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1부 11장 19
간부는 사랑을 통해 정령으로 각성하고, 정령은 그 사랑이 깊어짐에 따라 '신'에 이르게 된다.
'사랑의 행위를 넣으려는 상술같기는 한데.'
작품의 장르가 미연시라 일부러 이런 설정을 넣은 건지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석하랑과 환룡을 정령으로서 각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석하랑이 사랑을 느낀 대상은 은유하.'
석하랑이 SS급으로 각성했던 당시, 세상 떠나갈 만큼 슬퍼하던 그는 자신을 보살펴주는 은유하에게 사랑을 느꼈다.
'석하랑이 스승으로 여기던 광검을 죽이고, 은유하를 붙여서 옆에서 보듬어주며 마음의 안식처로 만들었지.'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는 이성으로서 '남편'이라는 가족이 되어줬고, 내가 광검을 죽였던 초기에는 은유하를 붙여서 '언니'라는 가족으로 만들려고 했다.
'석하랑의 정령화.'
싱크로의 조건만 해결하면 재능에 관계없이 누구든 신화에 이를 수 있으니까.
'싱크로는 속성이 관계 없어. 무능력자도 SSS급으로 갈 수 있는게 싱크로의 힘이다.'
루살카를 만나기 전의 내 계획은 은유하라는 인간과 석하랑이라는 정령을 싱크로시켜, 석하랑을 정령화하고 은유하를 수속성 신화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다 쓸모없게 되었지.'
이제는 말짱 도로묵은 커녕 마그마속에 처박힌 일장춘몽이 되어버렸지만, 석하랑은 반드시 신화에 이르러야 한다.
괜히 나혼자 깝치다가 이계신에게 참교육을 당한다거나 하는 미래를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최대의 전력으로 이계신과 맞서야 했다.
그래서 환룡도 각성시켰지만, 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삶에 대한 의욕. 일단 그것부터.'
나는 환룡이 보는 앞에서 부하들을 모두 죽여버렸고-물론 가짜였지만-, 폭주시켜 가을을 보내 환룡이 이 세계를 살아가게 할 의지를 만들어내게 했다.
조건만 알면 환룡은 각성시키기가 쉬웠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환룡의 각성은 클리어. 이성애든 가족애든 동료애든, 어느쪽이든 상관 없었어.'
지극히 오랜 세월 남들을 떠나보내며 상처만 입었던 환룡은 이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육체를 버리고 영체가 되었다. 그리고 환룡이 걸어놓은 빗장을 내가 육탄 공격으로 열어젖혔고, 가을이 그 속으로 들어가 환룡을 일깨웠다.
나는 가을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와 기운을 북돋아주라고 했지만, 가을은 무슨 수를 써서 환룡을 각성시켰는지 아직까지 가르쳐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환룡의 사랑은 이제는 가을에게 향하고 있다.
나는....
어쨌든 약 2.5명의 정령은 클리어. 나는 설야와 환룡이라는 두 SS급 정령과 동료가 되었다.
'신화는 또 한 단계 더 들어가지.'
물론 각성을 통해 SS급에 이르렀다고 해도 그 성장이 끝나는게 아니다.
그리고 석하랑은 설야의 힘을 이어받은 반인반령인 만큼, 창염에게 힘을 이어받은 주인공처럼 스스로 '신화'에 이를 수 있다.
'정령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니까.'
인간과의 싱크로를 통해 신화에 이를 수 있는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창염과 설야는 조건만 만족하면 스스로 신화에 이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주인공은 창염이 존재의 소멸로 신화에 이르렀었지.'
창염의 피닉스는 존재의 소멸을 통해 힘을 주인공에게 모두 넘겨주는 것으로 주인공을 신화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석하랑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어.'
2대 설야의 루살카-석하랑 또한 사랑으로 신화, SSS급에 이르렀다.
그 각성의 조건이 가족애.
개인 루트를 타서 평생의 반려가 되거나, 광검과 엮인 가족간의 비사를 해결하는 것으로 석하랑은 SSS급에 이른다.
'내가 석하랑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가능...할까?'
석하랑이 내게 오빠니 여보니 하며 가족으로서의 관계에 매달리는 이유도 내게 가족으로서의 정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냥 형제자매 관계로 신화에 이르게 하면 얼마나 좋으련만.'
석하랑을 아내로 맞이한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다. 석하랑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사랑은 지금 한 사람만을 향해 있으니까.
'그러니까 석하랑은 광검과의 관계를 해결해야해.'
광검과의 부녀지간에 대해서 애증을 끊고 광검 나름의 부정을 가슴으로 이해해야 했다. 광검이 왜 자신이 아버지임을 숨기고 평생동안 주변을 맴돌며 살아갔는가.
'광검이 석하랑에게 원죄를 지었으니.'
많은 플레이어들이 공감하지 못한 부분이지만, 몇몇 플레이어들은 광검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강하게 대변하기도 했다.
'자식한테 증오의 대상이 될까봐 두려운 거야.'
