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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72화 (272/1,497)

〈 272화 〉1부 12장 18

라스푸틴의 심장에 박혀있던 코어는 차원문을 여는 매개체가 되었다.

차원문은 인체의 가장 중요한 곳인 심장 속에 숨어 그 크기를 키워나갔고, 차원문에서 나오는 괴수들은 라스푸틴의 신체를 갉아먹으며 성장해나갔을 것이다.

"아마 저대로 뒀으면 30분만에 B급이 수백 마리는 내장을 뚫고 튀어나왔을 걸요? 1시간이면 S급도 나오고! 웨이브 한꺼번에 몰려오기 전에,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지우자고요."

차원문 키워먹기. 코어 파밍의 정석은 언제나 1 웨이브 부터 시작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차원문이면 닫아야지!"

하지만 히어로 수칙이 머리에 박히기라도 한 건지, 루살카는 팔을 걷어붙이며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했다.

"잠깐만요!"

"루살카. 잠시만."

나와 광검이 루살카의 양 팔을 붙잡고 간신히 번지점프를 막았다. 루살카는 내가 잡은 팔은 흔들면서, 광검이 잡은 팔은 떨쳐내기는 커녕 오히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지적하지는 않았다.

"진정해, 루살카. 라스푸틴은 아직 안 죽었다."

"그래요. 모처럼 차원문 열렸는데 코어 파밍 좀 하자고요."

"지금 코어가 중요해?!"

루살카는 팔을 격하게 흔들어 나를 떨쳐냈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광검의 품에 안기며 나를 노려보는게 여간 고단수가 아니었다.

"우리 가문의 사람들이 지금 다치잖니! 아까 잡아먹힌 사람들도!"

"......그 사람들 아직 안 죽었어요. 영 좋지 못한 곳에 갇혀버렸지만."

나는 라스푸틴의 어둠에 잡아먹혔던 이들이 어디에 '보관'되고 있는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우리 괴인들이 사이좋게 잡아먹혔을 줄이야...."

청화단의 괴인 하나와 환룡단의 괴인 한 명.

대피하면서 도망치지 못한 건지, 괴인 두 명이 지금 고간룡에게 잡아먹혀 나란히 그의 여의주에 갇혀있었다.

* * *

"이거 큰일이네.... 이보쇼. 정신 차리쇼."

환룡의 괴인, 사재는 구형의 결계 속에서 기절한 이들을 한데 모아 부축했다. 헬멧은 쓰고 있던 청화단의 푸른 깃털, 적송은 결계를 주먹으로 노크하듯 툭툭 건드렸다.

[안 돼. 너무 단단해. 우리 수준으로는 못 뚫어.]

"젠장. 돌아버리겠군."

고간룡에게 잡아먹힌 이들은 사재와 적송 둘만이 아니었지만, 괴인은 둘 뿐이었다. 사재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마지막에 그거 그냥 버리고 나올 걸 그랬네."

사재는 도망치기 직전 익사할 뻔한 어린 아이를 구하러 발길을 돌렸고, 아이를 살린 대신 고간룡의 브레스를 맞고 산화했다. 고간룡은 냅다 사재를 집어삼켰고, 그를 구하러 내려왔던 적송도 함께 잡아먹혔다.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됐네요. 그래도 네 덕분에 꼬마애는 수영해서 도망쳤으니 된 거 아니냐?]

적송은 너스레를 떨었으나, 실제로 사재의 희생 덕분에 아이는 살 수 있었다.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상기해보면, 아이는 가문의 시동으로 일하던 낮은 경지의 이능력자 였으리라.

"전직 빌런 주제에 정의감 챙기기는."

[뭔 소리야. 나 누명썼다가 이 꼬라지가 된 거거든? 권력자 눈밖이 났.... 에휴, 됐다.]

적송은 손사레를 치다가 옆으로 물러섰다.

끼이익!

