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화 〉1부 12장 21
차원문은 닫혔다. 그러나 여전히 괴수들은 득실거렸다. 라스푸틴의 육체를 좀 먹어들어가듯, 괴수들은 꾸멀꾸멀 호수를 헤엄쳐 육지로 올라왔다.
캬아아악!!
이계의 악마들이 현신한 듯한 괴수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날뛰기 시작했다. 괴수들은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을 죽인다.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해보였고, 인간들은 쉽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퍼--억!!
하늘성이 개처럼 달려드는 괴수의 아가리를 붙잡았다. 동시에 풍백이 옆에서 스틱을 휘둘러 괴수의 머리를 찔렀다.
"우사야!"
"말 안해도!"
우사는 수증기를 모아 수탄을 만들어 사방으로 쏘았다. 전위의 둘을 방해하려는 잔챙이들이 수탄에 일거에 쓸려나갔다.
"우사 님 왼쪽위! 시체 뒤에 하나 더!"
이능력으로 주변을 주시하던 등대가 경고를 날렸다. 수탄에 얻어맞은 돼지같은 괴수의 뒤에서 작고 꼬장꼬장하게 생긴 녹색의 괴수가 뛰쳐나왔다.
케르륵!
온몸이 앙상한 괴수는 녹슨 단검을 들고 있었으나, 그 단검에는 보라색 마력이 서려있었다. 수탄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아키택트는 재빨리 소리쳤다.
"아키택트!"
"으라차!"
아키택트가 두 손으로 흙바닥을 내리쳤다. 아키택트의 마력이 땅에 번개처럼 퍼져나갔고, 이능력자들의 주변에서 폭발했다.
쿠-웅!!
땅에서 두꺼운 흙기둥이 솟아올랐다. 건물의 대들보같은 기둥은 아래에서 괴수를 쳐올려 날려버리거나, 돌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하아아!"
주춤거리는 괴수들은 전부 하늘성과 풍백의 먹잇감이었다. 하늘성은 흙기둥을 뽑아 끝을 잡고 휘둘러 괴수들을 곤죽으로 만들었고, 풍백은 사방을 뛰어다니며 스틱을 휘둘러 괴수들의 목을 베었다.
"이걸로 127...!"
방금 아키택트의 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은 소머리의 괴수까지 무려 127마리의 괴수를 사냥했다. 특사단 일행은 러시아 협회의 총동원 요청에 응해 전장에 나섰고, 그 전과는 아주 혁혁했다.
"그것도 죄다 C급 이상만 오는 것 같은데...."
"좋지 않은가, 끌끌. 이거 다 우리 공적으로 될 터이니, 돌아갈 때 코어 한 아름 챙겨가겠군."
하늘성이 풍백의 머리 위로 주먹을 휘둘렀다. 풍백도 하늘성의 등허리를 향해 스틱을 찔러넣었다.
끼이익!!
작은 요정같은 괴수들이 하늘성의 주먹에 나가떨어졌고, 풍백의 스틱에 꼬치마냥 꿰였다.
"누가 전직 빌런 아니랄까봐 더럽게 잘 싸우는 구만."
"그쪽도 아직 은퇴하기에는 이른 거 아닌가? 흐흐."
둘은 서로를 향해 비웃으며 숨을 골랐다. 암마룡이 죽고 차원문이 닫히면서 사실상 전투는 잔챙이를 제거하는 일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화권이 있었으면 더 좋았으련만."
"그 놈 기절했잖소. 어쩔 수 없지."
화권 이승형은 라스푸틴의 실체를 알리고 기절했다. 정신적 충격이 병행된 마력 탈진이었고, 특사단은 은연중에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혼자서 저 거물을 상대했으니 충격을 받을만도 하지."
머리를 발사한 고간룡의 몸통은 고사포마냥 별궁을 향해 뻗어있었다. 특사단은 소강상태에 이른 전장을 살피며 호흡을 골랐다.
"저 육시럴 놈이 다 해먹네. 아이고, 우리 코어 다 빼앗긴다."
"그래도 저 놈은 지 나라에 안 갖다 바치잖소."
"으하하하!"
호수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놀이공원에 놀러온 어린 아이가 신이 난 것 같은 해맑은 웃음소리였지만, 그 미소는 마음껏 괴수들을 베고 죽이고 학살하는 살인귀의 것이었다.
"별 모양으로 잘라주마! 아하하!"
질풍객은 독식을 하듯 날아다니며 괴수들을 죽였다. 철저히 목만 날리는 그의 행동에 괴수들조차 겁을 먹을 정도였다.
"인간 백정이 따로 없구만."
"저게 히카리 오빠였지? 으으, 보스도 참 대단해. 저런 놈을.... 쯧."
아키택트는 귀를 쫑긋 세운 우사의 모습에 뒷말을 삼켰다.
"거 변태야? 남의 말을 왜 들어?"
