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1부 12장 11
괴인 DD가 인간의 탈을 벗어던졌다. 심장에 박힌 코어에서 막대한 마력이 끓어넘치기 시작했고, DD의 전신은 검고 매끄러운 가죽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꾸륵! 꾸륵!
보는 것 만으로도 탄력이 느껴지는 검은 가죽에 화권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금발벽안의 백인은 전신의 피부를 라택스처럼 뒤덮었고, 하얀 눈동자와 가지런한 치열이 흰불꽃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신께서는 내게 이런 은총을 내리셨지.]
괴인 DD는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심장이 있어야할 그의 가슴에는 피부처럼 새까만 코어 하나가 마력을 펌핑하고 있었다.
"검은색…?! S급 코어인가?!"
[그래! 내가 신께 바친 물건이다. 흐흐흐. 신은 이 코어로 나를 신인류로 만들어주셨어. 하아.]
DD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끌어안았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만큼 거대해진 괴인이 허리를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에 화권은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신께서는 말씀하셨지. S급 이능력자. S급 코어. 그리고 나와 신의 속성까지. 삼위일체를 이루는 이 완벽한 조화속에서 태어난 나는 라스푸틴이라는 이명을 버리고, 진정한 어둠의 화신이자 밤의 여신을 수호하는 <짙은 어둠>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둠속에서 불빛에 비친 붉은 혀가 날름거렸다. 화권은 진심으로 자신의 불꽃을 꺼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불을 꺼뜨리는 순간 자신은 어둠속에 파묻혀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걸 차라리 나만 봐서 다행이야."
[무슨 말이지?]
"다른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공공외설죄로 신고당했을 거란 말이다!"
화권은 그의 고간에서 돋아난 세번째 다리에 역겨움을 금치 못했다. 괴인으로 신체가 커지며 그곳 또한 커졌는지, DD의 아랫도리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종마의 그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래! 큰 건 알겠어! 알겠는데!!"
화권은 목젖까지 차오른 쌍욕을 간신히 삼켰다
"왜 더럽게 발기하고 지랄이야!!"
가 마력과 함께 사자후를 터뜨렸다. 앞으로 내민 발보다 더 앞으로 나와있는 DD의 성기는 하필이면 그 각도가 더럽게도 화권의 정면에 놓여있었고, 휘어진 각도는 얼굴을 향해있었다.
[흐흐…! 히어로란 놈이…! 감히 이걸 두고 더럽다고 했겠다!!]
DD가 격분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화권이 마력까지 실어 내지른 소리보다 더 강한 음파는 듣는 것 만으로도 고막을 찢을 정도였다.
"이런…!"
하필이면 역린을 건드렸나 싶어 화권은 속으로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것에 대해 더럽다고 욕을 했으니-
[누구는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아느냐?! 자라다보니 키와 함께 커진 걸 나보고 어쩌라고!!]
"......."
갑작스레 내뱉는 DD의 울분에 화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뭔진 몰라도 화를 내면서 발로 땅은 구르지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보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징그럽다고! 내가 17살 이후로 바지를 한 번도 입지 못했어!!]
한 번 뚜껑이 열린 DD의 분노는 도저히 그칠 줄 몰랐다.
[살다보면 그냥 지나가다가도 발기할 수 있지! 그걸가지고 다들 쳐다보면서 수근대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나! 어! 여자랑 할 때도 말이야, 나는 내가 하는 걸 제대로 즐기지도 못해! 혹시나 안이 파열될까봐! 귀두만 밀어넣고 동정마냥 왔다갔다하는 슬픔을 너는 모르겠지!]
"......."
화권은 싸우다 말고 듣게된 DD의 고충에 무어라 답할 방법이 없었다. 이미 DD는 자신만의 분노를 토해내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께서는 편견없이 나를 봐주셨다! 나의 이능과 힘만을 보시며 보듬어주셨어! 이 세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내 영혼을 직시해주신 거다! 그렇기에 나는 그분에게 내 영혼을 바친 것이다! 라스푸틴은 죽었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건 마암의 아래에 있는 사도 중의 한 명 뿐!]
"......어쨌든 다크 레기온의 하수인이라는 거지."
화권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미 상대는 말이 통하지 않는 괴인이었으며, 죽여도 다시 부활이 가능한 존재였다.
"마암룡 아지다하카. 맞지?"
[이 놈! 감히 그분의 존함을 입에 올리다니!]
DD가 주먹을 아래로 내리쳤다. 단순한 무력 시위에도 화권의 마력은 크게 흔들렸다.
