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1부 11장 9
나를 상대로 올가미을 씌우려던 백희아와 은유하는 청화단을 자신들의 아래에 들이는 데 성공했다.
청화단은 성공했고, 창염의 피닉스는 청화단의 목록에서 빠졌다.
은유하는 내 품에서 나도 같이 청화단으로 들어오면 안되냐고 사정했지만, 내 완강한 거절에 결국 포기했다.
백희아는 제법 놀란 것 같았지만 순순히 김지화의 서명을 받았다. 아무래도 피닉스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가진 모양인 듯 했다.
세부적인 내용을 조절한 뒤, 나는 간부들을 모아 상황을 알렸다. 옆에 백희아가 따라오는 바람에, 나는 그들에게 존대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청화단이 달라지는 건 없어요. 이전처럼 38선 넘어가서 괴수 사냥하고 판매하는게 공식적으로 합법화된 거죠. 세금이야 조금 떼이겠지만, 어차피 유성에서 알아서 할 테니 우리가 신경쓸 일은 아니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여러모로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부담스러워졌지만."
이제는 진짜 청화단의 단장이 된 김지화는 왠지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예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예 손을 뗄 줄 알아요?"
"아뇨. 단ㅈ…. 뭐라고 부르죠?"
"그냥 피닉스 님이라고 불러요."
"예. 피닉스 님의 명령은 당연히 따를 겁니다. 아까 다행이라고 한 건, 싸우지 않는 길을 선택해주셔서 정말 다행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지화는 내심 싸움을 꺼리고 있었나보다. 나는 그가 나 이상으로 더 열심히 전투를 준비했던 것은 알고 있지만, 상전의 선택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걸 존중하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당신, 조금 바뀐 것 같은데…."
"그런가요? 하하하."
지화는 어째선지 상당히 여유가 흘러넘쳤다. 충족되지 않던 무언가가 채워진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그럼 됐고. 다른 간부들은 어때요?"
"우리야 환영이지. 아, 나는 계속 보스라고 부를 거야."
"공식적으로 청화단을 운용할 수 있게 됐으니, 이걸로 서울의 치안도 안정될 터. 고맙군, ...피닉스."
아키택트, 하늘성도 협정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대외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하며 서울을 복구했던 이들인 만큼, 서울이 전장이 되어 다시 폐허가 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다.
"저는 그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등대 님을 옆에서 잘 보좌하겠습니다."
궁성은 등대의 옆에 착 달라붙어 게슴츠레 웃었다. 등대는 궁성이 몸을 붙이자 몸서리를 쳤다.
"......?"
"나는 청화단 탈퇴야."
"나도."
천가을과 조덕배는 빌런으로 남기를 원했다. 그들의 발언에 나를 비롯한 다른 간부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왜요?"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가을이 먼저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내가 청화단에 있던 이유가 뭐겠어? 너랑 있으려고 하는 거지. 그런데 네가 빠져버리면 내가 청화단에 있을 이유가 있니?"
"그 생각은 고마운데…."
가을이 청화단에 남아서 해줘야 할 역할이 있다.
"<창염의 피닉스>는 청화단에서 빠지더라도, 괴수 조종사인 '청화'는 청화단에 적을 두게 할 생각이거든요?"
"나보고 청화로 활동하라는 거야?"
"겸사겸사죠. 집행관, 설명을."
"감사합니다. 크흠."
백희아는 간부들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피닉스 님은 청화단에서 빠지기는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피닉스와 청화 두 사람이 동일인물인 걸 알지 못합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큰 혼란이 생기겠죠."
자기희생의 표본이자 영웅적인 행보를 보이는 미소녀 청화.
막무가내의 화신이자 또라이 사이코패스 살인자인 피닉스.
두 존재가 같은 존재라고 세간이 알게되면 사람들은 아노미 상태에 빠질 것이다.
"다행히 당시 피닉스 님의 발표회에 참가했던 히어로들 또한 전면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입이 무거운 이들인 만큼, 어디가서 정보를 흘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막을 거고요."
나, 청화단, 정부, 협회, 유성.
그 누구도 '피닉스=청화'설이 진실로 세간에 드러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고로 피닉스와 청화가 다른 인물이라는 걸 확실시하기 위해, 둘은 별개의 장소에서 각각 활동을 해야만 한다.
