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1부 12장 9
수보르프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가득차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딸의 위치를 파악하였는지 의문이었고, 그 많은 이능력자들과 경비병들의 눈을 돌려 별궁을 뒤졌는지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별궁으로 향하는 다리 양 옆에 한 가득 떠다니는 가솔들을 보며 수보르프는 여러 생각이 다 들었다.
'죽일 의도는 없다는 건가.'
아직까지 누가 죽었다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자신의 가문을 습격한 괴한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다.
'분명 청화단이라고 했지.'
헌터 길드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개가 되기 이전, 그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빌런 조직이었다.
그런 자들이 굳이 무려 세 명이나 러시아에 왔다는 것은, 그들의 뒷배인 SS급 이능력자 피닉스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진짜 그 소문이 사실인가?'
까득.
수보르프는 딸과 관련된 루머를 상기했다.
단둥.
중국의 이능력자들이 평양 정벌의 기치를 내걸고 남하하던 날, 딸은 원탁의 지원 요청에 따라 단둥에서 빌런 피닉스와 조우했다.
그 뒤로 딸의 행보가 이상해졌다.
매일같이 마시던 술도 끊었고,
알음알음 남몰래 찾고 즐기던 한국의 문화에 대해 대놓고 찾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부산이라는 해안 도시의 부동산까지 뒤지며 살 곳을 찾고 있더라.
'혹시 그 청년은 피닉스가 아닌가?'
라고, 수보르프는 생각하고 있었다.
피닉스는 그 외형이나 행동을 생각하면 남성성이 강했고, 실제로 아나스타샤가 피닉스와 가웨인 사이를 중재하였다고 오라클은 증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원탁과 빌런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니!'
SS급 이능력자인 만큼, 그 힘의 격차를 이용해 딸을 억누르려 할 것이다.
피닉스는 한국의 SS급 이능력자(추정)인 광검까지 살해한 악당이니, 원탁이고 나발이고 딸을 개처럼 부리는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다, 시기가 맞지 않아. 피닉스는 영상이 찍히던 당시에 다른 곳에.... 하지만 SS급이라면 그런 정도는....'
탁.
머리가 복잡해지려던 수보르프는 정면에 서있는 청년을 보고 머리가 한 순간에 맑아졌다.
"그래. 아주 간단한 답이 있군."
금발의 청년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보고 있으나 직접 보니 그 외형은 상당히 미형이었고, 수보르프는 그 외형과 기세만큼은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이미 영상을 본 시점에서 합격점은 커녕 과락이었지만.
"자네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어. 그저...."
까드득.
수보르프가 두 주먹을 들어올렸다. 특수부대 출신으로서 이능력의 등급조차 A급인 그는 러시아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 중의 강자였다.
"내 딸을 개처럼 다루는 남자에게, 내 딸을 내어줄 수 없네!'
"......송구했습니다."
금발의 청년, 광검은 손을 양 옆으로 뻗으며 마력을 서서히 일으켰다. 잔잔했던 밤의 호수에 금빛의 물결이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 루살카의 아버지라고 해도, 저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네, 네 놈! 딸의 애칭을 부르지 마라!"
수보르프로비치 라는 부칭(父稱)마저 '루살카'라는 이름으로 딸은 개명해버렸다. 수보르프는 자신조차 허락받지 못한 이름을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남자에게 분명 분노와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정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네 놈을 인정할 수 없다!"
"......저도 그 마음만큼은 이해합니다."
딸가진 아버지이기에, 피닉스가 석하랑을 들먹이며 자신을 골릴 때마다 여간 속이 썩어들어간게 아니다.
"딸가진 아버지로서, 저는 죽여 마땅한 쓰레기일테지요. 허나."
광검은 기세를 끌어올리며 쌍검을 치켜들었다.
"이왕 쓰레기가 된 것, 제 아내를 데려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네-이-노오옴!!"
수보르프는 전력으로 광검을 향해 뛰었다. 광검은 눈을 슬쩍 첨탑을 흘긴 뒤, 숨을 한 번 고르고 마력을 폭발시켰다.
"잠깐 따로 이야기를 하시지요, 장인어른."
"누가 네 장인어른이냐아!!"
광검과 수보르프가 사라졌다.
* * *
블라디미르 가문에 테러가 발생.
헬멧을 쓴 괴한들은 유령처럼 움직이며 별궁의 식솔들을 기절시켜 별궁 바깥으로 옮겼고, 괴한 하나가 발각되면서 사태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괴한들의 목표는 '운디네의 납치'다.
