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1부 11장 15
<2020년 7월 20일 오전 5시, 강원도 정동진 해변가.>
"여기가 루살카가 상륙한 곳인가요?"
창염은 하늘하늘거리는 원피스에 샌들차림으로 내 옆을 걸었다. 나는 괴인형으로 창염과 손을 잡은 채 백사장을 산책했다.
"다른 곳이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네, 오구오구. 말 잘했어요. 앞으로도 제 앞에서만 목소리 내세요."
나는 창염에게 '목소리'를 돌려받았다. 드디어 괴인형의 상태에서도 내 육성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몸으로 이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이상한데."
문제가 있다면 180이 훌쩍 넘는 괴인의 몸으로 창염의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
"이래서야 배구선수 같지 않나?"
"그거야 당신의 진짜 목소리는 저만 들을 수 있으니까요. 푸흐흐."
"독점욕 하나는 대단하군. ...음, 이거 진짜 이상한데. 방법 없나?"
두 사람에게서 같은 목소리가 나오니 몹시 이상하다. 창염은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보이스팩 DLC는 큐브 하나 더 받습니다~ 주머니 속에 두 개 더 있는 거 알고 있는데요."
"장난하냐?"
"농담이에요. 정색은. 목소리 흉내내면 되잖아요. 다른 사람 거."
"어떻게, 아. 음...."
나는 목을 가다듬고 발성을 조정했다. 내가 가장 익숙한 자의 목소리로.
"이렇게?"
"네! 잘했어요. 참고로 그게 당신이 예전에 플레이했던 '주인공' 목소리랍니다."
"......남자주인공이라서 남주인공 밖에 안 되는 건가. 후우."
'내' 목소리가 아니라 '주인공'의 목소리라는 게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괴인형의 외형에 창염의 미성이 나오는건 여러모로 보기가 그랬다. 창염도 내 괴인 상태에서는 남자의 목소리가 나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래서 괴인형에서는 남성형으로 확정한 거네요?"
"그런 셈인가."
"그럼 이제 석하랑이랑도 막 떡치고 그러겠네요? 아주 좋다고 가슴 만지작거리시던데."
...이래서 불렀다. 석하랑이 큐브의 무드에 홀렸듯, 나도 어느정도 영향을 받아버렸다.
당연히 내 안에 있던 몸주인은 그걸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봤을 터.
"불가항력이다. 나도 석하랑이 큐브를 두 개나 구해올 지 몰랐다고."
"그렇기는 한데 당신, 그 뒤로도 마음껏 만지작거렸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돌아서지않냐. 석하랑이 SS+ 오르면 진짜 나 질 수도 있어."
"어디까지나 '봐주면서 싸운다'는 가정이잖아요. 대련이나 모의전이니까."
죽일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다만 석하랑은 죽여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적으로 돌아서면 상성적으로 최악의 적이다.
"애초에 석하랑과는 한 배를 탄 몸이다. 이제는 엄연히 '동료'야."
"남의 걸 탐하려는 도둑고양이를 저는 어떻게 봐야하는 걸까요. 뭐? 오빠가 여보? 푸흐흐, 그거 진짜 건방진 말이네."
"걱정마라. 나는 너만 바라보고 살고 있으니."
"그런 사람이 그 껌딱지 조물딱거렸어요? 어이가 없어서."
삐졌다. 아주 제대로 삐졌다. 아마 조금만 늦게 불러세웠으면 또 중요한 순간에 정신세계에 납치되어 영원히 고통을 받았거나, 아니면 큐브를 사용해도 아예 안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가슴 만져주랴?"
"변태. 하지만 나중에요. 지금은 별로 제 몸을 허락하고 싶지 않아서요."
"쩝. 아쉽군. 모처럼 만져 볼 기회였는데."
"......푸흐흐."
창염은 나를 비웃듯 웃었다. 나는 괜히 울컥해서 창염과 잡은 손을 살살 손으로 쓸었다.
