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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56화 (256/1,497)

〈 256화 〉1부 12장 2

히어로와 전직 빌런, 6명의 남자 이능력자들을 태운 유성의 전용기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서울시장의 러시아 출장기>라는 이름의 저세상 방송은 잠들려고 하던 전국민이 잠에 들지 못하게 하는 이슈가 되었고, 그들은 공중파 방송을 통해 볼 수 없던 온갖 막장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하게 된다.

뜬금없이 S급 한 명과 A급 넷-카메라맨까지 포함해 다섯-의 방문을 눈앞에 둔 러시아 당국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입국 신청부터 비행기를 띄우는 시간이 불과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백희아가 집정관 유영호라는 빽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마 비행기는 영종도를 뜨자마자 한반도만 빙글빙글 돌며 입국 허가를 기다려야할지도 몰랐다.

"그 사이 우리는 밀입국을 하는 거죠."

나는 내 앞에 안은 소녀에게 계획을 간단히 설명했다. 회색의 소녀는 여전히 삐졌는지 대답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듣고 있어요? 설마 자는 거 아니죠?"

"너 존대하지마. 걔 생각나니까 빡쳐."

환룡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게 으르렁거렸다. 환룡의 말대로 존대는 창염의 특징이었고, 환룡은 내가 창염을 따라하는 것에 상당히 신경질을 부렸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나?"

환룡의 고백을 거절한 이후 어색해져서 말을 높였으나, 환룡은 다시 내가 말을 놓기를 원했다. 나 또한 환룡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만큼, 괜히 또 창염의 컨셉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말 해. 목소리는 듣기 싫지만."

"......목소리는 바꿀 수 있다."

창염의 몸에서 어울리지 않는 걸걸한 내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환룡은 갑자기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 하나만 부탁하자."

"뭔데."

"내가 하는 말 그대로 따라해봐. '나는 지구가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 옆을 지키겠다고.'"

"......너는 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구나."

오마케의 주인공 대사를 그대로 읊으라니 이런 수치스러운 일이 또 어디있단 말인가. 문제는 지금 내가 내는 목소리가 원작 주인공읨 목소리라는 점이다. 내 진짜 목소리는 창염만 들을 수 있었고, 창염은 내게 자신의 목소리와 원작 주인공의 목소리만 낼 수 있도록 몽니를 부렸다.

"싫다."

하지만 거절한다. 설령 지금 환룡의 신세를 져야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나는 환룡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 왜!"

환룡은 내게 안긴 상태로 격하게 투정을 부렸다.

"내가 지금 너 도와주는데도 그러기야?"

"해 줄 수 있는 게 있고 아닌 게 있어. 내가 그 말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 뿐이다."

"씨이, 자꾸 염장지를래?"

환룡은 울컥한 듯 울분을 토하며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건 내 가슴이 아니라 창염의 가슴이니, 내가 입는 데미지는 0이었다.

"소용없다."

"......어이가 없네, 정말. 너 지금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 맞아?"

"당연하지. 성주 이기려면 네 도움이 절실하다. 모든 정령들의 도움이."

"근데 나한테 이리 막대해도 돼? 막말로 나 지금 꼬우면 얘들 부활 안 시켜줄 수 있어."

환룡은 자신의 품에 끌어안은 배낭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형형색색의 코어가 25개 들어있었다. 청화단과 환룡단, 두 집단의 괴인들이 코어가 된 채 환룡의 가방에 들려 이송되고 있다.

내가 레이더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고도에서 하늘을 날고, 괴인들을 부활시켜줄 환룡만 등에 업은 채, 환룡이 모아놓은 코어가 떨어지지 않게 보관.

서울에서 출발한 피닉스 호는 북경 상공을 들려 모스크바로 전속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환룡."

"왜."

"싫으면 청화단 코어만 빼서 내려라."

환룡단이 사라지면 인원수의 절반이 사라지는 꼴이지만, 그렇다고 환룡에게 절박하게 부탁까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칫. 말이라도 해주면 덧나나…."

환룡은 투덜거리면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너 진짜 나쁜 새끼야. 모처럼 내가 싱크로 해주겠다는데."

"난 너랑 싱크로 할 생각 없다고 몇 번을 말해."

"......그럼 이건 어때."

환룡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 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내가 가을이랑 싱크로 할까? 그럼 너 나랑 가을이 동시에 먹을 수 있다? 아니면 미래에서 나랑 싱크로했던 그…이유나? 걔랑 해?"

"......너 내가 유나랑 하는 거 봤냐?"

