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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64화 (264/1,497)

〈 264화 〉1부 12장 10

A급 이능력자와 SS급 이능력자.

그 차이는 개미와 인간의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수보르프가 휘두르는 주먹은 단 한 번도 광검을 때리지 못했다.

"이 쓰레기 자식!"

그래서 수보르프는 자신의 울분을 입과 주먹에 담아 내뱉었다. 비록 자신의 주먹은 광검에게 닿지 않을지 몰라도, 자신의 목소리는 광검의 귀에 쏙쏙들이 박혔다.

"......."

광검은 양손에 쥔 검을 각각 휘두르며 철저히 방어에 집중했다. 수보르프가 주먹을 휘두르면 검면을 세워 주먹을 막았고, 다리로 걷어차면 몸을 크게 뛰어 피했다.

"네 놈!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 무슨 짓을 하려고!"

"......."

광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쓰레기처럼 여기던 피닉스에게 자신이 분노하던 모습이, 자신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수보르프의 모습과 훤히 겹쳐보였다.

'내가 그 쓰레기와 같은 짓을 저지른 거나 다름없군.'

광검은 죽지 않기 위해 철저히 피하고 방어하는데 집중했고, 양심에 찔려 차마 공격을 하지 못했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냐, 이 썩을 놈!"

당연히 수보르프는 광검이 한껏 봐주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어디가서 빠지지 않는 A급 이능력자였으나, 상대는 S급을 넘어서 그 위의 경지가 아닐까 의심되는 강자였다.

카앙!

검과 주먹이 맞부딪혔다. 수보르프의 철권은 금빛의 검날에 깎여나갔고, 광검의 검은 흔들림없이 굳건했다.

"어째서!"

수보르프는 상대와 합을 주고 받을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검날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마음에는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수보르프는 그의 성정을 깨달았다.

"어째서 자네같은 자가 이런 짓을!"

눈앞의 남자는 결코 테러를 일으킬만한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광검은 블라디미르 가문의 별궁을 습격해 가솔들을 기절시키고, 이제는 수보르프를 1:1로 막아서 시간을 벌고 있었다.

원탁의 히어로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그가 어째서 이런 테러에 동참하게 되었는가.

"저는."

그제서야 광검이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입니다."

"허."

수보르프의 주먹이 아래로 떨어졌다. 서로가 없어서 죽고 못사는 사람은 딸 뿐만이 아니었었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역만리 땅으로 온 건가? 그것도 세계 최악의 범죄자라 불리우는 자의 도움까지 받으며?"

"......루살카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없어...."

빌런은 타도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던 수보르프로서는 사랑에 눈이 멀어 빌런과 손을 잡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내 딸을 사랑한다는 말이렸다...."

딸이 처음으로 속마음을 표현한 남자이며, 남자 또한 딸을 사랑하는 존재였다. 수보르프는 딸을 맡길 수 있는 강한 남자가 사위가 되기를 원했고, 눈앞의 남자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지만 조건은 분명 만족하고 있었다.

"자네는 분명 나를 충분히 이겨낼테니."

1:1로 수보르프를 꺾는 것. 그게 수보르프가 아나스타샤의 남편감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저 방어만 하는 것도 본심으로 싸우면 내가 일격에 죽을까봐 힘조절을 하는 게야."

"......."

광검은 부정하지 않았다. 광검이 마음만 먹으면 A급은 커녕 S급도 일격에 목을 날릴 수 있었고, 수보르프도 광검의 힘을 직접 몸으로 체득했다.

"강자의 여유인가, 아니면 장인어른이랍시고 봐주는 건가."

"......당신이 다치거나 하면 루살카가 슬퍼할테니. 그 뿐입니다."

"허. 말은 참 번지르르 하군."

수보르프는 광검에게 주먹을 겨누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좋다! 그렇다면 어디 내게서 딸을 빼앗아가봐라! 네가 정말로 내 딸을 사랑한다면!"

수보르프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나를 죽이고 넘어가라!"

"......허락할 생각이 없으신가."

자신도 마찬가지다. 석하랑에게 갑자기 남자가 생긴다면, 곱게는 보내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나."

광검이 두 손을 내렸다. 수보르프는 갑자기 방어조차 하지않고 피하지도 않는 광검의 행동에 이상을 느끼고 마력을 줄였으나, 이미 그의 주먹은 광검의 어깨를 내리찍고 있었다.

카---앙!!

수보르프의 철권은 광검의 몸을 살짝 밀어낼 뿐이었다. 전력을 담은 공격이 전신에 두르고 있는 마력의 기막조차 뚫어내지 못했다는 것에 수보르프는 충격을 받았다.

"네놈.... 도대체?"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고.... 흠흠."

