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1부 12장 12
수보르프와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고 신부를 납치하는 방법이 무엇 있을까 고민하던 우리는 아주 기가 막힌 플랜을 마련한다.
'신부의 정신만 납치하는 건 어떤가?'
그게 가능해? 라고 묻고 싶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인재 풀이 충분했다.
먼저 영혼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정점에 있는 환룡.
환룡이 직접 루살카의 몸으로 들어가 루살카를 설득한다. 나와는 다르게 정령으로서의 과거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이상, 좀 더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분령(分靈)을 통한 분신의 제작.
인격을 나누는 것에 있어서 스페셜리스트인 <인형술사> 은유하가 있고, 그 이능력의 발현 매커니즘을 연구해낼 수 있는 히카리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분신을 집어넣을 의체의 확보.
이것은 무엇으로 할까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으나, 정말 다행히 광검에게는 적절한 소체가 하나 있었다.
X로이드.
루살카를 잊지 못해 극비리에 주문한 1:1 스케일의 피규어. 본래는 가사에 대한 지원과 모종의 용도로 사용되고는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잊지 못했던 광검은 루살카와 똑같은 체형의 X로이드를 몰래 보관하고 있었다.
한 명은 러시아의 원탁 이능력자 <운디네> 아나스타샤로서 활약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분신이든 본체이든 <루살카>로서 광검과 함께할 것이다.
아마도 X로이드인 루살카는 마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단순 기계 인형에 불과하겠지만, 적어도 광검과 정신적 교감을 이루는 쪽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파편화된 조건들을 하나로 아울러 현실에 실현시키는 게 가능한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큐브.
나는 큐브를 통해 <인형술사>로서의 능력을 복제하여 루살카에게 깃들게 할 생각이었다.
* * *
"좋네. 실제로 가능하다면 말이야."
내 계획을 전해들은 루살카는 진지한 얼굴로 분령을 통한 분신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계의 몸이라서 조금 불편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연구를 하다보면 생체인형도 만들 수 있겠죠?"
"누가?"
"히메지 히카리. 우리에게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프로페서가 있거든요."
시간과 예산만 있다면 뭐든지 만들어주는 만물박사다. 신화에까지 이르면 단독으로 인류 문명을 한 단계 진일보시켜, 인류가 외우주로 나아가는 기반까지 마련하게 될 정도였다.
"당신이 아나스타샤의 삶과 루살카의 삶을 둘 다 가지고 싶다면, 둘 다 가지게 해드릴게요. 이름하야 '호문클루스'."
"......좋아. 거기까지는 알겠어. 큐브를 통해 그 은유하라는 인간의 이능력을 복제하고, 그걸 바탕으로 내가 동시에 세상에 둘이 있게 하는 걸."
정확히는 인격을 둘로 나누는 형국이 될테지만, 어느쪽도 루살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은유하가 일곱번째 인형에 망나니 기질을 봉인해둔 것처럼, 루살카도 자신의 또다른 인격에 끓어넘치는 성욕을 몰아넣으면 지금같은 문제는 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궁극적인 문제 해결책이 아니야. 나는 계속 약혼자가 생길 거고, 아빠는 나를 계속 결혼시키려 하겠지."
"예. 그래서 라스푸틴의 성기를 잘라낼 거예요."
"이야기가 갑자기 왜 그렇게 돼?"
루살카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환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환룡은 그 사이에 알아서 하라며 루살카의 몸에서 빠져나와 침대와 하나가 되었다.
"내 약혼자들을 다 고자로 만들 셈이야?"
"아뇨. 라스푸틴 만. 애꿎은 귀족 가문의 명맥을 끊을 수야 없죠. 라스푸틴만 제거할 거예요."
나는 라스푸틴이 가진 이능력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라스푸틴의 거근도 거근이었지만, 몸을 허용하는 즉시 라스푸틴만을 생각하는 노예가 된다는 것에 루살카는 진심으로 라스푸틴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라버릴까?"
"그러다 시선만으로도 임신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큥큥 당하고 싶어요?"
"......그럼 누가 자를 거야? 너도 일단 인간형은 여자잖아."
"그렇긴 하죠."
누가 미연시 아니랄까봐 정령은 일단 다 여성 의 몸이었다. 고로 우리가 자를 수 없으니, 나는 라스푸틴보다 더 강한 남자를 데려왔다.
"광검이 자를 거예요."
"서방님이...?"
"예. 자기 여자를 건드린 죄를 자신이 직접 집행해야 한다다 뭐라나."
