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1부 12장 26
수보르프의 정의감을 두 눈으로 직접 느낀 나는 내 스스로의 행보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옆에 두고 설득하는 타입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사람이라는 걸. 특히 그 상대가 큐브에 잠식되어 정신적으로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인 존재라면 더더욱 설득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여봉선은 분명 S급 이능력자다. 화속성이 아니라 광속성의 이능력자로, 개인의 무위도 뛰어난 빌런이다. 누군가의 아래에서 있지 못하고 반역을 일삼는 반골기질만 아니었으면, 나는 여봉선을 괴인으로 만들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역시 죽이는 게 제일 깔끔하지.'
그래서 나는 덕백스, 돌도끼가 된 덕배를 투척했다. 내가 팔을 괴인으로 바꾸어 전력으로 집어던진 돌도끼는 여봉선의 이마를 찍었고, 여봉선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굳이 긴말하면서 설득할 필요는 없지.'
나는 날 부분에 피가 묻기 시작한 덕배를 여봉선의 시체에서 떼어냈다. 덕배는 여봉선의 피를 야금야금 먹어치웠고, 두개골이 으스러지며 튄 피의 마력은 전부 덕배의 것이 되었다.
"역시 A급은 안 되네요."
요행을 바랐지만 당연히 될 리가 없었다. 덕배의 화속성 친화율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내가 그를 여의도 불방망이로 만들 수 있었지만, 덕배와 나의 상성은 최악이었다.
'히드라나 찾아줘야지.'
"일단 큐브부터 회수하고."
나는 손톱을 세워 여봉선의 심장에 찔러넣었다. 여봉선은 큐브에 의해 강해진 S급 이능력자인 만큼, 머리가 으스러졌음에도 아직까지 미세하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하여튼 큐브에 홀린 놈들 치고 좋은 꼴을 못 봤어.'
머리는 쇼크사했어도 신체의 마력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나는 오른손으로 심장을 뒤적거리다 찾고자 했던 물건을 발견했고, 여봉선의 시체를 발로 툭 밀어버렸다.
콰득.
여봉선의 심장이 딸려나왔다. 나는 손에 불꽃을 피워 심장을 태워버렸고, 안에 들어있던 작고 딱딱한 큐브 조각을 손에 넣었다.
"자, 부하 2호. 이제 일어나세요."
"끄응."
나는 덕배를 부활시켰고, 덕배는 부활하자마자 맞이한 사람의 시체에 비명을 질렀다.
"으악?!"
"왜요? 한 두번 보는 것도 아닌데."
"꼴이 말이 아니잖아!!"
"괜찮아요. 빌런이니까."
"그런 말도 안되는 논리는 뭐야?!"
"피닉스 식 논리죠. 내로남불 몰라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큐브를 던졌다 잡았다.
"그럼 빨리 움직입시다. 큐브에 의해 만들어진 이계는 죄다 시간 흐름이 이상해서, 밖에 나갔는데 막 3년이 흘러있다거나 할 수 있어요."
"......여긴 아니지?"
"당연하죠."
오히려 이 쪽의 시간이 300배 빠르게 흘러갈 뿐이다. 바깥의 세 시간이 여기서는 900시간, 그러니까 거의 37일에 가까운 시간으로 바뀐 것이다.
"그럼 나갈 준비나 합시다. 큐브 써서 나가면 돼요."
"......여기서 있는 게 시간 적으로 더 낫지 않냐?"
"왜요?"
나는 설명을 요구했고, 덕배는 두 팔을 벌리며 주변을 가리켰다.
"효율적으로 생각해보면 여기서 사흘 벌고 밖으로 나가는 게 낫지 않아?"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바깥 세상의 시간은 이곳보다 세 배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 상으로는 그렇죠."
이능력을 갈고 닦기에는 이곳만한 곳이 없다. 큐브를 통해 밖으로 나갈 때, 육체가 들어오기 전으로 돌아가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까. 자고로 정신과 시간의 방은 검증된 최고의 훈련장이다.
"하지만 그건 그럴 사람이 있을 때나 필요한 얘기죠. 여기에 누가 수련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나, 나 있잖아."
"저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요."
"괴인도 '인'이잖아. 사람 아니냐?"
여기서 한자 드립을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기에 덕배의 상승욕구도 상당히 대단해보였다.
"평소에는 의욕없어 보이다가 꼭 이럴 때면 신나가지고."
"왜 그러면 안 돼냐?"
"아뇨. 그래도 돼죠."
나는 덕배의 코어 옆에 박힌 정령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덕배는 내 마력의 흐름을 읽고 씩 미소 지었다.
"좋아요. 원래는 그냥 다 터뜨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부하 2호가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죠."
"나도 이제 무쌍 한 번 찍어보냐?"
"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큐브로 구현화된 괴수들이니까, 어디 마음 껏 해봐요."
양심이라는 문제만 없다면 큐브에 의해 만들어진 이계는 천혜의 수련 장소다.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괴수들을 죽이는 게 상당히 마음에 걸리지만,
"아즈아!"
덕배는 역시 덕배답게,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나 또한 거부감이 없었다.
