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1부 13장 2
<2020년 7월 23일 오전 7시, 서울 상공.>
나는 석하랑에게 이능력자의 경지를 강제로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 알려줬다.
마력이라는 것은 결국 체내에 얼마나 많은 양의 마력을 쌓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며, 쌓인 마력을 혈관을 통해 어떻게 잘 흐르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정도가 결정된다.
그러니까 간단히 얘기하여, 체내에 마력을 강제로 쌓아 흐르게 만들면 된다는 이야기.
정령의 입장에서보면 인간의 몸은 '밭'이나 다름 없다.
마력이 전혀 없는 무능력자는 개간되지 않은 황무지같은 것이고, S급 수준에 이르면 씨만 뿌려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옥토나 다름없다.
정령이 해야할 일은 그 밭에 물길을 트고 흙에 영양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 물과 영양이 '정령이 직접 주입하는 마력'인 것이다.
"그러면 다른 간부들은 왜 안 돼?"
가을의 물음은 타당했다.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도 원래는 정령인만큼 이능력자들을 마음껏 각성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으나, 그들은 그게 불가능했다.
"마력에 테라의 오염이 섞여있으니까요."
세뇌를 풀고 정령의 힘을 뽑아낼 수 있다면 모를까,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이 사용하는 마력은 이계신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
그것을 정화할 수 있는 물리적인 수단이 내 불꽃-창염이고, 원작 주인공은 창염의 피닉스로부터 힘을 전해받아 간부들을 정령으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죠. 제가 화속성을, 환룡이 환속성을, 그리고 석하랑이 수속성 마력을 주입하면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거예요."
당장 눈앞에 있는 가을이 대표적인 예였다.
가을이 사용할 수 있는 환속성 마력이 88-A급 최대치에 가까웠지만, 환룡이 가을의 몸 속에 자신의 마력을 채워줌으로써 가을을 S급으로 만들었다.
"환룡이 어떻게 마력을 넘겨줬어요? 혈액교환? 아니면 코어를 만들어서 넘겨줬나?"
"어, 음, ...."
가을은 얼굴을 붉히며 내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둘이 따로 있을 때 얘기해줄게."
"......말 안해도 알겠네요. 혈액으로도 마력을 주입 가능하다고 했죠? 타액으로도 가능해요. 정액도 가능하고."
"야!!"
가을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무시했다. 내 말에 다른 간부들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단장님, 혹시 화권을 상대로-"
"오해하지마요. 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으니까."
궁성 유이신이 엄한 소리를 하기 전에 먼저 뒷말을 차단한 나는 손바닥을 펼쳐 내 마력을 허공에 끌어모았다.
푸른 불꽃은 속이 꽉찬 구슬이 되었고, 그 모양은 색깔만 붉은 색이었다면 S급 화속성 코어와 거의 비슷했다. 내가 만든게 더 정순하지만.
"괴인들이 다른 코어를 흡수해서 강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제가 제 마력을 정제해서 직접 심장에 흘리는 거죠. 뭘 기대한 거예요?"
"......그러니까 막말로 너한테 키스받으면 화속성 S급 된다는 거네?"
"틀린 말은 아닌데,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거 좀 표현이 그렇네요. 사람들 오해하게 하지마요. 얘가 듣고 있잖아요."
[저는 신께서 코어만 내려주셔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나의 자가용, 흑염룡은 마력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남들이 듣기에는 드래곤의 포효나 다름없지만, 적어도 S급에 이른 존재들은 흑염룡의 의사를 읽어낼 수 있었다.
"끄응...."
유이신은 침음성을 흘리며 아쉬워했다. 내가 각성시킨 정령 셋 중 유이신과 일치하는 정령은 없었다. 그건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환룡에게 부끄러운 짓을 당해서 S급이 된 천가을을 제외하고, 지속성인 조덕배랑 아키택트. 암속성인 하늘성이랑 등대. 궁성 당신은 풍속성이죠. 이미 저는 B급이었던 흑염룡을 S급까지 만들어줬고."
"질문있습니다. 그럼 왜 흑염룡을 괴수로 만드셨습니까?"
등대가 자리를 비우니 궁성이 질문을 한다. 나는 타당한 그의 질문에 흑염룡의 등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원래 흑염룡은 B급이었죠. 그걸 강제로 A급으로 만들고, 연이어 S급까지 만들었으니 흑염룡도 자기 경지에 적응할 시기가 필요했어요. 흑염룡을 드래곤으로 만들었을 때는 그가 간신히 A급의 경지에 올랐을 때고."
"몸은 만들어졌어도 정신도 그 경지에 따라가야 한다나 봐. 나도 그랬잖아? S급 코어지만 A급 스펙밖에 못 냈던 거."
가을은 자신의 엉덩이 뒤를 가리켰다.
이제는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게 되었지만, 가을이 S급의 코어로 만들어졌어도 A급의 경지에 있었기에 항상 촉수를 밖에 내놓고 다니고 있었다.
"청화단에도 화속성이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이 땅에는 물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화속성이 씨가 말랐어요."