실제로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내 너스레에 루살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방님도 참...."
"그리고 광검이 남자 거시기를 자르는 건 이걸로 끝. 라스푸틴만 희생시키고, 곧장 당신과 결혼시킬 생각입니다."
"뭐?"
광검을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내 말에 루살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광검 살아있다고 광고할 거야?"
"아뇨. 어차피 얼굴도 젊어졌겠다, 광검인 거 아는 사람 없을 거 아녜요. 광검 젊은 시절에는 쩌리였으니까."
S급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는 루살카를 잃고 액면가가 상당히 늙었던 시절이다. 심지어 자기관리도 제대로 못해 수염을 기르고 다니던 순간이니, 청년 허윤환을 알아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광검을 새로운 존재로 둔갑시킬 거예요. 사람들은 광검의 트레이드마크를 빛의 검을 난사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광검은 검술 전문가잖아요?"
"우리 서방님 칼솜씨가 좀 대단하긴 하지."
"......예. 그래서 검기로 SS급에 이른 이능력자로 둔갑시킬 거예요.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부산 일대에서 숨어살고 있다가, 당신과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는 걸로. 됐죠?"
"......첫 만남은 속초 바닷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좀."
대외적인 선전에 굳이 오마케에서의 진실을 섞으려는 루살카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렇게 허윤환이 좋아요? 없고 못살만큼?"
"......한 번, 아니 두 번이나 포기했던 걸 다시 얻게 된 걸. 나는 서방님 놓치지 않을 거야. 설령.... 너와 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그런 비유는 굳이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의 의지는 잘 알았으니까, 거기까지는 오케이."
아직까지 바깥의 소란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블라디미르 가문의 일원들은 부리나케 첨탑으로 올라와 방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루살카가 다시 보강해 둔 결계 때문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공주님!!"
"......엄청 미안한 걸."
루살카는 결계를 두드리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메이드들에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내가 광검을 소개해주는 식으로 수보르프에게 인계해야하니까."
"괴인 피닉스가 말이지...."
반드시 우리를 처음 목격하는 자는 '수보르프'가 되어야 한다는 내 고집 때문에, 루살카는 한 번 결계가 깨졌음에도 다시 결계로 주변을 봉쇄했다.
"광검도 마냥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걸 수보르프도 알아야죠. 남의 조직 SS급을 사위로 들이게 됐는데, 그럼 앞으로 우리가 블라디미르 가문을 홀대하겠어요? 콩고물 하나라도 더 떨어지겠죠."
"너 우리 아빠랑 되게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거 아니...?"
"수보르프랑요?"
"응. 우리 아빠가 나랑 서방님 혼인시킨다고 마음 먹었을 때 하던 얘기랑 거의 비슷해."
"......뭐요?"
루살카는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나는 멍청히 반문했고, 루살카는 무안한 듯 고개를 돌리며 수보르프의 계획을 내게 읊었다.
"그러니까 줄리엣을 연기하기로 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셈 치고?"
"다들 납득할만한 과정이 필요하잖니. ......네 계획도 나쁜 건 아닌데, 누가 빌런 아니랄까봐 엄청 과격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음...."
정보의 차이에서 온 혼선이었나보다. 어찌됐든 수보르프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번 작전은 큰 문제 없이 잘 마무리 될 수 있었다.
"라스푸틴만 잘라가면 되겠네요."
"하는 김에 우리 아빠도 설득해줘. 나 그냥 바로 서방님이랑 결혼식하게. 붉은 광장에서 서방님한테 안겨서 퍼레이드 하고 싶어."
"......결혼식은 광화문 광장에서 하려고 계획했는데."
나와 루살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내가 러시아 인인데 왜 한국에서 결혼식을 해?"
"정령이 국적 따지는 게 어디있어요?"
"너는 한국인이랍시고 신분증까지 만들었잖아."
"그거야 활동의 편의.... 쯧, 좋아요. 그건 인정."
나는 급히 대화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래도 첫 결혼식인데 남편 나라에서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너 엄청 가부장적이다? 그리고 상황을 생각해. 러시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막말로 지금 러시아의 공주님을 빌런들이 훔쳐가려고 하는 건데, 그럼 이 나라 사람들 생각이 어떻겠어?"
"도둑놈의 나라가 되겠죠. 끙. 좋아요. 그것도 인정."
나는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이왕 결혼하는 거, 딸아이가 있는 나라에서 결혼하는 건 어때요?"
