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1부 11장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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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번째 죽음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창염의 신전에 들어온 환룡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죄인처럼 구속되어 있었다.
"정말 지치지도 않네요. 벌써 몇 번째예요?"
창염은 싸늘한 눈빛으로 환룡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요. 당신은 내 걸 못 빼앗는다고. 정신세계에서라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웃기지 마요."
"......정말 욕심만 가득한 돼지새끼네."
환룡은 눈을 희번득 치켜뜨며 창염을 올려다봤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니까 좋아?"
"네. 좋으니까 이제 포기하세요. 그는 오직 저만 가질 수 있는 거니까."
"그럼 그 기억은 왜 나한테 보여준건데?"
환룡이 입술을 깨물며 울분을 삼켰다. 창염이 환룡에게 불쌍하다며 적선하듯 던져준 그와의 기억은 너무나도 행복하고 부러워보였다.
환룡은 미래의 자신에게 질투를 느꼈다.
그리고 미래의 자신과 영생을 약속한 평생의 반려, 그-지금은 피닉스가 된 자를 독점하고 있는 창염이 너무나도 미웠다.
"나도 평생동안 죽지않고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을 원한다고…."
"그럼 그런 사람 찾아요. 괜히 주제도 모르고 남의 것 탐하지 말고."
"주제? 너나 나나 같잖아!"
"다르죠."
창염은 입꼬리를 비틀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피닉스와 똑닮은 검은 독수리 괴인들은 창대로 환룡의 주리를 틀었다.
"나는 테라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고 버텼던 자고, 너는 처음부터 다 포기하고 성주한테 환(幻)을 넘겨줬잖아요."
"......."
환룡은 침묵했다. 창염은 다리를 꼬며 옥좌에 몸을 뉘였다.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도들이 죽었는지 알아요? 죽여도 죽여도 다시 부활하는 사령들이 누구의 하수인이었는지. 심지어 당신, 그걸 뒤에서 보기만 했다면서요. 귀찮아서."
"......."
환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래의 행복을 가지기 위해 기껏 창염의 정신세계로 들어오기는 했으나, 항상 마지막 관문처럼 지키고 있는 창염 때문에 번번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나는, 그러니까…."
"남의 몸에 비집고 들어와서 궁상떨지마요. 당신 삐뚤어진 정신 가다듬은 건 그 사람이 한 것 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중요한 건 당신이 주제도 모르고 저의 사도를 탐한다는 겁니다."
"......."
"말 안 하려고요? 좋네요. 제가 얘기하는 거 밖에 나가서 그대로 전달하세요. 그럼 구속을 풀어드릴게요. 흠흠.'
창염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서서히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음, 미안해요. 당신에게 괜히 말했나봐요. 성주가 온다는 건 이미 출발했을수도 그렇지 않을수도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알려드린 거예요. 그렇잖아요? 언제나 당신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시니까. 다만 그 최악이 당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변수가 생겼던 거죠.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당신의 계획은 언제나 그럴싸하니까. 성주는 겁쟁이잖아요? 무신의 시체가 소멸했어도 계속 의심하면서 출발 안했을수도 있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한 번 더."
창염이 고개를 떨군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당신, 괜히 저 다시 부른다고 큐브쓰지마요. 명심해요. 큐브는 저랑 데이트하는데만 쓸 수 있는게 아니라 이런저런 곳에 사용할 수 있는 거라고요. 큐브 때문에 괜히 다른 여자한테 휘둘릴까봐 못 쓰겠다고요? 어…음…. 지난번 석하랑 때 정도 까지는 이해해줄게요. 저는 가슴이 넓은 여자니까. 대신 직접적인 행위는 금지. 예? 점점 허용 폭이 넓어진다고요? 이러다 하렘까지 용인해주시겠다? 시끄러워요. 자꾸 그러면 다른 거 안 돌려줄 거예요."
창염은 엄한 표정으로 천장을 향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루살카를 구하러 가는 건 정말 고마워요. 불쌍한 아이니까 여러모로 잘 챙겨주세요. 고작 인간 나부랭이 따위에게 사랑을 느끼고 자식까지 낳아서 이제는 인간이 된 건 여러모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저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라서 뭐라고 말은 못하겠네요.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 강해도 성별이라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정령은 무성이라고 해도 당신은 외형을 여성으로 고집하고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일에는 부하들 동원하시고, 뒤에서 그냥 구경만 하세요. 절대 앞에 나섰다가 엄한 일 당하지 마시고. 제발요."
