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1부 11장 16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창염의 피닉스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창염의 피닉스를 세뇌한 존재인 성주 뿐이다.
그런 성주가 원작보다 더 빨리 움직이게 생겼다.
나 때문에.
내가 무신의 유해를 없애는 바람에.
그렇다면 이제 성주는 언제 올 것인가?
모른다.
예언에 따른 2025년 12월 25일은 그저 원작에서 성주가 달에 도착한 날이었지, 특별히 성주의 출발일은 정해져있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이제 하나 뿐이다.'
성주가 늦게 오기를 바라는 것은 요행이다. 어쩌면 이미 방주가 출발했을 수도 있고, 성주가 아직도 무신이 사라진 걸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게 성주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성주는 방주-그러니까 우주선을 타고 오는 진짜 외계인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최소 '5개월 전'에는 관측이 가능하다는 것.
성주가 지구로 오고 있다는 징조는 모를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이제 3개월 남았다는 생각으로, 움직임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4월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석하랑과 환룡을 각성시키지 않았냐.'
나는 죽을 수 없다.
내 속에 있는 창염의 피닉스를 죽일 수 없다. 또다시 성주에게 세뇌되어 다른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괴수로 전락해, 주인공에게 패배하여 운명적으로 소멸하는 미래를 겪게할 수는 없었다.
'일단 성주가 온다는 건 숨기자.'
원탁에서도 2025년에 멸망이 찾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공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2025년이 아니라 2020년입니다!'라고 외치게 된다면, 세계는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구 멸망까지 5년 남았습니다!'와,
'지구 멸망까지 5개월 남았습니다!'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니까.
방주가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를 얻는 즉시, 전세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러러면 먼저 간부들 부터 처리해야 해.'
나는 카르나가 기다리고 있을 인도로 가기 위한 준비로 먼저 서울로 날아올랐다.
* * *
<7월 20일 오전 7시, 여의도 청화단 아지트 회의장.>
창염과 일출을 맞이하며 데이트아닌 데이트를 즐긴 이후, 내 수중에 있던 큐브를 모조리 소모한 나는 청화단의 간부들을 소집했다.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에 급히 소집했음에도 불구하고 간부들은 회의장으로 모였다. 유일하게 뚱해있던 등대가 내게 불평불만을 내뱉었다.
"이제 단장은 접니다만...."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괜히 내가 초조함을 보이면 간부들도 덩달아 혼란스러워지리라. 나는 언제나처럼 평소의 모습을 가장하며 마력으로 등대의 이마를 튕겼다.
"그래서 꼬와요?"
"아뇨....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김지화의 쿠데타는 금방 진압되었고, 나는 석하랑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인도행을 주장했다.
"개천광 카르나가 인도에 있어요. 석하랑에게 큐브를 줬죠."
"왜 하필 인도일까요?"
"큐브를 준 이유는?"
"몰라요. 직접 물어봐야 알지. 석하랑한테도 그냥 선물이라면서 주고 휙 사라졌다고 합니다."
'인도에 있다'는 것만 확인되었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도 단서라도 얻으려면 인도로 가야겠지?"
"보스가 외형을 알고 있다잖아. 그러면 수소문을 하든 뭘 하든 하면 되겠네."
"다른 간부들이 카르나를 잡으러 인도에 올 수도 있습니다. 전면전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세세한 부분에서는 저마다 의견이 있었지만, 청화단의 간부들도 소재가 파악된 카르나를 잡으러 간다는 것에 큰 이견은 없었다.
"그래서 누구를 대동하시겠습니까? 지난 번 처럼 조덕배와 천가을만 데려가실 계획이십니까?"
"아뇨. 조금 달라요."
지난번 환룡을 잡으러 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참가하는 이들이 조금 달랐다. 적어도 나는 지난 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느끼지 못할 바보는 아니었다.
"먼저 <하늘성>이랑 <아키택트>는...."
내가 둘의 이명을 호명하자 아키택트가 먼저 손을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벌써부터 내 생각을 읽고있었다.
"보스. 나랑 하늘성은 서울 대기요. 보스가 얘기하던 대학교 마저 지어야지."
"네, 맞아요. 은하 대학교, 적어도 9월부터는 시작할 수 있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더 당길 수 있다면 훨씬좋고요."
"나야 건물 다 만들어놨는 걸. 하늘성, 이제 그쪽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 단장, 걱정마시게. 나도 예전에는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몸. 9월에 2학기가 아니라, 8월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당겨보겠네. 흐허허."