그들의 행보는 분명히 운디네를 찾고 있었고, 사람들은 행여나 운디네가 납치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했다.
- 아무리 그래도 원탁인데, S급 히어로인데 납치를 당할까?
- 라스푸틴도 지금 약혼 문제 때문에 블라디미르 가문에 식객으로 머무르고 있지 않나?
- 그냥 평소처럼 블라디미르 가문에 앙심을 품은 자들이 습격한 게 아냐?
사람들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전해진 테러 소식에 뜬눈으로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스크바 상공에 나타난 SS급 빌런 <피닉스>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 피닉스가 운디네를 납치하려고 한다!
검은 갑옷을 입은 푸른 불사조는 수 백 미터 허공에서 자유낙하하며 첨탑의 유리창을 깨버렸다.
그리고 딸을 지키기 위해 본 궁에서 달려가던 <원수> 수보르프는 자신을 가로막은 정체 불명의 청년과 마주한 즉시 사라져버렸다.
- 머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임?
대중들은 시시각각으로 전해지는 정보에 혼란스러워했다. 갑자기 피닉스가 나타나 별궁의 유리창을 깨질 않나, <운디네 스캔들>의 당사자로 추정되는 금발 한국인 청년이 수보르프를 상대하며 검을 빼어들지 않나.
그리고 그들은 한 가지 무서운 예상을 하기 시작했다.
- 혹시 강제로 혼약 맺었다고 신부 납치하러 온 건가...?
사람들은 베일에 감춰진 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납치범들의 계략을 막을 영웅을 찾았다.
- 라스푸틴은 어디로 간 거야?!
본 궁 어디에도, 라스푸틴의 반응은 없었다.
* * *
DD는 결계만 펼쳤을 뿐, 화권을 향한 공격은 대부분 박투술이었다.
퍼억!
DD의 주먹이 벌처럼 화권의 허리를 찔렀다. 화권은 허리를 살짝 비틀며 DD의 주먹을 흘려냈고, 동시에 그 허리 반동을 이용해 주먹을 내질렀다.
"우훗, 좋은 허리."
"......!!"
순간적으로 집중이 흐트러질뻔 했지만, 화권은 이를 악물고 백염을 실은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파공성과 함께 전방으로 쏘아진 흰 불꽃이 DD의 상체를 불태웠다.
"흐하!"
한 발자국 크게 물러난 DD는 기합으로 백염을 떨쳐냈다. 어둠에 동화된 검은 사제복은 흰 불꽃에 상반신이 전부 타버렸고, DD는 배꼽 아래에 남은 사제복을 단단히 동여매어 흘러내리는 걸 막았다.
"후훗. 지금 그 공격은 날카로웠어. 하지만 직접 때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젠장."
불쾌감이 상당했지만 화권은 반박할 수 없었다. 상대는 자신과 동격인 S급 이능력자이며, 전투 스타일도 신체 강화를 통한 육탄전으로 비슷했다.
꿈틀, 꿈틀.
백염에 비친 그의 구릿빛 상반신이 흔들거렸다. 사제복 아래 그가 숨기고 있던 것은 세 번째 다리 뿐만이 아니었다. 나름 근육이 많은 화권 조차도 한 수 접어줄 정도의 육체미를 자랑하는 DD는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며 복근을 손으로 쓸었다.
"후후, 신께서 내려주신 은총이 더해진 몸이지. 어떤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와 함께 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나?"
화권은 숨을 고르며 마력을 갈무리했다. 아무리 주먹을 주고받아도 DD는 그 공격을 흘려내거나 여유롭게 맞받아 칠 뿐이었고, 지치는 건 자신이었다.
"신이 스테로이드라도 되나? 후우."
"저런. 내가 모시는 신을 모독하는 발언은 삼가하지? 스테로이드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력을 가진 분이야. 너도 신의 은총을 받으면 기분이 달라질 걸?"
DD는 주먹을 검은 마력으로 감싸며 달뜬 숨을 내뱉었다.
"이리 마음껏 마력을 방출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하아. 운디네만도 못한 S급인 내가 이렇게 SS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도, 다 그 분의 은혜를 입어서 그런 거야."
"......당신이 SS급 직전이라고?"
"그래. 너도 S급이니 충분히 자질이 있다. 그 분께서는 네 마음 속 어둠을 짙게 피워주실 거다. 네 안에 있는 그림자를 직면하는 것으로, 너는 어쩌면 그 단계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SS급 말이다!"
