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화 〉1부 12장 24
광검 루살카 부부에 대한 조치는 이미 모두 마쳤다. 나는 술에 취한 환룡을 백청영에게 넘겨 공터에 대기시켰다. 이미 환룡단은 환룡에 의해 코어로 변했고, 푸른 구체를 안아든 백청영만이 남아 나를 맞이했다. 환룡은 백청영의 몸에 등을 기대고 숙취에 골골거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네. 그거 이제 환룡한테 넘겨요. 음.... 이 몸으로는 힘들 것 같고."
화륵.
나는 괴인형이 되어 환룡을 품에 끌어안았다. 환룡은 살짝 눈을 크게 뜨면서 내 갑주에 몸을 맡겼다.
[중간에 떨어지면 큰일나니 꽉 잡아라.]
"...응."
환룡은 백청영이 넘긴 푸른 구체를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면서 그러나.]
"그치만 포장은 다 네 마력인 걸."
내 마력이 뭉친 덩어리에 고개를 파묻는건 이해가 갔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러는 게 참 그랬다.
[...백청영. 코어가 돼라. 눈을 뜨면 북경일테니.]
"예. 아무쪼록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후후."
백청영은 싱글벙글하며 환룡에 의해 코어가 되었다. 환룡은 내 품에서 환룡단의 코어와 푸른 구체를 꼭 끌어안았다.
"가는 도중에 안 흘리게 천천히 날아.... 느긋하게."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말이다.]
모스크바로 날아오면서 시간을 벌었지만, 다시 동쪽으로 날아가면 그만큼 시간을 잃게 될 것이다.
[간다.]
"......칫."
환룡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드러냈고, 나는 환룡을 품안에 잡아당기며 강하게 끌어안았다.
[중국 땅에 들어가면 최대한 천천히 날아가마.]
"......맘대로 하셔."
이후.
나는 흑사갈에게서 큐브를 강탈하여 북경까지 날았던 하늘길을 그대로 따라 날았다. 북경에 도착할 때 까지 두 시간.
"......."
환룡은 내 품에서 고이 잠들었다.
[자는 사이에 내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쩌려고.]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말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환룡이 내게 보이는 사랑의 계기를 알지 못했다.
"참 미안하게 됐군."
"......! 방금 그거 네 목소리야?"
자던 환룡이 눈을 부릅뜨며 일어났다.
[아닌데. 착각한 거 아닌가?]
"아냐. 분명 내가 창염한테서 봤던 네 목소리였어. 히히."
[.......]
환룡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하여튼 이 놈의 입방정."
이거 주인공 목소리인데. 나는 환룡을 끌어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레 환룡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빨리 다른 간부들을 다 각성시켜야겠어."
"아, 목소리 좋다아. 왜 지금까지 말 안하고 다녔어?"
"......시끄러워요."
창염의 목소리로 바꾸자마자 환룡이 기함하며 질색했다.
"너, 그 몸으로 그 목소리 내지 마! 듣기 싫어!"
"싫은데요."
나는 아예 몸까지 인간형으로 바꾸었다. 넓었던 어깨가 좁아지며 환룡이 아둥바둥댔지만, 나는 환룡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푸른 구체를 빼앗았다.
"그럼 북경까지 전속력으로!"
"시, 싫어어어--!!"
나는 동쪽으로 최고 속도로 날았다.
이전에 창염과 30분 넘게 야간 비행을 했던 거리였으나, 불과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영체는 회색의 마력을 토한다는 걸 처음 알게되었다.
* * *
<북경시 7월 22일 오후 4시, 모택평 장원.>
미션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환룡을 침대에 눕혔고, 우리를 맞이한 샤오린은 환룡을 간병하며 꿀물을 태웠다. 수십 병의 보드카를 양손에 들고 병나발을 불어서 그런지, 환룡은 아직까지도 숨결에서 알코올의 진한 향이 빠져나오질 않고 있었다.
"영체 상태로 술을 직접 드리면 어떻게 해요?"
"......마력 한 번만 돌리면 취기 다 날아가는데, 왜 내가 혼나야하죠?"
나또한 함께 술을 대작했지만, 속에 들어오자마자 불꽃으로 알코올을 다 날려버렸다. 결국 목을 넘어가는 순간 술은 음료가 되었고, 나는 그걸 뱃속에서 전부 마력으로 변환시켰다.
환룡은 그러지 않았다. 숙취에 골골거리는 것도 술을 즐기는 방법이라나 뭐라나.