구체에 연결된 마력의 관을 타고 사람들이 하나 둘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적송은 기절한 그들을 받아 바닥에 눕혔다.

[여기 거기 맞겠지? 진짜 싫다.]

"살면서 남의 부랄에 들어오게 될 줄이야."

고간룡의 목구멍을 지나오면서 묻은 끈적한 검은 점액질이 질척거렸으나, 적송은 능숙한 손길로 사람들의 기도를 확보해 차곡차곡 쌓았다.

[이러다 다 차서 압사당하겠는 걸? 우리 폭사당하는 거 아냐?]

"다 차오르기 전에 한 번 물 빼지 않겠냐?"

사재는 주먹을 쥐고 반대편 손바닥에 탁탁탁 두드렸다. 적송은 팔짱을 끼며 몸을 떨었다.

[우리가 정자냐? 난자 못 만나면 바로 찍하고 뒤지겠네.]

"그렇지. 우리야 죽어도 주군들께서 부활시켜 주시겠지만...."

사재는 괜히 두 가지 사항이 마음에 걸렸다.

[철표가 사고쳐서 우리 곱게 안 보일 걸?]

"역시 그렇겠지? 하아."

하나는 푸른 깃털 중 한 명이 배신하여 금기를 저질러 사망했던 것. 생사여탈권을 쥔 자에게 정면에서 대들었으니, 그로 인한 불똥이 괜히 다른 괴인들에게 튈 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다른 하나.

"설령 죽어도 그분들께서 우리 코어를 회수할 수 있을까?"

과연 피닉스와 환룡이 자신들을 구할만큼, 두 괴인은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A급 두 명의 화력으로도 도저히 깨뜨릴 수 없는 딱딱한 결계 속에서 둘이 죽어 코어가 된다면, 아마도 두 정령은 그냥 찾는 걸 포기하거나 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그냥 한낱 괴인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말은 바로해야지.]

"뭘?"

[코어를 회수하실 수 있는게 아니라, 코어를 회수하려 하실까 하는 것부터 생각해야하지 않겠냐? 팬텀이나 샤오린같은 애들이었으면 지금쯤 바로 구하러 오셨을 걸?]

"그렇군."

둘의 생존에 대한 고민은 점점 더 깊어졌다.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면 차곡차곡 쌓으며, 둘은 두서없는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죽기 전에 흑사갈 한 번 만 더 맛보고 싶었는데."

[나는 우리 부대장이랑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진짜 그 누님, 조신한 척 하면서 뒤에서는 아주 그냥.... 잠깐. '더'?]

"어. 나 흑사갈이랑 해서 코어 여덟개 깠다. 하나는 심지어 S급이었지."

[이 새끼가? ......좀 자세하게 이야기해볼래?]

둘은 고간룡의 목덜미 바로 아래 여의주 속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혹시나 주인들이 살려주러 올 때 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잡혀들어오는 사람들이 죽지 않게 조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없었다.

* * *

"고간룡의 여의주에 갇힌 애들을 폭사시키면 고간룡도 데미지를 입지 않을까요?"

아지다하카처럼 괴인의 코어를 무기로 사용하자는 내 의견에 다른 정령들은 표정이 금방 썩어버렸다.

"안 돼.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잖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거기 우리 가솔들도 있단다. 너, 나랑 싸우자는 얘기지?"

"......내 부하도 있어."

"이런 극단적인 방법도 있다는 거니까 참고하라는 거예요. 제물들이 차원문을 완전히 폭주시키는 건 막아야 하니까."

아지다하카의 전술을 따라한다는 내 계략을 금방 반려되었다. 나도 어디까지 그냥 해본 소리였기에 더이상 강권하지는 않았다.

"어, 일어선다."

휘어져있던 고간룡이 서서히 하늘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호수에 누워 물장구를 치던 딥다크 라스푸틴은 묘기를 하듯 몸으로 아치형을 그리며 호수에서 몸을 일으켰다.