"귀가 있는데 그럼 어떻게 안 듣나? 나 참. 그럼 지껄이지나 말던지."
"자, 자. 싸우지들 마시고."
등대가 가운데서 중재를 하며 나섰다. 레이더의 붉은 점들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적었고, 사실상 차원문에서 흘러나온 괴수들은 모두 퇴치되었다.
"이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그렇죠?"
"......그런 셈이긴 하지. 끄응."
130여마리나 되는 괴수를 격퇴했고, 러시아 협회의 히어로들과 연계하여 괴수들의 범람을 막았다. 심지어 지금은 기절한 이승형도 라스푸틴의 정체를 알리는 전공을 세웠다.
"나머지는 저분들한테 맡기도록 하죠."
특사단이 대외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했다. 그러니 이제 일명 <소시지 파티>의 주연은 뒷면에서 암약하는 존재들이었다.
'또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건 아니겠지.'
유리창이 깨진 별궁을 올려다보는 등대의 표정은 복잡해보였다.
* * *
"그 더러운 물건은 일단 봉인부터 할까요?"
나는 백청영이 진상한답시고 두 손에 들어올린 40cm 대물을 코어를 감싸듯 마력으로 덮었다. 졸지에 지름만 40cm를 훌쩍 넘는 푸른 구체가 만들어졌고, 백청영은 그것을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저도 제법 믿음직스럽지요?"
"예. 잘했어요. 이제 진짜로 환룡 맡겨도 되겠네요."
"......."
백청영은 입을 쩍 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감격한 듯한 그의 모습에 사뭇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요?"
"겨우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치하를 받다니...."
"아."
보상이 모자랐나보다. 나는 백청영에게 어떤 보상이 있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손으로 뜨개질을 하듯 자수를 놓으며 옷 하나를 연성했다.
"자요. 원하면 흑사갈한테 입혀서 재미봐요."
"이건...?!"
백청영의 손에는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들려있었다. 흑사갈의 사이즈를 가늠해 흉부가 조정되었지만, 적어도 입히는 데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허어."
백청영은 어안이 벙벙한 채 웨딩드레스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혹시 취향이 달라요? 바꿔드려요?"
"아닙니다. 그...."
백청영은 내가 행여나 빼앗아갈까봐 잽싸게 등뒤로 드레스를 넘기고는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최고의 포상입니다."
"아.... 그러세요."
표현의 문제였나보다. 백청영은 내가 그를 치하했다는 것에 몹시 감격한 듯 했다. 나는 괜히 쑥스러워져서, 다음에 백청영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주기로 다짐했다.
"그럼 이제 저거는 나중에 중국에 가서 괴인으로 만들기로 하고."
나는 봉인구를 백청영에게 넘긴 뒤, 소파에 검을 끌어안은 채 누워 헤실거리는 루살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슬슬 광검 원래대로 돌려야하지 않을까요?"
"안 돼. 싫어.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서방님 귀여워서 계속 하고 싶단다."
루살카는 검의 폼멜 부위에 입술을 맞추며 혀를 할짝거렸다. 검신을 가슴에 살짝 끼워 비비고, 다리를 오므려 검의 끝부분을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끼워 비비고 있었다.
"하여튼 그거 방심해서 죽을 뻔 했다고.... 어휴."
"그치만 서방님한테 그 더러운 걸 묻히고 싶지 않았는 걸."
루살카가 만약 진작에 검을 휘둘렀다면 당할 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살카는 마지막 순간에 방심했고, 질풍객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너도 좀 그래. 네가 있었으니까 나도 안심하고 긴장을 푼 거 아니겠니?"
"책임을 떠넘기기는. 만약에 제가 딴 생각 하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그랬니? 그래서 네가 아니라 질풍객 그 놈이 나를 구해준 걸까? 아주 우연히?"
"질풍객은 내가 불렀고, 이거 쏘기 전에 마침 그 녀석이 와서 따로 안 도와준 거예요."
나는 손에 들린 플라스틱 모델건을 흔들었다. 리볼버의 약실에는 탄환 모양의 돌 조각 하나가 박혀있었다. 나는 덕배탄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모델건을 태워버렸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총이야?"
"......그냥 기분전환?"
창염이 내게 건카타 비슷한 테크닉을 가르쳐줬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루살카나 환룡 둘 다 내 안의 창염을 인지하고 나를 경계하게 될테니.
쾅쾅쾅!
"오, 왔다."
아직까지 결계로 막혀있는 문 너머, 누군가가 다급히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호들갑을 떠는 이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버님 오셨는데 이제 어쩌실래요?"
"......모르겠어."
루살카는 광검을 끌어안은 채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문 바로 앞에 서서 루살카에게 선택권을 부여했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어요. 하나는 나나 광검에게 납치를 당해 러시아를 떠나는 길. 또 하나는 이 문을 열고 당신의 아버지에게 모든 진실을 밝히는 길."
