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화 〉1부 12장 19
더럽고 찝찝한 공격이었으나 그 위력 만큼은 상상을 초월했다. 고간룡이 내뿜는 얼티밋 스트림은 사방을 뒤덮었고, 히어로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산성비에 온몸을 비틀어 피했다.
"으아아악!!"
"내 슈트! 녹는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쉴틈없이 뿌려지는 산성의 브레스는 주변 호수 일대를 뒤덮는 걸로도 모자라, 때때로 강가에 있던 히어로들을 향해 조준사격까지 해대고 있었다. SS급 암마룡 라스푸틴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문제는 그가 한 번 호수에 먹히고 난 뒤로 이상반응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차원문 발생! 발생 지점은...라스푸틴의 심장?!"
캬아아악!!
거대 라스푸틴의 흉부가 활짝 열리며, 그 안에서 온갖 종류의 괴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중세 판타지에서나 볼법한 온갖 괴수들은 수면으로 떨어져, 강변으로 헤엄쳐 사람들을 습격했다.
"막아! 탱커들 앞으로!!"
수보르프가 최전방에 서서 달려오는 검은 늑대 한 마리의 대가리를 주먹으로 찍었다. 자색의 안광을 내뿜던 늑대 괴수는 수보르프의 일격에 절명했다. 협회의 지휘관이자 가문의 주인이 솔선수범하여 가장 앞에서 전투를 치르는 통에, 가솔들과 협회 히어로들은 결사의 각오로 괴수들을 쓰러드려나갔다.
"우오오!"
특사단으로 파견된 이들도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다. 기절한 이승형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저마다의 이능력을 발휘해 본궁으로 올라오는 괴수들을 틀어막았다.
아키택트가 벽을 세워 길을 막고, 우사가 허공에 물결을 만들어내어 산성비가 튀지 않게 모았고, 풍백이 바람을 일으켜 산성물질을 역으로 괴수들에게 쏘아보냈고, 하늘성은 벽 사이에서 일당백으로 달려드는 괴수를 때려죽였다.
핑! 피비빙!
정식으로 '헌터'로서 협회에 등록된 등대는 자신의 이능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비록 서울보다는 못했으나, 고간룡이 내뿜는 산성 숨결의 예상 궤적이나 마물들의 움직임 정도는 오픈 채널을 통해 신호로 경고할 수 있었다.
"...!! 위험!"
등대는 차원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괴수 중에서 위험종이 있음을 감지했다. 보라색과 검은색의 마력이 섞여 흐르는 괴수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은밀한 움직임으로 강가에 다다랐다.
캬아아악!
그 목표는-지휘관인 수보르프.
"어리석은 것! 나를-"
자신을 향해 흉측한 앞발을 휘두르는 괴수에게 주먹을 내지르려던 수보르프는 갑자기 흩어지는 마력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푸쉬이--
"이런-"
광검과의 전투에서 진이 다 빠져 마력을 회복할 틈도 없이 전투에 들어간 것도 이유였고, 지속된 전투로 인해 알게 모르게 산성물질에 길게 노출되어있던 것이 원인이었다. 수보르프의 몸에 쌓여있던 산성물질이 일정량 쌓이자, 수보르프의 전신을 감싸던 마력이 녹아내렸다.
캬아아악!!
괴수는 그 틈을 놓치지않았다. 자신의 몸이 반으로 갈리면 그 남은 반으로 인간을 죽이려드는 살인귀들은 눈앞의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인간을 찌르려들었다.
죽는다, 고 생각한 순간.
푸슈슉!!
수십 가닥의 물줄기가 괴수를 꿰뚫었다. 괴수의 손톱은 수보르프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췄고, 물줄기가 흩어짐과 동시에 피분수를 뿌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하아."
수보르프는 수십 수백 번을 불러도 나오지 않던 이가 드디어 칩거를 깨고 나온 것에 허탈함과 동시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콩깍지가 씌인 철부지마냥 방안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던 아이는 가족들의 위기에 칩거를 깨고 히어로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믿고 있었다…. <운디네>!"
공식적으로 라스푸틴보다 더 강한 이능력자가 첨탑의 꼭대기에 오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검을 집어든 채.
"......금빛으로 빛나는 검?"
운디네는 광검(光劍)을 들고 있었다.
* * *
"잘 들어요. 매커니즘은 간단합니다. 코어웨폰이 된 광검으로 제가 마력을 보내드릴게요. 그러면 당신은 그걸 당신 것으로 변환해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말은 쉽지…. 흐윽, 너무 뜨거워.]