청년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청년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던 수보르프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루살카를 만나지 않고는-"

"광검이냐?"

"......."

광검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수보르프는 그 찰나의 기척만으로도 광검의 정체를 한 눈에 깨달았다.

"광검이지, 광검이야, 그래. 내가 잊을 리가 없지. 평양이 그 지경이 되기 전에 서울에서 네 놈과 만났던 그 때의 일을 어찌 잊겠는가! 내게 처음으로 패배의 굴욕을 안겨줬던 그 날의 기억을 잊어버리다니!"

".......광검은 죽었습니다."

광검은 존댓말까지 하며 발뺌했다. 하지만 광검은 자신이 광검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정하지 않았고, 수보르프는 이제는 명백히 기억에 떠오른 청년 시절의 광검과 눈앞의 청년을 대조했다.

지금의 모습이 더 젊어보였지만, 분명 이목구비는 명실상부한 광검이었다.

"네 이 노오옴!"

수보르프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내 딸과 열 다섯은 차이가 나면서도 딸을 건드린 것이냐아아아!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아아!"

"......."

수보르프가 더 많기는 했지만, 둘의 나이 차는 한 자리수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아나스타샤는 진작에 죽었고 그 안에 정령 루살카가 들어갔다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광검은 그냥 쓰레기가 되기로 했다.

"......거 사랑하는 데 나이차가 중요한가?"

"이 개같은 새끼!"

광검이 정체를 드러낸 것을 시작으로, 수보르프는 성난 불곰처럼 광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 * *

운디네를 제압했다.

환룡은 아나스타샤의 몸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루살카는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이제 수보르프가 오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나스타샤(환룡) 또한 자신의 몸을 가다듬으며 연기할 준비를 마쳤다.

"우리 계획이 뭐였지?"

"아까는 계획 따위 신경쓰지 말라며."

"목표를 하나 달성했으니 다음 목표를 찾자는 거다. 라스푸틴의 성기를 잘라내야 하는 건데...."

"굳이 그럴 필요 있어?"

환룡은 괜히 라스푸틴을 건드리기를 두려워했다. 나 또한 긁어부스럼은 만들고 싶지 않았으나, 라스푸틴은 분명 위험한 존재임에 틀림은 없었다.

"주군."

봉효 백청영이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언제 왔어요?"

"아래층에서 결계가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지금 주변 상황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백청영은 환룡단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내게 전했다.

"특사단은 계속 수보르프의 집무실에서 대기. 이건 오케이. 괜히 얘들이 움직였다가는 오해를 받으니까."

설령 손절을 해야할 타이밍이 오더라도, 나나 광검은 특사단의 비행기에 몰래 탄 불청객이 되어야 했다. 아무리 우리가 공주를 납치하기 위해 왔다고 하더라도, 전쟁까지 일으키는 건 사양이었다.

"그럼 광검이랑 수보르프는?"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아, 광검이 궁극기 쓴 거 예요. ......왜 썼대?"

호수의 잠자는 공주를 키스로 깨워야할 남편이 예비 장인 어른과 궁극기로 장소까지 바꿔가며 1:1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걸까.

"어느 쪽이든 석하랑이랑 좀 해결을 봤으면 좋겠는데."

"석하랑인가 하는 걔는 혼자서도 싱크로를 할 수 있다고 했지."

"네. 반인반령의 힘이죠."

"그럼 루 언니는 안 돼?"

환룡의 물음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루살카가 본래의 수속성 정령으로서의 힘을 되찾는다? 상당히 흥미가 동하는 이야깃거리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하나는 루살카가 아나스타샤로서 석하랑과 싱크로하는 것. 그럼 힘을 공유하게 되겠죠?"

엄마와 딸의 관계이니 가족으로서의 사랑으로 신화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거야 둘의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을 때의 이야기이니 차치.

"또 하나는...큐브를 쓰는 거? 솔직히 이쪽은 가망이 없어요. 큐브라는 건 결국에는 이계신의 권능이니까. 루살카가 가진 정령의 힘은 모두 석하랑에게 있어요."

"아쉽네...."

환룡 또한 아나스타샤의 몸을 살피며 아쉬워했다.

"얘 S급인 건 자체적인 재능인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가 S급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환룡에게 다가가 손목을 붙잡았다. 살짝만 훑었는데도 몸 안에 충만한 수속성 마력의 잠재력은 과연 라스푸틴 이전의 원탁으로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존재가 확실했다.

"봉효. 라스푸틴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그게, 소실되었습니다."

"뭐요?"

소란을 정리해야할 장본인이 소실되었다니,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화권 이승형의 반응도 사라졌습니다."

"......둘이 혹시 마지막에 같이 있었다거나?"