[흐흐흐. 하지만 그 배짱, 마음에 들어. 나와 함께 그분을 모실 사도가 되기에 충분한 몸과 마음이야. 특히…얼굴이 잘 생겼지. 딱 그분이 좋아하실만한 상이야.]
DD는 아주 천천히 화권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을 밟는 발자국 소리는 화권의 목을 옥죄듯 아주 천천히 울려퍼졌다.
"흐랴아아앗!"
화권은 먼저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오른주먹에 온 마력을 집중시켜 내지른 훅은 DD의 심장부를 정확히 찔렀다.
"?!"
합금판을 때리는 듯한 감각에 화권은 소름이 돋았으나,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뒤로 물러섰다. DD는 행동이 굼떠서 자신의 약점을 노출한 게 아니었다.
부웅-!
화권을 끌어안으려던 DD의 팔은 허공을 갈랐다. 조금만 늦었어도 꼼짝없이 베어 허그를 당할뻔한 위기에 화권은 식은땀을 흘리며 거리를 벌렸다
[흐흐. 한 번은 도망쳤지만 과연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DD는 미련한 곰처럼 화권을 덮쳤다. 2.5m 거인이 자꾸만 허그를 하려는 것에 화권은 그 어느때보다 집중하여 틈을 찾아 피하고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도망을 치면서도 틈틈이 DD에게 백염을 머금은 주먹을 때려넣었다.
[쥐새끼마냥 잘도 도망가는 군. 하지만 이런 걸 두고 독안에 든 쥐라고 하지?]
DD는 수 차례 공격을 허용했음에도 활짝 웃으며 몸에 붙은 잔불씨를 털어냈다. 같은 S급임에도 불구하고 DD는 화권의 공격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다. 이곳은 나의 결계 안. 내 침대 위나 다름없다는 말이지. 그리고….]
수차례 화권은 놓친 DD는 자신의 코어 바로 옆에서 거세게 타오르는 백염을 털어버린 뒤, 한쪽발을 무릎까지 들어올리며 바닥을 크게 굴렀다.
[도망칠 곳은 이제 없다!!]
쿵!
DD가 발을 구르기가 무섭게 화권의 자세가 무너졌다. 안 그래도 비좁았던 응접실이 점점더 좁아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DD는 자신의 결계를 점점 축소하기 시작했다. 화권은 등을 떠미는 어둠의 결계에 연속으로 주먹질을 하며 결계를 부수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후후…. 소용없다니까…. 네 힘으로는 안 돼.]
결계가 계속 줄어들어, 결국 화권은 DD의 두 걸음 앞에 놓이게 되었다. 도망칠 수 없는 라커룸안에 갇힌 것 마냥 숨이 턱 막혔다.
[그럼 지금부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
화권은 자신의 배에 닿을락 말락 하는 검고 굵은 막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상체를 숙인 DD의 거친 숨결과 손길이 뜨거운 무언가와 함께 자신ㅈ의 몸에 닿는 순간, 온몸의 털이 쭈볏 선 화권은 본능적으로 전신의 마력을 방출했다.
"으아아아악!!"
3평 될까말까할 정도로 좁아진 직육면체의 짙고 어두운 결계 속에서 화권과 DD의 힘겨운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 * *
수보르프가 대자로 엎어진 순간, 광검은 검을 내렸다. 수보르프의 마력은 한계까지 고갈되어 기력이 다 사라졌고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하아, 하아."
수보르프는 격한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아 생전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금빛의 하늘이었으나, 그 금빛의 주인은 결코 곱게 보이지 못했다.
"SS급이 되면 외형도 젊어지는 건가?"
"......전성기의 모습을 되찾은 것 뿐이다."
광검의 겉모습은 많아봐야 20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광검은 수보르프보다 나이가 어리기는 했으나, 상대에게 예의를 차리거나 존대를 하는 성정은 아니었다.
"내가 누군지 안 이상 내숭 떨 필요는 없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말을 높였을 뿐. 수보르프가 자신의 정체를 알자마자 광검은 바로 말을 놓아버렸다. 설령 그 상대가 예비 장인 어른이라고 할 지라도.
"안 그런가, 원수? 백두산에서 한 번 붙고, 서울에서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이군. 이렇게 다시 만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허."
수보르프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낌새는 눈치챘지만 그 옛날부터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어이가 없군. 그럼 평양에서는 왜 그 사단을 낸 거지? 막을 수 있었지 않나?"
