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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47화 (247/1,497)

〈 247화 〉1부 11장 17

<라스푸틴>.

원작에서는 펜릴에게 잡아먹힌 원탁의 후임으로 추천을 받은 러시아의 S급 이능력자다.

하늘성 류천성과 마찬가지로 단순 신체강화계 이능력을 지닌 그는 원작에서 히어로인 동시에 빌런이었다.

<난봉꾼>. <섹스머신>. <요승(妖僧)>.

원 모티브의 이미지에 맞게,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대물이요, 이 세계에서 단언컨대 '가장 큰' 물건을 가진 남자일 것이다.

히어로로서의 영웅성과는 별개로, 라스푸틴은 그 엄청난 크기의 성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악명을 떨치는 존재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자신의 크기를 바탕으로 밤일도 상당히 즐긴다는 것.

그리고 그 여색을 많은 여자들-특히 히로인들에게 풀려고 하는 빌런 아닌 빌런이다.

라스푸틴의 이능력 때문에, 한 번 박히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매혹'술을 가진 환속성 이능력자가 바로 라스푸틴의 진짜 정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라스푸틴이 지금 루살카의 약혼자가 되었다.

* * *

<그 시각, 러시아 블라디미르 저택.>

아나스타샤는 당장에라도 한국으로 돌아가, 20년만에 만난 남편과 해후를 즐기고 싶었다.

"서방님...."

고작 한 두달 정도의 시간으로는 그간 쌓인 둘 사이의 사랑을 해결할 수 없었고, 피닉스의 코칭에 따라 둘의 금슬은 그 무엇도 끊어낼 수 없을 만큼 단단해졌다.

"본가로 와서 미안.... 하지만 나는 지금 루살카이면서 아나스타샤인 걸...."

하지만 몸 주인의 영향과 빙의 이후 살면서 알게된 가족의 사랑에 루살카는 스스로를 온전히 루살카라고 부르기 힘든 '블라디미르.루살카.아나스타샤'가 되었다.

"설마 정략결혼으로 나를 옭아메려 들 줄은 몰랐어...."

블라디미르 가문의 혼기가 찬 여식이라는 게 화근이었다.

'공주님'이라는 비유가 틀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나스타샤는 명문가의 자식이며 상류층이며 러시아 현 정권의 실세와 인척이었다.

본인의 이능력도 설화령 다음 가는 얼음술사인 만큼, 아나스타샤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사실상, 러시아의 영웅.

원탁이라는 상징성을 생각하면 운디네는 러시아 전 국민의 응원과 찬사를 밭는 여신이었다.

- 그런데 왜 그런 공주님이 한국에서 잠적한 거지? 진짜 한국에 남편 있는 거 아니냐? 단순히 한국 좋아한다는 수준을 넘어선 것 같은데?

- 국부 유출이다!!! 한국이 샤오린부터 시작해서 원탁의 인재들을 하나씩 자기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거다!!!

- 공주님 진짜 한국남자랑 눈맞아서 한국에 뿌리 내리는 거 아냐? 그럼 우리는 어쩌지? 공주님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셔서 우리 전 국토가 괴수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는데??

"서방님이랑 하는데 너무 많이 신경써버렸어...."

청화가 한국을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 뭇 여러 한국인들이 경계했듯이, 아나스타샤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는 움직임에 러시아 국민들의 여론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아빠...! 이건 아니지!"

그래서 블라디미르 가문은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가문도 꿀리지 않고 본인의 외모도 출중하며, 아나스타샤와 마찬가지인 S급 이능력자 <라스푸틴>과 정략결혼을 맺어버린 것이다.

쾅쾅쾅!

얼음으로 굳게 닫힌 문이 노크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아나스타샤는 마력을 더 강하게 뿌리며 문의 얼음을 견고히 했고, 밖에서는 아나스타샤의 부친 수보르프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딸아. 미안하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너를 자유롭게 풀어줬어도 선은 지켰어야...."

"듣고 싶지 않아요. 가세요!"

아나스타샤는 귀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하지만 S급 이능력자의 힘은 수보르프의 한탄을 아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 네가 강제 소환 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미안, 미안하다. 딸아."

"......."

아나스타샤는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았다.

"인간이라는 거.... 진짜 짜증나...."

뚝.

아나스타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방안에서 냉기가 되어 흘렀다.

"흑, 흐윽, 흑."

아나스타샤는 호흡을 헐떡이며 눈물을 참으려했다. 하지만 울컥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 어떡해 진짜...."

<운디네>는 아나스타샤와 루살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 * *

<그 시각, 여의도 피닉스 펜트하우스.>

"루살카가 그걸 따랐어요?"

나는 광검을 불러 소파에 마주앉아 독대를 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폐인이 되어버린 그의 몰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그래. 루살카이면서 동시에 아나스타샤이기에 생긴 트러블이지."