"......."
진실을 숨기고 사랑의 도피를 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진실을 밝히고 정면에서 부딪힐 것인가.
"당신과 광검의 사이에 대해 알리려면 전말을 모두 밝히는 길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죠?"
어줍잖게 정보를 숨기려들면 수보르프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을 기만하려 드는 걸 눈치챌 것이다. 적어도 한 나라의 지휘관이라면 그 정도의 자질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서방님 의견은-"
"당신이 직접 선택해요. 루살카."
나는 또 선택을 미루려는 루살카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인간 루살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하라 이 말입니다."
"......너무 몰아세우지 마."
딱딱한 내 목소리에 환룡은 중간에서 갈피를 못잡고 당황했다. 루살카는 고개를 떨궈 침묵했고, 나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요? 나는 당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거예요. 하지만 그 선택에 따른 모든 일은 당신이 책임지는 거죠."
"......역시 너는 '그 아이'가 아니야."
루살카는 처연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아이라면 내게 의견을 묻지도 않았을 걸. 바로 자기 편한대로 상황을 만들어버리고 강요했겠지."
"......그래서 어쩌실 거예요?"
"이렇게 할게."
루살카는 광검을 소파에 내려놓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어느새 루살카의 눈동자는 새까만 밤하늘에 눈송이가 소복히 쌓인 것 마냥 아름다웠다.
저벅, 저벅.
루살카는 말보다 행동으로 자신의 결정을 보였다.
끼이익.
루살카는 결계를 해제하고 문을 열어, 자신의 아버지인 수보르프를 맞이했다.
"딸! 무사-"
수보르프는 삽시간에 방 안을 훑었다. 루살카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수보르프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붙잡고 안으로 잡아당겼다.
"잠깐 얘기좀 해."
"따, 딸?!"
쿠웅!
문이 닫히고, 결계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나는 환룡과 함께 수보르프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신 딸의 의자매같은 사람들이랍니다."
"안녕."
"어...."
수보르프는 방에 널브러진 보드카 수십 병을 보고 혼란에 빠졌다.
"이게.... 지금...."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말이에요."
루살카는 수보르프를 소파로 잡아당겼고, 나는 그와 마주앉았다. 루살카와 환룡은 내 양옆으로 앉았고, 졸지에 수보르프는 나를 가운데에 놓고 세 정령을 상대로 면접을 보듯 앉게 되었다.
"제가 먼저 상황을 설명 드리고, 당신이 그 뒤에 루살카에게 직접 들으세요."
나는 헛기침을 하여 시선을 잃은 수보르프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당신 딸은 이계인이었습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구구절절한 러브스토리가 다시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 * *
30분 뒤.
"하아...."
수보르프는 깊은 한숨과 함께 한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나는 그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나부터 열까지 자세히 설명했고, 그는 내 설명에 머리가 터져나갈 것처럼 보였다.
"......일단 <원수>로서 판단하자면, 나는 당장에라도 회견장 앞에 서서 국민들에게 오늘의 일을 보고해야 한다."
"네. 그게 지휘관의 덕목이죠."
차원문 반응까지 나타났으니 국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사람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해야할 터.
"라스푸틴이 사라졌으니 사람들은 응당 그의 행방을 찾을 거예요."
"그렇다고 다크 레기온과 관련된 것을 밝히기에는...아니지."
수보르프는 눈을 빛내며 내게 제안했다.
"전 세계에 다크 레기온의 실체를 밝히도록 하는 건 어떤가. 아직 원탁에서 밝히지 않았다며? 그렇다면 그 공은 우리가 가져가도록 하지. 대신...."
수보르프가 손을 들어올려 나를 가리켰다.
"우리가 알게 된 다크 레기온은 '아지다하카의 조직'인 걸로 하지. 어떤가?"
"좋아요."
대중들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나와 수보르프는 세간에 알릴 내용에 대해 속전속결로 정리하였다.
"......일단 이걸 발표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하지."
나와 논의한 합의문을 들고 떠나는 수보르프는 문을 나서던 순간까지도 루살카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
루살카는 그저 고개를 떨구었고, 환룡은 루살카의 눈치만 보며 침묵했다.
그리고 나는.
"너무 많이 마셨네요. 잠깐 바람 좀. 푸흐흐."
둘을 내버려두고 루살카가 서있던 첨탑에 올라섰다. 이제 내가 해야할 것은 하나.
배신자의 처단.
"자, 그럼 나와봐라."
나는 철표의 코어를 부활시켜, 그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유언으로 딱 한 마디만 들어주지."
"......죽여라."
탕.
나는 이 날, 처음으로 내가 만든 괴인을 소멸시켰다.
잠시 뒤.
나는 마도 기어에서 흘러나오는 수보르프의 공식 발표를 들으며 승리를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