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화 〉1부 12장 3
운디네의 일탈로 인한 해프닝은 국제 문제로 번질 뻔 했다.
-도대체 운디네와 스캔들을 일으킨 청년은 누구란 말인가?
운디네를 따라다니며 온갖 일탈을 즐긴 청년의 외형은 금발을 제외하면 순수 한국인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러시아 협회로서는 그런 이능력자를 보디가드로 파견한 적이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
-내 딸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는 자들은 내가 직접 찾아가서 요절을 내주겠다.
당연히 가장 격하게 반응했던 사람은 군부의 최고 권력자 가문의 수장이자 운디네의 부친인 수보르프였고, 그의 부탁을 받고 운디네의 제어를 하기로 되어있던 오라클은 잠적해버렸다.
결국 운디네를 러시아로 입국시키기 위해 강제로 약혼을 진행함과 동시에, 수보르프는 단독으로 한국에 입국하려고 했다.
-한국으로 가는 항공편이 지금 꽉 차서 러시아에서 비행기 들어올만큼 공간이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시기가 한창 피닉스-석하랑-샤오린의 세 SS급 이능력자가 있는 한국땅으로 외국인들이 몰려오던 시기와 맞물려, 수보르프는 공군기지까지 갔다가 눈물을 삼키며 자택으로 돌아가야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이 되고 말았다.
원탁의 S급 히어로를 개처럼 부리며 전라 야외 목줄 플레이를 감행한 대담무쌍한 청년의 정체에 대해서는 정부와 협회가 가장 궁금해했고, 졸지에 한국인인지
조차 불분명한 청년 때문에 수보르프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아니 외국인 커플이 입국 심사도 없이 한국와서 불법 관광한 것 가지고 왜 우리에게 따지고 그러냐.
청년이 한국인이라면 모를까, 외국인이라면 한국은 그저 장소만 제공한 죄(?)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집행관 백희아가 극비 첩보를 입수했다.
-운디네 주인, 실은 한국인이래요.
청년은 사실 순수 한국인이었고, 운디네와 사랑의 도피를 위해 금발 외국인인척 염색까지하며 부산 일대에서 불꽃같은 사랑을 나누다가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했다는 것.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아무리 젊은 남녀가 눈이 맞았다고 하지만, 크흠.
-이건 기회입니다. 잘하면 원탁을 또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요.
집행관이 물어온 정보니 결코 틀린 정보가 아니리라. 정부는 잘하면 S급 원탁 히어로를 며느리로 삼게 되는 쾌거와 함께, 러시아 정계의 최고 권력자 가문과 우호적인 교류를 맺는 일거양득을 얻기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특사단의 파견.
러시아에 이 문제에 관한 긴급 특사단을 파견함으로써 정부는 수보르프의 분노를 잠재움와 동시에 양국의 우호를 다지려고했다.
-그래서 특사로 누구를 보낼 것인가?
집행관 백희아는 모종의 임무 때문에 러시아로 갈 수 없음을 확실히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수보르프의 분노를 감당해낼 깜냥이 없었다.
-그럼 나를 보내주시오.
류천성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했고, 백희아 또한 류천성이 적임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자원자도 없고, 이능력자이니 앞에서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는 사람이다. 호위 겸 감시로 히어로들을 파견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그리하여 류천성은 러시아 특사라는 임무를 맡아, 그를 보좌한듯 따라나선 아키택트와 카메라맨 한 명, 그리고 히어로 셋과 함께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전용기를 타고 도착했다.
"자,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유성의 전용기를 타니 러시아까지 금방 도착하는 군요. 스파시바! 할 줄 아는 러시아어는 이것밖에 없지만, 어차피 번역은 이 워치가 해줄테니 괜찮습니다."
류천성은 자신의 손목에 밴드처럼 감은 검은 스마트 워치를 만지작거렸다. 카메라맨은 교묘히 카메라의 각도를 가렸고, 사람들은 류천성의 손목에 감긴 워치의 이질성에 의아해했다.
"저거 시장이 아니라 유성 광고쟁이가 하나 온 거 같은데."
"서울에 들어가는 물품들 대부분이 유성에서 납품하는 게 아닌가. 시장이라고 뇌물 받은 게지."
두 히어로는 뒤에서 궁시렁거렸다. 아키택트는 벌써부터 러시아산 보드카를 마실 생각에 방송이나 특사관련 문제는 뒷전이었고,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상황을 전달받은 이승형만 죽을 상이었다.
"선배님들, 지금 시청자분들 다 듣고 계시잖아요…."