창염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또 계속 싸우게 될 건데 몸 함부로 굴리지 마요. 이건 제가 몇 번을 얘기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신이 다치면 저도 그 고통을 느끼고 있거든요? 진짜 아프니까 죽을 정도로 다쳤다가 재생하는 식으로 싸우지 마세요. 알겠어요? 생사결이니 뭐니 무인의 자존심이니 뭐니 그런 거 다 제 힘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니까, 카르나가 싸우고 싶어하면 다른 애들한테 맡기라고요. 당신은 좀 가만히 있을 필요가 있어요. 알겠죠?"
창염이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환룡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면 환룡.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전달하세요. 이건 당신을 이 세계에서 다시 밖으로 돌려보내주는 조건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환룡은 맥없이 대답했다. 창염은 기대도 안한다는 얼굴로 병사들을 물렸다.
"당신에게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괜히 입 어줍잖게 놀리지 마세요. 그가 물어보면 그냥 조용히 입 꾹 닫고 있으라고요.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잘해왔잖아요?"
"......싫어."
환룡이 눈을 치켜뜨며 창염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사람과는 평생을 함께 살 거야. 만약 그 사람의 마음을 내게 돌릴 수만 있다면, 그는 평생 내 옆을 지키며 영원히 나만 바라보고 살아가겠지. 마치."
환룡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지금 네게 하고 있는 것처럼."
"......푸흐흐."
창염이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그의 사랑은 지금 오직 저만을 향해있죠. 당신이나 다른 여자들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사랑이었을 뿐, 지금은 오로지 제게 향해있는 사랑이라고요."
"너는 그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잖아. 하찮은 인간 따위라며 가지고 놀 뿐이야. 그렇다면."
환룡이 마력을 주변에 흩뿌리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내가 진심으로 그를 빼앗겠어. 나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다른 여자들을 대표해서 말이야."
"과연 남의 몸 빼앗는데에 있어서 스페셜리스트. 이제는 남의 사랑까지 빼앗아 갈 생각인가요?"
"장난감처럼 굴려지는 것 보다 내 옆에서 평생을 함께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환룡이 창염에게 명백히 적의를 보였다. 하지만 창염은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를 부렸다.
"좋아요. 어디 한 번 빼앗아보세요. 하지만 그건 명심하세요."
창염이 환룡을 향해 검지를 뻗으며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가 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순간, 이 세상은 멸망할 거라는 걸."
"웃기지 마셔."
환룡이 고개를 치켜들며 창염을 비웃었다.
"너는 안에서 그냥 똑똑히 지켜보기나 해. 나, 가을이, 그리고 다른 정령들과 인간들이 어떻게 그의 마음을 빼앗는지."
"......아, 건방지네."
창염은 손을 뻗어 허공에서 석장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순간적으로 환룡이 흠칫했지만, 창염은 악동처럼 웃으며 환룡을 도발했다.
"우리 내기해볼까요? 그가 누구를 선택하는지. 돌아가서 한 번 고백해보세요. 사랑한다고. 아, 거기까지 말 할 용기는 없으시나? 푸흐흐."
"......진짜 해봐? 이름을 걸고 약속해."
"......시건방지게, 진짜."
창염은 입꼬리를 비틀었다가 옥좌를 발로 탕 구르며 선언했다.
"태양을 걸고 맹세하죠. 만약 그가 당신을 받아들인다면, 저도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겠어요."
"자신감이 아주 흘러넘치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내가 이 몸을 완벽하게 지배한다는 거야. 내가 너를 가만히 놔둘 것 같아?"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당신을 선택했을 때의 이야기죠."
창염은 손을 뻗어 자신과 환룡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나, 그리고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당신. 분명 그는 어느쪽을 선택하든 마음을 정하면 평생동안 바뀌지 않을 거예요. 그럼 그가 누구를 선택하겠어요?"
"그거야 뻔하지."
둘은 동시에 선언했다.
"나지."
"나예요."
싱긋.
둘은 서로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창염은 환룡을 정신세계에서 쫓아냈고, 환룡은 곧장 의식세계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환룡은 자신의 '신화'까지 걸고 그-피닉스에게 마음을 밝혔다.
다른 이들처럼 죽거나 소멸하지 말고 우주가 멸망할 때 까지 자신의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자기는 창염을 사랑할거라고.
"씨발."
환룡이 생전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욕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그것이 환룡이 피닉스의 의식 세계를 점거한 동안 벌어진 사건의 전말이었다.
* * *
잠시 뒤.
나는 눈가가 퉁퉁 부어있는 환룡과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다. 이전보다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어딘가 서먹서먹한 기운이 우리 둘 사이에 감돌았다.
"우선 창염의 첫번째 전언이야, 피닉스 씨."
"갑자기 씨?"
"남의 고백 대차게 까버렸으면 닥쳐."
"......오케이, 인정."
환룡의 입장에서는 내가 소위 '먹버'를 한 쓰레기가 되었으니, 나는 환룡의 투정을 감내해야 했다.
"그전에 하나만 질문."
"뭐?"
