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1부 12장 1
환룡과의 담화 이후.
나는 본격적인 소시지 파티를 위해 총각들을 모았다. 남들의 눈에 띄면 상당히 문제가 되는 작전인 만큼, 히어로들을 배제하고 빌런만 모집했다.
"야! 이런 재미있는 일에 내가 안 낄 수 없지. 나 네 밑에 있는 간부 아니냐. 근데 나로 라스푸틴인가 뭔가 하는 놈 거기 으깨거나 그러진 마라."
"거기까지는 생각 안해봤는데 바라신다면 그렇게 해드릴게요."
"야!!"
재미있을 것 같아서 참가했다고 하는 조덕배. (1/99)
"청화단은 공식적으로 헌터 길드이지만, 단장님께서 만드신 '푸른 깃털'은 청화단에 소속되어있지 않습니다. 태생이 빌런들인만큼 이런 상황에 최적의 요인이라 생각됩니다만."
"사람 중상 안 입히는 선까지는 허용하면 되겠죠?"
"예. 괜히 죽이면 골치가 아파지니까요. 오히려 난동을 피우다 죽은 걸 회수하는 게 더 나을 듯 싶습니다."
노예처럼 굴려지기도 하며 아직 머리를 되찾지 못한 푸른 깃털 9명. (10/99). 이들은 간부는 커녕 이명조차 부여받지 못힌 깃털 A,B,C이지만 적당한 곳에서 요긴히 써먹을 계획이다.
"저도 갑니까?"
"당신은 누가봐도 빌런이니까요."
영종도를 지키는 임무를 완수한 A급 괴인 서해무기. 내가 처음으로 영창까지 더해 만든 괴인이 드디어 나의 작전에서 활약할 때가 되었다. 서해무기는 푸른 깃털들을 움직이는 우두머리 역할이 될 것이다.
서해무기까지 11명. (11/99).
"이걸로 청화단에서는 끝."
"저희는 동원되지 않습니까? 이건 성차별입니다."
"라스푸틴에게 박히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대신 굴복해서 적이 되면 부활 안 시켜줄거니까. 나중에 괴인으로 만들어서 마음껏 박아드릴게요."
"실례했습니다. 저희는 서울을 지키도록 하지요. 그러니 용서를…."
궁성은 참가의사를 밝혔다가 자진철회했다. 다른 이능력자들은 인도행을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라 더이상 동원이 불가능했다.
"제가 옆에서 보좌하겠습니다."
최초 작전의 입안자인 백청영(12/99)이 작전에 참가하기를 표명했다. 라스푸틴의 성기를 잘라 괴인으로 만들자는 엽기적인 아이디어에 모두가 그에게 질색을 했지만, 누구 한 명은 절박한 심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맙군. 정말 고마워."
"별 거 아닙니다. 저도 제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걸요."
작전의 주인공인 광검 허윤환(13/99)은 작전 입안자인 백청영에게 연거푸 허리까지 숙였다. 전직 히어로인 그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기책을 낸 백청영이 그에게는 인류 문명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나 다름 없을 것이다.
"피닉스 님. 환룡단도 동원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마침 다 남자들밖에 없습니다."
"얼굴은 다 가려야 할 것 같은데…."
"첩보조직이라 얼굴은 괜습니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마력 패턴이지요."
"그거라면 괜찮아요. 다 괴인이니까 저랑 환룡이 화속성이든 환속성이든 1만 올려도 달라져 버리는 게 마력 패턴이니까요."
"오호. 그렇다면 협회의 레이더에 걸려도 큰 문제가 없겠군요."
환룡단의 전 동정 단원들도 동원되었다. 백청영은 조직 운영, 코어 생산, 정보 통제 등에 필요한 인력을 제외하고, 잠입에 최적화 된 정예 병력을 뽑아냈다.
그리하여 합류한 환룡단의 단원 11명. (24/99).
"나도 가지. 노서아가 그리 땅이 넓다던데 직접 보고 싶군."
서해무기와 마찬가지로 비쥬얼만큼은 빌런 그 자체인 흑전갈 괴인-시황제(25/99)가 참가 의사를 보였다. 서해무기와 함께 놓고 본다면 어디 특촬물 악당 조직의 고위 간부급 중에서도 원투 펀치를 자랑하는 생김새였다.
"거기에 작전 총괄자인 저. 여차하면 괴인형으로 나설 거지만, 저는 라스푸틴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당연하지요. 피닉스 님이 라스푸틴에게 큥큥 당하면 저희 다 망하는 거 아닙니까."
큥큥 당하다.
이번 작전에 참가하는 이들끼리 통하는 은어로, 말의 뉘앙스만으로고 다들 이해했기에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그 대상이 작전의 실패나 다름없는 아나스타샤에 이어 창염의 피닉스 일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조덕배, 서해무기, 광검, 백청영, 시황제.
네임드라고 할 수 있는 5명과 20명의 수하로 구성된 특공대는 어지간한 국가 하나는 뒤집을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그러면 공주님 구하러 가봅시다. 다크 레기온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지 똑똑히 보여주자고요."