"너, 내 테크닉을 무시하지마라. 내가 이래봬도 히로인 16명을 이 손 하나만으로 몇 번을 가게 만든 테크니션이야."
"예, 예, 잘 알고 있으니까 다음에 꼭 부탁드릴게요. ......흐흥♬"
창염은 콧노래를 부르며 내 손장난에 손을 잡고 흔드는 것으로 응했다. 우리는 백사장을 거닐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카르나의 위치가 특정되었다. 석하랑이 인도에서 만났다더군."
"120 유녀 가슴 쪼물딱 거린 변태."
창염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매도했다. 하지만 나는 저 웃음 뒤에 넘실거리는 살기가 석하랑을 향하지 않도록 달래야 했다.
"......그거 연비 최저 폼 아니냐. 카르나 본체가 어떤지 너도 알 잖아?"
"뭐요. 세로가 가로로 바뀌는 그거? 좋으시겠어요? 아주 사이즈별로 주물주물거려서."
"내가 주물주물 거리고 싶은 건 넌데."
창염은 침묵했다. 나는 괜시리 부끄러워져서 헛기침을 했다.
"그...뭐냐. 솔직히 석하랑이든 카르나든 다 만져본 가슴아니냐. 내가 아직 만져보지 못한 가슴이 하나 있거든?"
"흐응. 누구요?"
"너."
"아하하!"
창염은 시원하게 배까지 잡으며 웃었다.
"그렇게 저를 만지고 싶으세요?"
"만지는 걸로 끝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흐흥, 그러시구나. 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여자 가슴을 만져서 저랑 데이트권을 따내고 싶을 정도로 저를 만지고 싶으신 거구나. 알겠어요. 그정도라면 제가 이해해드리죠."
드디어 창염이 화를 풀었다. 나는 십년감수한 마음으로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제 인도에 카르나 잡으러 갈 생각이다."
"개천광은 꼭 잡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역시."
제일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알았다. 설정적으로 생각하면 창염이 가장 싫어할만한 존재는 설야도 절풍도 아닌 개천광일테니.
"하나의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는 법. 자, 이 세계의 유일한 태양은 누구죠?"
"당연히 창염의 피닉스지."
"정답! 후후, 그래요.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응당 저를 태양으로 모셔야지요."
개천광, 하늘을 여는 빛.
누가봐도 개천광 쪽이 더 태양에 가까운 존재일 것 같지만, 창염은 주구장창 자신이 태양이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나는 창염의 편이다.
"걱정마라. 개천광과의 전투에서 나 혼자 싸우지는 않을 거다. 한국 히어로들이 일단은 아군이 되었으니, 그들을 이용하는 수밖에."
"그건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은 개천광을 '각성'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그렇지. 정령이니까. 이것 참, 어쩌다보니 거꾸로 공략하게 돼서 희안한 조건들이 나오는군."
"그래도 점점 공략하기 쉬운 정도로 단계가 내려가잖아요. 이제는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되니까."
창염의 말마따나 지금부터는 각성시키기 훨씬 수월했다. 망할 놈들이 연합을 해서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개천광을 각성시키고 동료로 들이면 수적으로는 4:3의 고지를 점하게 된다.
"그런데 왜 카르나는 석하랑에게 접근했을까."
"모르죠. 그거야 본인에게 직접 묻지 않는 이상. 인도에 있다면서요. 종교에 귀의라도 한 거 아녜요? 막 도 닦으면서 명상하는 수도승의 삶을 살고 있는 거죠."
"세계 정복을 하려는 간부 중의 인데? 카르나가 어떻게 전면에 나오는지 모르나?"
"알죠. 가웨인 상대로 1:1로 붙어서 외치잖아요. '넌 아직 약하다! 강해져서 돌아와라!'"
그게 2022년에나 일어날 미래다. 가웨인과 카르나는 정면으로 붙었고, 카르나는 승기를 잡았음에도 가웨인을 놓아주며 더 강해지라는 말과 함께 도망쳤다.
