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1부 12장 5
그 시각. 블라디미르 별궁.
나는 청화단과 환룡단을 동원해 아나스타샤가 근신하고 있는 장소를 찾고자 했다.
회담이 이루어지는 본궁은 라스푸틴이 존재하니 쉽게 다가갈 수 없었고, 우리는 본궁으로부터 이어지는 수많은 별궁을 뒤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두 가지.
"루살카의 기운이 느껴져?"
"전혀."
"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
"보통 이런 경우는 결계를 쳐서 마력의 흐름을 차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루살카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근신을 하며 누군가에 의해 펼쳐진 결계에 갇혔을 지도 모른다.
"그럼 왜 스스로 나오지 않는 건데?"
"환룡아. 스스로 근신을 받아들인 걸수도 있지 않냐."
"......귀찮아서 안 나오는 거 아니고?"
"루살카가 너겠냐."
누군가가 결계를 쳤다면 스스로 결계 속에 갇히기를 자처한 것이고, 만약 스스로 결계를 쳤어도 별반 다를 건 없으리라.
"연락 가능한 방법도 없으니...."
결국 우리는 루살카를 찾기 위해서는 직접 발품을 팔아 별궁을 뒤져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별궁이 뭐 이리 많아?"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래. 부지만 합쳐도 내 장원보다 약간 작겠는 걸."
"......어느쪽도 대단하긴 한데, 지금은 참 짜증나기만 할 뿐이군."
"동감이야. ......막상 찾으려하니 엄청 귀찮네."
가문의 부지 전체가 어지간한 소도시 급의 면적인 것이 놀랍기는 하였으나, 그 부지 전체를 뒤져가며 사람 한 명 틀어박힌 공간을 찾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짜증만 날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루살카와도 정령 네트워크 만들어 둘 걸 그랬어."
"루 언니 딸이랑 연결하던 그거? 지난 번에 삼중결계 갇히면서 다 깨졌잖아. 만들었어도 루 언니 결계들어간 순간 박살났을 걸."
".....그랬지."
"나 그거 관련해서 할 말 있는데.... 그냥 나중에 하자. 지금 말하기 귀찮아."
"나도 지금 들어줄 정신없다."
정령간의 교신을 위한 분령 네트워크는 아직 복구하지 못했다.
결계에 갇히면 끊어지는 한계로 인해 굳이 다시 복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마도기어의 성능이 생각보다 뛰어나 분령을 통한 교신을 대체할 정도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보험을 들어둘까.'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하나 만들어 두자. 나는 다시 별궁의 상황에 집중했다.
♪♬
우리의 주변에 펼쳐져있던 미니피닉스들이 재잘대기 시작했다. 가까운 별궁부터 탐색하기 위해 나는 인원을 나눴고, 미니피닉스들은 괴인들의 배치가 끝났음을 전했다.
"그럼 시작하지."
소시지 파티의 시작은 라스푸틴의 성기를 자르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모두, 지금부터 신부 대기실을 찾는다. 실시."
신부를 납치하기 위해, 우리는 결계가 쳐진 신부 대기실을 찾아 별궁 전체를 샅샅이 뒤졌다.
* * *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별궁의 복도.
총검을 든 경비병이 눈을 부릅뜨고 지정된 위치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행여나 별궁에 침입하는 무뢰배들을 제거하거나 비상을 울리는 것.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없기를.'
사고가 나지 않는게 뭣보다 좋았지만, 사고가 나기라도 한다면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에 대해 반감을 가진 훌리건들이 미쳐 날뛰고 있다고...!'
괴수를 조종하는 청화에 대한 이미지는 호감이 99%였지만, 나머지 1%의 비호감이 분명 존재했다.
괴수를 조종하는 이능력으로 유세를 떠는 거냐, 자기 멋대로 도와줄 나라를 정하며 동정을 베푸는 거냐, 도와주는 척 하면서 S급 코어를 훔쳐가는 거냐 등등.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들은 청화가 러시아에 방문해주기를 바랐으나, '운디네 스캔들'이후로 여론은 급격히 들끓었다.
'우리 공주님도 슬슬 결혼하실 때가 됐지만 외국인은 좀.'
러시아의 명망있는 가문의 적자라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뜬금없이 한국에 들어가, 신서울도 아닌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마치 몇 년은 살던 사람마냥 태연하게 한국 음식들을 먹으며 금발의 청년과 데이트를 하는 모습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컬쳐 쇼크를 일으켰다.
'설마 공주님 랜덤채팅 같은 거 하다가 만나신 건가?'
