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250화 (250/1,497)

〈 250화 〉1부 11장 20

<운디네> 아나스타샤.

업무차 한국을 방문한 그는 부산에서 돼지국밥을 말아먹고 신세계에 빠지게 된다. 이전부터 한국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이 강했던 아나스타샤는 부산 전역의 국밥집에 출몰했다.

-같이 다니는 금발외국인은 누구임?

-몰라. 러시아에서 붙인 호위겠지.

-제가 러시아 쪽 잘 아는데요, 저런 미남 없음ㄷㄷ

-그럼 저 얼굴이 한국인이냐? 근데 쟤들 국밥 오지게 잘 말아먹네ㅋㅋㅋ 암 깍두기 국물 넣어야지!

그 옆을 지키는 금발의 미청년은 언제나 아나스타샤를 따라다니며 꼬이는 날파리들을 차단했다. 청년은 유창한 한국어로 아나스타샤를 부산 전역에 데리고 다녔고, 아나스타샤의 부산 여행은 제법 장기화되었다.

-부산에 있는 모텔 사장입니다. 왠 외국인 부부 하룻밤 자고 갔는데 테러당했습니다….

-요즘 숙소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심하세요. 남자 쪽은 변장을 막 자유롭게 하는 것 같은데, 여자 쪽은 운디네랑 똑 닮았어요.

-알고보니 본인이고.

-러시아에서 홍차 배달 될 소리ㅋㅋㅋ 하루종일 모텔 돌아다니는데 운디네가 떡치고 돌아다ㄴ

전 세계에 12명 밖에 없는 만큼 운디네의 기행은 많은 이슈를 불러모았고, 사람들은 운디네의 남자친구처럼 행동하는 금발 미청년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러시아 보디가드 맞나? 내가 보기에는 그냥 금발로 염색한 동양인같은데?

-부산에서 눈맞아서 데이트 중이라는 것에 제가 가진 C급 코어 겁니다ㅋㅋㅋㅋ

-아아, 택배로 홍차가 배달되면 수보르프 님 당신인 줄 알겠읍니다.

-아니 진짜 떡치고 돌아다니는 거면 미친 거 아녜요? 원탁 히어로가 부산에서 거의 한 달을 넘게 데이트만 하고 다닌다는 건데 러시아에 나오는 괴수는 안 죽임?

처음에는 그저 잠깐인 것으로만 생각되던 운디네의 여행이 장기화되며, 사람들은 운디네와 신원미상의 금발 청년을 찾아나섰다.

자연히 그 소식은 블라디미르 가문의 귀에도 들어갔고, 운디네의 부친인 수보르프는 운디네에게 최후 통첩을 날렸다.

-사흘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약혼을 추진하겠다.

운디네는 돌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사흘 째 되던 날, 부산 해운대 인근에 위치한 모 공원에서 두 금발의 외국인이 야외에서 목줄 플레이를 하며 공원을 산책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수보르프는 그 소문을 듣자마자 자신의 딸이 결코 그런 문란한 여인이 아님을 주장하며 약혼을 추진했다. 그 상대는 러시아에서 정의감 넘치기로 소문난 S급 이능력자 <라스푸틴>.

수도승이라고도 불리우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그와 운디네의 약혼은 러시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운디네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로 돌아가 곡기를 끊고 무언의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가택연금.

아나스타샤는 저택이라는 케이지 안에 갇힌 나비가 되었고, 엄청난 두께의 구렁이가 케이지를 향해 혀를 벌름거리고 있는 상황.

그것이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광검과 루살카 부부의 트롤링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에 백희아가 좋아할만한 MSG를 팍팍 뿌려, 마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각색했다.

사기였지만.

***

"운디네는 부산에서 한 청년과 만나게 돼요. 둘은 첫눈에 서로가 운명의 상대임을 직감했고 사랑에 빠졌죠. 하지만 청년은 평범한 20대 군필자에 불과했고, 둘의 신분차는 극명했어요. 청년이 꾀를 내죠. 자신이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사랑을 위해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다니…. 그런!"

유력 가문의 자제분이라서 그런지 백희아는 루살카에 상당히 감정을 크게 이입했다.

"운디네는 첫날밤을 보낸 청년에게 물었어요. 나와 러시아로 가자. 자신이 다 책임져주겠다. 하지만 청년은 단호히 거절했죠. 내가 너를 사랑하지만 나는 이 조국을 떠날 수 없다."

"세상에…! 아직까지도 그런 바람직한 관념을 가진 젊은이가 있다니!"

