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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84화 (284/1,497)

〈 284화 〉1부 13장 1

7월 23일 새벽.

결전의 날이 밝았다.

루살카는 더이상 약혼자 문제로 시달리게 되지 않았고, 나는 잠정적인 문제였던 라스푸틴을 내 괴인으로 만듦으로서 위기를 모면했다.

한 가지 추측에 따른 확신이 있다면, 아지다하카는 마구잡이로 S급이나 그에 준하는 괴인들을 늘렸다는 것.

대부분의 암속성 이능력자들이 빌런이거나 빌런의 자질이 있으니, 아지다하카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들을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히로인들 중에서 혹시나 아지다하카의 괴인으로 만들어질 이가 누가 있나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아지다하카의 마수가 뻗치지 않고 있다.

'내가 서울에서 버티고 있으니까.'

그 전에는 관심이 없어서 안 봤는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서울에서 내 존재감을 한껏 과시하고 있으니 쉽사리 오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자리를 비워야 한단 말이지.'

서울에 청화단을 만들면서 했던 고민이 이제서야 수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을 비운 사이, 혹시나 협회-원탁-다크 레기온의 간부 중 누군가가 서울을 습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행히 이제 협회와 원탁은 그럴 일이 없다.'

협회는 나와 함께 인도로 갈 예정이었고, 원탁은 다크 레기온을 상대로 나와 밀월관계를 맺었다. 결국 내가 걱정해야하는 것들은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군.'

아마도 이 세계에서 나 다음으로 강한 히어로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간부들도 쉽사리 서울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SS급 원탁의 히어로, <설화령> 석하랑.

나는 떠나기 전, 석하랑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잠깐 부산으로 날아왔다.

* * *

<오전 5시 30분, 부산 석하랑 자택.>

"씻기도 전에 여자친구 집 습격하고 그러면 안 돼. 알긋나?"

"누가 내 여자친구야. 일어나 봐."

석하랑은 하품을 하며 식탁에 앉았고, 나는 아침부터 과하지 않게 마실 음료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블루베리가 듬뿍 들어간 요거트였고, 석하랑은 군말없이 머그컵을 들어올렸다.

"일단 고생했다. 나 없는 사이에 잘 지키고 있어서."

"고작해야 이틀도 안 지났구만...."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잖냐. 간부들 말고도 다른 문제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니."

나는 은유하로부터 건네받은 데이터를 석하랑에게 건넸다. 석하랑은 명단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야들은...."

"<탈주자들>. 세간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

평양 사태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해외로 도망쳐 국적을 따냈으면서, 한국이 안정화될 기미가 보이자 잽싸게 신서울로 들어온 기회주의자들에게 '탈주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놈들, 지금 특별히 다른 문제는 일으키지 않던가?"

"별로? 매번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난리 피우고 있고, 국적 포기한 놈들은 부활시켜달라고 떼쓰고 있더라. 내가 공항에서 한 번 그 지랄...크흠."

"나한테는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럼 고맙고. 그 지랄해댔더니 부산으로는 오기 민망한 것 같고, 죄다 서울로 올라갈라 카더라. 니 볼라고 하는 것 같던데."

아직까지도 청화를 자기 나라의 히어로로 만들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명단을 석하랑에게 건네며 주의를 줬다.

"조심해. 아지다하카의 괴인이 정체를 숨기고 섞여들어올 수 있으니."

"그 고간룡이랑 악마 말하는 거 맞제.... 으, 징그러."

석하랑은 자신의 하복부로 슬쩍 고개를 숙였다가 얼굴을 붉혔다. 나는 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숫처녀가 그것부터 걱정하고 말이야."

"걱정해야지.... 혹시나 니가 나한테 나중에 하면 어느 정도인지 감은 잡아야 할 거 아이가?"

"......요즘들어서 아주 노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그럼?"

석하랑은 실실 웃으며 발로 내 무릎을 톡톡 건드렸다. 나는 다리를 감아 석하랑의 발을 내린 뒤, 내 몫의 딸기라떼를 들이켰다.

"하여튼 발랑까져가지고."

"왜? 까지면 안 되나? 내가 누구 앞에서만 이러는 지 뻔히 알면서. 이 집 비밀번호 알고있는 사람 유하 언니야 말고 너 밖에 없는데."

"......하여튼 말 한 마디 지지를 않아."

유리창을 깨지 말래서 현관 문 열고 들어갔더니 못하는 말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더 들어갔다가는 석하랑에게 말릴게 분명했고, 원래 하려던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무튼 아지다하카의 괴인을 조심해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 지 몰라."

"지 불리하다 싶으니까 말 돌리는 거 봐라? 흐흐, 알았다, 알았어. 그렇게 노려봐도 귀엽기만 하니까 그만 하그라. 내도 니 하는 말 알아들었으니까."

"내가 뭐라고 했지?"