글로벌 시대라고는 하지만 대 괴수 시대이고 하니 외국으로 가기가 어려운 만큼, 타국의 청년에게 환상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가 평소 즐겨보던 한국 드라마에 나오던 남자 주인공도 아주 친절하고 멋진 신사로 나오니까.
'분명 이름이 이승.... 뭐였는데.'
공주님은 그를 만나러 갔다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은 게 아닐까? 수보르프에 의해 철저히 차단되고 있지만, 그는 남들 몰래 봤던 공원 CCTV에 찍힌 공주님의 영상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아니, 그건 공주님이 아니다. 한국에서 공주님을 능욕하기 위한 코스프레야!'
아니면 한국과 러시아 사이를 이간질하여 청화가 러시아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타국의 술수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진짜로 공주님과 한국 청년이 사랑하는 사이인가? 전생에 서로 뜨겁게 사랑하던 둘이 현생에서 전생의 기억을 되찾아, 현생에서 극적으로 만나 못다한 사랑을 나누는 건가?'
......경비병은 홀로 자신이 맡은 구역을 지키며, 온갖 망상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시계의 바늘은 그리 오래 지나가지 않았다.
'아, 거 시간 엄청 안 가네.'
"흐아암."
머릿속으로 온갖 망상을 해도 고작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경비병은 졸린 눈을 끔뻑거리며 다시 눈을 부릅 떴다.
'......솔직히 이 별궁에 침입자 같은 게 있을-'
"......?"
총에 부착된 검날에 금빛의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천장의 조명에 비친건가 싶었지만, 묘하게 따가운 기색은 경비병의 긴장을 본능적으로 일깨웠다.
'위에 무슨-'
"......."
천장에는 문제의 청년이 있었다. 공주님의 엉덩이를 발로 차며, 빛처럼 허리를 흔들던 그 부럽고도 괘씸한 이국의 청년이.
"......! 침입ㅈ-"
"미안하다."
청년은 중후한 목소리로 경비병의 목을 발로 내리쳤다. 경비병은 비상을 울려야 한다는 생각에 스마트 기어로 손을 뻗었으나, 이미 스마트 기어는 어찌된 영문이지 반으로 잘려 있었다.
"아내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니, 이해하라."
청년의 입에서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왔고, 경비병은 번역조차 되지 않은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추측하며 의식을 잃었다.
툭.
청년, 광검은 기절한 경비병을 슬쩍 창문 가까이 놓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무얼. ......부탁하네."
그의 뒤를 따라온 환룡단의 부단주, 봉효는 영체화를 해제하여 기절한 경비병을 유리창 밖으로 들고 사라졌다. 청화단과 환룡단은 협력을 통해 경비병들을 하나 둘 제거해나가며 아나스타샤의 결계를 찾아 별궁을 뒤졌다.
"......이건 분명 범죄일테지."
광검은 반으로 잘려진 스마트 워치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루살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광검이 허공에 만든 단검을 수평으로 던졌다. 막 그를 눈치채고 비상을 울리려던 메이드는 자신의 손목에 걸린 스마트 워치를 정확히 자르는 투검에 비명을 질렀다.
"실력자-!"
메이드는 치마를 들쳐올렸다. 갑자기 무슨 짓을 저지르나 싶어 눈을 감은 광검은 그 사이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메이드에게 검을 휘둘렀다.
채-앵!
"......일반인이 아니야?"
메이드는 이능력자였다. 광검이 당황하는 걸 눈으로 본 메이드는 씩 웃었다가, 광검의 정체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우리 공주님을 노예처럼 부린 쓰레기!"
"......한 가지 확실히 말하자면."
이미 스마트워치는 부숴서 번역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하지만 광검은 메이드의 단검을 자르고 뒷목을 내리치는 걸로 빠르게 기절시켰다.
"다 루살카가 하라고 명령하니까 하는 거다...."
광검은 기절한 메이드를 벽에 눕히며 방문을 몰래 열어젖혔다.
"우와, 공주님 진짜 어떻게 이런 플레이를...."
"처녀가 허리 놀리는 게 아닌데? 진짜 얘랑 지내면서 쌓은 테크닉 맞아?"
"공주님 부럽다.... 저기, 아까부터 문 열고 뭐하는-"
"......."
광검은 자신과 루살카의 사랑을 대형 스크린에 걸고 보는 메이드 집단에 한숨을 푹 내쉰 뒤.
철컹!
빛처럼 빠르게 검을 휘둘러 메이드들을 모두 기절시켰다.
"......."
광검은 영상을 일시정지시키고 다른 방을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별궁 수색을 시작한 지 10분.
아직까지 광검을 비롯한 일행은 루살카의 결계를 찾지 못했다.