공주를 보쌈하기 위한 악당들은 어둠속에서 암약하지만, 그 시선을 돌리기 위해 몇몇 히어로들이 지원을 나섰다.
"집행관이 그런 작전을 쓸 줄은 몰랐다."
"다 당신 도우려고 하는 거예요, 광검 아저씨. 당신 이제 무조건 광화문에서 루살카랑 결혼 해야한다고요. 알아요?"
"루살카를 구할 수 있다면 그 정도 쯤이야."
집행관 백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고의 지원을 보냈다. 시야 교란을 위한 최적의 인선을 뽑아서.
이른바, <친해지길 바라>.
히어로와 헌터(전직 빌런)들 간의 화합을 위해, 백희아는 기책을 내놓았다.
* * *
<2020년 7월 20일 밤 11시, 경부고속도로.>
"음…."
이승형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야간의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승합차 안에서 불안감에 빠졌다.
"어, 음, 시청자 여러분? 혹시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시나요?"
이승형은 오랜만에 하는 방송용 멘트가 영 어색했지만, 스마트 워치 생방송을 통해 인사하게 될 시청자들을 위해 상황을 설명했다.
"제가 지금 무슨 상황에 놓였냐면 말이죠…. 광고 촬영을 한다고 자다가 갑자기 불려나왔거든요? 예, 집행관 님 명령이 있었는데…."
이승형은 자신의 눈에 씌워진 안대를 가리켰다.
"갑자기 이거 씌우시더니 대뜸 차에 태우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예. S급 이능력자도 집행관 님 명령에 따라야 하죠. 하하…."
과연 이 영상을 보게 될 시청자들은 이승형이 당하는 걸 꼬시다고 할까, 아니면 불합리한 명령을 한 백희아에게 욕을 할까. 아미 전자가 대부분일 것이고, 이승형은 카메라맨을 통해 철저히 망가지라는 언질을 받았다.
"사실 여기 저 말고도 다른 분들도 몇분 납치당했어요. 어, 그러니까."
"크허헝, 푸후우…."
"......."
이승형은 코고는 소리가 나는 뒷 좌석을 엄지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의자를 한 껏 뒤로 젖힌 채, 안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숙면에 들어간 중년 남자와 노인-우사와 풍백이 있었다.
"......선배님들은 방송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시고 계속 주무시고요, 거기에 다른 분들은…."
이승형의 손이 자신의 앞에 앉은 두 남자를 가리켰다. 한 여름임에도 중절모를 고집하는 신사와 생활한복을 입은 금발의 중년이라는 조합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괴랄했다.
"......서울의 시장님, 류천성 님과 <아키택트>...."
"제임스 리."
이름을 잊어버린 듯한 승형에게 카메라맨이 이름을 알렸다. 승형은 시작부터 사고를 쳐서 당황했지만, 아키택트는 괜찮다는 듯 의자 뒤로 손을 흔들었다.
"신경 꺼. 어차피 나도 이름보다 이명으로 하도 많이 불려서 내 이름 같으니. 안 그렇소, 하늘성?"
"저, 그, 그 이름은…."
아키택트가 류천성의 빌런 시절 이명을 언급해버렸다. 연달아 뻥뻥 터지는 방송사고에 이승형은 어쩔 줄 몰랐다.
"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일세. 특별사면 받았으니 문제 없지. <하늘성> 류천성일세. 지금은 임시로 서울 시장을 하고 있지."
"아니, 갑자기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시면…."
이승형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마냥 좌불안석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류천성의 과감한 커밍아웃에 댓글창은 그야말로 폭발했지만, 이승형에게는 불행히도 방송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성, 우리 진짜 가는 동안 술 먹으면 안 되나?"
"이 사람아. 나는 업무차 가는 거야. 해외 출장 중에 술 먹으면 안 되지."
"어차피 마력으로 알코올 분해하면…. 쯧. 거 되게 깐깐하네."
"어쩌겠는가. 흐허허. 공적인 자리는 지켜야지. 설마 누가 업무차 가는 사람 옆에서 막걸리 한 병씩 들이키겠나! 으허허!"
류천성은 호탕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이승형을 지나 맨 뒤에 앉아있던 백발의 노신사를 자극했다.
까드득.
풍백은 분명 자고 있었지만 이를 갈고 있었다. 항상 허리춤에 호리병마냥 달고 다니던 막걸리는 수납공간에 고이 들어간 채 뚜껑조차 열리지 않고 있었다.
"저기…. 류 시장님. 저희 진짜 어디로 가는지 말씀 안 해주실 겁니까?"
"내가 말한다고 뭐 달라지겠는가. 어차피 비행기 타면…. 음, 스포일러했군."
"비행기? 자, 잠깐만."
자는 척 하고 있던 우사가 식겁하며 안대를 집어던졌다.
