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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62화 (262/1,497)

〈 262화 〉1부 12장 8

괴한의 침입을 알리는 경보에 따라, 회담은 자연히 중단되었다.

"......흐음."

딸의 상황에 연거푸 담배연기를 내뿜던 수보르프의 눈에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전신에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해 활력이 돌았고, 수보르프는 러시아 협회의 '지휘관'으로서 상황을 냉철히 판단하기 시작했다.

"양동? 아니면 이용?"

고작 세 마디의 말이었지만 수보르프의 눈썰미는 현재의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천기를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보르프는 자신이 놓인 상황을 즉각 이해했다.

"어느쪽이든 누군가 운디네를 노리고 있는 것은 확실하군. 회담은 잠시 멈추지."

수보르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흉흉한 마력을 흩뿌렸다. 그의 맞은 편에는 하늘성부터 시작하여 A급 이능력자가 다섯이나 있었으나, 그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저희는 여기 있겠습니다. 괜히 원수 각하의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군요."

하늘성은 두 손을 들며 백기를 들었다. 수보르프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진짜 배경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속내를 추궁해야 했다.

"정말 오해일까...?"

다만, 그건 일이 끝나고 난 뒤. 이 넓은 러시아 땅에서 한국인 다섯이 쉽게 도망칠 수도 없을테니, 수보르프는 먼저 딸이 있는 별궁을 노리는 괴한을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좋네. 현명한 판단이야. 자네들의 진의에 대해서는 내 다녀와서 추궁하도록 하지."

"......."

하늘성은 자신들의 등뒤로 다가서는 시종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풍백이 혀를 차며 슬쩍 스틱을 바닥에 찍었다.

"아무 힘도 없는 노인네를 등 뒤에서 그렇게 째려보면 되겠는 감?"

"이미 당신들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습니다. <풍백> 당신이 이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것도요."

수보르프의 명령을 받은 시종장이 하얀 면장갑을 말아쥐며 풍백의 뒤에 섰다. 그에 하늘성이 기함하며 등을 돌렸다.

"무슨 소리인가? 내가 저 놈보다 훨씬 강해."

"껄껄, 말로는 나도 S급 이길 수 있지."

"......."

김지화는 적진에서도 으르렁거리는 두 노인의 자존심대결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자신이 있는 땅이 마음껏 조감할 수 있는 서울은 아니었으나, 창밖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눈에 훤히 비쳤다.

"알아서 잘들 하시겠지...."

자신들은 그저 러시아에 특사단으로 왔을 뿐, 김지화의 현상금은 이미 철회되었고 죄도 사면받았다.

"저희 앉아서 기다려도 됩니까?"

"......그러시지요."

아키택트와 김지화는 좋다고 의자에 앉았고, 풍백도 하늘성과 기싸움을 하기 위해 마주 앉았다.

"......세상에 맙소사."

우사는 자신의 상식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적진이나 다름없어진 상황에서 이 무슨 태평함이란 말인가.

"정말 지옥같군."

바로 옆 방에 있는 이승형을 당장에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쟤들은 왜 이렇게 조용해?"

집무실 너머의 두 S급은 소란 하나 없이 조용했다.

* * *

루살카는 반투명한 네글리제를 입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워낙에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일어나다가 기력없이 침대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루살카."

나는 괴인형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방 안에는 CCTV 같은 건 없었고, 오롯이 루살카 한 명만 있을 뿐이었다.

"물어봐야 할 것도 있고, 도와줘야 할 것도 있지만, 지금은 일단 이리와요."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위로 올라갔다. 루살카는 왠지 모르게 겁을 먹고 있었고, 나는 매트리스에 엎어진 루살카를 일으켜세웠다.

"완전 헬쓱해진 것 봐. 밥 안 먹었어요? 당신 이러면 다음 강의 때 남편 테크닉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서방님 얼굴을 보겠어."

루살카는 절망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설마 벌써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거나 그에 준하는 일이 일어난걸까 싶어, 나는 절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음 굳게 다잡아요. 광검이 겨우 그런 일로 당신을 버리겠어요?"

"아냐. 그런 거. 설마 내가 서방님 말고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거나 했을 것 같니?"

루살카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정절을 의심하는 내게 즉각 반박했다. 나는 졸지에 내가 잘못한 것 같아 미안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루살카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도대체 뭣때문에 이렇게 울고 있던 거예요?"

"나....나 이제 이혼녀가 되어 버린 걸...!"

"예...?"

고작 약혼에 파혼을 했을 뿐인데?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그...."

"중고가 되어버렸다고!"

"오해할만한 발언은 하지 맙시다."

"......흐끅."

루살카는 억울한지 눈물을 글썽이며 흐느꼈다.

