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화 〉1부 12장 6
이승형은 진심으로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각성을.... 그렇군요. 관악에 열린 차원문을 닫기 위해 S급으로 각성했고, 화마룡을 일격에 물리쳤다. 과연, 한국의 신성이라고 불릴만한 분이십니다."
라스푸틴은 은은한 눈빛으로 감격했다는 듯 이승형을 칭찬했다.
"그리고 화권 님께서는 화마룡의 저주에 대해 실증하셨지요."
"네. ...화마룡이 죽은 지역 근처에 가면 각혈했지만, 지금은 극복해냈습니다."
분명 자신의 전공에 대해 환대하는 목소리였지만, 한 번 색안경이 씌워진 이승형은 그 행동 하나하나가 소름끼칠 수 밖에 없었다.
"그거 다행입니다. 한국은 참 복이 많은 나라군요. S급의 각성에 더불어 SS급까지. 후후, 정말 여러모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군요."
상체를 슬쩍 숙여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 꼭 금방이라도 일어나 얼굴을 붙잡고 강제로 입을 맞추려는 것 같았고, 로브에 가려져 있지만 양 옆으로 벌려진 다리는 마치 자신의 거대한 코끼리를 과시하며 자랑하는 듯 했다.
"하물며 EX급 이능력자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청화 양이라고 했던가요? 그러고보니 화권 님은 비스트 테이머와 스캔들이 발생했다고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화권 님과 비스트 테이머는 무슨 관계입니까?"
"세간이 억지로 엮는 관계입니다. 저나 그 분이나 서로에 대해 관심은 없습니다."
이승형은 딱 잘라서 말했다. 그 단호함은 청화(피닉스)가 자신을 향해 말하던 것과 상당히 흡사했다.
"저런. 안타깝군요. S급 이능력자와 EX급 이능력자가 합쳐진다면 분명 더할 나위없는 이능력자가.... 크흠. 잠시."
라스푸틴은 다리를 모으고 성호를 그린 뒤 경건한 자세로 기도했다. 이승형은 그 행동 마저도 가증스러워 구토가 치밀어 올랐지만, 점점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의 다른 면모가 보였다.
'이거.... 나혼자 착각하는 거 아닌가?'
사람을 처음 본 순간부터 게이라고 오해하는 건 남자로서 크나큰 실례였다. 이승형은 당연히 이성애자였으나, 굳이 동성애에 대해 개인적으로 완강히 거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다만 나한테는 안해줬으면 좋겠다 이거지.'
남자를 사랑하게 될 일은 앞으로도 평생 없을 것이다. 하물며 그게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경우라면 더더욱. 특히 그게 눈앞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크기가 크다는 소문의 당사자라면 더더욱.
'아니야. 설마 게이겠어? 종교인 출신이었다며? 물론 이능력자 되고 나서 성관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저...."
이승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에게 기도를 하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던 라스푸틴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무슨 궁금한 거 있으십니까?"
"라스푸틴 님께서는 이능력자로 각성하신 이래, 많은 여성들을, 그...."
"아."
라스푸틴은 볼을 긁적이면서 쑥쓰러워했다.
"......색에 취해 있던 때가 있었죠. 이능력을 각성한 이후에는 일반인 여성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능력자가 아니면 제 크기를 감당하기가, 크흠."
"수도승 아니셨나요?"
"......사실대로 말하면 이건 패션입니다. 제가 바지를 입을 수도 없는 지라. 크흠."
"아."
색안경을 잠시 내려놓고 보니, 자신의 크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로 인한 애로사항에 상당히 불편을 겪는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 참. 그러고보니 화권 님. 화권 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만."
라스푸틴은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승형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화권 님은 원탁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원탁이요?"
지금 이 남자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이승형은 일단 말의 의미도 그렇지만 숨결이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피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 만약 원탁이 자리가 빈다면, 그 자리를 노리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아."
이승형은 라스푸틴의 말을 이해했다.
"혹시 운디네 님이 원탁의 자리를 반납하시는 경우가...?"
"예. 어떤 이유에서든지, 운디네 님은 원탁에서 물러설 계획입니다. 그걸 지금 원수 님께서 특사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중이지요."
"예?"
이승형은 멍청히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운디네가 어떻게 원탁에서 은퇴를 한다는 말인가?