화륵.
내가 발로 여봉선을 건드리기 무섭게, 여봉선의 시체는 불꽃에 휩싸여 활활 타들어갔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여봉선의 시체는 금방 원래의 모습인 메뚜기 괴물로 변해 역한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갔다.
"그거 S급인데 안 아쉽냐? 괴인으로 만들면 되잖아."
"그다지 끌리지는 않네요. 얘, 놔두면 샤오린 자꾸 침실로 들여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니까."
"오케이. 더 이상 따지지 않지. 흐흐."
덕배는 손가락으로 나를 향해 허공을 쿡쿡 찔렀다. 그게 꼭 비웃는 것 같아, 아니 실제로 비웃어서 기분이 살짝 아니꼬왔다.
"아참. 부하 2호."
"왜?"
"시간은 중요하니까, 화염 거인 변신 시간 딱 3분 드릴게요."
"뭐? 그런 게 어디있어?!"
나는 덕배에게 마력을 불어넣어 강제로 그의 몸집을 불렸다. 덕배는 막사의 천장을 뚫고 기지개를 켜기가 무섭게 밖으로 내달렸다.
"푸흐흐."
나는 마도기어의 알람을 맞추고 의자에 앉았다.
"바깥기준으로 3분이니까, 여기서는 900분인데."
아마 2분이 되면 걱정할 거다. 이제 1분밖에 안 남았는데, 하고. 그런데 3분이 지나도 변신이 풀리지 않고, 오히려 변신이 계속 지속되는 것에 기뻐하리라.
'그러다가 언제 변신이 풀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겠지.'
"상사를 놀려먹으려는 벌이죠."
과연 덕배는 이 세계에서 A급을 찍을 수 있을 것인가.
* * *
"화살을 퍼부어라! 접근을 저지해!"
장수들은 병졸들을 검으로 위협하며 시위를 당기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병졸들은 흔들리는 지축에 당장이라도 전장을 떠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쏴! 어차피 도망치면 다 죽는다! 쏘라고!!"
장수 또한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들이 말을 타고 도망가기도 전에 모든 장병들을 다 짖이겨버릴 것이다.
쿵, 쿵, 쿠---웅!!
거인이 달려온다. 그렇게 병사들을 쏟아부어도 열리지 않던 호로관을 발차기 한 번으로 박살낸 괴물이 불꽃을 흘리며 달려온다. 군마를 아득히 뛰어넘은 속도로 달려오는 거인은 전설 속 염제가 현현하여 폭주하는 것 같았다.
"으, 으아, 아아아악!!"
결국 장수가 가장 먼저 겁을 먹고 기수를 돌렸다. 그가 고삐를 쥐고 있던 말도 진작에 겁을 먹고 몸을 돌려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우, 우리는 어쩌라고!"
"죽고싶지 않아! 으아악!!"
병졸들 또한 자신의 병장기를 내던지고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농번기에 끌려온 농민일 뿐, 신체만 백 척이 넘는 괴물을 상대할 만큼의 용력은 없었다.
"허허허."
장병들이 모두 도망가고, 홀로 남은 장수가 허망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죽음의 공포에 다리가 풀렸으나, 도망치지 않은 건 총사령관으로서 마지막으로 내세울 수 있는 자존심이었다.
"나의 천하가.... 키킥."
뿌직.
화염 거인은 발을 크게 디디며 도망치는 병졸들의 위로 뛰어올랐다. 화염거인이 발을 크게 구른 바닥에는 메뚜기 괴수의 시체가 하나 찌그러져 있었다.
* * *
"진짜 가차없네요. 저거 다 그래도 죽이기 전까지는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인데."
나는 덕배가 발차기로 부서버린 성벽에 짖이겨진 사람들을 하나 둘 모아 불로 태웠다. 푸른 불꽃은 봉화처럼 피어올랐고, 호로관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곧 낙양으로 들어갈 것이다.
키긱, 기이익....
괴수는 비명을 단말마를 내지르며 사라졌다. 성벽의 바위에 깔린 하반신은 인간의 것이었지만, 죽기 직전에 이르자 본모습을 각성하고 괴수로서 도망치려 한 것이다.
'마력으로 본체가 어떤지 알 수 있으니 그것도 무의미한가.'
콰득.
메뚜기를 닮은 괴수는 불에 타들어가며 몸부림을 쳤다. 아직 도망치지 못한 병졸들은 함께 일을 하던 동료가 괴수가 되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비명을 질렀다.
"크, 크으, 캬아아악!!"
"와, 괴밍아웃!"
드디어 괴수들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전부 약하디 약한 괴수일테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강해져 언젠가 지구로 향하는 문을 열고 지구에 범람하게 될 괴수들이다.
"덕배한테 그 소리 해놓고 이러는 것도 민망하지만...."
조덕배는 반동탁 연합군, 나는 동탁군. 졸지에 우리는 2천년 전의 세계로 와서 깡패짓을 벌이게 되었지만, 이게 아니면 이 세계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다.
'원작에서는 여봉선이 모든 적을 먹어치워서 여봉선만 죽이면 됐지만....'