"다 들으셔야 해. 아이고, 보궐 선거까지 얼마나 남았으려나."
"......애초에 이런 막장을 보고 계신분이 몇이나 될 거라고 그러냐."
"지금 60만 넘겼고 집행관 님도 보고계십니다."
우사는 입에 전자담배를 물고 한 대 피우려다 이승형의 보고에 깜짝 놀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거 임무 상 실적 들어가는 거지?"
"호위에 만전을 기하라고 하시는데요."
백희아는 중계 방송의 매니저로 참가하여 채팅으로 명령을 전달했다. 관심종자도 아니고 왜 이런 극비임무를 전세계에 생방송으로 진행하냐는 악의 어린 채팅이 섞여있었지만, 채팅방을 관리하는 이들에 의해 글이 싹뚝 잘려나갔다.
"후후, 모처럼 해외로 나오니 감개무량하군요. 저기 보이십니까? 러시아의 광경이. 유성의 전용기를 타고 온 덕분에 괴조들을 따돌려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만, 어서 빨리 하늘길이 무사히 열려 예전처럼 되었으면 좋겠군요. 아니면 철도…. 흠흠."
류천성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채팅창에는 온갖 추측과 예상이 난무했지만, 류천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S급인 화권이 국외로 갑자기 나온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SS급인 설화령께서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일본 전역까지 영향력을 미치실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한국은 안전합니다."
류천성은 이승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씩 웃었다. 비록 서울수복작전에서는 직접 맞딱뜨리지는 않았으나, 한 때는 적으로 마주했던 그가 친한 척을 하자 이승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 예. 맞습니다. 저는 지금 이분들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 특혜 아니냐고요? …."
이승형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 특혜라고 하기에는 뭔가…."
"특혜맞지 뭘. 나라에 하나 있는 S급 이능력자인데 이 정도 대우는 받아야지. S급이 어디 뉘집 개이름인가? 어디 외국에는 S급 구해온다고 유정도 바치고 그러는데 말이야."
아키택트는 벌겋게 취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빈정거렸다. 이미 선은 진작에 넘었던 저세상 방송은 잡음이 끊이질 않았고, 졸지에 가운데서 중재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이승형은 죽을 맛이었다.
"아키택트 님. 그게 아니라…."
"어, 온다. 저기 마중나왔네."
아키택트는 일행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헬로! 아, 아닌가? 몰라! 알아서 번역하겠지! 안녕하신가!"
알코올 가득한 인사는 시작부터 심각한 결례를 범하는 것으로 외교의 첫발을 떼었다. 채팅창을 예의주시하던 백희아조차도 뭐라 제지를 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하늘성은 딱딱하게 굳은 정장 사내들에게 중절모를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온 러시아 특사, 류천성이라고 합니다."
우드득.
류천성의 상체가 터질듯이 부풀었다. 대학의 인자한 노교수가 갑자기 서너배 몸집이 부풀어 올라 근육질의 거인이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인사를 말이 아니라 살기로 하시는가? 허허허."
옷이 터질듯한 근육질의 거한이 되었음에도 류천성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가장 먼저 다가온 검은 수도복의 거한은 류천성과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라스푸틴> 입니다. ...러시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운디네>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약혼자입니다."
류천성은 자신의 손을 잡은 라스푸틴이 입술로 혀를 핥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의 시선은 분명히 자신과 특사단을 먹이를 눈앞에 둔 짐승처럼 날카로웠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정말로, 후후."
".......그렇소. 반갑소이다. ...이제 악수는 좀 푸는게 어떠신가?"
두 사람이 악수하는 사이, 하늘에는 푸른 날개의 새 한 마리가 모스크바 상공으로 서서히 날개를 접으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 * *
"좋아. 도착했어요. 슬슬 잠입하도록 하죠."
나는 그들의 목적지인 블라디미르 저택을 향해 뒤따라 날았다. 한국보다 시차가 6시간 느린 만큼, 아직 시각은 러시아 시로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현재 시각 러시아 시 7월 22일 자정.
"슬슬 일어나. 일해야지."
"......귀찮은데. 난 그냥 너한테 계속 안겨있을게. 어차피 너도 아무것도 못하잖아. 큥큥당할까봐."
"이게 진짜."
환룡은 내게 엉겨붙어서 무언가 할 의욕이 전혀 없어보였다. 하지만 환룡의 의욕을 북돋기 위해 설득할 바에는 그냥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나았다.
"내려. 저기 컨테너에서 다 부활시킬 거니까."