그 전투를 계기로 가웨인이 SS급에 이르게 되지만, 이 상황에서는 어찌 될 지 모른다. 가웨인은 막말로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SS에 오를테니.
"자기랑 동격이나 위의 경지랑 붙기만 해도 각성할텐데. 아, 아쉬워라. 경험치 1남기고 지금 몇 년을 S급에서 머무르는 걸까요."
"그래서 내가 지금 가웨인이랑 싸우는 건 철저하게 피하고 있지 않냐."
약 수 년 간 원탁의 우두머리로서 전면에 나서는 걸 지양하다가 처음으로 싸운게 대 카르나 전이었다. 만약 가웨인이 체면을 차리지 않고 광검과 맞싸웠다면, 한 명은 정체가 탄로나고 한 명은 SS급으로 각성했을 것이다.
"그랬던 분이 영국에 민트초코로 테러를 해요? 혹시나 싸웠으면 어쩔 뻔 했어요."
"그럼 무조건 도망쳤지. 내가 가웨인이 민초 좋아하는 지 어떻게 알았겠냐? 히로인도 아닌데."
"그건 그렇네요. 뭐…해둔 얘기가 있으니까 이제 몸 함부로 굴리면서 싸우시진 않을테고."
딱.
피닉스가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만들어냈다.
32개의 불꽃.
"큐브?"
"네. 데이트도 중요하지만, 모처럼 당신에게 이야기할 게 있어서 시간 좀 쓸게요."
"가슴은?"
"다음 기회에.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해요."
피닉스가 불꽃 두 개를 꺼내 지웠다.
"한국에 있던 둘은 제거. 하나는 천가을의 부활에 지원용으로, 하나는 제가 나타나는 걸로 사용했죠."
남은 불꽃은 30. 피닉스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석하랑이 가져온 두 개의 큐브가 여기."
화륵. 불꽃이 사라짐과 동시에, 내 품에 있던 큐브가 한 번에 사라졌다.
"아직 너한테 쓴다고 얘기도 안 했는데."
"나온 김에 없애는 거예요. 또 다른 여자한테 헤벌레하기 전에 미리 그런 일이 없도록 차단하는 거죠. 대신 그만큼 서비스 해드릴게요. 나중에."
"......."
나중에 누가 석하랑이 가져온 큐브 어쨌냐고 물어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바로 없앴다고 변명해야겠다. 남은 불꽃 28. 피닉스가 손가락을 제법 세게 튕겼다.
"그리고 당신이 없앤 여섯."
"뭐?"
내가 언제?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창염이 답했다.
"절풍, 지륜, 마암룡. 셋이 당신을 상대하면서 큐브 여섯 개가 박살났어요. 궁극기 맞고 회복하면서 하는데 한 번, 그리고 괴수화를 자의로 해제하는 데 한 번."
"......아, 그 때?"
어쩐지 너무 쉽게 마력을 회복한다 싶었다. 코어를 사용했거나 싶었지만, 설마 큐브를 각자 두 개씩 사용하면서가지 나를 이기려들지는 몰랐다.
"그럼 그 때 잡았으면 걔들 싹다 이겼겠는데."
"도망가는 결과는 같았을 거예요. 당신은 결계에 봉인당하고, 봉인당한 동안 셋은 도망쳤겠죠?"
"......뭐, 그렇다 치지. 좋아. 남은 큐브는 22."
벌써 ⅓ 가량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 더 지워야할 것들이 남아있다.
"순서상으로는 중국에서 없앤게 먼저인 것 같은데."
"예. 당신이 흑사갈을 잡고 얻은 큐브. 그건 여기서 저를 부르는 데 썼죠. 석하랑이 구해온 큐브는 제가 방금 없애버렸고. 그러므로 당신에게 큐브는 지금 없는 거예요."