"예. 보고에 따르면 그러합니다. 저희가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의 정보라 그 사이에는 어떻게 됐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럼 됐어요. 라스푸틴이 빌런이 되었어도 여자만 노리는 범죄자니까. 화권은 별 문제 없을 거예요."

애초에 심장에 박아둔 창염 덕분에 잠재력 하나만큼은 이미 하늘을 뚫고 있는 놈이다. 계기만 적절히 마련된다면 내가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언젠가 SS급에 이를 수도 있는 재능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서울 돌아가면 진짜 키워봐야겠네."

"누구를? 나?"

"아니. <화권>. 푸른 깃털은 영 써먹을 게 못 되는 것 같아서."

히로인들이 나를 생각하다가 폭주하여 사고를 치는 건 귀엽게 봐줄 수 있다. 하지만 히로인도 아닌 시커먼 남정네가 나를 엿먹이려고 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봉효. 사재가 찾았다고 했죠? 사재에게 연락해서 철표의 코어를 가져오라고 해요."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폐기요."

아무래도 푸른 깃털을 하나 둘 정리할 때가 되었나보다.

청화단에 들어가기에는 전과가 너무 악질이여서 사면을 받을 수 없는 놈들을 위주로 데려왔고, 그들은 분명히 히어로의 탈을 쓴 빌런들이었다.

"라스푸틴도 마찬가지고."

"빌런이라고 했지. S급이야?"

"아니. SS급. ......5년 뒤의 이야기야."

암속성의로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라스푸틴은 원작에서 SS급에 이르렀고, 그 반동으로 평범한 여성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자신의 성을 받아주기 위한 여자를 찾다 결국 빌런이 되었다. 제작사 측에서 구현은 해두지 않았지만, 만약 히로인들을 강제로 취하는 일이 있었다면 제작사는 진작에 간판을 내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힘을 숨기고 있거나 그러면 어쩔 거야?"

"라스푸틴이요? 좆을 숨기고 있는게 아니고?"

"......불결해."

"진짠데. 라스푸틴은 SS급이 되면 더 커진다고요."

"히익."

환룡이 고개를 숙여 아나스타샤의 몸을 슬쩍 살폈다.

"역시 루 언니 데리고 빨리 도망가자."

"도망도 도망이지만 라스푸틴 거기 잘라내야 하는데...."

라스푸틴과 이승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타닥, 타닥.

내 몸 주변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나는 정전기처럼 일어나는 기묘한 감각에 몸이 절로 떨렸다.

"으으, 뭔가 이상한 기분인데...."

"화권 죽거나 하면 난감해지지 않아?"

"죽기야 하겠냐만, 역시 찝찝하기는 하죠."

라스푸틴과 이승형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S급으로서 싸운다면 이승형의 승리가 되겠지만, 둘 중 한 명이라도 SS급에 오르면 전황은 금방 기울게 될 것이다.

"쯧. 화염술사가 지는 꼴은 못 보죠."

나는 손을 뻗어 불꽃을 빚어내 푸른 카나리아를 만들었다. 창염의 인격이 복제된 미니 피닉스가 내 검지 위에 앉아 입을 열었다.

- 진화시키는 거시야.

"제 마음대로 퇴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래도 보험을 들어두는 게 낫겠죠?"

라스푸틴보다는 이승형이 훨씬 낫다. 나는 미니 피닉스에게 이승형을 찾아 깃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몸을 돌렸다.

"너...."

환룡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 이승형이야?"

"미쳤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퉁명스러운 말에 나도 환룡도 봉효도 놀랐다.

"......난 이승형이 아니야."

미국에서 넘어오는 금발 서양남이라면 모를까, 나는 적어도 이승형은 아니었다.

"난 피닉스다."

"......알았어, 알았어."

환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서서히 들어올려진 눈동자는 루살카 특유의 물빛을 담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나를 어쩔 생각이니?"

"드디어 얘기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네요?"

나는 루살카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납치당할 생각 없어."

"하지만 지금의 가족과 트러블이 일어나기는 싫죠? 그럼 좋은 방법이 있어요."

나는 마도기어에서 홀로그램으로 회심의 물건을 꺼냈다. 루살카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일단 당신이 아나스타샤로서도, 루살카로서도 양립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한 번 시도해보실래요?"

광검의 20년 순정이 이렇게 빛을 발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광검과의 사랑은 급한대로 이걸로 해결하라 이 말이에요. 참고로 말하자면...."

아나스타샤의 시선은 신서울 광검의 비밀 창고에 고이 보관된 루살카 1:1 스케일의 X로이드에 꽂혀있었다.

"이거 광검이 한 번도 안 써서, 처녀랍니다?"

"......얘."

루살카는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만지작거리며 숨을 골랐다.

"좌표 불러봐."

루살카는 당장이라도 전이할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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