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1부 12장 14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위기의 싹은 진작에 제거해 없애는 게 답이라는 거다.
'내가 당하기 전에 먼저 선빵을 친다.'
그게 괴수이든 큐브든 다르지 않다. 빌런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며, 이 몸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자라면 무조건 제거해야했다.
'문제는 지금 당장 그놈들은 히어로라는 건데.'
그 중 가장 골치아픈 놈들은 라스푸틴처럼 5년 뒤 미래에는 빌런이 될 놈들이지만 현재 시점에는 아직 히어로인 자들이었다. 내가 '원작에서는 이런 범죄를 저질렀어요!'하면서 죽여봐야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할 것이며, 괜히 창염의 피닉스에게 애꿎은 전과만 생길 뿐이었다.
'뭣보다 뒷일을 처리하기 귀찮아.'
당장 죽일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뒷감당을 하기가 몹시 까다로웠다. 아직까지 전세계에 남아있는 폭탄 스위치들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 그 대표 스위치 중 하나인 라스푸틴이 빌런은 커녕 괴인이 되었다? 나는 광검과 대치하는 라스푸틴의 몸에서 테라 특유의 마기가 흘러나온 순간, 쾌재를 부르며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시기도 자르고, 모가지도 자르자.'
다행히 광검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검이 아닌, 전투의 여파로 파괴된 다리의 잔해를 이용해 라스푸틴을 상대하고 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지금 상황에 전화할 겨를이 있니?"
"광검이 발로 싸워도 이기니까 걱정하지마요."
나는 불안해하는 루살카를 등지고 마도기어를 눌러, 한창 루살카의 몸을 어떻게 구현해낼지 연구중일 소녀를 호출했다.
"히카리, 들려요? 부탁할게 있는데요."
[동생 자는데 무슨 일이냐?]
네가 거기서 왜 나와. 히카리를 불렀더니 히카리와 똑같은 얼굴이 나타났다. 녹색의 눈동자를 한 히메지 하야테-질풍객이.
"질풍객? 언제 한국 왔어요?"
[나야 발 닿는 곳에 가는 거지. 동생이 한국에 있는데 동생 보러 오는 것도 안 되냐? 오, 그래. 드디어 나랑 죽일 생각이 들었냐? 지금 어디야. 목 씻고 갈게.]
"어우, 징하다 정말."
중국에서의 일전 이후, 질풍객은 기회만 생기면 나를 이기려고 들었다. 샤오린도 이기지 못하는 놈이 뭘 나를 상대하려고 하나 싶었지만, 하야테는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강자를 상대로 싸우다 죽는 건 영광이라나 뭐라나.
"지금 당장은 싸워 줄 생각 없어요."
[지금 당장? 나중에는 싸워준다는 거지? 잊지 마. 나 분명히 기억했다?]
"예. 나아아아중에는 싸워줄 게요. 언젠가는."
나는 창염의 피닉스가 강하다는 걸 인정한 질풍객의 기개를 높이사 무례를 용서하기로 했다. 대신 나는 원래 내 전화를 받았어야 할 이의 행방을 물었다.
"히카리는요?"
[방금 연구 끝내고 막 잔다. 그...호문뭐시기? 그거 너한테서 듣자마자 또 밤 새워서 연구하던데.]
"좋아요."
나는 스크린을 잠시 멈추고 루살카에게 고개를 돌렸다.
"연구 끝났다고 하네요. 큐브만 있으면 당신 예전 육체로 정신 옮길 수 있을 거예요."
"진짜?!"
"그렇게 기뻐할 일이에요?"
"서방님을 기쁘게 할 방법이 다양해지잖니!"
루살카는 보드카로 칵테일을 만들던 환룡을 끌어안으며 볼을 비볐다. 환룡은 양손에 든 보드카를 벌벌 떨리는 손으로 컵에 붓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질풍객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말이야. 너 이 년아, 우리 동생 자꾸 잠 못자게 하지마. 키 안 커. 한창 자랄 나이에 자꾸 안 재울래? 얘 재미있는 연구 주제 있으면 맨날 밤 지새운다고.]
"그런 거야 당연히 알긴 아는데......."
예전이라면 이런 대화의 흐름에서 '키가 아니라 가슴, 크흠.'이라며 말실수를 했겠으나, 나는 긁어부스럼을 만들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는 질풍객의 짜증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질풍객의 검이 솔깃할만한 제안을 하나 넌지시 건넸다.
"잘 됐네요. 마침 당신한테 연락할 일이 있었거든요. 마력 여유 많아요? 모스크바까지 날아올 수 있나?"
[뭔데? 지금 모스크바야? 운디네 있는 거기? 운디네 보는 앞에서 나랑 한 판 거하게 뜨려고?]
틈만나면 나와 싸우려들어서 대화가 끊기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질풍객은 환룡과의 싸움에서 깽판을 친 이후 조금 얌전해졌다. 특히 내가 샤오린을 들먹일 때마다 꼬리를 말았다.