"환룡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알코올 다 날릴 수 있어요. 본인이 지금 꽐라된 걸 즐기는 거지."
"하아…."
샤오린은 얼굴을 두 손으로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환룡은 자주 음주가무를 즐긴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주군은 완전히 폐품이나 다름없잖아요."
"샤오린. 폐품이라니. 정정해라."
환룡이 마지막 남은 정신으로 부활시킨 백청영은 짐짓 단호한 얼굴로 샤오린을 나무랐다.
"주군께서 폐품으로 살아가시더라도 우리가 곁에서 보좌하면 되는 일이다. 안그렇습니까, 피닉스 님?"
"......예. 그런 셈이죠."
백청영은 웃는 낯으로 환룡이 일을 하지 않는 만큼 자신이 열심히 더 일하겠다며 열의를 보이고 있지만, 그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나는 백청영의 실체를 알고 있다.
백청영의 최종 목표는 환룡의 주 5일제 근무. 성주를 쓰러뜨리고도 환룡이 최저한의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백청영은 바로 옆에서 교묘하게 환룡을 정신적으로 세뇌시키고 있다.
"그러니 주군께서는 조금 더 쉬셔도 된다. 음…. 주군, 두 시간 뒤에 깨어나시는 건?"
"......세 시간."
"알겠습니다."
녹음까지 마친 백청영은 바로 세 시간 뒤에 알람이 울리도록 워치를 조정했다. 알람이 울린 뒤에는 또 '5분만'하면서 씨름할테지만, 백청영은 '그럼 10분 뒤에 다시 깨워드리겠습니다'하면서 환룡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할 것이다.
'저거 내가 환룡에게 자주 써먹던 수법인데.'
역시 DLC 주인공은 뭔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나는 백청영에 의해 장시간의 조교를 거쳐 만들어질 '일하는 환룡'을 기대하며, 침대에 누운 환룡의 주변을 따뜻하게 데웠다.
"흐아아아…."
환룡은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숙면에 빠졌다.
"봉효, 세 시간 뒤에 꼭 깨워요. 그 때는 진짜 할 일이 있으니까."
"오호."
백청영은 자신이 든 푸른 구체를 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가 하려고 하는게 아닐까 싶어 기대하는 눈치였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당장 할 것은 아니라서 시간이 필요했다.
"세 시간 지나면 그걸로 괴인 만들 거니까 기다려요."
"예? 환룡 님의 괴인이 아니라요?"
"환룡이 빡돌아서 그거 들고 저한테 달려들면 어쩌려고 그래요?"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백청영의 건방진 외침에 손으로 목을 그었다. 샤오린은 부끄러운 오빠를 처리하기 위해 그에게서 푸른 구체를 빼앗았고, 백청영은 보물을 빼앗긴 어린 아이마냥 슬퍼했다.
"아아! 그거 흑사갈한테 박아야하는데!!"
"세 시간만 기다려요. 그 뒤에는 그렇게 해 줄테니까."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찌 음식이라도 만들어둘까요? 딸기 좋아하셨죠? 딸기 탕후루 한 아름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세팅해둬요. 갔다와서 먹을테니까. 사고치지 말고."
백청영은 참 태세전환이 빠른 괴인이었다. 나는 백청영이나 샤오린이 괜히 사고를 일으키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지만, 일단 라스푸틴의 성기는 내 마력으로 봉인해두었으니 내가 아니면 열지는 못할 것이다.
"혹시 뭐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아니면 샤오린을 대동하시겠습니까?"
"저는 준비되어있습니다. 전투라면 맡겨주십시오."
샤오린은 의욕을 보였지만, 유감스럽게도 SS급이 놀 전장은 아니었다.
"...저 오는 동안 둘이서 흑사갈이나 가지고 놀아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백청영은 내가 그에게 건넨 포상인 순백의 드레스를 꺼냈다. 웨딩 드레스를 펼치며 흑사갈에게 입히겠다며 웃고있는 백청영의 모습에 샤오린은 얼굴을 구겼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오빠의 또라이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면-
"좀 더 안이 비치는 시스루여야 하는 거 아닐까요?"
...얘도 만만찮은 또라이였다. 둘 다 괴인이 되며 분명 나사가 하나는 커녕 부품 전체가 빠져버린게 틀림없다.
"아이고."
바라면 해줘야지. 나는 백청영이 든 웨딩 드레스의 허리 아래의 마력을 조정해, 속이 살짝 비치게 뭉쳐놓은 마력을 풀어버렸다.
"역시."