"......."
루살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들 부부의 역린은 당연히 딸인 석하랑이었고, 루살카 또한 딸과 직접 얼굴을 맞대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딸이랑 화해해야죠. 가족석에는 앉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설마 하객석에도 못 앉게 할 거예요? 당신들이 석하랑 얼굴 보기 무섭다고?"
"......"
루살카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나는 이전보다는 거부감이 사라진 루살카의 모습에 더이상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불행히 여기에는 나 말고도 다른 입이 하나 더 있었다.
"언니 딸 예쁘더라. 근데 진짜 언니 딸이라서 그런지 가슴 절벽, 히이잉."
루살카는 환룡의 볼을 손으로 붙잡고 늘어졌다.
"얘가 못하는 말이 없네. 서방님은 내 가슴 좋아하니까 됐어."
"X로이드 흉부 사이즈 개조할 수 있는데."
"그건 한다고 해도 서방님 허락 받고 할 거야. 이 몸이 누구건데?"
"허윤환 거예요?"
"당연하지."
루살카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며 나를 비웃었다. 부부의 사랑을 과시할 때마다 빈약한 가슴과 딸에 대한 방폐가 자꾸만 마음에 걸려 안타까울 뿐이었다.
"알았어요. 재회의 사랑을 또 나누든 아니면 허니문까지 버텨보든 마음대로 하세요. 이번처럼 사고 치지만 말고."
"......얘."
루살카는 눈을 좌우로 굴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인도 갔다가 개천광까지 각성시키고 나면, 한 가지 부탁해도 돼?"
"뭔데요?"
나는 짐짓 예상이 갔지만 굳이 물었다. 루살카도 내가 되물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서방님이랑 얘기해서, 서방님도 괜찮다고 한다면 하랑이랑 한 번 만나고 싶어."
루살카가 드디어 용기를 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예요?"
"......나, 인간이 되고 나서 한 번도 아빠랑 싸워 본 적이 없었어."
루살카는 고개를 떨군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본심을 꺼내기 시작했다.
"항상 나 먼저 생각해주고 배려해주고 아껴줬거든. ...아마도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런 거겠지? 나도 처음 느껴보는 사랑이라 이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어."
루살카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싸우고 나서 보니까.... 아빠가 엄청 밉고.... 한편으로는 나 생각해줘서 그런 거라고 나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루살카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내 딸은 한 번도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을 거 아냐...?"
"혼자컸죠."
나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도 알겠지만 석하랑은 12년 가까이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양친이 있는 것도 모르고. 광검이 2012년에 거두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딸로서 교감하지는 않았죠. 후원자였을 뿐."
"......그래. 우리는 가족이 되어주지 못했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더 하랑이랑 가깝지. ......그치, 피닉스 씨?"
"......쯧."
나는 환룡을 향해 혀를 찼고, 환룡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루살카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아마 어머니인 나보다 네가 더 하랑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진짜 미래의 남편님이니까 그렇겠지? 사위분?"
"......지금 저는 당신 사위 아니니까, 괜히 이상하게 부르지 마요."
"그래도 전직 사위로서, 장인장모랑 아내랑 화해할 수 있게 자리 정도는 마련해주지 않을래?"
"......."
원작에서는 그들이 직접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석하랑이 그들을 용서할 때에는 이미 고인이 되고 없어진 자들이었으니.
하지만 지금에서라도 그들은 먼저 손을 내밀고자 용기를 내었다. 나는 괜시리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창가로 몸을 돌렸다.
"......이 놈의 아저씨들은 왜 이렇게 오는게 늦어!"
빨리 수보르프가 와서 다음 계획을 진행해야 하는데, 왜 광검은 아직까지도 궁극기를 해제하지 않는 걸까. 이러다가 라스푸틴이 오기라도 한다면-
".....!!"
이질적인 마력의 기운이 내 피부를 찔렀다. 루살카와 환룡 또한 결계를 타고 넘어오는 마력에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건......!"
"아지다하카의...?"
본궁에서 마암룡 아지다하카의 마력이 느껴졌다. 나는 창가로 달려가 두 눈에 마력을 둘러 시야를 강화했다.
"이런 미친."
그리고 나는 보고 말았다.
아지다하카가 만든 S급 암속성 괴인을.
그것도 S급 이능력자를 기반으로 한.
"라스푸틴을 괴인으로 만들었다고?"
"그럼 죽이는 데 아무 지장이 없네?"
진심으로 아지다하카에게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