■■■■■■■!!

라스푸틴은 상체만 일으킨 채, 노출된 차원문에서 쏟아지는 괴수를 사방으로 집어 던졌다.

개중에는 라스푸틴의 투척을 견디지 못하고 육편이 된 괴수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육지에 떨어져 히어로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서방님!"

"......."

루살카는 광검이 자신을 풀어주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고, 광검은 내게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라스푸틴을 가리켰다.

"그럼 루살카, 당신은 지금 당장 저걸 쓰러뜨리기를 바라는 거죠?"

"당연하지!"

이미 아까전부터 물길을 조종해 라스푸틴을 억누르는 루살카의 얼굴은 제법 버거워보였다.

폭주하여 괴물이 된 SS급 이능력자 하나만으로도 벅찰텐데, 거기에 뻥 뚫인 심장에 열린 차원문에서 쏟아지는 괴수들까지 억누르려하니 죽을 맛일 것이다. 나는 술을 홀짝이며 루살카에게 물었다.

"저걸 쓰러뜨릴 힘은 있고?"

"네가 도와주면 되잖니! 네가 강하잖아!"

"지금은 제가 나서기 애매하단 말이죠."

첫번째. 라스푸틴의 매료 능력에 대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일단 저 흉물을 가져와야해요."

나는 라스푸틴과 고간룡이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버려진 2m 기둥을 가리켰다.

"저게 아마 매료의 주체일 거예요. 마력의 흐름으로 봐서는 아마 코어같이 '핵'이 되는 존재가 있는 것 같은데...."

"잠깐만."

환룡이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었다.

"봉효가 바로 근처에 있어. 명령만 내리면 바로 챙겨오겠다는데."

"......흠."

백청영은 굳이 라스푸틴의 성기를 잘라내어 자신이 활용하고자 했다. 흑사갈 전용 파트너 괴인을 만들자고 말이야 했지만, 행여나 다른 용도로 쓰일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솔직히 신뢰가 안 가는데...."

"그렇다고 네가 직접 갈 것도 아니잖아. 광검 보낼 거야?"

나는 광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거 손으로 다 헤집어서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되겠어요?"

"......꼭 해야하나?"

"안 돼. 우리 서방님한테 저런 더러운 거 시킬 수 없어!"

광검은 어쩔 수 없다면 따르겠다고 말했으나, 루살카가 완강히 거부했다. 그렇다고 청화단의 깃털에게 명령을 내리자니 애매했다. 철표처럼 사고를 칠까봐.

"봉효가 자기 믿어달래.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면서."

"솔직히 한 번 뒷통수를 맞은 입장으로서 내키지는 않는데."

"......내가 명령을 내려뒀으니 그럴 일은 없어. 봉효가 전해달래."

환룡은 정자세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백청영의 말을 전했다.

"자기가 한번만 더 뒷통수를 치면 평생 모택평 친아버지로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친아버지잖아."

"괴인이 되면서 인연이 끊긴 사이야. 몸안의 피도 다 뽑아냈다고. ......믿어주면 안 돼?"

환룡은 내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다. 나는 환룡이 제 부하를 위해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보기 그랬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하지 말라고는 할 수 없었다.

"......3분 준다고 전해."

"응!"

환룡은 활짝 웃으며 백청영에게 내 지시를 전했다. 본인이 정말로 간절하다면 주어진 시간 내에 임무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환룡 부하에 샤오린 오빠, 거기에 DLC 주인공이라서 믿어본다.'

마지막은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나는 딱 한 번만 백청영을 믿어보기로 했다.

"환룡아. 백청영이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응. 내가 직접 코어를 부서버릴게. 이름을 걸고."

나와 환룡은 손가락을 걸었다.

"그럼 이걸로 라스푸틴 성기에 대한 문제는 해결. 미안해요, 루살카. 조금 이야기가 길어져서."

