷰를 전해들은 풍백과 우사는 그를 마음으로나마 위로했다. 어깨를 두드리거나 하면 심각하게 과민반응을 보였으므로.
"그래도 가서 쉴 날이 있을게야. 아무렴 이렇게 날아가는데 사나흘 정도는 있겠지."
"글쎄요. 중국 때 보셨잖습니까, 선배님. 중국에 가자마자 비행기 터지더니, 이틀만에 S급 둘을 처리하고 귀환했어요."
인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화권은 정신을 가다듬고 비행기 안에서라도 편히 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흑염룡을 향해 다가갔다. 흑염룡은 세 남자를 바라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커먼 남정네들을 태우다니.... 하아.]
"뭐라고?"
"왜 그러느냐, 화권아."
"선배님, 방금 못 들으신...."
화권이 어이가 없어 삿대질을 했지만, 흑염룡은 눈을 감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아무래도 흑염룡의 의사는 자신만 들은 것 같았다.
[신께서 앉으실 때는 기분 좋았는데.... 젠장.]
"와. 이거 진짜."
화권은 직감했다. 이 자는 구제불능의 쓰레기라고. 하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빨리 타자, 화권아. 행사고 뭐고 빨리 처리한 다음, 집행관 님 배에서 쉬던가 하자고."
우사는 피곤한 얼굴로 흑염룡의 위에 올라탔다. 엉덩이를 깔고 앉는 행동에 흑염룡도 화권도 얼굴이 불편해졌다.
"......예."
화권 또한 흑염룡의 위에 올라탔다. 풍백까지 흑염룡의 등에 오르자, 흑염룡은 행사장을 향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너 왜 서서 가냐?"
"이게 더 편해서 그렇습니다."
화권은 흑염룡의 등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보드를 타는 것 마냥 서있었다.
* * *
잠시 뒤.
전국에 생방송으로 출정식이 거행되었다. 피닉스의 예상대로 다행히 인도 측에서는 청화의 방문을 즉각 수락했고, 식이 끝나는 즉시 청화단은 하늘길에 오르기로 하였다.
"......하여, 우리 영웅들이 인도에서도 인류의 평화를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길고 긴 총리의 일장연설이 끝난 뒤, 총리는 파견을 나가는 이능력자들과 한 명 한 명 악수를 하며 덕담을 나눴다.
"조심하세요."
그 옆에는 설화령 석하랑도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석하랑은 히어로들과 두 손 꼭 잡고 악수를 하며 그들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여기는 제가 지키고 있을테니까,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세계 최강의 히어로가 한국을 지키겠다는 말에 영상을 보던 국민들은 마음을 놓았다. 아무리 인도로 소위 '파병'을 나간다고 하더라도, 석하랑까지 해외로 나가버리면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을 것이다.
"꼭, 꼭 부탁드릴게요."
"안심하십시오."
"남사스럽게 왜 이런데. ...크흠, 알겠수. 조심히 다녀오지."
석하랑은 히어로들 중 유독 운사와 우사의 손을 꽉 붙잡았다. 둘의 손에 미약한 서리가 내려앉을 정도로, 석하랑은 유독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있던 시간이 길었다.
"다녀올게."
"네."
석하랑은 화권과 단 1초도 되지 않을만큼 짧게 인사했다. 심지어 눈도 제대로 맞추는 양 마는 양 하더니,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푸흐흐."
귀빈 석에 앉은 청화-피닉스는 눈이 마주친 이승형에게 손을 흔들었다. 의기양양한 것이 꼭 승리를 과신하는 사람 같았으나, 화권은 오히려 피닉스에게 고개를 꾸뻑 숙였다.
"뭐야...?"
저게 왜 나한테 저렇게 인사하지. 피닉스는 속으로 이승형의 의도를 의심했으나, 물어볼 기회는 없었다.
"집행관 백희아 및 히어로, 청화단. 지금부터 인도 지원을 다녀오겠습니다."
캬오오오오!!
흑염룡이 날개를 펼치며 그 힘을 과시했다. 신서울에서 인천 옛 국제공항 터로 날아가는 정도의 이동거리였지만, 사람들은 흑염룡이 날아가는 그 짧은 시간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 * *
"젠장!"
서울에서 급히 달려와 신서울에 도착한 검은 머리의 외국인들-석하랑의 표현에 따르면 '탈주자들'은 인천으로 향하는 흑염룡의 뒷날개에 땅을 쳤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흙길을 달려오느라 전신이 만신창이였으나, 그보다 타깃인 청화가 다시 서울 방향으로 떠나버렸다는 것에 더 울컥했다.
"어디로 간다고? 인도?"
"이런 젠장, 이래서야 우리 완전 쫑났잖아."
탈주자들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청화를 회유해 '본국'으로 데려간다는 본래의 임무는 애초부터 실패했고, 심지어 청화의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알아낼 수 없었다.
"저거 혹시 우리 일부러 놀리나?"
"에이, 설마 그러겠냐...."
"아니면 왜 신서울갔다가 인천갔다가 그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놀려먹는 것 같은데? 얘, 넌 어떻게 생각하니?"
탈주자들 가운데, 유독 머리를 붉게 물들인 소녀가 껌을 씹다가 바닥에 퉤 뱉었다.
"알게 뭐야.... 나는 오고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너 왜 이렇게 비협조적이야? 너 이렇게 나오면 우리도 너를 도와줄 수 없어. 너 평생 불법 밀입국자로 살래?"
탈주자들은 소녀를 협박했다. 소녀는 뒷짐을 진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며 몰래 빠져나갔다.
"인생 시발.... 하아."
소녀는 화장실의 벽에 고개를 처박고 소리없이 울었다. 굳센 마음으로 버티고 싶었지만, 인생은 소녀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나도.... 응?"
소녀는 화장실 벽에 붙은 스티커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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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 또라이 같은 스티커는...?"
어째서일까. 소녀는 스티커의 문구를 보고 눈을 떨어뜨릴 수 없었다.
"야! 슈리! 우리 서울로 돌아간다!"
"......시발, 알았다고!"
소녀-슈리는 벽을 쾅 발로 차며 씩씩거렸다.
슈리가 나온 화장실 칸에는 뜯겨나간 스티커 자국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