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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58화 (258/1,497)

〈 258화 〉1부 12장 4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파견된 특사단이라도 그 뒷배경은 무시하지 못하는 건지, 러시아는 S급 히어로 라스푸틴을 보내 특사단을 맞이했다.

- 그냥 한국에서 그런 스캔들이 있었을 뿐, 청화를 데려오려면 밉보이면 안 되지 않나?

운디네로 인한 트러블과는 별개로, 서울에 있는 청화라는 존재의 뒷배는 의식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 내 딸이 지금 한국인이랑 놀아났다고 온갖 악의적인 소문이 돌고 있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 아직 그 청년이 한국인인지 불확실하잖습니까!

수보르프가 분노에 휩싸여 한국인으로 의심되는 청년의 허리를 분질러버리겠다고 으르렁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러시아 당국과 협회는 일단 급히 파견된 특사단을 맞이하기 위해 냉철한 이성을 가진 존재를 파견했다.

"러시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자, 안쪽으로 오셔서 몸을 데우시지요. 후후후."

공항에서부터 특사단을 맞이한 검은 로브의 수도승은 방송이 끊기기 전에 그를 보았던 한국인들에게 첫인상 만큼은 호감이었다.

- 존잘....

- 키 봐라. 화권이나 하늘성이나 나름 떡대 되는데 쪽도 못쓰고 올려다보네ㄷㄷ

- 아 나 저 사람 썰 아는데ㅋㅋㅋㅋㅋ 저 사람 세번째 다리가 읍읍

- 운디네 약혼자라고? 이거 우리한테 시위하는 거 아니냐? 운디네 자기 나라 공주님이니까 넘보지 말라고ㅡㅡ

- 솔직히 우리가 남의 나라 공주님 빼내올려고 하는 것 맞지....

그 S급 이능력자가 하필이면 운디네의 약혼자로 선정된 라스푸틴이라는 것도 또다른 의미가 있었지만, 당장 눈앞에 펼쳐진 근육들의 향연을 더이상 볼 수 없게된 시청자들은 긴장과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 회담 들어가면 생방 끝나는 거?ㅠㅠ

- 아…. 이 지옥같은 조합을 더 못보고 출근하다니….

- 풍백 영감은 이 방송 계획한 작가 죽여도 정상참작 해드립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말이죠.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여섯 남자들이 펼친 지옥도는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다.

덕분에 야식업체와 편의점들이 때아닌 호황을 이루었지만, 공교롭게도 특사단이 러시아에 도착해 회담에 들어가는 때와 한국에서 해가 떠오르는 시각이 맞물렸다.

"이승형 씨, 마무리로 한 마디 해주실래요?"

카메라맨 김지화의 부탁에 한껏 수척해진 이승형이 애써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예. ......그러면 시청자 여러분."

말 한 마디 실수로 2천억에 이르는 돈으로 시청자 일부에게 선물하게 된 이승형은 영혼없는 얼굴로 카메라에 마무리 멘트를 남겼다.

"계속 방송을 이어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제 블라디미르 가문으로 가게 되었는데요. 여기서부터는 촬영금지구역이라고 하시네요. 회담 끝나면 다시 방송 키겠습니다. 그 때는 아무쪼록 좋은 결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승형은 재빨리 방송의 마무리 멘트를 남겼다. 카메라맨인 김지화도 방송을 종료했고, 특사단 일행은 저택에 마련된 응접실에 도착해 잠시 대기했다.

"다들 서있지 말고 앉으시지요. 따뜻한 물 한 잔 마시면서 말이지요. 예.... 그 화권이라고 했습니까? 자리가 없으면 제 옆으로 오셔도 됩니다만."

"......."

이승형은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는 라스푸틴의 눈빛이 너무나도 소름끼치고 신경쓰였다.

"후후. 화권 님은 정말 강하신 분이군요. 보는 것 만으로도 ㅅ...흠흠."

눈을 마주칠때마다 눈웃음을 치는 라스푸틴의 태도에 이승형은 표범 앞에 놓인 토끼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자신은 불곰이었으나, 상대는 불곰을 눈앞에 두고도 겁을 먹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안에 가서 말씀을 드리고 오겠습니다."

라스푸틴은 응접실 너머, 살기가 풀풀 날리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불빛 한 점 없는 집무실 가운데, 특사단이 이제 대화를 나누어야 할 상대인 수보르프의 맹수같은 눈빛이 흉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 아키택트 님."

침묵이 맴돌던 가운데, 이승형이 고개를 돌려 운을 슬쩍 떼었다.

"혹시 이거 그 자의 계략입니까?"