샤오린은 합장까지하며 내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두 남매가 흑사갈을 상대로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무서워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 저는 잠깐 어디 다녀옵니다."
"어디가십니까? 모처럼 오셨는데 구경이라도…."
"됐어요. 나중에 영상 찍어서 보내요. 지금은 진짜 할 일이 있으니까 가는 겁니다."
나는 환룡의 장원을 빠져나왔다. 시스루 드레스를 입은 흑사갈의 코어 생산 쇼를 보고 싶기는 했지만, 굳이 지금 당장 구경할 필요는 없었다. 내게는 시간이 촉박했으니.
화륵.
나는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모스크바는 이제 해가 하늘로 떠오르고 있겠지만, 이곳은 해가 어느덧 중천을 넘어간 지 오래였다.
"세 시간 뒤에 실험 한 번 하고…. 서울 돌아가면 시간 맞겠다."
환룡이 휴식을 취하는 세 시간.
나는 중국에 남겨둔 도시락을 챙기기 위해 서쪽으로 날아올랐다.
***
그 시각.
수보르프에게 호된 꾸짖음을 받은 허윤환과 루살카는 혼이 나가있었다.
"딸이 좋아하는 음식은?"
"......서방님?"
"처음에 보육원에 데리러 갔을 때, 국밥 엄청 잘 먹던데…."
틀렸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에 기뻐했던 것이며, 자라면서 석하랑의 입맛은 철저한 양식으로 바뀌었다.
"딸이 평소에 뭐 하면서 지내는지는 아나?"
"이능력을 훈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급이잖아, 아빠. 자기 단련은 빼먹지 않을 거라고."
또 틀렸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진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던 석하랑은 피닉스에게 자극을 받기 전까지 노력이라고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나마 피닉스가 주기적으로 대련을 함으로써, 잠재력이 폭발하여 SS급에 이른 것이다.
"딸아이의 평소 교류관계는?"
"......친구는 거의 없고, 그나마 화권 이승형과 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잘생긴 남자애? 그러고보니 같이 서울수복작전에서 함께 서울로 갔었지? 걔랑 무슨 사이 아냐?"
"아니다. 알았으면 내가 진작에 잡았을 거다."
또 헛다리를 짚었다. 이승형과는 그저 같은 나라의 히어로라는 동료일 뿐, 이성으로는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
"끄응."
수보르프는 피닉스가 떠나기 전, 그가 알려준 석하랑에 대한 정보들을 부부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개탄스러웠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와버렸다.
"너희들 진짜로 석하랑 부모 맞느냐...?"
"수보르프."
"아빠."
방금 전까지 주눅들어있던 둘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허윤환과 루살카는 눈을 부라리며 수보르프에게 으르렁거렸다.
"제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에요."
"......."
"저, 전의 육체로 말이에요."
"그래. 그건 이제 신경쓰지 않으마."
수보르프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루살카도 딱히 그 부분에 대해 더 지적하고는 싶지 않았다.
"그래. 딸이야 만리타향에 있었으니 그렇다고 치지. 그럼 자네는 어떤가. 그래도 8년 정도는 그 아이의 스승 노릇이라도 하지 않았느냐?"
"......혹시나 딸이라는 게 들킬까봐 멀리했습니다."
허윤환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런저런 변명거리는 많았지만, 결국 허윤환이 석하랑을 방치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쯧. 그래, 차라리 잘했다. 부모로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12살 아이를 딸로 들이면 서로 어색해질게 뻔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으니 넘어가도록 하지."
수보르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 부부를 향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피닉스가 알려주지 않고 떠나버린 질문을.
"...그럼 손녀가 좋아하는 사람은 있나? 시쳇말로 썸이라고 하던 것 같은데...."
"......."
두 부부는 어느때보다도 답변하기가 무서워졌다. 이미 세 번은 쓰러졌어도 모자랄 충격의 향연을 책임감과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수보르프에게 대답하기에는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다.
"어, 아빠. 그러니까...."
"있지?"
"있어. 있긴 한데...."
"수보르프. 나중에 듣는 게 낫지 않겠나?"
"자넨 좀 닥쳐. 뭘 나중에 들어? 또 뭘 숨기고 있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냐."
수보르프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고, 루살카는 심호흡을 하며 진실을 밝혔다.
"걔 피닉스 좋아해...."
"......?"
"정령은 무성이거든? 성별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거야. 하랑이는 피닉스를 고꾸라뜨려서 남성형으로 바꾸려하는데...."
"허허."
수보르프는 헛웃음을 지으며-
"난 이제 모르겠다."
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