"잘 부탁해요. 은유하랑 잘 조율하시고, 혹시나 무슨 일이 있으면 서울을 부탁드립니다."
내가 전투원들을 대동하고 서울을 떠날 때면, 언제나 둘은 서울에 남아 본거지를 지켰다.
"하늘성, 미안해요. 자꾸 당신에게 출전 기회를 빼앗아서."
"무얼. 껄껄껄. 대신 대학 만들어지면 대련 기회는 조금 많이 마련해주시게. 히어로들 상대로 싸우다 보면 분명 S급이 될 수도 있을 게야."
"그건 얼마든지 해드릴게요."
전투원인 하늘성이 계속 전장에서 누락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서울의 행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내 손가락이 등대를 가리켰다. 등대는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등대도 대기합니다."
"예."
등대는 자신이 서울에 남는 것을 기대했고, 내 지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저야 어디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등대가 항구에서 떠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단장님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제가 단장 대리로서 서울의 뒤를 지키겠습니다."
"청화단 단장은 당신인데요."
"하하, 한 번 단장은 영원한 단장이십니다. 저야 헌터 길드 청화단의 단장이고, 단장님은 빌런 조직 청화단의 단장 아니십니까?"
"말장난은. 좋아요, 겉에서는 하늘성과 아키택트가 지키고, 뒤에선 등대가 보조합니다."
등대는 이능력적으로 A급까지 성장했지만, 조직원-괴수-괴인-간부진에 이르는 청화단의 모든 전력을 적재적소에 총괄하는 지휘자였다.
"등대의 이능력이면 이제 누워서도 서울 전역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비록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은 아니었지만, 등대의 이능력으로 유사 지휘관 효과를 내는 김지화의 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나중에 백희아와 모의전을 해봐도 되겠네요."
"제가 그 정도 입니까? 흐흐, 이거 언젠가는 집정관은 커녕 단장님도 이기는-"
칭찬을 하기가 무섭게 등대는 헤실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다시 불꽃을 튕겨 등대의 이마를 때렸다.
"경지에 올랐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하늘 위에는 또다른 하늘이 있는 법이니. 아직 당신은 많이 부족해요."
당연히 히로인인 백희아보다는 훨씬 못했다.
"정진하겠습니다.... 그래도 단장님께서 드디어 제게 청화단 전체를 맡기시다니. 감개무량합니다."
"뭘 감개무량까지."
김지화는 금세 시무룩해졌지만 내가 평가한 그의 역량에 대해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제 다른 간부들에 대한 지시를 내릴 차례.
"나머지."
나는 한꺼번에 지시를 내렸다.
"궁성, 팬텀, 흑염룡, 청화는 헌터 길드 <청화단>의 길드원으로서 인도행에 참가합니다."
"저나 가을 님은 그렇다치고, 흑염룡에 청화까지요?"
궁성은 상당히 의외라는 얼굴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전투원으로서 투입된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흑염룡과 청화까지 나선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듯 했다.
"역시 직접 인도로 가실 생각이시군요."
"예. 또 빌런 피닉스로 인도를 방문하면 겉으로는 싸우는 척이라도 해야하니까요."
차라리 청화로서 인도에 방문해, 위급 상황에서 변신하여 싸우면 그만이다. 내가 괴인으로 변한 동안에는 가을이 청화의 역할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청화와 협회의 히어로들이 외국의 괴수들을 퇴치하러 가는 거니까요. 다행히 인도에도 잠들어있는 S급 괴수들이 많답니다."
암속성 S급 야차.
풍속성 S급 킨나라.
화속성 S급 가루라.
아쉽게도 중국에서의 경우처럼 큐브를 가진 괴수는 없지만, 청화가 인도로 입국하기에 좋은 명분은 될 것이다.
"흑염룡을 데려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비밀. 그냥 비밀병기라고 생각하세요. 일종의 조커카드?"
"코어로 만드셔서 데려가면 되기야 하겠습니다만...."
"또 괴수들끼리 붙는 거 볼 수 있는 거야? 좀 기대가 되기는 하네."
......흑염룡을 데려가는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흑염룡이 괴수들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인재인 건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흑염룡까지 지시를 마쳤고, 남은 한 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깍두기죠."
"농담말고. 남냐, 아니면 따라가냐?"
덕배는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그에게 활짝 웃어주며 역할을 부여했다.