15년도 전에 SS급을 이미 달성했다면 광검은 왜 평양에서 그 사단이 나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수보르프는 러시아 동남부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던 지옥도를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힘이 폭주했었다. 자세하게는 말할 수 없어."
"알려줄 생각도 없겠지. 크흐."
수보르프는 아주 약간 회복된 마력을 짜내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사납고 성난 곰같던 수보르프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겨우 광검과 마주 설 수 있었다.
"왜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왜 죽음을 가장하고 잠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보르프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주먹 근처에 선명하게 반짝이던 마력은 이미 보일 듯 말 듯 희미해져있었다.
"내 딸을 건드린게 설령 SS급 히어로라도, 나는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
상대가 자신보다 아무리 강자라고 할지라도 딸을 건드린 남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특히 그게 딸보다 무려 15살이나 연상인 남자라면 더더욱.
"......동감한다."
역설적으로 그 감정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광검 본인이었다.
자신도 석하랑이라는 딸이 있고, 언젠가 딸은 미래에서 금발의 남자와 백년 가약을 맺고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수보르프와 광검의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
수보르프는 딸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었고, 광검은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광검은 수보르프가 자신과 루살카의 사이를 막아서는 것이 꼭 석하랑을 방폐한 과거의 업보가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루살카를 데려가겠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군. 너는 네 행위가 어떤 결과를 일으킬 지 두렵지 않나?"
차갑게 가라앉은 광검의 눈동자는 오히려 무서웠다. 수보르프가 기억하기에 광검은 분명 나라를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오욕까지 뒤집어 썼던 히어로였다.
그런 광검이 자신의 딸을 너무나도 사랑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명예를 버리고 빌런으로 전락하겠다는 것이 안타깝고 화가났다.
"도대체 무엇이 너를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만들었다는 거냐?"
"......나는 20년을 죽지 못해 살아왔다."
광검이 손에 빛의 검 한 자루를 쥐고 수보르프에게 겨눴다.
"그런데 이제는 살아갈 이유가 두 가지나 생겨버렸어. 그 중 하나가 루살카다."
"......여기서 다른 하나를 굳이 물을 필요는 없겠지."
수보르프는 허탈한 미소로 주먹을 내렸다.
"그래. 어디 한 번 납치해볼 거라면 납치해봐라. 그게 아나스타샤가 선택한 길이라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미안하군."
광검은 마력을 갈무리하며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빛의 검 한 자루가 금빛의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고, 광검은 열쇠로 문을 열 듯 궁극기를 해제했다.
"하지만 두 가지 오해하는 게 있다. 나는 오늘 루살카를 여기서 보쌈하려고 온 게 아니야."
"......그럼?"
"루살카와 감히 약혼을 맺은 라스푸틴이라는 놈을 베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 무슨...!"
수보르프는 엄청난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딸아이를 데려가는 게 아니라 라스푸틴을 죽이기 위해 왔다고?! 그 무슨 미친 소리냐?!"
"설명할 시간은 없어. 나는 이미 히어로이기를 포기한 자다. 미래에 빌런이 될 자를 베는 것 정도야 각오한 바."
광검은 표정을 굳히면서도 스스로 자조했다. 살아있던 시절에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극단적인 수단은 분명 괴인이 되며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버린 영향이리라.
"라스푸틴이 미래의 빌런이라니, 그 무슨-"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 일단 지금은 이렇게 하지."
광검이 자리를 박차고 수보르프를 향해 빛처럼 달렸다. 수보르프는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광검에게 뒤를 잡혔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다. 조금 아프기야 하겠지만."
"뭐?! 네, 네 놈-"
퍼--억!
광검이 검면을 세워 수보르프의 뒷목을 쳤다. 수보르프는 끝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복잡한 얼굴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툭.
광검은 다리 한 가운데에 쓰러진 수보르프의 목덜미를 잡고 난간으로 향했다.
"그래도 역시 루살카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혼약을 맺은 건 나도 참을 수 없어서 말이야."
광검은 수보르프를 호수 한가운데로 집어던졌다. 이미 청화단과 환룡단에 의해 호수의 식솔들을 구조하던 이들은 수보르프가 호수에 던져진 것에 기함하며 그를 구출하려 들었다.
"......."
광검은 고개를 돌려 본궁을 향해 달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은 마스크가 들려있었고, 광검은 마스크를 쓴 채 정면으로 달려나갔다.
♩♬
하늘에는 푸른 카나리아가 선행하며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광검이 성기를 베어야 할 타깃, 라스푸틴이 있는 본궁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