"오해하게 하지 말아주실래요?"
어디까지나 광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내 마력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내가 직접 옆에서 마력을 부어주거나 할 수 없으니, 광검을 여과기 삼아서 루살카는 막대한 마력을 공급받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마음껏 날뛰어보세요. 마력은 제가 밑에서 계속 보내드릴테니까."
[너 진짜 무식하게 크고 뜨겁기만, 흐아아….]
광검을 통해 필터링을 거침에도 불구하고 내 마력에 절여진 루살카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괜히 루살카가 엄한 소리를 더 하기전에 설명을 마무리하고 스크린을 닫았다.
"생각해보니 왜 여기에 방이 있는지 알겠네."
"사방이 물이라서?"
"그렇지."
전직 물의 정령이며 물속성 S급 이능력자이니,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는 호수는 루살카에게 있어서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곳이다.
"누가 침입하기 전에 다 수장당하겠군. 이거 봐라. 괴수들 빠져나오기도 전에 물속에 끌려들어가는 거."
루살카가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라스푸틴의 심장에 열린 차원문에서 나오던 괴수들은 비행형을 제외하고는 전부 호수에 수장되었다. 루살카는 물줄기를 일으켜 괴수들의 다리를 강하게 잡아당겼고, 괴수들은 하나같이 허우적대며 몸부림을 치다 익사했다.
"전장의 이점을 살리는 건 전술의 기본이지."
"......나는 보기 좀 그런데."
하나같이 물귀신이 되어가는 괴수들을 보며 환룡은 착잡한 얼굴로 병나발을 불었다. 나는 왠지 미안해져서 잔에 따라진 보드카 위에 불을 붙여줬다.
"미안하다?"
"왜 의문문이야?"
"사실 별로 안 미안해서."
"그럴 거면 말이라도 하지 말지."
환룡은 툴툴거리면서도 불붙은 보드카를 한 번에 들이켰다. 다른 인간의 몸이 아닌 환룡의 디폴트 육체는 불타는 수십 도짜리 보드카 정도는 아주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었다.
"크으…. 인생 쓰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냐?"
"어쩌면 우리가 결혼했을 미래에서? 너 보니까 녹색 병에 든 공업용 알코올 마시면서 온갖 허세는 다 잡더라. 히히."
"......."
나는 언젠가 환룡에게 소맥을 거나하게 말아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공에 몰래 숨어있는 미니피닉스들이 나와 환룡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다.
"잘 싸우네."
"아무렴. SS급 둘이 옆에서 도와주는데."
루살카는 손에 든 광검을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음악을 연주하는 것 마냥 휘둘렀다. 고요한 호수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 물줄기가 휘날렸고, 아직도 수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던 괴수들은 전부 물을 먹고 호수 바닥에 처박혔다.
■■■■■!!
강가의 히어로들을 견제하던 라스푸틴이 몸을 루살카에게 향했다. 상반신의 암마룡과 하반신의 고간룡이 동시에 루살카와 그의 손에 들린 광검을 눈으로 확인했고, 괴성을 지르며 날개를 펼쳤다.
쿵! 쿠--웅!!
라스푸틴은 다리를 휘감는 물줄기에서 발을 들어올리며 호수 한 가운데의 섬으로 다가갔다. 날개는 있으나 이미 허벅지까지 잠겨 호수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고, 라스푸틴은 억지로 물살을 거스르며 루살카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폭주해서 자아가 날아갔을텐데 어찌 루 언니는 알아보네?"
"자기 성기 자른 당사자를 보는 거다. 덤으로 우리도 느낀 거지."
나는 손가락을 네 개 펼쳤다.
"최우선적으로 노리는 타깃인 정령이 둘이나 여기 있고, 영혼은 정령인 인간이 그 위에 있어. 심지어 그 인간은 자기 성기를 자른 괴인을 검으로 들고 있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을 거다. 우리의 마력 반응을."
"으, 싫다. 그럼 우리도 저거 맞아야 해?"
고간룡이 우리 위의 첨탑 꼭대기- 루살카 부부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마룡의 대가리에서 서서히 모여드는 마력이 어디서 흘러오는지 궁금했던 나는 마력의 흐름을 훑었고,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고간룡의 코어가…. 하필이면."
"왜? 무슨 문제 있어?"
"코어가 약점이라고 해도 너무 위치가 심한데."
고간룡의 목 아래, 인간으로 치면 쇄골 바로 윗부분이라고 할만한 곳에 크고 어두운 구체 두 개가 달려있었다. 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검은 아우라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미니피닉스의 시야를 통해 마암룡의 약점을 삽시간에 파악해냈다.