빌런 피닉스는 이승형에게 있어 타도와 계도의 대상이었으나, 일단 그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기에 청화단의 간부진이 러시아까지 파견된 것이리라.

이승형이 청화단의 간부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너희가 그냥 러시아에 왔을 리는 없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

아키택트는 선반에 잔뜩 놓인 보드카 한 병을 짚으러 가려다 슬쩍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 자라니, 누구?"

"그, 왜...."

이승형은 주변을 눈으로 흘겼다. 방에는 블라디미르 가문에서 일하는 시중들만 있었으나, 이승형은 그들의 안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마력을 감지했다.

파닥파닥.

이승형은 손을 새처럼 모아 손날개를 펼쳤고, 아키택트는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보이지 않게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야 모르지. 나는 이 늙은이가 나는 꼭 있어야 한다며 데려온 사람이니까."

"아주 짙은 동맹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키택트의 힘이 꼭 필요해서 말이야. 허허허."

"그리고 뭘 그런 걸 신경쓰냐. 너는 그냥 네 임무에 집중해. 하늘성 지키는 게 네 임무잖냐."

아키택트는 궁시렁거리며 선반 위에서 찰랑거리는 보드카 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거 말하는 거 하고는."

"히어로들한테 칭찬해봐야 뭐 좋은 거 나오던가?"

히어로들에게 좋은 소리는 나오기 힘든 입장으로서,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이승형은 차에 타는 순간부터 이어진 2:2의 극한대결 사이에 끼여 혼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라리 치고박고 싸워 승패를 정하면 마음이라도 편할텐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기회는 없을 것이다.

"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집무실에서 나온 라스푸틴이 이승형의 뒤에 서서 특사단을 눈으로 훑었다. 팽팽하게 기싸움을 하던 아키택트와 우사는 서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고, 하늘성만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수께서는 어찌...."

"다행히 만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일정은 잡히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인만큼 어쩔 수 없지요.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니, 부담없이 들어가셔도 됩니다."

특사단은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흘겼다.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오한이 들었으나, 하늘성은 심호흡을 하고 집무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들어가겠네. 다른 이들은...?"

"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굳이 독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원수 님 께서는 여러분 모두를 만나고 싶어하시니까요. 다만...."

라스푸틴의 손이 슬쩍 이승형의 어깨를 잡았다. 이승형은 화들짝 놀라 손을 치우려했지만, 편안하게 웃는 라스푸틴의 미소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적국이 아닙니다.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긴장으로 몸이 굳으셨습니다. 제가 풀어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라스푸틴이 상체를 살짝 숙이며 엄지로 이승형의 어깨근육을 마사지했다.

"사양하지 마십시오. 신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오신 비행 거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예전에 수도원에 있으면서 사제분들에게 피로회복에 좋은 지압법을 배웠는데.... 후후...."

듣는 것 만으로 아이를 낳을 것만 같은 중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이승형은 소름이 돋았다. 다른 특사단 일행은 라스푸틴의 타깃이 자신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

회담의 진행자나 다름없는 류천성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1. 응접실 너머, 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A급 이능력자이자 운디네의 부친 수보르프를 대면하는 것.

2. 수보르프와 하늘성의 회담이 끝날 때 까지 응접실에 남아 라스푸틴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후후후."

라스푸틴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에 일행은 오한이 들었다. 일행이 대표격이 된 류천성은 이승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두드렸다.

"그럼 뒷 일을 부탁하네."

"예?"

류천성은 마력까지 가다듬으며 응접실 너머, 전직 대원수가 기다리고 있을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아키택트와 김지화가 뒤따랐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저는 함께 배석하여 회담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청화단에서 온 세 남자가 호랑이굴로 들어갔다. 이승형은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저들을 그냥 들여보낼 수는 없지. 들어가지, 영감."

"그러세. 미운 놈이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끄응. 고생하시게."

풍백과 우사는 각각 양쪽에서 이승형의 등을 두드리며 청화단 간부들의 뒤를 따라들어갔다.

"그럼 저도-"

"그대는."

턱. 라스푸틴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승형을 마력까지 사용하며 다시 주저앉혔다. 이승형은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그윽한 손길에 전신의 털이 쭈볏 섰다.

"잠깐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

츄릅.

라스푸틴은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어깨를 누르는 손길은 마치 탄탄한 어깨 근육을 주무르는 듯 끈적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승형은 라스푸틴의 손목을 잡았다. 상대가 마력을 이용해 은근히 압박하는 통에, 자신 또한 마력을 끌어올려 라스푸틴의 손목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일으켜, 라스푸틴과 마주섰다.

"오호."

"다시 한 번 더 소개하죠. 저는 한국의 S급 히어로 <화권> 이승형이라고 합니다."