"......알았으니까 빨리 이야기해봐. 저것만 가져오면 네가 나갈 수 있다는 거지?"

"아뇨."

나는 이번 전투에서 딱히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내 움직임이 알려지면 다른 간부들을 자극할 수 있으니까.

"대신 당신에게 힘을 빌려드릴게요."

"빌려줘?"

"네."

나는 종종걸음으로 두 부부에게 달려가-

"레벨이 딸리면 템빨로 이겨야죠!"

두 부부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 * *

# 303

"3분이라…."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미 라스푸틴의 잘려나단 성기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청영은 환룡의 전음이 전해지자마자 짙은 어둠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꿀럭!

짙은 어둠의 감촉은 마치 해파리의 표피를 가르고 그 속을 헤집는 것 같은 불쾌한 끈적거림이었다. 점성을 가진 액체는 고무 원액처럼 백청영의 손에 달라붙었다.

톡 까놓고 말해, 성기를 이루고 있는 짙은 어둠은 정액같았다. 하지만 백청영은 그 촉감과 역한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깊숙히 쑤셔넣어 안을 뒤적거렸다.

'이거보다 심한 짓도 동창 제독 하면서 했는 걸!'

모택평의 아래에서 그에게 살아남기 위해, 또한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온갖 비인외도를 저질렀던가. 환룡이 그를 구원해주기 전부터 백청영은 이런 얄궃은 일에 이미 익숙해져있었다.

'찾았다.'

어깨까지 넣어 어둠 속을 헤매이기를 수십 초. 이미 제법 많은 시간을 허비한 백청영은 하필이면 기둥 한 가운데에 있는 라스푸틴의 성기에 표정이 굳었다.

"......후우."

백청영은 딱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흡!"

주저없이 어둠속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상체 전체를 밀어넣은 덕분에 그는 수월히 기둥의 핵과도 같은 물건을 두 손에 쥐는데 성공했다.

"!!"

그 순간, 뜨거운 기둥은 어둠속에서 백청영의 눈앞에 환각을 만들었다. 푸른 머리칼의 여인과 회색 머리의 소녀-피닉스와 환룡이 속이 비치는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 우람한 것에 박히고 싶은 것이에요….

나 잘거니까 안에 가득 채워줘….

"......풉."

백청영은 라스푸틴의 성기가 자신을 좀먹어들려는 것을 직감했다. 눈앞의 두 여성은 진심으로 한순간이나마 흔들릴정도로 매력적이었으나, 백청영을 유혹하기에는 한참 멀었다.

'전직 고자 상대로 이런 짓 해봐야 무쓸모지!'

고작 성욕을 일으키는 것으로 백청영을 낚을 수는 없다. 만약 성기가 보이는 환각이 백청영의 진의를 읽어냈다면, 피닉스나 환룡은 분명 다르게 말했으리라.

"으으으읍!!"

백청영은 기둥 속 마력의 핵심을 잡아비틀었다. 기둥과 연결된 마력의 결합을 강제로 뜯어버린 그는 반동 때문에 뒤로 나뒹굴었다.

"하하하!"

백청영의 손에는 40cm의 휘어진 막대기가 들려있었다. 백청영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것에 기뻐, 자신의 몸이 다리 아래로 추락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179초.

단 1초를 남겨두고 백청영은 임무를 완수했다. 그는 임무를 보고한 뒤 고개를 살짝 숙여 쑥스러워 하며,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뭐라 말을 해야할지 몰라 속으로 말을 고르며, 하기는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입을 열며 백청영을 치하하는 피닉스의 모습을 그렸다.

-...칫. 잘했어요. 이제는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좀 믿고 맡길 수 있겠네요. 오해하지마요. 아직까지 한참 남았으니까. ...오늘 일은 수고많았어요. 잘했습니다.

"후후."

백청영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성취감 속에 빠져, 호수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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