설마 그 많고 많은 오마케 중에 그걸 본 건가. 환룡은 게슴츠레 웃으며 내 팔에 자신의 엉덩이에 슬쩍 비볐다.

"내 육체도 제법 탄탄하지 않아?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코를…. 에이, 창염 몸이잖아. 됐어, 안 해줄래."

"할 생각도 없다."

그건 이유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씬에서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기에 했던 짓이지, 결코 내 본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환룡에게 욕정이 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어린애 몸으로 무슨."

환룡의 키는 내가 깃들어있는 창염의 몸보다 훨씬 작은 편이다. 심지어 가슴마저 평면에 가까운, 욕정은 일절 나오지 않는 체형이었다.

"......난 다른 사람 몸에 깃들 수 있거든?"

"하지만 기본형은 이 모양이지."

"야. 너, 아니 창염이랑 나랑 얼마나 차이난…. 에이씨, 나 가을이한테 빙의하러 갈래."

"천가을은 내 괴인이다. 괜히 헛짓거리 하지마."

나는 환룡에게 미리 경고했다. 하지만 환룡은 손가락으로 경우의 수를 따지며 나를 살살 약올렸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그 이유나라는 애한테 한 것 처럼 깃들어서 동시에 먹을래? 아니면 하다가 분리해서 3P? 그것도 아니면 네가 여자로 박히길 바라는 거야? 그거 잘됐네. 나는 남자 몸에 빙의하고, 가을이도 남자로 변신하면 앞뒤로도 가능-아얏!"

"쓸데없는 소리를."

나는 환룡을 끌어안은 손의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살을 꼬집었다. 감히 나조차도 아직 탐하지 못한 창염을 탐하겠다니. 개소리도 이만하면 수준급이었다.

"왜? 무서워? 흐흐, 너 나한테 겁 먹었구나?"

"내가 들은 정보가 있지."

나는 잠시 날개짓을 멈추고 환룡을 내려다봤다.

"너, 모택평에게 빙의해서 흑사갈과 재미 좀 본다고 하던데."

"......."

환룡은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누가 그 괴인에 그 상사 아니랄까봐, 백청영이 좋아할만한 외도를 진짜로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흑사갈이랑 연습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했냐."

"가을이나 너…. 에이, 내가 왜 부끄럽게 이걸 이야기해야 해?"

"너는 내 부끄러운 기억 다 봤잖냐."

"그럼 안 부끄럽게 기정사실로 만들면 되지. 미래에 있었던 일이라며. 한 번 더 하기 쉽겠네. 자, 싱크로 하자."

환룡은 계속해서 내게 호감을 어필했다.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아예 화제를 돌려버렸다.

"러시아 도착하면 일단 남자에 빙의해있어라.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라스푸틴이 그렇게 위험해?"

"인큐버스 같은 존재니 말이다. 기껏 동료로 영입했는데 배신해서 적이 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지."

"되게 귀찮은 적이네. 알았어. 나는 부활시켜놓고 어디 잠적해있을게."

역시 환룡은 환룡이었다. 석하랑이었으면 라스푸틴의 영역 밖에서 대기하겠다고 했을텐데, 환룡은 부하들만 보내고 자기는 하지 않으려는게 정말 속이 훤했다.

"넌 루살카가 걱정 안 되냐."

"걱정되긴한데…. 그렇다고 내가 어디 부하들한테 빙의할 것도 아니잖아. 모택평 몸을 들고 올 것도 아니고. 아, 그럼 이번에는 내가 그 라스푸틴인가 뭔가에 빙의해서 아주…. 아. 그랬다가는 내가 큥큥 당하는 구나…."

모택평은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라스푸틴은 S급 이능력자인 만큼 환룡의 육체 강탈도 시도하기가 두려웠다.

"괜히 했다가는 되돌릴 수 없으니 말이야."

"흐음…. 그렇구나. 후후."

환룡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처럼 세이브 & 로드를 할 수 없는 내 상황을 대번에 이해한 것 같았고, 나도 원코인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너 배신하면 전부다 멸망이니까 나보고 도우라는 무언의 압박이잖아. 그렇지?"

"알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도와줘."

"고백 대차게 까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좋아. 시간은 많으니까."

환룡이 고개를 들어 내 볼에 입술을 가져갔-다가 기함하며 얼굴을 떼어냈다.

"윽. 내가 키스하면 창염한테 하는 거잖아. 싫다…."

"......."