"그럼 나도 다시 소개하지. 나는 러시아의 S급, <라스푸틴>. 이름은-"

"앉아서 얘기하시죠?"

라스푸틴이 악수를 청하는 것을 정중히 사양한 이승형은 소파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지. 후후후."

무안해진 손을 여러 차례 쥐었다 폈다 한 라스푸틴은 이승형의 옆에 앉으려다가, 그의 경계하는 모습에 두 손을 올리며 이승형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시게. 내 생각에는 말이야."

라스푸틴은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이승형과 얼굴을 마주했다.

"우린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

이승형은 그 순간, 진심으로 '혐오'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직감했다. 자신이 방금 느낀 이 감정이, 자신을 향한 피닉스의 마음이라는 것을.

* * *

그 시각, 신서울 유성 일가 저택.

"이승형이 최신형 유성 스마트 워치를 쏜다...? 쯧, 별로 마음은 안 들지만 몇 십대나 팔아주니까 내버려두죠."

은유하는 어느 순간부터 검색차트에 치고 나오기 시작한 '이승형 2천억'이라는 문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봐도 바이럴인데."

자신이 X로이드를 동원해 검색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니, 분명 백가(白家)에서 히어로 이승형을 위한 프로파간다로 띄우려는 것이 분명했다.

"백희아 아가씨 작품.... 쳇. 고객님 때문에 나도 입에 붙었네."

"아가씨라고 부르면 어떤데? 언니야도 맨날 그 아가씨 그 아가씨 타령하잖아."

유하가 내린 에스프레소에 물을 왕창 쏟아 아메리카노를 만든 석하랑은 커피를 홀짝이며 유하의 옆에 다가갔다.

"저 언니야는 어디 있다가 튀어나온 사람인데?"

"선의철 때문에 몸 숨기고 있다가 실각하니까 바로 나온 거야. 쟤, 선의철 계속 집권했으면 이승형한테 정략결혼 당했을 걸?"

"으."

하랑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얼굴로 몸서리를 쳤다. 유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 화권이랑 친하지 않아?"

"친하긴 한데, 자꾸 사람들이 금마랑 엮는다 아이가. 하얗고 파란 불꽃이 섞여서 새로운 하늘을 만드니 뭐니. 어휴."

"......생각만해도 불쾌한 멘트네."

은유하는 에스프레소를 살짝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하랑아. 그거 아니? 유성은 푸르게 반짝일 때 제일 예쁜 법이란다."

"언니야. 불이랑 가장 어울리는 게 뭐겠어? 당근 물 아이가."

"넌 얼음이잖아."

"얼음은 물 아이가?"

자매처럼 친했던 두 여자는 이제 한 존재를 두고 연적이 되고 말았다. 둘은 서로를 향해 서슬프레 웃다가 동시에 피식 웃었다.

"됐어. 너랑 싸우면 괜히 머리만 아프다 얘."

"내도 언니야랑 싸우고 싶지는 않다. 그럼 이건 어떤데."

하랑이 유하가 앉은 의자 옆에 딱 달라붙으며 그의 몸에 엉겨붙었다.

"언니야 나랑 금마 공유할래?"

"......어머. 지금 공동소유하자는 거니?"

"생각해봐래이. 금마는 우리 약점 다 알고 있을 거 아이가? 그럼 1:1은 버거우니까 2:1로 싸우는 기다."

하랑은 큰 다짐을 했다는 것 마냥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유하는 몇 차례 눈을 깜빡이다가 하랑을 위아래로 한 차례 훑고 등을 토닥였다.

"너랑은 좋은 동맹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체? 뭔가 야시꾸리한 눈으로 내를 본 것 같다만, 그건 넘어가줄게."

"그래. 알았어. 그런데 나 말이야."

유하는 하랑이 두 개만 펼친 손가락을 전부 펼치며 환하게 웃었다.

"어쩌면 2:1이 아니라 16:1로 싸워야 할 지도 모르는데, 그건 괜찮니?"

"......."

하랑은 고뇌에 빠졌다. 그리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질렀다.

"금마 지금 뭐하는데! 내 당장 얼굴보고 얘기해야겠다! 암만 생각해도 16명은 아니지!"

"과거가 16명이고, 현재 바라보고 있는 사람까지 17명이지. 아, 걔한테는 과거라도 우리에게는 미래가 되려나?"

유하는 온갖 경우의 수를 따지며 손가락을 접었다 펼쳤고, 하랑은 씩씩거리며 TV의 채널을 돌렸다.

"러시아 방송국은 뭐하는데! 당장 채널 안 잡나?!"

러시아 현지 시각 새벽 1시.

한국에 송출되는 채널은 화면조정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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