"청화의 역할을 대신해줄 사람이 바로 팬텀이죠. …...해줄 수 있어요?"
"좋아. 알았어."
가을은 시원하게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백희아가 보는 앞에서 청화로 변신했다.
"......아, 그 날도 혹시?"
"맞아. 내가 얘로 변했지."
가을은 나와 팔짱을 끼며 얼굴을 붙였다. 나와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체형이어서, 쌍둥이가 아니라 복제인간이라고 의심할 수준이었다. 나는 백희아와 다른 간부들에게 구분하는 법을 알려줬다.
"마력이 발현되는 눈동자 색만 다르죠."
나는 머리색과 같은 밝은 파랑색.
가을은 환속성의 상징이기도 한 잿빛 회색.
"하지만 그 때는…."
"컬러렌즈 꼈지. 얘가 만들어줬거든."
"한 눈에 봐도 차이가 나는데 당연히 조치를 취했죠."
가을은 내 몸으로 변신해 얼굴과 몸을 부비적거렸다.
"남들 보는 앞에서 하지마요."
"남들 보는 곳 아니면 해도 된다는 거야?"
"......장난치지말고 좀 떨어져. 장난은 나중에 받아주마."
"칫."
가을은 투정을 부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백희아는 그게 조금 충격이었는지 다소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진짜 천가을 배우님 맞으신가요?"
"응. 맞아. 이승형이 장례식 상주 치뤘던 그 천가을."
"......화권이 당신을 싫어할 만 하군요."
백희아가 나를 노려보는 표정이 심상찮았다. 나는 오해를 풀기 위해 선후관계를 바로잡았다.
"나 NTR 한 거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아무튼 나는 얘 없이는 못 사는 몸이야. 얘가 나 살려주고 S급으로 만들어줬거든."
"......그렇군요. 아, 그러면 천가을 님. 이중생활 가능하시겠습니까?"
"청화와 천가을의 삶을 따로따로 살라?"
가을은 금방 백희아의 말을 이해했다. 나는 불꽃을 피워 시계로 낮과 밤을 구분했고, 백희아는 신기해하면서도 불꽃을 이용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예. 낮에는 천가을로 사시되, 밤에는 청화로 사시는 겁니다. ...밤에 하는 일이라고 해봐야 주무시거나 쉬시는 것 말고는 없겠지만."
"낮에는 내가 청화로서 일을 할 거예요. 주로 해외 순방같은 걸 할 때? 아니면 공식적인 자리에 있거나-"
"아냐. 그때 처럼 하면 되잖아? 강남에 하늘성 만나러 갔을 때."
"아."
[이러자는 건가?]
나는 피닉스로 변신해 가을의 뒤에 섰다. 주변에 강하게 마력의 파장을 펼쳐 몸을 숨겼다.
"오, 그 때 그거군."
[밤에는 힘들어. 그 때는 큐브의 힘을 사용했으니까 밤에도 투명화가 가능했지. 아마 S급 이상 되면 뒤에 따라붙은 것도 눈치 챌 거다.]
나는 변신을 해제하여 다시 인간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면 천가을은 해결이 됐고."
나는 일단 예의상 그의 의사를 물었다.
"조덕배, 당신은 왜요?"
"별 거 있냐? 여기서 얘들이랑 협회에서 노는 것 보다 너랑 다니는 게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지."
"으웩."
내가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냈지만, 덕배는 물러서지 않았다.
"부하 2호 데리고 어딜 나가려고. 엉? 너 중국 갔을 때 나 데리고 재미있게 놀지 않았냐. 안 그래?"
"......그건 그렇네요. 아, 잠시만요."
나는 덕배의 뒤로 돌아가 등을 손으로 두드렸다. 덕배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등짝이 열렸고, 곧 코어만 남아 덕배트가 되었다.
"어...?"
"괴인은 이런 것도 가능하답니다. 알아두세요."
나는 덕배트를 붕붕 돌리며 그립감을 다시금 확인한 뒤, 하늘 높이 치켜올리며 상태를 점검했다.
"......역시 이쪽이 더 나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개인적인 사정이에요. 그럼 백희아 아가씨."
나는 덕배트를 가리켰다.
"청화단 단원 중에서도 저랑 비슷하게 전과가 있는 악질 범죄자도 있거든요? 얘처럼. 자세한 전과는 말하기 좀 껄그럽고, 상당히 흉악한 범죄자라는 건 알아두세요."