"지금은 전국에 흩어져 있으니까 일일이 다 죽여야죠."
남은 시간은 대략 37일.
대륙 전체에 흩어진 모든 괴수들을 죽이기에 충분한 시각이었다. 나는 나를 향해 달려드는 메뚜기 떼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해충 구제는 불질이지.'
"덧붙여서 코어도 좀 챙겨가고!"
도시락을 일찍 까버린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큐브를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도시락을 너무 오랫동안 안 먹으면 쉬어버리니까.
화륵.
나는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기 전, 내가 먼저 낙양 하늘에 날아올라 불의 비를 내렸다.
* * *
쿵! 쿠궁!
대들보가 무너졌다. 동시에 메뚜기 괴수가 다리를 뻗으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요격."
"쳇."
덕배는 귀찮은 얼굴로 초라한 행색의 메뚜기 괴수를 제압했다. 이제 세계는 더이상 인간 행새로 우리를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모든 인간이 메뚜기가 되어 우리에게 이빨을 들이밀고 있다.
"드럽게 많네. 야, 이거 어떻게 안 되냐?"
처음에는 화염 거인으로 신나게 날뛰던 덕배도 이제는 싫증이 난 것 같았다. 무려 7일을 메뚜기만 잡아댔으니 지루할 법도 했다.
"뭘요?"
"한 방에 제거 못하냐고. 언제까지 이렇게 때려잡을 거야."
"당신 A급 되고 싶다면서요. 벌써 포기하는 거예요?"
"도저히 가망이 없어보이는데."
덕배는 우리의 등 뒤에 한가득 쌓여있는 E급 코어를 가리켰다. 코어를 수영장에 풀어 풀장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E급 코어는 넘쳐났다.
"하나같이 이런 잔챙이였는지 미리 얘기해줬어야지!"
E급 코어만 넘쳐났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효율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E급 괴수 백만 마리가 어디 찾기 쉬운 줄 알아요?"
덕배가 사흘 동안 화염거인과 괴인으로서 죽인 메뚜기 괴수만 백만을 넘겼다. 내가 죽인 것까지 포함하면 우리는 수 백만에 이르는 메뚜기 괴수를 학살했고, 그 중 겨우 수 만개에 이르는 온전한 코어만을 획득했다.
"시간이 배로 늘어나는 대신 현실에 가져갈 수 있는 보상은 적다 이거죠. 대략 1%."
"이거 다 모아도 S급 하나 만도 못하잖냐."
"네. 코어만 따졌을 때는 흑사갈이 하나 낳는게 더 빠르죠. 푸흐흐."
나는 덕배의 등을 두드렸다. 메뚜기 사냥에 질려있던 그는 시대상에 맞게 돌도끼로 변했고, 나는 덕배를 양손으로 쥐고 목을 꺾었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내가 여봉선을 죽인지도 벌써 딱 일주일이 지났다. 아마도 이제 곧-
"캬아아악!!"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어느새 내 지척에 다다른 회색 머리칼의 소녀는 나를 향해 방천극을 휘둘렀다. 나는 덕배를 들어 방천극을 막아냈고, 소녀는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너, 뭐야!!"
"태양!"
나는 방천극을 쳐낸 뒤, 땅을 박차고 달려 소녀의 멱살을 잡았다. 뜯겨나간 소녀의 심장은 온전히 부활해있었고, 나는 소녀의 배를 걷어차며 하늘 높이 쳐올렸다.
캬아아악!!
여봉선, 이제는 <캘리펠라>라고 불러야 할 거대 메뚜기가 본색을 드러냈다. 인간의 형상을 한 메뚜기라고 불러야 할 지, 아니면 메뚜기와 인간이 섞인 키메라라고 불러야 할 지 애매한 그로테스크한 외형이었다.
"차라리 흑사갈이 더 이쁘겠다."
키에에에엑!!
캘리펠라는 괴성을 지르며 이빨을 좌우로 딱딱거렸다. 큐브를 빼앗은 걸로도 모자라, 자신을 한 번 죽인 나를 목숨을 걸고 죽일 기세였다.
"7일에 1번씩 리스폰되는 S급 괴수라...."
환룡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까지, 이 세계 기준으로 30일 조금 남았다. 나는 그 사이에 캘리펠라의 'S급 광속성 코어'를 캐내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다섯 번 만에 나오면 좋으련만."
조덕배가 이 세계에서 시간을 끝까지 보내자고 얘기했으니, 조덕배를 위해 조덕배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부하의 성장을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착한 상사니까.
"그럼."
나는 덕배의 코어를 조정해, 조금 크기가 큰 권총으로 만들었다. 대리석을 투박하게 총 모양으로 깎아낸 형태였으나, 그립감은 훌륭했다.
"성능 테스트 해볼까요."
캬아아아악!
캘리펠라가 회색의 기다란 더듬이 두 개를 흩날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돌권총을 붙잡고,
"투척!"
여봉선에게 돌도끼로 첫 인사를 했던 것 처럼, 캘리펠라의 대가리를 향해 덕배를 집어던졌다.
푹.
키에에....
2번째 시도.
아쉽게도 캘리펠라의 코어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