환룡은 사실 나쁜 남자 취향이 아니었을까. 모스크바 상공에 다다른 순간까지도 나는 환룡이 내가 좋다고 엉겨붙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피닉스와 환룡이 모스크바 인근에 다다른 그 시각.

블라디미르 가문의 저택에서는 조금 나이가 들어보이는 청년 한 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리 찾아와줘서 고맙소, <라스푸틴>."

수보르프는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과 마주앉은 S급 이능력자, 라스푸틴을 대했다. 국가적으로는 S급 이능력자이자 원탁인 <운디네>를 결혼을 통해 러시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줄 애국자였으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아이를 가진 아버지로서는 여러모로 착잡한 심정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지요."

라스푸틴은 은은한 미소로 수보르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190cm에 이르는 장신은 수보르프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었고, 사제복으로도 숨길 수 없는 우락부락한 덩치는 마치 곰이 한 마리 앉아있는 것 같았다.

"자네에게는 정말로 미안하네. 결혼을 강요하게 되었으니."

"당치 않습니다. 저는 신께 귀의한 자. 원수님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제 명예는 땅에 떨어져도 좋습니다."

라스푸틴은 수보르프가 내어놓은 종이를 들어올렸다.

"파혼이라...."

"여러모로 미안하네. 아직 가정도 꾸리지 않은 자네에게 좋지 않은 기록을 남기게 되어. 내 나중에 반드시 보답하겠네."

수보르프는 고개까지 숙이며 라스푸틴에게 사과했고, 라스푸틴은 종이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는 운디네 님이 걱정되는군요. 원수님의 계획에 따르면, 운디네 님은 계속해서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게 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네. ...아직 딸아이는 듣지 못했지만."

수보르프가 자신의 계획을 말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는 방문을 걸어잠궜다. 어찌 말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도, 차가운 얼음 벽을 세워 소리마저 차단해버렸다.

"설령 말했다고 하더라도 안 들었을 거야. 지금 딸아이는 망할 놈팡이에게 아주 단단히 콩깍지가 씌인 상태이거든."

"아, 그...."

라스푸틴은 항간에 떠도는 불편한 소문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자신이 듣기에도 아주 민망한 소문이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소문의 당사자를 딸로 둔 아버지였다.

"괜찮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거늘. ...내 딸이 한국에서 청년 한 명과 아주 정분이 났다고 말이야."

"......."

"내 딸아이의 처녀를 가져간 것도 모자라서.... 야외에서 개목걸이로 공원 산책을...."

빠득. 수보르프는 이를갈며 주먹을 말아쥐었고, 라스푸틴은 행여나 그 분노가 자신에게 올까 전전긍긍했다. 이능력자로서의 경지는 라스푸틴이 훨씬 높았으나, 딸을 노리는 남자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는 라스푸틴도 견디기 어려웠다.

"혹세무민의 소문일 뿐입니다. 설마 운디네 님께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셨겠습니까?"

"......."

수보르프는 침묵했다. 차마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미 들은 것이 있어, 딱잘라 아니라고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크흠, 알겠습니다. 하지만 안심하여주십시오. 저는 원수 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식사 자리를 한 번 가진 뒤, 운디네 님께서 저를 거부하신 걸로 하는 거지요?"

"그렇네. 그...사유는...."

수보르프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봐도 완벽한 1등 신랑감을 상대로 그럴듯한 파혼의 사유를 꾸며내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외모가 빠지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부족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이능력은 러시아 내에서 운디네와 쌍벽을 이루는 정점이 있는 남자다. 그가 러시아에 애착을 가지지 않았다면, 아마 진작에 다른 외국의 유력 가문에서 혼인을 통해 빼내어갔을 만큼 라스푸틴은 귀중한 인재였다.

"운디네 님의 그...문란하다고 주장하는 불경한 자들을 일거에 교화시킬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그건 바로…."

라스푸틴이 자신의 아래를 눈으로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부부생활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으나, 저의 것이 너무 큰 나머지 운디네 님께서 보자마자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시면 됩니다."

"......그걸 사람들이 믿겠나?"

수보르프는 코웃음를 치며 손을 흔들었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탕녀라며 욕을 먹고 있는 아이야. 그런데 자네와 잠자리를 가졌다가 놀라서 기절했다? 어불성설이지. 하물며 자네가 얼마나 자신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단언컨대."

라스푸틴은 한쪽 손을 자신의 팔뚝 언저리에 놓으며 감싸쥐었다.

"저보다 큰 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라스푸틴의 검은 눈동자는 자신감으로 짙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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