형편상의 이유로 자식을 먹여살릴 능력이 안 될 사람들이 보육원에 맡겼다가, 성공해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자신이 부모임을 밝히지 못하는 슬픔.
광검이 두려워하는 슬픔의 근원은 '석하랑이 자신을 증오하게 될 미래'이다. 그건 석하랑을 진짜로 죽이려 들었던 루살카 또한 마찬가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싶었는데.'
5년 5개월 동안 옆에서 보듬어주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됐다.
루살카는 졸지에 다른 남자의 아래에 깔릴 위기에 처했고,
광검은 아직까지도 딸에게 자신을 드러낼 용기를 내지 않고 있으며,
석하랑은 자존심 때문에 부부가 먼저 자신에게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시간은 화살처럼 달려오고 있다.
하지만 조금, 아니 많이 답답하기는 하더라도 가족 문제는 외야에서 건드릴 일이 아니었다.
게임처럼 선택지에 따른 대화로 해결할 수 없는 감정적인 문제가 하필이면 꼬이고 꼬여버린 것이다.
* * *
"이제 제가 가진 고충을 이해하겠나요?"
나는 내가 가진 답답함을 덕배에게 전부 토로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의 치부를 땅속에 소리지르던 남자의 심정이 지금 내 상태가 아닐까 싶었다.
"그.... 뭐냐."
덕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하나도 이해 안 가는데."
"......어떻게 부하 2호는 외계인 가정보다 더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 하아, 최소한의 공감능력도 없어요?"
"몰라. 그딴 거. 가족이 있던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냐."
덕배는 셀프 패드립을 시전했고,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부부도 좀 그래. 20년 만에 만났을 때 그 짓부터 했다며? 자식 걱정은 안해?"
"하면서도 이야기를 하죠. 제가 옆에서 코칭해주면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너 그런 것도 해주냐?"
"그렇게 해주면 마음의 안정을 얻어서 석하랑이랑 원활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부부가 서로에게 주는 사랑만큼 자식에게 주면 어떨까 싶었지만, 부부는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랐다. 애초에 자식을 낳아는 봤어도 기르지는 못했으니까.
"됐어요. 나중에 진짜 마지노선에 이르면 강제로 테이블 만들어서 삼자회담 시킬테니까. 이건 나중에 광검에게도 직접 말할 거예요."
"그래. 알겠다. 그런데 내가 하나 물어봐도 되냐?"
덕배는 슬쩍 마도기어를 눈으로 흘겨 시각을 확인했다. 우리가 쉬기로 한 10분은 벌써 훌쩍 넘겨버린지 오래였다.
"도대체 그 신화라는 경지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야? 너는 지금 상태로도 핵을 터트리고 다니는데, 그 위의 경지는 도대체 어디까지 강해지는 건데."
"말했잖아요. 신화라고."
"진짜 신이라도 된다는 거냐?"
"능력적으로는요."
마도기어에서 홀로그램을 꺼냈다. 덕배와 나 사이에 놓인 구형의 물체에는 크레이터가 송송 뚫려있었다.
"달이네?"
"네. 저로 설명을 드리는 것 보다 석하랑을 예로 들게요."
딸칵.
내가 손가락을 튕기기가 무섭게 달의 크레이터에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덕배의 눈이 그 어느때보다도 커졌고, 나는 단언컨대 살면서 덕배가 이렇게까지 놀라는 걸 본적이 없었다.
"놀랍죠? 예, 그래요. 신화에 이르면 이런게 가능해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회색의 대지가 녹색으로 물들었고, 달을 감싸는 녹색의 대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금색의 빛과 검은 어둠이 달을 주기적으로 공전하며 낮과 밤을 이루었다. 대기를 타고 흐르는 회색의 부유체들은 실체를 갖추어 생명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달의 내핵에는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다들 '신'인데, 테라포밍 정도는 가능하겠죠?"
"......테라포밍이 아니라 천지창조 수준인데?"
"풉. 덕배 씨."
나는 덕배의 말에 쓰게 웃었다.
"그런 전지전능한 존재였으면 제가 이계신 무서워서 이렇게 살고 있겠어요?"
"......그건 그렇네."
"그리고 이건 일곱 명이 다들 신화에 이르렀을 때의 이야기죠. 지금은 신화는 커녕 넷이나 적이잖아요?"
지상의 그림자가 모두 소멸하고, 금색의 빛이 사그라들며, 땅이 다시 회색빛으로 물들고, 생명이 호흡하던 대기가 사라졌다.
"그러니까 석하랑 문제에 대해서는 당신도 광검 그만 괴롭혀요. 결국에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덕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홀로그램을 손으로 흐뜨릴 뿐이었다.
"푸흐흐, 우선 옛 신을 구하러 가볼까요? 고작 인간 남자한테 깔려서 타락하시기 전에, 구할 방법을 찾으러 가보자고요."
"......그래."
휴식은 끝났다.