DD의 몸이 순간 사라졌다. 화권은 그가 어둠속에 동화되었음을 직감하고 전신에 마력을 둘렀지만, 이미 DD는 자신의 결계 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훗!"
갑자기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화권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는 생각에 갈무리한 마력을 가다듬어 주먹을 휘둘렀다.
새액!
하얀 불빛이 짙은 그림자를 혜성처럼 갈랐다. 화권의 주먹은 벌처럼 쏘아졌으나 DD의 실체를 찌르지는 못했다.
덥썩!
그 순간, DD가 화권을 등 뒤에서 붙잡았다. 화권은 자신의 뒤를 점한 DD이 이능도 두려웠지만, 어깨와 허리 뒷편에 닿는 DD의 몸에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으아악!!"
화권은 전신의 마력을 사방으로 방출했다. 피부를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가 화권을 중심으로 터져나왔으나, DD는 붙잡은 화권의 몸을 놓지 않았다.
"우후훗."
오히려 DD는 화권의 오금을 지그시 발로 누르며 화권을 꿇어앉혔다. 자신의 피부가 벌겋게 익어 땀이 뻘뻘 나는 와중에도 DD는 화권을 점한 구속을 풀지 않았다.
"저항해봐야 소용 없어…. 여긴 이미 나의 안방이다."
DD는 여전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화권에게 속삭였다. 둘의 마력이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며 힘싸움을 벌였고, 화권은 서서히 DD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이거 놔! 으아아!"
"크흣, 제법 힘이 강한데…!"
DD는 화권의 위에 엎드려 찍어누르려했으나, 화권은 죽어라 마력을 방출하며 그가 몸에 닿지 않게 밀어냈다.
"이러니까 꼭 올림픽에서 레슬링을 하는 것 같지 않-"
"흐아아아아아!!"
화권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 전신의 마력을 뿜어냈다. 화권의 온몸에서 백염이 폭발하듯 뿜어져나왔고, 결국 DD는 마력의 줄다리기에서 기세를 접고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헉, 허억!"
한 번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낸 화권은 부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사방을 경계했다. 행여나 또 DD가 뒤를 점할까봐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웠다.
"겁먹지 말지. 꼭 아기고양이 같군 그래."
"......!"
화권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간신히 참았다. 상대가 여유를 부리는 사이 마력을 조금이라도 회복해야했다. 다행히 DD는 완전히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는 듯 여유를 부렸다.
"왜 그렇게 격렬하게 저항하지? 얌전히 신인류가 되는 걸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시끄러워! 네 놈은 사람도 아니야!"
화권은 DD에게서 느꼈던 께름칙한 기운의 정체를 깨달았다. 비단 자신의 몸에 뒤에서 엉겨붙었던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마력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분명 이전에 상대했던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이었다.
"넌 괴인이다!"
"......."
화권이 갑작스러운 선언에 DD는 잠시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괴인, 괴인이라…. 하긴, 신의 은총을 받지 않은 우매한 자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나. 후후후."
DD는 다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화권은 주먹을 눈높이로 들어올리며 자세를 다시 잡았다. 시야에서 사라지면 언제든지 공격을 넣을 수 있게 마력을 가다듬었고, 다시는 뒤를 제압당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히어로 협회에서 우리 신인류를 그렇게 부르기로 한 건가? 후후, 그렇다면 유감이야. 그 분께서는 우리를 '밤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시길 원하시거든."
"......그 분은 누구고 또 신인류는 뭐야?"
화권은 끓어넘치는 분노를 삼키며 색안경을 벗어던졌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분명 러시아의 S급 이능력자였으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라스푸틴이라는 히어로의 정체성을 버리고, '괴인 DD'가 된 것이다.
"드디어 들을 마음이 생긴 건가! 하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너와는 좋은 동료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지."
"동료가 될 생각은 아직 없어. 네가 말하는 신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전도하려고 드나?"
화권은 일부러 DD를 도발했다. 자신이 아닌 신을 모욕하는 화권의 태도에 DD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너와는 육체적으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군."
DD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심장을 직접 찌르는 손길에 화권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으하하하! 그 분의 은총을 두 눈으로 괄목하라, 히어로여!"
DD의 심장에 박힌 코어에서 막대한 양의 마력이 사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암개벽(魔暗開闢)!"
"역시 괴인이잖아!!"
세상에 저런 부끄러운 언행을 자랑스럽게 하는 이들은 괴인 말고는 없을 것이다. 화권이 마력을 다시 끌어올리기가 무섭게, 괴인 DD가 본색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