"사타구니 부위에 검은 구체가 두 개 달려있다. 하나는 코어고, 하나는 잡아먹은 인간들을 가두는 감옥이야."
"......웁."
환룡은 마시던 술까지 주륵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왜 저래? 아지다하카 취향이 원래 저런 거야?"
"글쎄. 이계신의 악의가 발현된 것 아닐까."
광기로 점철된 테라의 영향을 받아 폭주하는 괴인이니, 정신마저 오염되어 인류가 가진 상식에서 어긋난 부분은 하나씩 가지고 있을 터.
"......어, 봉효 호출이야. 잠깐만."
환룡이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밖에서는 루살카가 별궁 뒷편의 호수에서 물을 끌어와 포신까지 만들어 물대포를 쏘고 있었고, 라스푸틴은 고간룡의 머리를 격하게 움직여 물폭탄을 허공에서 요격하고 있었다.
■■■■■!!
고간룡은 뱀장어처럼 퍼덕이며 물대포를 후려쳤다. 악마를 형상화한듯한 라스푸틴의 몸은 호수에서 뻗어나온 물의 사슬에 결박되어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 보기 더러운 싸움이야."
만약 내가 상대를 하고 있었다면 진작에 고간룡의 코어부터 박살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마암룡의 사체에서 쏟아지는 괴수들을 사냥하며 코어를 벌다가, 외국의 개입 가능 시각 직전에 차원문을 닫아 코어를 낼름 챙겨갈 것이다.
"정말 근질거리네."
개천광과의 전투를 목전에 둔 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나섰을텐데. 나는 아쉬움에 술잔만 계속 기울였다.
■■■■!!
물대포 하나가 고간룡의 턱 아래를 강타했다. 산성 브레스를 뿜어내던 고간룡이 심하게 휘어지며 브레스를 뿜었다.
"봉효 보고야. 라스푸틴의 성기를 회수했다네."
"뭐?"
* * *
"후아!"
백청영은 물속에서 빠져나와 실체를 갖추며 숨을 토해냈다. 그의 손에는 빳빳하게 서있는 40cm 길이의 성기가 들려있었다.
"더럽게 크네, 진짜."
백청영은 샤워장에서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2m짜리 짙은 어둠 기둥 속에는 라스푸틴의 진짜 성기가 코어처럼 파묻혀있었고, 백청영은 소동 속에서도 라스푸틴의 성기를 기어이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이건 뭐…."
백청영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자신의 것을 발기시켜 크기를 비교해도 절반에 살짝 못 미치리라. 도대체 누가 이 성기를 끝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없어도 괴수라면 가능하겠지…. 후후…."
백청영은 라스푸틴의 성기에 꿰뚫릴 흑사갈의 치태를 상상했다.
"더 많은 코어…. 더 많은 실적…!"
백청영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실실 웃었다.
"나의 실적은 곧 주군의 실적! 아무리 주군께서 일을 안 하셔도 내가 그만큼 일하면 피닉스 님께서 주군을 바라보시는 마음도 달라질 터. 우후후."
백청영은 자신이 그리는 장밋빛 청사진에 마음이 부풀어있었다.
"그럼 결국 두분의 관계는 깊어지시고.... 주군은 사랑을 쟁취.... 음, 완벽하군."
봉효 백청영.
모택평의 아래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하며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던 그가 자신을 괴인이라는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준 환룡에게 충성을 다하는 괴인이 되면서, 환룡의 연애전선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거기에 샤오린까지 함께 엮어서 피닉스 님의 곁에.... 후후. 완벽한 작전이군."
임무를 완수한 백청영에게는 이제 하나의 고민밖에 없었다. 라스푸틴의 성기를 진상함으로써 백청영은 피닉스에게 임무 완수의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아이고, 딸같은 사람들 시집 보내기 참 힘드네."
자신이 충성을 바친 존재와 가족같이 사랑하는 이복동생의 반려는 세계를 호령하는 존재여야만 한다. 백청영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러한 존재는 푸른 불사조밖에 없었다.
"자고로 영웅은 삼처사첩이라고 했지. 후후."
백청영은 라스푸틴의 성기를 조심히 감싸안고 샤워실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밖은 차원문에서 쏟아지는 괴수들과 그에 대처하는 히어로들로 혼란스러웠다.
"딱 좋군."
백청영은 피닉스가 있을 첨탑 꼭대기를 향해, CCTV와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별궁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아직도 발기가 풀리지 않은 물건이 덜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