"신발끈이 좋으세요, 아니면 지난 번처럼 깔창이 좋으세요?"
"야 이."
"농담이에요."
덕배도 B급에 이르렀고 새로운 전투 스타일을 가지게 된 만큼, 명실상부한 다크 레기온의 간부로서 활약하게 될 것이다.
"당신도 참가해요. 자리는...."
'전투원'으로 참가하는 가에 대해서 묻는 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화물칸이에요."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짐짝 취급이냐?"
"네. 당신만큼 찰진 무기가 없어서 말이죠. 푸흐흐."
굳이 따지자면 덕배는 이능력자보다 <장비> 쪽이 더 적절한 카테고리였다.
"머리가 맨들맨들해서 그런지 그립감이 아주 상당하더라고요. 부하 2호 괜히 힘들게 괴수들 잡으려 들지 말고, 제가 무기로 써 줄 때 경험치 먹기나 하세요."
"하아, 맞는 말이라서 뭐라 못하겠네. 쳇."
내가 중국에서 애용했던 덕배트는 적의 뚝빼기를 깨고 다니기에 정말 안성맞춤인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덕배트를 이용해, 언젠가 히드라의 볼기짝을 때려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 한 명 남았는데."
나는 간부들을 눈으로 쓱 훑었다. 다 나오라고 했더니 건방지게도 방 안에 틀어박혀 술이나 퍼마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광검 어딨어요? 또 죽을려고 하나."
"야. 그 아저씨 지금 속이 말이 아닐 걸?"
덕배가 광검을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광검을 위하는 그의 태도가 영 아니꼬왔다. 자기가 언제부터 광검을 챙겼다고.
"무슨 소리예요? 또 술 쳐먹었어요?"
"......아니, 광검이 술은 마신 건 아닌데."
가을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손목을 두드렸다. 왠지 가을의 숨결에서 미약한 알코올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제 밤 늦게 기사가 났어. 너 어제 밤에 외박해서 전달을 못 했거든?"
"어제? 밤?"
"그래. 너 석하랑이랑 이야기하러 간 때 말이야."
"중요한 회의를 하시는 것 같아 연락은 따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일의 경중도 높다고 하기에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뭣보다 광검 님을 위로하느라...."
가을이 마도기어에서 신문기사를 꺼냈다. 나는 그 내용을 보고 왜 광검이 방에 틀어박혔는지 대번에 이해했다.
- <운디네> 전격 약혼 발표.
"......문자라도 넣어주시지 그랬어요."
알았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텐데. 나는 엎친데 덮친격으로 몰려드는 변수의 파도에 휩쓸려 미아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네가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마침 오늘 아침에 얘기하려고 했다고."
"잘 됐네요. ...그래서 내용은?"
기사가 난 시각은 불과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
"쯧. 루살카가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너무 협회와 간부들에만 신경을 써서 그랬을까. 설마 이런 곳에서 변수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저희가 오늘 정기 회의에서 말씀드리고자 했던 안건이 이것이었습니다만...."
"이래서야 두 문제가 동시에 겹친 택이 아닌가. 끙, 난감하게 되었군."
카르나를 잡으러 가는 것과 일의 경중을 놓고 보면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의 갈림길 정도였지만, 그 서브 퀘스트를 해결하지 않으면 여러모로 아웃인 상황이었다.
"보스. 광검 그 양반, 아내 없이는 못 살 공처가던데? 아내 다른 남자랑 결혼하면 막 폭주해서 미칠 걸?"
"그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라 더 무섭네요."
SS급 괴인이니 내 명령조차 씹어버리고 분노에 가득차 러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리라. 나는 이어지는 기사의 제목들을 눈으로 훑었다.
- <운디네>, <라스푸틴>과 결혼? S급 부부 탄생 예감
- 라스푸틴, "일생의 영광. 평생을 아내로 모시고 살 것."
- [사설] 러시아 군부와 협회의 결합, 국방력 강화를 위한 정략결혼?
"<라스푸틴>?"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라는 말이 나올법한 존재였다. 아나스타샤.루살카.블라디미르와 정략결혼을 맺은 상대는 러시아의 S급 이능력자, <라스푸틴>이였다.
"<운디네> 님과 쌍벽을 이루는 남성 이능력자입니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며 설원의 괴수들을 때려잡는 그 모습은 가히 영웅적이라 할-"
"얘 성범죄자 빌런인데요."
미래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