수속성 정령이 이 땅에서 20년을 상주하고 있었으니, 한반도 전체에 소위 물난리가 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개인적으로 흑염룡이 서울에서 B급 화속성으로 버티고 있던 것도 대단한 걸요? 만약 다른 나라였으면 제 도움 없이도 A급 찍었을 거예요."
[하지만 신을 영접하여 이런 S급에 이르지는 못했을 겁니다.]
"......흠흠."
흑염룡이 내 얼굴에 금칠을 해대는 통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원래는 그냥 완전히 아군이 될 자들만 성장시키려고 했는데, 이제는 슬슬 전력을 늘리려고 합니다."
흑염룡이 서서히 아래를 향해 활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울을 벗어나 신서울의 상공에 들어왔고, 굳이 파견된 전투기의 선행에 따라 흑염룡은 날개를 접고 신서울 인근에 착륙을 시작했다.
우리가 착륙하는 곳은 과거 내가 광검과 일전을 벌였던 대전 연구 단지의 공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행관 백희아가 흰 베레모를 쓴 채, 우리를 맞이했다.
* * *
언제나 발표는 기습적으로.
괜히 출발도 하기 전에 다른 국가들이 외교적으로 항의할 수 있다는 의견에 따라, 우리는 출발하기 직전에 출정식을 하고 곧장 인천에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인천에서 신서울까지 왔다갔다 하시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서울에서 출정식을 거행하게 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원래는 인천에서 간단히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백희아는 인도로 가는 출정식을 화려하게 하기를 바랐고, 나는 굳이 신서울을 거쳐 인천으로 올라가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렇게 흑염룡을 타보고 싶으셨어요?"
"흠흠. 신서울 주민분들께 안전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피...청화 님의 행보도 널리 알릴 필요가 있고요."
백희아는 남들의 눈을 신경써서 내 호칭을 빠르게 수정했다. 나 또한 다른 이들의 귀가 신경쓰여 존댓말을 했다. 인도로 가는 일행의 총 책임자는 집행관이었고, 청화는 청화단의 일원이자 한 명의 이능력자일뿐이었다.
"굳이 알리지 않아도 알아서 홍보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 달 중국에 다녀오신 이후, 흑염룡까지 타고 신서울로 오신 건 이번이 처음이니."
"네. 벌써 커뮤니티 불타기 시작하네요."
불을 지른 방화범들은 기껏 서울에 도착해 내 행방을 찾다가 닭 쫓던 개가 된 탈주자들이었다. 새벽같이 흑염룡을 타고 서울로 날아왔으니, 그들이 서울에서 신서울로 내려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들 직감했네요.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르고."
"......보안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그래서 출정식 할 때…."
나는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반드시 출정식에 참여해야 할 두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
"운사랑 우사, 둘은 꼭 참가해야합니다."
"...혹시 그 둘이?"
나는 손가락으로 S자를 그렸다.
"오늘부터 수속성은 물가촉천민이 아니라 물귀족이 될 겁니다."
설화령께서 은총을 내리심에, S급이 되리리라.
* * *
흑염룡이 신서울에 도착했다.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급보가 전 세계에 흘러갔고, 대중들은 한동안 잠잠했던 청화의 행보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 얘 또 6민트 같은 거 하려고 신서울 온 거 아니냐?
합당한 의심이었다. 하지만 달력이 한 장 넘어가던 시기도 아니었고, 청화와 함께 흑염룡을 타고 온 이들의 면면을 살핀 이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쟤들 청화단인데?
세계 최초의 '헌터 길드', 청화단은 집행관의 인도에 따라 당당히 신서울에 진입했다. 그리고 청화가 신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행관 백희아는 공식적으로 기자회견을 예고했다.
"반갑습니다, 집행관 백희아입니다."
언제나처럼 정복에 베레모를 갖춘 집행관이었으나, 그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 들떠보였다. 백희아는 궁금증에 미쳐 돌아버리기 직전인 기자들을 한 번 눈으로 훑은 뒤, 카메라를 향해 당당히 선언했다.
"저희 인도갑니다. 이상입니다."
브리핑 역사상 가장 짧고 충격적인 브리핑으로 미래에 화자가 될 충격적인 상황에 기자들은 어안이 벙벙했고, 백희아는 아무 미련 없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며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자, 잠깐만요!"
"집행관 님! 이건 도대체?!"
"러시아에 간 특사단은 어떻게 된 겁니까?!"
기자들은 자리에서 무분별하게 백희아의 뒤를 쫓았다.
"진정하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뭐라고 제대로 설명이라도 해주고 가야지!!"
심지어 기자들은 옆으로 달라붙는 척 하면서 앞 길을 가로막기 시작했고, 백희아를 보좌하러 나온 히어로들이 그들을 막아섰지만 기자들은 막무가내였다.
"저희들은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백희아가 고개를 돌려 질문한 기자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도 언질 못 받았어요. 청화 양이 오자마자 바로 인도가고 싶다고 하셔서."
"네?"
"신서울 오시는 것도 전혀 들은 바가 없었는 걸요."
백희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고, 스크린을 통해 백희아를 보던 사람들은 동정심이 일었다.
정말로 종잡을 수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청화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여러모로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신서울 유성 일가 저택.