나와 덕배는 회의장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다시 계획과 그에 따른 리스크를 토론하며 청화단의 안건을 세웠다.
......결국 <공주님 보쌈 계획>에서 리스크를 줄여나가는 정도가, 우리 빌런 조직 청화단의 한계였다.
* * *
<오전 11시, 영종도 유성 호텔 펜트하우스.>
청화단의 안건과는 별개로, 나는 인도로 가는 배가 제대로 움직이는 지 확인하기 위해 영종도로 나왔다.
"어서와요, 제 섬에."
"국유지인데요."
영종도, 옛 인천국제공항에 백나로 호를 댄 백희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여의도에 있는 제 방이랑 거의 비슷하게 꾸며놓은 곳이에요."
"......유성에서 산 사치품들이 제법 위로 많이 올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곳에 있을 줄이야."
백희아는 자신이 앉은 의자의 메이커를 확인하고 눈쌀을 찌푸렸다.
"왜 유성 제품이 아닌거죠?"
"백희아 아가씨 유성무새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정정할게요! 왜 국산이 아니라 수입제 가구를 쓰냐는 거예요."
"아, 그쪽인가. 미안하네요."
백희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방에 국산은 커녕 유성의 물건은 하나도 없다. 은유하가 손수 골라 넣은 물건들이니까.
"여기 제 방이라서 은 회장님이 직접 가구들 골라주신 거예요."
"당신 혹시 은 회장님이랑 그런 사이...는 아니겠네요. 미안해요. 괜한 소리를."
"은 회장님과는 각별한 사이긴 한데, 저는 납품업자고 은 회장님은 거래처 사장님에 불과해요. 주요 납품 품목은 이거."
나는 품에서 A급 코어를 하나 꺼내 백희아에게 던졌다.
"옛 북한 땅에서 나오는 괴수들을 사냥해서 유성에 우선 납품하고 있어요. 혹시나 당신이 걱정할까봐 미리 얘기해두는 건데."
나는 백희아가 말하려던 것에 선수를 쳤다.
"제가 납품하는 거 정당하게 유성에서 다 세금처리 합니다?"
"그럼 됐어요. 국세 충당에 감사드립니다."
"......저기요, 집행관 아가씨."
나는 소파에 앉은 백희아의 어깨를 짚으며 상체를 숙였다.
"내가 편해요?"
"네. 엄청. 지금은 <피닉스>가 아니라 애국자 청화 님과 만나고 있는 거잖아요?"
백희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활짝 미소지었다.
"제가 여러모로 생각을 해봤는데, 청화 님만큼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분도 없더라고요."
백희아가 내게서 선물받은 마도기어를 누르며 리스트를 하나 뽑아냈다.
"유성에서 지난 달에 '수입'했다고 알려진 S급 코어만 무려 8개. 그 S급 코어들을 재가공하지 않고 SOC에 투자. 우선입찰로 유성이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지만...."
짝! 백희아가 손뼉까지 치며 싱글벙글 웃었다.
"드디어 전국의 국도가 복구될 것 같습니다! 이르면 10월까지! 호호, 역시 예산이 많으니까 인력도 많이 충당되네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
내가 코어를 공급하고, 은유하가 그걸 바탕으로 자본을 투자해, 백희아가 가문의 힘을 바탕으로 온갖 인프라들을 복구해가기 시작했다.
"저기요, 진짜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데, 아키택트 님 한 달만 빌려주시면 안 돼요?"
"안 됩니다. 아키택트는 서울에서 일해야 해요."
덕분에 건축물 복원 전문가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었지만, 나는 아키택트에게 서울부터 우선 복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서울 복구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다른 것부터 얘기하도록 해요. 굳이 이 방을 당신 거로 해준 이유도 그거니까."
".....? 저 여기서 지내요?"
"네. 당신 영종도 출장오면 여기서 지내라고 복구한 건물이에요. 방은 여기서 쓰시고. 지금부터가 본론인데."
"이런 호화로운 방을 그냥 쓰라니, 도대체 무슨-"
"러시아의 원탁 히어로, <운디네> 아나스타샤를 귀화시킬 방법에 대해 논의를 하고자 하는데요."
백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 말, 자세히,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봅시다?"
"......나는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는 걸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외국인 이능력자를 귀화시키는 거에는 그렇게 기뻐해요?"
"그거야 당연하죠!"
백희아는 생각만으로도 기쁜지 연신 헤실거렸다.
"한국의 S급 이능력자가 한 명 늘어나는 거잖아요! 외교적인 문제가 중요해요? 원탁이 한국인이 된다는데!"
"......."
이러니 외국 플레이어들한테 인기가 없지. 그러나 나는 백희아의 심정을 이해했다. 당장 나도 외국으로 돌아다니면서 코어 서리하고 다니니까.
"일단 얘기부터 들어볼래요? 상황이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예. 처음부터 끝까지 듣겠습니다."
나는 광검과 루살카의 상황을 적당히 각색하여 읊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