"선배님! 그, 방송 규칙 상 갈 때 까지는 안대를 끼셔야-"
"넌 좀 다물어봐! 이보쇼, 하늘성! 비행기라니 뭔 소리야! 뭐 강원도나 개성 가서 괴수들 잡는 거 아니었어?!"
"......."
류천성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카메라맨을 향해 헛기침을 하고 시청자들을 향해 설명했다.
"저희가 갈 장소는 오로지 저만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야 그저 여권만 챙기면 되지만, 저는 공무원으로서 해외 출장을 나가는 입장이니 미리 알고 있지요. 혹시나 말씀드리자면 특혜는 아닙니다. 히어로 협회와 정식으로 협의하여 이루어진 출장이며, 다른 히어로 분들은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라고,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다. 승형은 카메라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을 늘어놓는 류천성의 담대함에 혀를 내둘렀다. 카메라맨은 류천성을 촬영하다가 이승형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승형 씨. 이제 이 네 분을 모시게 됐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제가 모셔야 한다고요?"
승형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벙쪘다.
"아니, 그, 지금 자리 보이시잖아요."
승형은 앞뒤 좌석을 가리켰다. 일찍이 서울수복작전에서 히어로측에서 활약했던 풍백과 우사, 그리고 그들을 강남 대로변에서 막아섰던 하늘성. 아키택트야 전선에 나오지 않았지만, 승합차 안에 앉은 이들은 불과 네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칼을 겨누던 적이었다.
삐리리.
승형의 스마트 워치에서 호출이 울렸다. 승형은 손을 더듬어 호출에 응했고, 스크린 너머에는 흰 베레모를 쓴 집행관이 나타났다.
"아, 집행관 님."
[우사, 안대 다시 쓰세요.]
"예...."
썬팅필름이 되어있는 유리창 너머를 훑던 우사는 집행관의 명령에 순순히 안대를 썼다. 마력 덕분에 그들은 차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 낌새는 차렸지만, '비행기'를 탄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희 지금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 맞아요. 그럼 지금부터 임무를 드릴게요. 아, 지금 생방중이죠? 안녕하세요, 국민 여러분. 집행관 백희아입니다.]
땀내나는 남자밭에 한떨기 가련한 흑백합이 피어오르자, 전쟁터를 방불케하던 생방송의 댓글창에 평화가 내려앉았다.
[다들 혼란스러우실 거예요. 갑자기 예고도 없이 생방송으로 이런 상황을 보여드려서. 하지만 저는 우리의 이능력자 분들이 충분히 서로 힘을 합쳐서 난관을 이겨낼 수 있을거라고 믿습니다.]
백희아는 가슴에 한손을 올리며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약 10분 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방송은 잠시 정지됩니다. 광고로 유성의...신형 제품이 소개되니 양해바랍니다. 이 방송은 유성그룹의 협찬으로 진행됩니다. ...하아.]
딱딱한 목소리로 의례적인 말을 하던 백희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실수 아닌 실수에 승형은 화제를 바꾸기 위해 호들갑을 떨었다.
"어, 시청자 여러분? 채널 고정해주시고, 10분만 기다려주세요. 댓글로 남겨주시는 분들 중 추첨을 통해 열 분께 유성의 신형 제품을 제가 선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션은.... 저희가 어디로 갈 지? 시장님. 시청자분들께 힌트 좀 드리겠어요?"
카메라가 류천성을 향했다. 류천성은 다시금 중절모를 가슴에 올려 인사를 한 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하늘을 가리켰다.
"비행기로 아주 가까운 곳을 갈 겁니다. 날씨는 춥지만 사람들의 온정이 가득한 나라죠. 사실 저희가 가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라, 이 땅에 계셨던 원탁의 히어로 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제가 대표로 가는 겁니다. ...후후, 이러면 힌트가 되셨을까요?"
류천성이 은근슬쩍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댓글창이 또다시 폭발하기 시작했고, 이승형은 사색이 되었다.
"어, 음, 그런데 유성의 신형 제품이라는 게 뭔가요? TV인가요? 노트북?"
"신형 스마트 워치일세. 개당 제조 단가가 10억이지."
"......."
이승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것을 끝으로 방송은 일시정지되었다.
10분 뒤.
방송이 켜진 곳은 인천국제공항.
"안녕하세요! 유성그룹의 금지옥엽, 은유하입니다! 윽, 엄청 칙칙하네. 아무래도 방송에 어여쁜 얼굴이 필요할 것 같네요!"
전세기를 대기시켜놓았던 은유하가 두 팔을 벌리며 여섯 남자를 맞이했다. 은유하의 뒤로는 승무원 복장을 한 여성형 안드로이드들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여행을 도와드릴 X로이드가 있습니다! 앞으로 인천으로 여행 가실 때 X로이드 승무원들이 도와줄 거예요. 호호."
"......."
카메라맨은 흘러내리는 선글라스를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달빛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검은자위와 흰자위가 바뀌어있었다.
잠시 뒤.
은유하가 제공한 전용기는 인천국제공항의 활주로를 달려 러시아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