"나.... 첫 키스도 첫 경험도 처녀도 서방님께 바쳤어. 이제 남은 건 신혼만 남았는데.... 흐끅! 아빠가 맘대로 약혼을 맺는 바람에, 난 이혼녀로 서방님께 가야한다는 말이야!"

"......겨우 그걸로 이러고 있는 거예요?"

"겨우라니! 서방님한테 처음을 바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허허."

처녀는 두 번이나 바쳐놓고는 겨우 신상명세에 이혼 경력이 한 줄 적힌 걸 신경쓴다는 말인가.

"그냥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했을 뿐이잖아요?"

"똑같아! 서방님이 아닌 다른 남자와 약혼을 했다는 것 자체부터 난 망한 거야. 으허헝...!"

나는 얼척이 없어서 절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루살카에게는 그 '처음'이라는 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였나보다.

"허, 나 참."

내 헛웃음이 비웃음으로 들렸을까. 루살카가 고개를 치켜들며 내 어깨를 잡고 몸을 흔들어댔다.

"너! 나 지금 무시하는 거니? 내가 서방님이랑 만나고 결혼할 생각에 얼마나 행복했는데! 부산에서 딱 반 년만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와서 성대하게 결혼식 올릴 생각이었어! 그런데, 흐끅!"

"아, 진짜 울렸다."

바닥을 굴러 벽에 처박혀있던 환룡이 나를 비웃었다. 환룡은 루살카를 달래거나 나를 도울 생각도 없이, 하품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단 빨리 도망치자. 지금 수보르프 달려오고 있는 중이래."

"음.... 역시 딸바보들은 하나같이 극단적이란 말이야."

단순히 유리창을 깨뜨린 것 만으로도 수보르프는 우리의 첨탑 침입을 눈치챘는지, 점점 우리 주변의 마력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마냥 날카로워졌다.

"지금 다리 달려오는 중."

"그런가. 그냥 사람들 강에다가 의식이 있는 상태로 던질 걸 그랬나. 아예 소란을 더 크게 피워서."

"너희 도대체 무슨, 흐윽,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루살카가 역정을 냈고, 우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당신네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 기절시켜서 묻어버린 정도?"

"야!"

루살카가 내 멱살을 움켜쥐며 화를 냈다.

"네가 뭐라고 내 사람들을!"

"죽인 거 아니니까 진정해요. 누가 광검 아내 아니랄까봐 삽질하는 것도 똑같네."

나는 멱살을 쥔 루살카를 잡아당겨, 그 뒷목을 강하게 내리쳤다.

"큭!"

예고도 없이 날아간 내 공격을 예상이라도 한 건지, 루살카는 마력을 뒷목에 끌어모아 내 수도를 방어했다.

"아으.... 아파...!"

루살카는 많이 아팠는지 눈을 찡그렸지만, 내 의도대로 기절하지 않았다. 나는 차마 옛 장모님이자 현 여동생 격인 루살카에게 계속해서 고통을 줄 수 없어, 루살카의 어깨를 짓눌러 침대에 쓰러뜨렸다.

"너, 너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우리 아빠랑 서방님이 너를 가만히 안 놔둘 거라고!"

"정령이 완전이 어린애가 됐네.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가."

나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방에는 내용물이 사라진 보드카가 궤짝째 널브러져있었다.

"당신 밥 안먹고 술만 마셨어요?"

"흐끅, 이거 다, 흑! 서방님이랑 마실려고 모아둔 건데, 흐끅!"

마력 때문에 알코올에도 잘 취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콰---앙!!

다리 방면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동시에 본궁에서도 마력이 크게 흔들리는 게 전해졌다.

"일단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합시다. 환룡!"

"내 차례네. ...실례."

침대에서 스멀스멀 기어온 환룡이 나와 루살카의 사이로 기어들어와, 루살카의 위에 몸을 포개었다.

"루 언니. 미안?"

"너, 너 뭐하는, 흐으응?!"

자신을 내려다보는 환룡의 미소를 본 루살카는 몸을 격하게 떨며 우리 둘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환룡은 루살카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손장난을 쳤다.

"자, 잠깐만! 그, 그러지마! 야아아!"

"환룡아. 장난치지 말고 바로 해라."

"......나는 장난도 못 치나. 칫."

루살카를 희롱하던 환룡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루살카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럼 잘먹겠습니다."

환룡이 루살카의 얼굴을 붙잡고 키스하자, 환룡은 진공청소기에 흡입을 당하는 것 마냥 루살카의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웁, 으읍?!"

루살카는 자신의 안에 들어온 환룡에 격하게 몸을 비틀었다. 나는 루살카의 사지를 누르며 루살카가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했다.

"내가 진짜 당신 결혼시키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하네요. 정말."

"으, 흐으윽!"

루살카는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하지만 내가 루살카의 몸을 제압하고 환룡이 루살카의 정신을 제압하는 협공을 하는 덕분에, 루살카의 반항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장모님만 아니었어도 약점 공략하는데. 쯧."