광검은 자조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느낀 바에 따르면, 아나스타샤는 광검의 입장에서 '시댁'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일단 본국에서 불렀으니 집에 잠깐 다녀온다고 해서 보내줬고, 막상 갔더니 정략결혼을 하라고 알려주더라?"

"......그래."

워낙 한국에 오랫동안 있어 러시아 국민들의 불안감은 넘쳐흘렀고, 심지어 각지에서 준동하는 괴수들에 대한 대처도 서서히 근태를 부리게 되면서 민심은 폭발 직전이었다.

"원탁이 괴수를 안 잡고 잠적해버리니까 사람들이 화가 난 거죠."

"...원탁도 개인이잖나. 루살카도 개인의 시간을 즐길 여유가 필요했다.

"너무 즐기시는 바람에 사람들이 뿔이났지만요. 으, 설마 기본적인 일도 하지 않고 부부생활에만 집중할 줄이야...."

'전이마법'도 사용이 가능하니 사나흘에 한 번이라도 러시아에 얼굴을 들이밀었으면 덜했을텐데, 두 부부는 그 한 번이 아쉬워서 침대에서 헤어나오지를 않았다.

"당신이랑 사랑을 나누느라 그랬죠. 음…."

예전의 광검이라면 분명 선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인격이 어딘가 결여되어버린 '괴인'인 만큼, 괴수로부터 사람들이 겪는 공포보다 자신의 성욕과 루살카와 지내는 1분 1초의 행복에 타협해버린 것이다.

"그건 반성한다. 앞으로는 야간에만 하도록 하지. 그래도 정략결혼이라니, 이건 아니지 않나."

광검은 피폐해진 몰골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엄연히 나라는 남편이 있는데."

"죽은 사람이죠."

"네가 죽였지."

광검은 두손으로 얼굴을 덮은 와중에도 나를 노려봤다. 내가 그를 괴인으로 만든 주인이건 말건, 수틀리면 죽여버리겠다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요. 나 아니었으면 평생 삽질만 하다가 아나스타샤가 루살카인 것도 모르고 죽었을 양반이."

광검은 침묵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을 테지만, 광검은 자신의 답답함에 대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끄응. 카르나 잡으러 가는데 당신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카르나를 상대로 광검이 선전할 수 있었을텐데, 광검의 상태가 영 별로였다.

"......나는 지금 여러모로 상태가 말이 아니야."

"그래요. 이해는 해요."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런 때에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나도 답답하고 화가 났다.

"네가 강제로 명령을 내린다면 싸울 수야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광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존심 강한 그가 내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광검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광검. 그-"

"아니지…. 아니야."

짝!

광검이 자신의 뺨을 손으로 때렸다. 흐리멍텅해져있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맑아졌다.

"나약해지면 안 되지. 못난 모습을 보였다. 미안하군."

광검은 자신의 추태를 금방 인정하고 내게 사과까지 했다. 광검이 내게 사과를 했다는 건 나도 조금 놀라웠다.

"루살카가 다른 남자와 약혼한 게 그렇게 충격적이에요?"

"......."

망가지는 건 봤어도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모습은 생경했다. 괜시리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음…. 좋아요. 그러면 이렇게 하죠."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상대가 S급 이능력자? 그럼 더 멋진 남편 감으로 나타나면 되는 거 아녜요."

나는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조언과 명령을 그에게 선언했다.

"뭐해요? 가서 신부 보쌈 안 해오고."

"......흐, 흐하하!!"

광검은 배를 잡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모처럼 사람 생각해서 말한 건데."

"흐하하, 아니, 아니! 웃기지 않나! 나는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히어로였던 자인데!"

광검은 박장대소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 아내를 지키기위해 다른 나라로 잠입해서 사람을 납치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그것도 내가 스스로."

"......각오는 되어 있죠?"

나는 그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루살카가 라스푸틴에게 홀리는 건 나도 바라지 않는 참상이었다.

화륵.

내 마력이 광검에게 스며들어가 그의 코어에 안착했다. 광검은 자신의 코어에 깃든 창염에 안정된 호흡으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게 명령을 받는 괴인의 힘인가."

"멀리서나마 창염을 열어드릴게요. 마음껏 날뛰어보세요."

광검의 눈에 의지가 차올랐다. 그는 창문을 깨고 러시아로 날아가-

"또 분위기 타서 저지르려고 하지?"

"광검 님! 지금 어딜 가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지 못했다.

"에잇! 놔라, 등대! 나는 내 아내를 다시 부산으로 데려올 거다!"

"광검 님 가시면 진짜 국가분쟁 일어난다고요! 단장 님도 왜 광검 님을 부추겨서 이 사단을 만드시는 겁니까!!"