* * *
잠입에 최적화된 환룡단이 영체가 되어 건물 이곳저곳을 누벼 사각지대를 찾아내고, 청화단은 경비원들을 몰래 납치해 기절시켜 땅에 묻었다.
때때로는 그 역할이 반대가 되기도 했지만, 역시 잠입은 환룡단이 더 뛰어났다.
"제일 열심인 건 광검이고."
그 선두에 광검이 있었다. 환룡단의 유령들이 경비병의 위치를 알리는 즉시, 광검은 빛처럼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러 경비병들을 기절시켰다.
"그래도 나름 정예라고 아예 모르지는 않군."
"최고 권력자 가문의 궁을 습격한 거야. 그야 당연하지. 흐아암."
나는 창고같은 방에서 환룡과 함께 단원들을 통제했다. 별궁의 어디에 아나스타샤가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별궁 전체를 이렇게 이잡듯이 뒤지며 일일이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루살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이래서야 시간만 버리는 택이네."
분명 별궁 어딘가에는 루살카가 있는데 루살카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도기어로 무전을 날리듯 내 괴인들에게만 들리는 채널로 지시를 계속 내렸다.
"기절시킨 이들은 전부 밖으로 빼내세요. 괜히 죽는 사람 나오지 않게."
"생체 반응은.... 전무. 응, 이제 여기는 하면 되겠어."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궁에는 이제 사람의 흔적이 없었고, 모든 '인간'은 청화단의 괴인들에 의해 별궁 밖으로 집어던져졌다.
"...봉효의 보고. 자기가 수색하는 별궁에는 별다른 흔적이 없대."
"칫. 거기도 없나."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라 별궁도 한 두개가 아니었다.
우리는 한창 류천성과 수보르프의 담화가 이루어지는 본 궁을 제외한 다른 별궁부터 수색을 이어나갔고, 그 진척도는 아직 30%도 채 지나지 않았다.
"무슨 저택 집사랑 메이드들이 경호원보다 더 강해?"
"...경비원들은 다 군인 출신인 것 같고, 집사나 메이드는 다 이능력자들이야. 최소 C급."
수색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수색 장소가 넓기도 했지만, 청소를 하던 메이드나 복도를 걷던 집사들이 갑자기 마력을 사용하며 요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비상을 울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제압하도록 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비상이 떨어져 수색 난이도가 훨씬 올라갔을 것이다.
"잠입 미션도 정도가 있지.... 하아, 유성 저택도 이정도는 아닌데."
은유하의 실체를 알기 위해 유성 저택에 잠입하던 악몽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복도를 돌아다니던 X로이드들의 감시를 피해 온갖 통로와 방을 드나들며 도착한 회장의 방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골골거리는 은하수 회장이 있었고, 그는 실제로 온갖 기계 인형들을 피해 도착한 주인공 일행 앞에 쓰러지며 사망한다.
그리고 인질로서 잡혀있던 은유하가 문을 활짝 열고 본체로 나타나 '내가 회장이다'을 선언. 흑막 늬앙스를 풍기던 은하수 회장은 사실 꼭두각시였고, 은유하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본격적인 히로인 레이스에 참가하게 된다.
그 때 수색하고 다녔던 방만 무려 77개. 지금은 그보다 더 신경을 많이 써야했고, 건물이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 이렇게 가다가는 회담 끝나기도 전에 못 찼겠는데...?"
"쳇. 루살카는 쓸데없이 결계를 쳐서…."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스스로 결계를 쳐버려서 이쪽에서도 마력을 탐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찾자니 시간도 없었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딸가진 아버지들은 다 똑같은 건가…. 하아."
수보르프는 루살카의 곁을 지키고 있었고, 함부로 루살카의 결계를 깨뜨렸다가는 수보르프가 러시아 협회 전체를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다.
광검이 그러했듯, 딸가진 아버지의 분노는 좀처럼 예상하기 힘든 과격함이 있었다.
"일일이 찾을 이유는 없는데....... 쯧. 슬슬 찾을 때가-"
"찾았다는데...?"
환룡단의 단원 하나가 드디어 타깃을 찾은 모양이었다. 나는 환룡에게 전해지는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본 궁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던 C 별궁, 호수로 둘러쌓인 섬의 별궁 꼭대기탑이래. 거기만 들어갈 수 없다고 하더라."
"섬의 별궁이면…."
나는 창문을 열어 밖을 훑었다. 저 멀리 보이는 별궁은 다리 하나로 이어진 호수 위의 성으로 이어져있었다.
"무슨 라푼젤도 아니고."
누가 공주님 아니랄까봐.
아나스타샤가 근신하고 있는 곳은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의 별궁, 그중에서도 첨탑 꼭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