"졸지에 청화 양이 천방지축이 되었는데 괜찮으세요?"
"상관없어. 이래야 청화에 대해 어그로가 더 끌리지."
백희아의 입을 통해 체계적으로 계획된 일정이 발표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즉흥적으로 국가를 정하게 된 식으로 알리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협회를 통해 내 움직임을 예측하려는 건 전혀 쓸모가 없다는 걸 알리는 거지. 적어도 행선지를 정함에 있어서, 협회가 갑이 아니라 내가 갑인 것처럼 위장하는 거다."
"위장이라기 보다는 그냥 사실 아녜요? 고객님께서 정하시면 백희아는 그저 따라야 하잖아요."
은유하는 커피를 마시며 네트워크의 상황을 내게 전했다.
"지금 난리났어요. 인도 협회에서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고."
"연락은 못 받아도 하늘길은 열어줘야할 걸? 지들이 어쩌겠어? 청화가 간다는 데 환영해줘야지."
"러시아로 특사단을 보낸 게 유효했네요. 다들 러시아 안 가고 왜 인도로 가냐고 다들 난리예요."
하늘성을 비롯한 특사단을 보낸 또다른 효과. 그건 '혹시 특사단이 청화의 방문을 위한 물밑 작업을 하는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그야 인도에 카르나가 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르는 걸요."
"이유가 굳이 필요한가? 음, 그럼 이건 어때? 처음 간 곳이 중국이었으니, 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인도로 가는 거라고. 꽤 그럴 듯한 이유 아닌가."
"그럴듯하기는 하네요. 인구수가 세 번째로 많은 나라는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마시고 눈이 빠져라 고객님을 기다리고 계시겠지만."
"착각한 자기들 잘못이지. 나는 간다고 한 적 없다."
나는 공식적으로 특정 국가에 가겠다고 선언한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중국 방문 이후 비행기 격추에 대한 마음을 추스릴 필요가 있다는 변명이 생각보다 잘 통했고, 뉴클리어가 생산하여 남하하는 괴수들은 적절한 변명거리가 되었다.
"당장 영국에 펜릴이 다시 나타났다면 영국으로 갈 수도 있고, 남미에 또 다른 간부가 나타났다면 지구 반 바퀴를 돌 수도 있는 거지. 내가 해외로 가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잖냐."
"그렇죠. 간부 잡으러 가시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은유하는 자신의 쇄골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님께서 반드시 카르나를 잡아오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고보니 내가 네게서 참 많은 것을 줬다가 빼앗아갔지."
광검도 그렇고, 큐브도 그렇다. 막상 은유하에게 줘 놓고는 이런 저런 이유로 자꾸 빼앗아가버렸다.
"개천광은 네게 맡기마."
"......이번에도 공수표 던지시는 거 아녜요? 아니면 또 어디 다른 곳에서 쓸 곳이 있다며 미루시거나."
"절대 그러지 않는다."
개천광 카르나가 어디에 배치되어야 가장 효율이 좋은가를 따져보면 역시 '은유하의 옆'이다.
"네가 광속성 아니냐. 카르나를 곁에두고 마력을 주기적으로 공급받으면 S급, 아니 언젠가는 SS급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전투는 어렵겠지만."
"그럼 고객님. 저는 미래에서 SS급으로 어떤 이능력을 사용했던가요?"
"......."
스포일러를 해도 괜찮을까? 나는 잠시 고민이 되었고, 알려주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직접 확인해봐라."
"...저 혹시 이능력 안 좋아요? 설마 조종 가능한 인형의 수만 늘어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죠?"
"노코멘트. 내가 알려주지 않는 것은 이유가 다 있다."
나는 커피잔을 벌벌 떠는 은유하에게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아무렇게나 읊조렸다.
"내가 네 미래의 이능력을 알려주면 그건 엄청난 길잡이가 되겠지. 하지만 그건 동시에 네 성장을 가로막는 한계가 될 것이다. 음...."
나는 기억을 더듬어 5년뒤, SS급 이능력자 은유하의 이능을 상기했다.
"......생각해보니 딱히 전투원은 아니었군."
"그럼요?"
"그냥 이런 미래도 있었다는 걸 알아둬라. 지금의 너는 그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으니."
나는 내가 괜히 은유하의 미래를 가로막는게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되었으나, 이참에 확실히 말하기로 했다.
"개천광에게서 마력을 전수받은 너는 C컵까지 성장을-"
"고객님."
은유하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나를 노려봤다. 역시 또 가슴을 걸고 넘어지니 화를 내려는 게 분명했다. 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하다. 그냥 말하려다보니-"
"저도 인도 갈래요."
"......."
"자꾸 신서울에서 기다리기만 하니까 감질나서 안 되겠어요. 제가 옆에서 직접 도와드릴테니까, 개천광 꼭 잡아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알겠죠?"
은유하는 엄청난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금빛 눈동자에는 일곱 개의 별빛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려면 인형 하나 바꿔야 할텐데."
"걱정마세요."
은유하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제가 직접 가면 되잖아요?"
그리고 나는 웃으며 대답해줬다.
"혼날래?"
"히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