"사단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조금 분쟁 정도...?"

"으아악! 막아! 죽으면 부활시켜주실테니 몸으로 막으라고오!!"

내 뒤를 따라온 간부들은 필사의 각오로 나와 광검을 저지했다.

결국 등대가 미저리처럼 광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통에, 다크 레기온의 <공주님 보쌈 계획>은 일시적으로 보류되었다.

* * *

그 시각, 부산 서면 석하랑 자택.

"아고고...."

석하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활력은 넘쳐 흘렀지만, 이상하리만큼 가슴께가 쓰라렸다.

"내가 어제 뭘.... 아."

석하랑은 이불을 다시 뒤집어쓰며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돌려 방안에 놓인 빈백을 보니,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이불을 팡팡 발로 찼다.

"미친 가스나, 아아악!!"

석하랑은 부끄러워서 어제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가능만 하다면 이 세계의 역사에서 어제 있었던 일만 가위로 오려내 갈기갈기 잘라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다.

"내 다시는 큐브 같은 거 모으나 봐라."

아직도 기억에 새록새록하다.

오빠야, 여보야....

"미친 년. 석하랑 미쳤네, 미쳤어."

천장에서 돌아가는 두 개의 큐브가 은은한 주황색을 뿌리며, 석하랑은 피닉스와 포개어지듯 누운 채 연분홍빛 입술을-

짝!

석하랑은 한손으로 뺨을 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마력까지 실어 턱까지 얼얼했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야는 근데 아무 말도 없이 갔네. 사람 민망케하고 말이야."

석하랑은 마력으로 끌어모은 물로 고양이세수를 했다. 부엌 식탁에는 제법 시간이 오래 지난 것처럼 보여도 온기가 남아있는 아침밥이 한 가득 남아있었다.

"아."

석하랑은 털레털레 의자에 앉았다. 밥 공기도 하나, 수저도 하나.

"같이 먹고 가면 어디 덧나나. 빙시."

조금 울적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차려준 밥이니 감사히 먹겠다는 마음으로 석하랑은 밥을 한숟갈 크게 펐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마력까지 동원해 온기를 유지하도록 한 듯 했다.

"아침부터 급한 일 있어서 간 건가.... 급한 일이 뭐 있다고."

석하랑은 피닉스로부터 선물받은 마도기어를 이리저리 조작해 아침의 이슈를 살폈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인기와 더불어 연관되는 검색어는 <운디네>의 약혼-

"엄마가?"

툭.

숟가락이 맥없이 식탁에 떨어졌다. 잠결이 확 달아나는 소식이었다.

"어, 그러니까, <라스푸틴> 이라는 이능력자가 <운디네>와 약혼...? 협회의 이능력자와 군부의 공주님이 정략결혼을 맺음으로써 국방력을 강화...?"

석하랑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력이 몸에서 새어나와, 피닉스가 차려놓은 밥의 온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설마 이거 때문에 내한테 말도 안하고 간 건가?"

석하랑은 피식 웃었다.

"엄마라...."

어머니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기에, 아무리 루살카가 정령적으로 어머니라고 해도 체감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가 내 엄마 노릇 하는 건가?"

석하랑은 숟가락으로 밥을 퍼올리며 헤실거렸다.

"다음에는 엄마라고 놀려봐야지. 히힛. ......윽."

밥은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것 처럼 딱딱했다.

"......."

석하랑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그래도 엄마랑 아빤데.... 본인들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줘야, 끄으응."

석하랑은 식탁에 고개를 박은 채 머리를 쥐어 뜯었다.

"아니, 그래도 20년 넘게 내 찾아오지도 않은 사람들 아이가.... 씨이, 쫀심이 있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둘이 맨날 부산에서 내만 만나면 도망다니고...."

석하랑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마도기어에서 호출이 왔다. 석하랑은 몸 상태를 단정히 한 뒤, 헛기침을 하며 호출에 응했다.

"무슨 일이시죠?"

[식사하시는 중이셨어요? 미안해요.]

<집행관> 백희아가 아침부터 석하랑을 호출했다.

[식사하시고, 급히 신서울로 올라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네?"

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석하랑은 괜히 또 불안해졌다.

피닉스, 혹시 또 사고친게 아닐까 싶어서.

"오빠 새끼, 진짜. 하아."

석하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출근해야지."

석하랑은 식어버린 밥을 데우기 위해 밥솥 뚜껑을 열었다.

"어?"

- 점심은 시켜먹지 말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 꺼내서 먹을 것.

"......."

냉장고를 연 석하랑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냉동실에 있던 온갖 쓰레기들은 정리되어 있었고, 냉장실은 온갖 종류의 음식으로 한가득 정리되어 있었다.

"오빠고 나발이고...."

석하랑은 결심했다.

"일단 아내로 삼고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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