"너, 너 그게 무슨, 히야앗?!"

루살카는 달뜬 숨을 터뜨리며 교성을 내뱉었다. 표독스럽게 나를 노려보는 루살카의 눈동자는 아래에서부터 점점 회색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너희 도대체 나를 가지고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야...!"

"무슨 짓이라뇨."

나는 루살카와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서서히 마력으로 루살카를 압박했다.

"허윤환 님 부탁으로 신부 보쌈하러 왔습니다."

"!!"

루살카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사지를 결박당해 발버둥치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고요한 눈내리는 밤의 호수처럼 몸의 떨림이 잔잔해졌다.

* * *

별궁과 집무실에서 난리가 난 사이, 이승형은 따끔거리는 피부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역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경보가 울림과 동시에 그의 심장 속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승형은 그 마력을 전신에 돌리며 집무실로 걸어가려했다.

"어딜 가십니까?"

탁. 라스푸틴이 이승형의 손목을 붙잡았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잡는 그 무례한 손길에 이승형은 힘으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라스푸틴은 마력까지 사용하며 이승형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저희는 마저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이 상황에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까? 당신은 러시아의 S급이잖아요! 그럼 이 상황에서-"

"예. 러시아의 S급이'었'죠."

라스푸틴은 굳이 어조를 높였다. 마치 지금은 아니라는 듯한 늬앙스는 번역기를 돌릴 필요도 없이, 이승형은 라스푸틴의 몸 주변에 흩뿌려지는 끈적한 마력에서 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었다.

"당신.... 뭐야?"

이승형은 라스푸틴의 불운한 마력을 감지했다. 수도승처럼 평온했던 마력이 불쾌한 감각으로 끈적거리기 시작했고, 이승형은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감각에 전신의 털이 쭈볏 섰다.

분명 관악에서 내려오던 그 듀라한 무리를 보는 듯한 감각-

쿠웅!

라스푸틴이 발을 굴렀다. 사제복 아래에서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가 응접실의 바닥을 빠르게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구속하려는 악의가 느껴졌다. 이승형은 사로잡힌 팔에 마력을 싣고 라스푸틴의 구속을 털어냈다.

"하압!"

이승형은 뒤로 크게 물러나며 집무실로 달렸다. 의도가 어찌됐든 라스푸틴은 자신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안타깝습니다."

저릿한 손을 만지작거리던 라스푸틴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집무실로 향하는 문은 라스푸틴이 퍼뜨린 짙고 어두은 그림자에 틀어막혔다.

치직. 칙.

". 이 기술의 이름인 동시에, 신께서 제게 주신 제 새로운 이명이지요."

라스푸틴-이제는 DD이라고 불러야 할 남자는 어둠 속에서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를 반짝이며 씩 웃었다. 이승형은 두 주먹에 흰 불꽃을 일으키며 자신을 덮으려는 어둠을 하얀 빛으로 걷어냈다.

"......과연. 당신은 협회의 히어로도 아니고, 러시아의 히어로도 아니야. 아니, 히어로가 아니야."

이승형은 주먹을 들어올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승형의 감각은 이미 그가 '인간을 벗어난 존재'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후후후."

DD는 이승형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다가갔다. 마치 그를 포옹하며 끌어안으려는 듯.

"이런 소란이 생겨서 다행이군. 덕분에 자네같은 멋진 남자와 둘이서 조용히 얘기할 수 있게 되어서 말이야."

"......장난치지마라. 나는 그런 쪽으로 취향이 없어."

"저런. 자네 자꾸 오해하는 것 같은데...."

DD는 상처받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은 뒤, 손을 악수하듯 이승형에게 내밀었다.

"자네와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 우리 신께서 맞이하시는 신인류(新人類)로 자네는 합격점, 아니 베스트라고 할 수 있지."

DD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훑었다. 그리고는 이승형을 향해 손가락을 쭉 펼쳤다.

"외모, 이능력, 근육, 정의감. 그 무엇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야. 그래, 그런 의미에서...."

조건을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던 DD는 혀로 윗입술을 핥으며 살포시 미소지었다.

"이 멋진 남자가 그 분의 손에 의해 타락하는 걸 보고 싶단 말이지."

"미친."

이승형은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DD는 상처를 받은 듯 눈썹을 찡그렸다가, 마지막 하나 남은 새끼손가락을 흔들었다.

"괜찮아. 그 분께서는 마지막 하나가 마음에 안 들면 신인류로 받아들이시지 않고 도태시키니. 후후후."

DD는 달뜬 숨을 내뱉으며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땀에 흠뻑 젖은 그의 손에 머리가 올백으로 넘어갔다.

"일단 옷부터 벗기고 시작해볼까...!"

"으아아아악!!"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짙은 어둠>의 결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이승형의 처절한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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