"탈주자 놈들 아지다하카 괴인인지 아닌지 찬찬히 살펴보라는 거 아이가. 니 그거 때문에 내 신서울로 오라카는 거 아니였나?"

"맞아."

다행히 석하랑은 이제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었다. 내 말보다는 내 말과 함께 전해진 마력을 통해 내 의도를 읽어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알맞을 것이다.

"라스푸틴도 자신이 괴인인 걸 숨기고 있었어. 분명 누군가는 나를 노릴 게 분명하다."

"음…. 청화를 노리는 사람들이야 많은데, 과연 아지다하카가 니를 노리겠나? 내같았으면 고마 암속성인 애들 노릴 것 같은데."

"그러니까 신서울 잘 지키라는 거 아니냐."

암속성 포텐셜이 높은 이들이 누가 있을까. 일단 한국 내에서는 한창 이능력자 교도소에 수감된 빌런들이 있다. 서울에 있는 청화단 중에는 등대 김지화가 대표적이나, 등대는 이미 내 괴인이다.

"일단 A급인 사람은 백희아가 있지. 걔는 걱정마라. 내가 인도에 데려가니."

"......나 걔 별로인데."

석하랑은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나는 석하랑과 백희아가 이전에 어떤 접점이 있나 싶었다. 흑사갈 레이드 때도 무난무난하게 지내지 않았던가.

"걔 내 볼 때마다 자꾸 신서울로 집 옮기라고 한다고."

"......하긴 그럴 법도 하겠지."

신서울과 부산이 그리 멀리 떨어져있는 곳이 아님에도, 그리고 석하랑이 신서울로 전력으로 날아가면 불과 수 분도 걸리지 않음에도 신서울 주민들은 불안해하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SS급 피닉스.

부산에 있는 SS급 석하랑.

대외적으로는 반목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제 이 나라의 국민들은 다 알고있다. 그래서 신서울 주민들은 광검을 없애버린 나를 상당히 싫어하는 동시에, 광검의 빈 자리를 채워줄 히어로를 필요로 했다.

"다른 곳은 SS급이 하나씩 상주하고 있는데, 신서울은 고작해야 화권 하나 뿐이니 말이야."

"그것도 니한테도 지고 내한테도 지는 아저씨지."

"네 살 차이인데 아저씨는 너무한 거 아니냐?"

"뭔 상관인데? 내가 화권 아저씨한테 오빠 소리 할 이유도 없구만. 혹시 니 나한테 아저씨 소리 들을까봐 무서워서 그런 기가? 흐흐,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신경쓰네."

"......아니, 화권 좀 신경쓰는 말이었는데 왜 말이 그렇게 되냐."

나는 또 괜시리 찔렸다. 그래서 얼른 또 원래 화제로 돌아갔다.

"그래서 화권을 SS급으로 만들 생각이다."

"진심?"

석하랑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그에 개의치 않고 내 생각을 말했다.

"아군은 아니더라도 우군은 많을수록 좋지 않나. SS급 동료를 만들 수 있는데."

"니 진짜 아저씨 SS급으로 만들 생각이가? 아니, 그 이전에 그게 가능해?"

"그럼. 내가 너를 신서울로 부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인데."

나는 슬슬 석하랑에게 인간의 성장 한계치를 높이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수속성 S급 이능력자 만들어서 인도로 데려가려고."

나는 손을 내밀며 흔들었고, 석하랑은 눈을 껌뻑였다.

"악수 한 번으로 사람을 S급으로 만든다고?"

"악수로 물가촉천민 5천명인가 6천명인가 만들었던 걸 잊었냐."

이능력자의 각성과 친화율의 향상. 간부는 할 수 없는, 정령이기에 가능한 일종의 치트키다. 히카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제 최대 레벨 올리는 방법을 알려주마. 이능력자 인플레이션 어디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

"대박."

한국에는 수속성 이능력자가 정말 많다. 그들 모두가 S급으로 오르지는 못하겠으나, 적어도 자신이 가진 한계보다 한 두 단계는 더 높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씻고 신서울로 날아와라. 나는 서울에서 자가용타고 내려갈테니."

"자가용?"

"그래."

나는 딸기라떼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참에 자가용 업그레이드 좀 하려고. S클래스에서 SS클래스로 말이야."

***

<그 시각. 러시아 상공 유성 전세기.>

X로이드 승무원에 의해 러시아 공항에서 출발한 전용기는 세 명의 이능력자를 태우고 러시아 상공을 날고 있었다.

우사, 풍백, 그리고 화권.

러시아에 특사단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이들은 청화단만 남긴 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뭔가 꿍꿍이가 있는게 틀림없다니깐?"

우사는 지치지도 않고 온갖 음모론을 펼쳤다. 러시아와 청화단의 야합에 더불어, <루살카>가 쓰러뜨린 고간룡을 두고 러시아와 청화단이 벌인 자작극이 아닌가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네 결론은 무엇인가?"