불꽃이 하나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남은 불꽃은 21.
"뭐…. 문제는 없어. 이미 히카리는 연구를 끝냈으니까. 교차검증이 필요하다고 해도, 소재를 알고 있는 큐브가 무려 셋이나 있다."
모택평이 스위스 은행에 맡겨둔 것 하나.
호로관 메뚜기가 지키고 있는 것 하나.
그리고 뉴클리언의 것 하나.
"셋 다 지워버린다고 가정하면 이제 남은 건 18? 아, 아니지. 무신의 유해에서 빼낸 것 까지 17개구나. 벌써 40%는 해결됐네. 17/32, 3/7. 진척도는 양 쪽 다 비슷하구만."
"......예. 그런 의미에서 말이에요."
피닉스는 열 손가락을 펼쳤다.
"앞으로 남은 5년 5개월 동안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뭘 어떻게 하겠어. 최대한 빨리 남은 네 정령을 각성시키고, 큐브 모아서, 힘을 길러야지."
"예를 들어서 5개월 안에 모두 모으면, 남은 5년 동안 힘을 기를 것이다?"
"그래."
창염은 손가락을 튕겼다. 불꽃 하나가 색깔이 붉게 변했다.
"파란 것 중에 하나가 붉은 게 있으니 꼭 폭탄의 뇌관 같은데."
"맞아요. 세계 멸망의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신호탄이죠."
창염은 고개를 숙인 채 모래사장을 발로 툭툭 건들였다. 나는 뜸을 들이는 창염의 태도에 괜시리 불안해졌다.
"......왜?"
"무신의 유해. 당신은 그의 심장에 박힌 큐브를 적출하고 유해를 불태웠죠. 기억나요?"
"그랬지."
"......당신이 시한 폭탄을 누른 거예요. 나는 진짜로 아무 잘못 없어요. 나도 몰랐고 당신도 몰랐으니까."
창염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역시 불안해져서 창염에게 다가갔다.
"그래. 내 잘못인 것 같으니 말해봐라. 뭔데, 도대체?"
"...당신이 영원의 결계에 갇힐까봐 광검을 경계했던 것처럼, 성주도 자신의 유일한 적을 경계했을 거예요. 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무신을. 그런 무신이 지금 시체까지 사라졌으니, 성주가 그걸 알면 어떻게 되겠어요?"
"......내가 아주 폭탄을 제대로 건드렸군. 성주가 방주 시동 걸었겠네. 무신이 완전히 소멸한 걸 알았다면."
갑자기 모든게 허탈해졌다.
"5년 일찍 활동을 시작했다고 원작까지 5년 일찍 당겨지는게 세상에 어디있냐. 진짜 억울하다."
"......몰랐던 거잖아요? 자책하지 마요."
창염은 나를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알면 절대로 안 건드렸을 거잖아요."
"그래. 하지만 지금은 건드리고 말았지."
"걱정마요. 저도 이렇게 빨리 죽기 싫으니까."
창염이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까치발을 들고 내 얼굴을 잡아당겼다.
"이번에 나온 김에 선물 드릴게요. 얼마가 남았을 지 모르지만…열심히 해주세요."
쪽.
수평선 너머로 아침햇살이 떠오르며, 창염은 햇빛을 받아 스르르 사라졌다.
"......허어."
나는 내 입술에 남은 온기를 손으로 쓸었다.
"최고의 동기 부여네."
화륵.
붉은 불꽃이 사르르 사그라들며 모습을 감췄다. 나는 떠오르는 해돋이를 맞이하며 하늘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최대한 빨리 간부들을 잡아야겠어."
성주가 오기 전에.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하지만 걱정되지는 않는다.
"원작 주인공도 맨땅에서 시작해서 1년만에 성주 잡았는데 내가 그것도 못할까봐."
이제 가야할 곳이 생겼다.
인도.
개천광 카르나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
"성주 오기 전에 끝장낸다. 전부."
나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