"그게, 사실은."
라스푸틴은 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원수 님께서는 그 청년과의 혼인을 인정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이승형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 * *
"그렇다네. 나는 그 청년과 딸아이를 결혼시킬 셈이야."
수보르프는 모니터를 끄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류천성을 위시한 다섯 특사단은 충격적인 영상에 말을 잇지 못했다.
"허어...."
"저런 과감한...."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게 지금 내 딸아이의 현실이지. 내가 아무리 밖에다 아니라고 외쳐도, 세상은 딸아이를 두고 온갖 뒷말을 할 게야."
그들은 영상 속에 희미하게 녹음된 단어를 잊을 수 없었다.
서방님.
루살카.
"......내가 아무리 전세계를 뒤져봐도, 루살카라는 이름을 쓰는 여인은 우리 딸아이 밖에 없었어."
솥뚜껑만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수보르프의 얼굴은 영상을 틀기 전보다 십 수년은 더 늙어보였다.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굳이 이 영상을 보여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말로 원수 각하께서는 저 청년과의 혼인을 승낙하실 겁니까?"
"그렇다네. 다만 아버지로서, 전직 원수로서, 그리고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걸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필요하지."
수보르프는 품안에서 파이프를 꺼냈다.
"한 대 피워도 되겠나? 아니, 자네들도 피고 싶으면 피워도 좋네. 바란다면 내 것도 주지. 지금부터는 격식없이 이야기하지. 후우...."
수보르프는 집사에게 담배를 가져오라 지시했고, 방안에 들어온 다섯 남자는 수보르프와 함께 담뱃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딸아이야. 다시 살아난 이후로는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았지. 언젠가 좋은 남자 하나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나는 그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어. 그런데, 하아...."
콰득.
수보르프가 파이프를 손아귀 힘으로 뭉게버렸다. 집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른 파이프를 건넸다.
"미안하네.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한국으로 간다고 해도 딱히 말리지는 않았어. 한국을 상당히 좋아한다는 건 정도는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쾅!
수보프르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힘조절 할 정신이 있는지, 책상은 부서지지 않았다.
"그 놈은 우리 딸아이에게 개목걸이를 채우고 전라로 무려 1km를 걷게 하는 치욕을 줬어! 그 뿐인 줄 아는가? 도대체 그 한 바퀴를 도는데 몇 번을 해댄 건지 셀 수가 없었지! 그래! 다 봤다네! 보고 말았어!"
"저, 그.... 혹시 운디네 님께서 칩거에 들어간 이유는...."
김지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수보르프는 헛웃음을 지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내가 그걸 다 봐버렸다고 안 뒤로 부끄러워서 방문을 닫아버렸지. 나도 후회해. 하지만 그 썩을 놈의 면상을 이 두 눈에 똑똑히 기억하기 위해 끝까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봤지."
수보르프는 씩씩거리며 파이프를 다시 물었다.
"그래.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딸아이가 사랑한다면 결혼시켜주지. 하지만 그 놈은 쉽게 결혼해서는 안 돼. 지금은 딸아이가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있지만, 이대로 결혼하게 된다면 딸아이는 그 놈의 노리개나 다름 없는 삶을 살게 되겠지."
"......."
진상을 알고 있는 청화단의 간부들은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 딸과의 결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본인도 알아야 한다 이거야. 내 행동이 틀렸나? 틀렸어도 난 하겠네. 욕을 들어 먹어도 나는 할 수 밖에 없어. 내 딸이 목줄을 쥘 지언정, 나는 내 딸이 평생 개목걸이를 차는 꼴은 다시는 볼 수 없어."
"......알겠습니다. 원수 각하의 심정은 충분히 통감했습니다."
류천성은 고개를 숙였다. 잘못은 당연히 분별없이 사랑을 과시하던 두 부부의 탓이니 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지금의 약혼도?"
"그래. 사람들은 수긍할만한 명분이 필요해. 딸아이가 그 사람이 아니면 죽어버리겠다고, 파혼에 파혼을 거듭하면 그제야 사람들도 이해를 하게 될 거야. 딸아이는 그 청년 없이는 죽고 못사는구나."
수보프르는 한모금 크게 빨아당긴 담배 연기를 망연히 천장으로 토해냈다.