풍백은 지친 얼굴로 우사에게 최종 정리를 하라고 말했다. 곧 한반도 영공에 이르게 될 것인데, 적어도 잠깐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거요."

우사는 혹시나 누가 들을까봐 목소리까지 낮췄다.

"사실 <벨로보그>는 광검 허윤환 형님이고, 청화단은 그를 전력으로 삼으려다 루살카에게 넘겨주게 된 거지. 이유? 아마 둘이서 사랑하니까 봐준 거 아니겠수?"

"에잉, 시간만 버렸군.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감? 피닉스 그것이 광검을 죽였는데 뭐하러 러시아에다 갖다바쳐? 화권아, 네 의견은 어떻느냐."

"......그럴듯 하기는 하다고 생각합니다."

화권은 영혼없이 대답했다. 모스크바를 출발하기 직전에 그는 정신을 차렸으나, 여전히 누군가 다가오는 걸 꺼려해서 따로 앉아있었다.

"쯧.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몰라도, 라스푸틴이랑-"

"히익?!"

화권은 라스푸틴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질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의 반응에 우사와 풍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돌아가면 훈련이나 해야지. 실력이 많이 녹슬었어."

"영감도 느꼈수?"

"그럼 같이 싸웠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쯧, 그 썩을 놈. 서울에서 행정은 안 하고 괴수들 때려잡고 다니는 게 분명해. 안 그러면 어찌 그 사이에 그리도 강해질 수 있는감?"

풍백은 서울 수복 작전 이후 엄청나게 강해진 <하늘성>의 힘에 짜증이 났다. 다른 자들은 강해지더라도 별 감흥이 없었지만, 유독 류천성만큼은 강해진 것은 그냥 넘기기 힘들었다.

"......영감.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또 뭐."

"피닉스, 사실 다른 이능력자 키우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거 아니요?"

"예끼 이 사람아."

풍백은 스틱까지 휘둘러 우사를 나무라려했다.

"단신으로 세계 최강의 힘을 가진 이능력자인데, 거기에 이능력자 키우는 능력까지 대단하다면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니겠냐. 그냥 경기 북부 돌아다니면서 괴수들이랑 싸우다가 성장한 거겠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흑염룡도 그렇고, 청화단에 속한 놈들 성장 속도가 장난 아니잖수. <팬텀>도 중국 한 번 갔다오더니 S급 찍었고, 거기 간부들 중에 A급이 아닌 자가 없고."

"......이쪽도 성장 속도 장난 아니지 않은감? 화권은 A급에서 S급이 되었고, 설화공주 아가씨는 9년 가까이 정체되어있다가 SS급에 올랐지."

"......아마도 다른 이의 성장을 돕는 건 맞을 겁니다."

잠자코 있던 화권이 입을 열었다.

"재능과는 별개로, 미래를 알고 있으니 누가 어디까지 성장하는 지는 알고 있겠죠. 그런 자들을 발굴해내려 할 테고요."

"그 은하 대학교? 끄응."

풍백은 침음성을 흘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모든 히어로들을 상대로 배부된 모집 요강은 장소가 서울이라는 것과 뒷배경이 상당히 마음에 걸렸다.

"그거 순전 빌런 양성소잖나."

"영감. 일단은 유성이랑 협회에서도 같이 들어가는 거 아니요. 화권 말이랑 종합해보면 내 생각에는 말이지."

우사가 다시 소리를 낮췄다.

"은하 대학교. 말만 모집 요강이고 실제로는 미래에 활약할 인재들 미리 뽑아서 키우는 걸 게요."

"......이 나라에 그렇게 인재가 많은가. 하아."

풍백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떨어지는 자는 이능력자로서 재능이 없다는 건가."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구만. 화권아. 너는 어떠냐."

다시 또 불똥이 화권에게 튀었다. 화권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원서 넣으면 프리패스라고 했습니다."

"세상 다 가졌군. 젠장. 삼촌 빼고 뭐든지 가진 놈이 이제는 S급보다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미쳤네, 미쳤어."

우사는 한탄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가서 임무 보고하고 어디 계곡 가서 술이나 진탕 마십시다, 영감."

"그래야지, 끌끌. 아이고, 능력없는 자들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

화권은 가시방석이라도 된 것 같았고, 빨리 비행기가 땅에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치직.

세 명에게 동시에 호출이 울렸다. 허공에 떠오른 스크린 너머에서 집행관 백희아가 나타났다.

[러시아를 다녀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보고는 어떻게, 지금 말씀 드리-"

[아뇨. 잠시 뒤에 구두로 직접 받겠습니다. ...여독을 푸셔야 하는데 죄송해요.]

"어…."

우사는 표정이 굳었다.

"저희 혹시 인도 가는 거, 오늘 갑니까?"

[......네. 전용기가 인천에 상륙할 거예요.]

백희아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풍백, 우사, 화권.

셋은 한반도 땅을 밟자마자 곧장 인도로 가는 백나로 호로 갈아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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