나는 인적이 없는 컨테이너에 몰래 숨어들어, 공터에다가 코어를 쏟아냈다. 나와 환룡은 각자의 괴인들을 찾아 코어를 한 곳으로 모았고, 코어로 만든 괴인들을 부활시켰다.
"타올라라!"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기가 무섭게 괴인들이 부활했다. 선두에 선 백금발의 청년, 광검은 금방이라도 루살카를 구하기 위해 뛰쳐나갈 기세였다.
"......."
"왜요?"
"......아니, 음,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을지도."
또 환룡은 혼잣말로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자문자답했다. 나는 그의 허리를 꺾어 그 말뜻을 실토하게 만들고 싶었으나, 이어지는 환룡이 말에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달아나고 말았다.
"음양의 이치에 따라, 혼돈에서 태어난 자가 명하노니. 하늘과 땅이 뒤집혀 섞이고 섞여 태어나는 환(幻). 소생하라."
"......와."
저걸 라이브로 듣게 될 줄이야. 나는 어디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창염개진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네."
"나는 저쪽이 더 취향이지만."
외야가 떠드는 걸 무시하고, 나는 백청영을 위시한 환룡단을 부활시킨 환룡에게 작게 속삭였다.
"영창 직접 하면 안 쪽팔려요? 무영창으로도 되잖아."
"......더 강하게 부활시켜주려면 어쩔 수 없는 걸?"
환룡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부활한 괴인들을 가리켰다.
"영창을 넣어줘야 강하게 부활하잖아."
"아니 그거야 그렇-"
나는 환룡의 입을 틀어막았다. 들었을까? 들었겠지?"
"이보쇼."
상전 알기를 상갓집 개 취급하는 개망나니가 대머리를 반짝이며 내 위에서 나를 깔보고 있었다.
"맨날 무영창이 빠르고 좋니 뭐니 하더니, 사실은 쪽팔려서 우리들 그냥 부활시켰어?"
"......불만있어요?"
나는 역으로 화를 내며 맞받아쳤다. 자기들이 외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외치는 건데, 적어도 영창에 대해서는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있지 않은가.
"아니, 그냥.... 욕 좀 보라고. 으으, 괴인 만들 때마다 저렇게 영창해야 한다는 거 아냐. 싫다."
덕배는 몸서리를 치며 물러섰고, 다른 괴인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내 영창을 풀로 듣고 태어난 서해무기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러고보니 저 A급 중간 정도 되는 수준이었습니다만, 괴인이 되고나서 A+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뭐여?"
"......얘가 신경 좀 써서 사도로 만들어 준 거네. 딱 보니까 알겠는 걸."
"엄한 소리 하지마요. 사람 부끄러워지게. 여기서 한 마디만 뻥긋하면 다 태워버릴 거니까, 앞으로 나한테 영창해달라니 뭐니 하지마요."
나와 창염의 존엄을 위해, 괴인화와 부활의 영창은 이제 사라져야할 폐단이나 다름 없었다.
"영창은 나쁜 문명입니다. 알겠습니까? 이제 더는 영창 없어요."
"그러다가 천가을 꼴 다시 나면?"
"반야심경 외우듯 읊어야지 뭘 당연한 걸 물어요?"
히로인이 죽었는데 그깟 쪽팔림이 대수냐. 내 대답에 덕배를 위시한 간부들은 콧방귀를 뀌었고, 환룡만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작전을 시작하자고요. 다들 자기 소시지는 잘 간수하시고, 우리 둘은 이번 작전에서 총괄만 합니다. 왠지는 다들 알죠?"
"우리가 큥큥 당하면 너희도 다 같이 큥큥 당하는 거야....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
환룡의 말에 25인의 결사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 신부를 납치하고 신부를 위협하는 악의 손길을 잘라낼 막중한 임무를 맡은 신랑, 광검의 표정은 비장하기 그지 없었다.
"그럼 다들 위치로. 죽어도 저희가 회수해서 다시 부활시켜 드릴테니까, 죽을 각오로 광검의 신혼을 지키는 겁니다."
7월 22일 오전 1시. 아마 한국 시각으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그 시각, 라스푸틴의 컷팅식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간과하고 있던 점을 상기해야했다.
원작의 설정은 분명 주의해야할 부분이 많았지만, 이미 이 세상은 원작으로부터 25년도 전에 뒤틀려 있다는 것을.
설마.
여자 탐하기를 숨쉬듯이 하던 라스푸틴이.
그렇고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