사실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버티는 거였지만, 광검이 한국을 떠나지 않던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고집을 꺾은 건 운디네였어요. 청년은 부산 전체를 돌아다니며 운디네에게 자신이 살아온 곳을 소개했고, 운디네는 청년의 순박한 마음에 깊게 감화되었죠. 영상 보셨죠? 국밥에 새우젓 팍팍 넣어서 깍두기 국물 섞어 먹는 거."

"한식사랑까지! 러시아에서 온 분이라 입에도 잘 맞지 않을텐데!"

애초에 외국이 아니라 외계에서 온 분이라 러시아 음식도 입에 맞을지 의문이다. 물론 원본 아나스타샤 양은 순수 러시아인이지만, 그 안에 깃든 루살카는 광검과 1년간 부산에서 임산부로 살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둘은 사랑을 나눴지만 세상은 둘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죠. 운디네가 한국에 있는 동안 본가에서 정략 결혼이 진행되어버린 거예요. 운디네는 이미 청년이 없으면 죽고 못사는 몸이 되어버렸는데."

"정략결혼을 통한 국외 유출 방지…. 저희도 시도는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전략이네요. 저도 그 대상이었고."

"......."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정보가 하나 늘었다. 살짝 울컥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사기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청년은 지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서울까지 무작정 걸어올라왔어요. 청화에게 흑염룡으로 자신을 러시아까지 데려다달라는 부탁을 했죠."

"나라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하다니, 끙."

"......그거에 대한 생각은 알아서 하시고. 그래서 이제 집행관의 고견은 어떠십니까?"

백희아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고뇌에 잠겼다. 나는 백희아가 결론을 내는 시간 동안 초조히 그의 답을 기다렸다.

"......그 청년 분이 각오가 있다면, 정공법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공개 선언을 하는 거예요. 나와 운디네는 사랑하는 사이다. 그런 운디네가 지금 가문 때문에 잡혀간 신세다. 나는 운디네와 다시 만나고 싶다."

"여론을 등에 업자?"

"안타깝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국가적인 도움을 말하는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없습니다. 청년 분이 러시아로 간다고 마음 먹으면 그 절차를 조금 빨리 진행되게 해드릴 수 밖에는."

"쯧."

원탁을 결혼 이민시킬 중요한 찬스임에도, 백희아는 그에 따른 리스크를 짊어지기를 두려워했다.

"역시 무리인가요?"

"네. 이능력자들이 생기면서 러시아에는 군부가 득세하고 있어요. 운디네의 가문인 블라디미르 일가가 그 군부의 정점이죠. ...그렇다고 국제 여론이 좋을 리가 없고."

"사랑에 콩깍지가 씌인 철부지로 보이겠죠?"

"네. 한순간의 불장난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남자분이 러시아로 간다면, 제 사비를 들여서 그분의 호위를 한 명이라도 붙여드릴 의향은 있어요."

"......당신의 뜻은 잘 알겠어요."

백희아의 제안.

여론의 힘으로 명분을 얻자. 막나가는 청화단의 방법과는 달리 지극히 정공법에 가까우나, 내게는 영 탐탁찮은 방법이었다.

"일단 그 청년한테 전달해둘게요. 러시아 전체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사랑하는 아내를 구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

"......뭔가 엄청 비장하네요. 그 청년분, 그 때 청화단 간부로 나왔던 분 맞죠? 그 분 얼마나 강해요? A급? 혹시 제가 모르는 S급 한국인이 있나요?"

"...S급은 아녜요."

SS급이지. 나는 뒷말을 삼켰고, 백희아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안타깝네요. 조금만 더 강하셨다면 다른 방법도 쓸 수 있을텐데."

"다른 방법?"

"예. 그, 군부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운디네의 아버님인 장군 분. 제가 기억하기로는 누차 그런 말을 하고 다닌 걸로 알고 있거든요?"

백희아가 자료를 검색해 내게 보였다.

"내 딸이랑 결혼하고 싶으면 일단 자기부터 이겨보라고. 아니면 남들 다 인정할만한 업적을 세워보라고."

"호오."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나는 백희아로부터 들은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백희아에게 넌지시 운을 띄웠다.

"만약에 제가 운디네 결혼 이민이나 귀화시키면 어떻게 해주실래요?"

"......광화문광장에서 결혼식이라도 진행할까요? 총리 님이 주례서고? 아, 서울 주민 분들이 하객으로 오면 되겠네요. 음…상징성을 위해서는 부산에서 하는게 좋으려나?"

백희아는 상상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몸을 떨었다. 나도 백희아의 생각에 전율이 흘렀다.