"넌 왜 나 좋아하게 됐냐."
자의식 과잉이 철철 넘치는 발언이었지만, 환룡이 '나'를 좋아하게 된 건 사실이다. 환룡은 창염과 피닉스가 별개의 인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에 대해 호감을 표하고 스스로 싱크로를 하기를 자처했다.
"너 사실은 나를 기만하려 하는 거 아닌가? 창염에게서 나를 빼앗아서 창염을 엿 먹인 다음, 쓸모를 다한 나를 버리려는 거지."
"아닌데."
"그럼 천가을인가? 천가을의 사랑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 나를 공략하려고 드는 건가?"
"그것도 아닌데."
"그럼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한테 잘해준 기억이 없는데."
나는 환룡과의 만남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잠깐 떠올렸다.
"잠에서 일부러 깨워, 일어날때까지 시끄럽게 소음공해 일으키고, 마주쳤을 때는 남자에 빙의했을 때마다 고환을 으깨고, 보는 앞에서 부하들 다 죽여버리고, 장강에 처박은 다음 석하랑 시켜서 물 먹이고, 가을이 꼬시려 들어서 내가 잔소리하고, 일하기 싫은 거 내가 강제로 시키고 있고, 이제는 너 스스로 나 좋다고 고백한 거 면전에서 차버렸는데. 네가 나를 좋아할만한 껀덕지가 1개라도 있냐? 너한테는 미안한데 이거 내가 생각해도 나 완전 쓰레기네."
새삼스럽지만 내가 생각해도 환룡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쁜 남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환룡에게 미안하고 쓰레기같은 짓을 많이 했다.
"이런데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냐? 너 모택평 안에 들어가서 살더니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지?"
"......말이라도 안 하면. 시끄러워.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안 할래. 맘대로 생각해. 하나 확실한 건 이거야."
환룡이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인간의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마. 알겠어?"
"......좋아. 쓰레기가 취향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런 건 아닌데…. 흠. 좋을대로 생각해. 그러면 내가 할 말은 했고, 여기서부터는 창염의 전언이야."
"창염이? 왜?"
굳이 창염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환룡을 통해 전할 이유가 무어 있단 말인가.
"나 메뚜기 잡고 바로 큐브…."
"그것도 전해들었으니까 신경쓰지마."
"큐브 써서 바로 창염 불러내려했는데. 내가 아직 받아야할 게 남아있거든."
"그렇다고 진짜 신경 안 쓰네…."
환룡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좋아. 그래서 내가 너 좋아하는 거야."
"나쁜 남자가 취향 맞지? 그러니까 백청영도 옆에 두고 있지."
"아니라니까. 일단 창염이 내게 남긴 전언에 굳이 나를 통하게 한 이유도 있으니까 잘 들어. 두번 얘기 안해."
"알았다."
창염은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지 두려웠다. 정동진에서 만난지 고작 12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도대체 어떤 말을 전하려 하는 걸까. 혹시 내게 전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게 아닐까?
"1.성주는 너무 급박하게 생각하지 말라. 내가 괜히 말을 꺼낸 것 같다. 2.다음 정령 각성시키기 전까지 큐브 얻어도 부르지 말라. 3. 라스푸틴은 진짜로 조심해라. 4.다치지 말라."
"......? 끝이냐?"
"어. 끝이야. 요약잘했지? 내가 이거 듣는다고 네 시간을-"
"아까는 10분이라며."
"......."
환룡은 잠시 시선을 연못 쪽으로 돌리더니.
"후후."
답을 피했다. 그제서야 나는 환룡의 또다른 면모를 깨달았다.
"너 귀찮아서 말을 잘 안하는게 아니라, 말 실수가 엄청 잦은 타입이었구나?"
"......."
환룡은 침묵했다. 당연히 그 침묵은 긍정의 표시였고, 나는 환룡의 얼굴을 붙잡아 그를 추궁했다.
"너 솔직히 말해. 나한테 얘기 안한 거 또 있지?"
"그, 그런 거 없어…."
"창염은 나한테 불필요한 얘기는 안 해도 거짓말은 안 한다?"
"......."
나는 비교를 통해 환룡을 자극했고, 환룡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나도 아무한테도 얘기 안했어. 대신, 네 정체에 대해 눈치챈 사람이 하나 있는데."
"루살카 구나."
"......."
루살카, 아나스타샤를 구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 * *
나는 환룡에게 볼일이 끝난 즉시, 백청영을 불러 빠르게 작전을 입안했다.
이른바, <소시지 파티>.
"내가 진짜 살다살다 별 짓을 다하네."
한 가정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나는 그의 희생을 강요해야했다.
"미안해요, <라스푸틴>. 어차피 당신 빌런이니까 이해해줘요."
오늘 밤.
우리는 거물 사냥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