"샤오린 이기고 오면 붙어드린다니까. 지금은 당신 힘이 필요해서 불렀어요."
[내 힘?]
나는 당장 질풍객의 힘-정확히는 질풍객이 쌓아온 지금까지의 이미지가 필요했다. 국가를 초월해 전세계에서 블랙 리스트로 들어간 살인귀의 이미지가.
"여기 S+급 괴인이 하나 있는데 죽여도 되거든요? 모가지 따보실래요? <라스푸틴>이라고 하는 남자인데."
[라스푸틴? 러시아 히어로 아니야? 그 양반이 괴인이고 나보고 죽이라는 거냐 지금?]
"미래에서 당신 얼굴 반반하다고 후장 털어버린-"
스크린에서 질풍객의 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질풍객이 이미 모스크바로 달려오고 있을 거라 직감하고 히카리와의 전화를 끊었다.
"-사람이랑 철전지 원수지간인데. 푸흐흐."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래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니까."
"너 그런 장난치다 질풍객한테 목 날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니? 너 혼자 뒤질 거면 혼자 뒤져. 우리 서방님까지 물귀신으로 끌고들어가지 말고."
"왜 이렇게 날카롭대?"
나는 신경질적인 루살카의 반응에 다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괴인 라스푸틴에게 철저히 수세에 몰리는 광검이 있었다.
"저거 다 연기라니까요. 발리는 척 하는 거라고요. 당신한테 멋있게 보이려고."
"그래도 혹시나 다치시면 어떡해?"
"혹시 죽으면 제가 부활시켜드릴게요. 광검은 어차피 물러서지도 못해요. 임무를 마치기 전까지는."
하야테를 부른 것은 이곳에서 라스푸틴이 괴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고, 원래 계획은 당연히 광검이 라스푸틴을 제압하는 것이다.
'아무렴 광검이 라스푸틴을 죽이지는 못하니까.'
그래서 광검이 거시기를 자르고 남은 모가지를 자를 존재를 불렀다. 자기보다 강한 존재를 죽여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할 수만 있다면 물불가리지 않던 전직 빌런 '살인귀', 질풍객을.
"원탁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어디서 객사했을 양반이에요. 그렇죠?"
"나한테 묻지마렴. 가웨인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원탁에 앉혀놓은 애니까."
"그건 그렇죠."
가웨인이 질풍객의 어그로를 끌며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 이제는 사람은 안 죽이고 다녔지만, 그래도 본래의 성정이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다.
'S+급 모가지 딸 수 있다니까 바로 달려오잖아.'
"이제 저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겠네요. 루살카, 혹시 더 먹을 거 있어요?"
"......방에 있는 건 이게 다인데."
"그럼 부엌 다녀와요. 느긋하게 구경이나 합시다."
나는 베란다의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했다. 루살카는 퉁퉁 부어오른 눈가를 손으로 비비며 문으로 다가가 결계밖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아나스타샤 님?! 무사하십니까!"
"그래. 무사해. ......혹시나 위험할까봐 결계친 거니까 그렇게 밖에서 봉창 두드리지 마렴."
"예, 예!"
루살카가 밖에 모습을 보인 걸로 식솔들은 안도하며 물러섰다. 다시 방안으로 고개를 돌린 루살카는 내 눈치를 보며 바깥을 가리켰다.
"저기."
"네."
루살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청화단과 환룡단이 호수에 던져놓은 가문의 식솔들로 가득했다.
"......강에 있는 사람들 구하려고 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니?"
루살카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가솔들을 구하려고 했다. 나는 루살카가 내게 동의를 구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첨탑과 호수의 거리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그거야 가능하지만 이 거리에서 돼요?"
"뭘 그리 놀라니. 나 한 때는 근본이 물이었어. 괜히 내 방이 호수 위에 있는게 아니란다."
루살카가 손을 쥐락펴락하며 베란다 밖으로 뻗었다.
"서방님 싸우시는데 이 정도는 도와드려야지. 누구 때문에 사람들 다 강에 처박혔는데 말이야."
"......."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술잔을 들어올렸다.
"......환룡. 네가 마셨냐?"
"흡."
내 술 잔은 빈잔이었다. 나는 환룡에게 메이드 중 하나에게 빙의하여 술과 안주를 가져오라 지시했고, 환룡은 울면서 결계를 비집고 빠져나갔다.
"너 완전 애를 막다루는 구나...."
"환룡은 그래도 돼요. 그럼 구경이나 하죠."
나는 의자에 몸을 눕혔다. 루살카의 방은 호수의 전경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을만큼 전망이 좋았다. 루살카는 분전하는 라스푸틴을 내려다보며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우리 나라 히어로였는데 저렇게 되어버린 건 보기가 좀 그러네.... 자르지 않고 어떻게 하는 방법 없을까?"
"광검이 자르고 나면 여기로 바로 오기로 했어요."
"서방님! 반으로 갈라버려!"
"......."
이럴 때 보면 참 루살카도 인간이 다됐다 싶었다.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애써 삼키고, 광검과 라스푸틴의 전투에 집중했다.