'생각해보니 결혼식 올리지도 않았네?'

진짜로 이루어질 것 같아, 무서웠다.

***

현재 내게 당면한 문제는 총 세 가지.

1. 개천광 카르나를 잡으러 인도에 가는 것.

세 가지 중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야할 일이었지만, 나는 김펜릴 사태 이후 혼자서 내 힘만 믿고 나서는 건 지양하기로 했다.

'괜히 카르나 상대로 1:1을 해줄 이유는 없어.'

어떤 의도로 카르나가 석하랑에게 큐브를 적선하듯 던져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카르나의 성격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면, 카르나는 적어도 인도에서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모래 인도 가기 전까지 하루의 시간이 있다.'

백희아가 최대한 빨리 백나로 호의 시동을 켠다고 했으며, 은유하가 이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도로 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그리고 다음 문제. 1번이 당장 급한 메인 퀘스트라면, 2번은 아군 동료의 강화를 위한 서브퀘스트였다.

2. 라스푸틴의 거근으로부터 아나스타샤를 보호하는 것.

설마 루살카가 광검을 버리고 라스푸틴에게 갈아탈 리는 없으니, 나는 석하랑 일가의 평화를 위해 아나스타샤를 확보해야했다.

'보쌈 계획 말고도 다른 아이디어가 나오겠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청화단의 간부진이 머리를 맞대어 지혜를 짜낼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는 그다지 도움이 될 리 없었다. 뭣보다 내가 라스푸틴에 그다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상,

- 그냥 라스푸틴 죽이고 루살카 납치하면 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드니, 그 짓을 저질렀다간 바로 한러전쟁의 발발이었다. 아무래도 아나스타샤의 아버지는 자식 사랑이 대단하신 모양이니.

그렇다면 내가 백나로 호가 뜨기 전까지, 그리고 청화단이 평화로운 해결 방법을 찾을 때 까지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당연히 세 번째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큐브.

중국, 호로관 메뚜기가 지키고 있는 큐브를 회수하기 위해 나는 피닉스가 되어 중국을 방문했다.

* * *

<오후 2시, 북경 환룡단 비밀 거점.>

"이번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직 다른 간부들의 행방은 찾지 못했습니다만."

<봉효> 백청영은 거점에서 나와 가을을 맞이했다. 내게 S급 코어를 정기적으로 수급해주며 환룡을 옆에서 보좌하는 그는 이미 나로부터 세계의 전말에 대해 어느정도 들어 알고 있었다.

"환룡은요?"

"지금 천자 님을 모시고 국토 순회중이십니다. 괴수가 완전히 토벌 된 것은 아닌지라, 근근히 튀어나오는 놈들을 상대로 천자께서 직접 상대하며 힘을 기르고 계시지요."

"쓸데없는 훈련을. 쯧."

하필이면 환룡이 자리를 비웠다. 최악의 타이밍이었지만, 선약도 예고도 없이 찾아왔으니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일.

"그럼 모처럼 온김에, 우선 당신에게 물어봐야겠네요."

"예. 하명하시지요."

다행히 백청영은 말이 잘 통하는 자였다. 외도나 다름없지만, 외도인 만큼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의견도 낼 지 모른다.

"러시아의 공주가 이런 상황인데…."

나는 백희아의 경우와는 달리, 백청영에게'만' 광검과 루살카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전했다. 다른 환룡단의 부하들만 없었으면 말을 편히 하며 명령을 내렸을텐데.

"흠, 음음. 과연. 그런 상황이군요."

"당신은 그래도 러시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싶어서."

"완전히 아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아는 건 알죠. 제 의견은."

백청영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킨 뒤 손날을 그었다.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혼인. 상대 남자가 남자구실을 하지 못한다면 약혼도 파국에 이를겁니다."

"상대는 지구 최강의 물건을 가진 남자인데요?"

"흐흐, 피닉스 님."

백청영이 흑우선을 내리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랫도리가 문제라고 한다면 고자로 만들어버리죠! 그리고 성기는 제게 주십시오. 환룡님께 부탁을 드려 괴인으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흑사갈이 코어를 낳는 파트너 괴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귀찮은 괴인도 제거하고 코어 생산에도 일석이조군요!"

"와, 진짜 미친 생각이네요."

나는 절로 헛웃음이 나와 박수를 쳤다.

"퍼펙트."

그야말로 완벽한 외도였다. 라스푸틴의 성기가 잘려나간다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히 약혼을 파토낼 수 있는 기책이었다.

"채택."

"후후."

백청영, 살려놓기를 잘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