"딸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나조차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나라의 둘밖에 없는 S급 이능력자, 그것도 원탁을 시집보내야 하는 국민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반대로 생각해보시게."
수보르프는 상체를 숙이며 역으로 질문했다.
"자네들 나라의 설화령께서, 만약 미국의 금발 양키와 결혼해서 미국 땅에 뿌리를 박겠다 선언하시면 그 기분이 어떠하시겠는가?"
"바로 이해했습니다. 저는 원수 각하의 마음을 지지합니다."
아키택트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보르프에게 강한 공감을 보였다.
다른 이도 아닌 전형적인 금발 벽안의 남자가 자신에게 공감하는 것에 수보르프는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그래. 자네들도 고생이 많아. 괜히 내가 으름장을 놓아 우리와 그대들의 관계가 서먹서먹 해진 것은 내 사과하지."
"이해합니다. ......그런데 원수 각하. 저희도 그냥 온 것은 아닙니다."
류천성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본론을 꺼냈다.
"그 청년이 원수 각하를 뵙기를 원합니다."
빠득.
수보르프가 든 파이프가 손아귀 힘에 으스러졌다.
* * *
"허어. 그 청년이 진정 한국인이란 말입니까?"
"예. ......전해 듣기로는 제법 강한 이능력자로 알고 있습니다."
이승형은 세계의 진실을 듣던 날, 그 청년이 청화단 간부들의 자리에 함께 배석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경지는 자신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고, 분명 중간중간 원탁에 앉은 운디네와 시선을 뜨겁게 주고받는 걸 이승형도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혹시나 러시아인이 아닐까 기대했습니다만.... 좋습니다. 그가 한국인이어도 괜찮을 겁니다. 블라디미르 가문에 데릴 사위로 들어가면 될 테니."
"......."
미묘한 문제에 대해 이승형은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다. 괜히 운디네가 한국에 와서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가, 이 우락부락한 거한과 드잡이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풍백과 하늘성의 기싸움에 질릴대로 질려있었다.
그러나.
"두 분이 결혼을 하게 되면 운디네 님께서 한국으로 오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흠."
이승형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정신적으로 조금 피곤하기는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그 정도 피로를 한 번에 날려줄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있었다.
"저희는 원수 님께 허락을 받고, 공주님을 모시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정말 노골적인 말씀이시군요."
"괜히 어줍잖게 숨기는 것 보다 진실된 말씀을 드리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승형은 마력을 체외로 방출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앞으로 두 사람의 혼인을 통해 끈끈해질 동맹국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후후, 좋습니다. 그 기개,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라스푸틴은 엄지로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살살 쓸며 입술을 오므렸다. 그 행동은 분명히 무언가에 달뜬 기색이 역력했다.
"......."
이승형은 그게 자신의 기백이 마음에 들었다는 건지, 아니면 벗어놓았던 색안경을 다시 써야하는 지 진심으로 헷갈리기 시작했다.
"...예. 그래서 그 청년이 원수 각하께 직접 말씀을 드리고자 하기에, 저희가 먼저 러시아로 날아왔습니다."
"오.... 과연. 한 나라의 공주와 평생가약을 맺으려면 그 정도의 결의는 있어야겠군요. 점점 한국 남자들에 대해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후후후. 이 참에 저희 쪽에서 가는 특사는 제가 가는 것도 좋겠군요."
제발 오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승형은 속내를 감추고 정중히 사양하고 싶었다.
"라스푸틴 님께서 한국에 오시는 것도 기쁜 일이지요. 하하."
"가면 화권 님과 둘이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라스푸틴은 여전히 입맛을 다시며 무언가를 아쉬워했다. 그의 칠흑같은 눈동자는 이승형의 전신을 훑으며 자꾸 아쉬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아 참. 아까 전에 제가 원탁에 흥미가 있느냐고 여쭙지 않았습니까."
"아, 예. 그거 말이군요. 운디네 님이 원탁에서 결혼은퇴하시면 확실히 자리가...."
"아뇨.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게 아닌데...."
라스푸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승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승형은 뱀을 눈앞에 둔 생쥐처럼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라스푸틴은 이승형의 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혹시 원탁을-"
애애애애애앵---
갑자기, 침입자를 알리는 비상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