* * *
광검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뭇내 아쉬워 혀를 찼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남들 보는 앞에서는 아무렇게나 집어든 쇠막대에 마력을 실어 검을 휘둘렀고, 그 공격은 괴인 DD에게 쉬이 통하지 않았다.
[어디서 칼밥 좀 먹은 놈이군! 너, 내 동료가 돼라!]
"......."
DD는 자신의 몸집보다 더한 메이스를 어깨에 걸쳤다. 자신의 몸에서 뽑아낸 어둠은 길이만 3m에 이르는 메이스로 굳어졌고, 광검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쇠꼬챙이 한 자루만 든 채 DD를 상대하고 있었다.
"쯧."
광검은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히어로였던 시절 워낙 화려하게 저질러놓았던 나머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금빛의 검=광검'이라는 인식이 판에 박혀있었다.
'궁극기를 쓰지 말 걸 그랬나.'
수보르프와 남자 대 남자로서 대화할 장소가 필요했고, 광검은 수보르프에게 자신의 의기를 드러내며 그를 제압했다. 평범한 기술도 아니고 그 이름부터 '궁극기'인 만큼, 다시 사용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흐하하! 왜 그러지? 꿀먹은 벙어리가 됐군!]
"......."
광검은 싸우면서 이야기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성정이 그러하였고, 쉴새없이 떠들기 좋아하는 촉새 때문에 전투 중에 이야기를 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불필요한 말은 싸우는 도중에 하지 않는다. 그게 광검의 지론이었고, 광검은 굳이 입으로 떠들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내 임무에만 집중하자.'
광검은 아래로 내린 한 손에 아주 작은 단검을 만들어냈다. 쇠꼬챙이로 시야를 교란하고, 대검을 피해 자신이 잘라낼 것만 잘라내면 될 일이었다.
[그쪽에서 오지 않으면 내가 가도록 하지!]
DD가 메이스를 머리 뒤로 넘기며 하늘높이 치켜들고 뛰어올랐다. 십 수 미터 가량 떠오른 DD는 하늘을 향해 머리 뒤로 넘긴 팔을 앞으로 당겼고, 매이스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광검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사라진게 아니라 주변의 마력을 집어 삼키고 있다는 것을. DD의 코어에서 뿜어져나온 검은 마력과 주변에 흩뿌려진 마력은 끊임없이 DD의 메이스로 흘렀고, 흉악한 철퇴는 어지간한 건물보다 더 거대해졌다.
[우오오옷!!]
"그래도 크기만 하고 실속은 없군."
광검은 쇠꼬챙이를 투척했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DD는 자신의 하반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쇠꼬챙이를 무릎을 들어 막았다.
[소용없-]
푸욱!
그 누구도 상처 하나 내지 못했던 DD의 방어막이 드디어 부서졌다. 쇠꼬챙이 하나에 방어막이 깨지고 검은 피부가 찢겨져 무릎에 철심이 박혔다.
[우오오오옥!]
DD는 괴성을 지르며 고통을 감내했다. 격통에 눈이 돌아갔고, 하늘을 향해 뻗은 불가시의 철퇴를 광검에게 때려박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신의 힘을 보아라!]
하늘에 태산같은 마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다리는 커녕 그 여파로 별궁까지 반파시켜버릴 마력이 DD의 손 위로 모여들었다.
"불합리하군. 이쪽은 쓰레기같은 놈의 덕분에 전성기 만도 못한 상태로 되살아났는데."
괴인이 될 이능력자의 경지, 괴인의 핵이 될 코어의 등급, 그리고 괴인으로 만들어 줄 간부의 속성과 코어의 속성이 병행하여 일치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 지는 광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S급 암속성 이능력자가 암속성 정령에게 S급 코어로 괴인이 되었으니, 그 경지는 SS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S+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정도면 상관없다."
손속에 가감을 둘 이유는 없었다. 심정같아서는 목을 베고 싶었지만, 그래도 전직 히어로로서 사람을 죽인다는 선택지를 집어들 수 없었다.
"직접 베기는 더러운데.… 평생 못쓰게 만들어주지."
가령, 싸우다가 파괴된 칼날이 영 좋지 못한 곳에 튀어 불구가 되어도 루살카와의 약혼은 파기될 것이다. 애초에 괴인이라는게 만천하에 드러났고.
'중국 놈들이 쓸 거라고 했지만 내 알 바 아니다.'
정 쓰고 싶으면 칼날로 난자가 된 거라도 가져다 쓰던가. 광검은 자신을 향해 내려찍히는 철퇴를 향해 두 손을 살포시 갖다대었다.
"내가 인생 선배로서 한 마디 하지."
신의 철퇴가 다리를 내려찍던 그 순간, 아주 약한 금빛의 불빛이 광검의 손에서 터져나왔다.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니더라."
금빛의 장검이 메이스의 핵을 찔렀다. 광검은 손목을 살짝 비틀며 웃었다.
"이렇게 망가지더라고."
푹.
신의 철퇴는 산산조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