"......역시 그렇군요."
백희아는 금방 수긍했다. 덕배의 외형은 확실히 범상찮기는 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 간부의 의향만 물어보면 되네요."
"마지막...아. 걔가 있었지."
아직도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자.
우리는 호텔에서 빠져나와 한강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와."
백희아는 한강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40m 길이의 드래곤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밖으로 나온 덕분에 가을은 원래 몸으로 돌아갔고, 흑염룡은 나를 바라보더니 이족보행으로 서서 날개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저건 뭘 하는 거죠? 복종의 의식?"
"쟤 사람인데요."
"......예?"
"흑염룡 곽용우. 아, 빌런 수배 리스트에는 아직 흑염소라고 등록되어있나? 자기들이 정리해와놓고도 모르면 어떡해요?"
백희아는 곽용우의 프로필과 눈앞의 거대 드래곤을 번갈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괴인의 가능성은 정말 무궁무진하네요. 무기도 되고 괴수도 되고...."
"참고로 화염거인은 덕배가 변신한 겁니다."
"허."
"그리고 중국에서 물지기 잡았던 용 괴인은 화염거인이랑 흑염룡이랑 합체한 거구요. 정확히는...화염 거인 위에 무기화한 흑염룡의 갑주를 덮어 씌운 택이죠."
흑염룡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나는 흑염룡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저는 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흑염룡은 콧김으로 불꽃의 글씨를 뱉어내며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흑염룡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백희아는 흑염룡을 가리키며 내게 질문했다.
"그럼 괴수 조종사는 사기에요?"
"아뇨. 진짜 괴수도 조종해요. 마음만 먹으면 물지기나 지파룡도 부활시켜서 괴인이나 괴수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죠."
"그, 그럼."
백희아는 뭔가 말을 꺼내기가 상당히 민망한듯 했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내게 물었다.
"혹시...돌아가신 분도 부활이 가능한가요?"
"......시신만 온전하다면?"
실제로 수 천년 전에 사망한 시황제의 미라에 코어를 박아넣어서 흑전갈 괴인으로 부활시키기도 했다. 대신 원형이 거의 없는 바람에 시황제는 진짜 흑전갈이 사람이 된 꼴이 되어버렸다.
"......알겠습니다. 피닉스 님, 나중에 개인적으로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음."
"......어, 그러니까."
백희아의 생각을 모두가 짐작했다. 그리고 나는 간부들과는 다른 짐작을 했다.
"죽은 사람을 부활시켜달라고요?"
"예. ...시신만 찾는다면."
"어?"
간부들이 백희아의 말에 의아해했다.
"광검을 부활시키려는 게 아니었나요?"
"......와, 이런 ㅁ, 크흠!"
백희아는 김지화를 경멸어린 표정으로 쌍욕을 퍼부으려다 헛기침을 하며 간신히 말을 삼켰다. 하지만 표정으로도 이미 지화는 백희아에게 상당히 밉보를 보였다.
"아니! 그!"
지화의 눈초리가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하던 백금발의 미청년을 향했다. 마스크는 또 어디다 치워버렸는지, 남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알자마자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 돌아다니고 있었다.
"청화단의 단장님. 아무리 빌런이라도 지켜야 할 선과 도리가 있는 법입니다. 비록 광검 님은 훌륭한 분이셨으나, 이제는 편히 쉬실 때가 되셨지 않습니까. 설마 청화단의 단장께서는 고인을 욕보이실 생각이십니까?"
"아뇨. 전혀요."
지화는 억울한 눈으로 나를 흘겼지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광검의 괴인화는 은유하의 아이디어였고, 나는 실행만 했을 뿐이니까.
"...세계 멸망의 직전이라면 고이 주무시는 그분께 손을 빌릴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은 편히 쉬시게 해드려야 할 때 입니다. 아무리 나라가 위급하다고 할지라도, 충무공과도 같은 분을 무덤에서 일으키는 만행을 저지른 수는 없습니다."
"충무공...."
모두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나는 웃음이 터져나오기 전에 잠깐 괴인형으로 몸을 바꾸어 진정했다.
"......."
백금발 청년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백희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주변을 훑다가, 백금발 청년 앞에 서서 고인의 위업에 대한 일장 연설을 펼쳤다.
"지금 광검 님의 업적이 충무공과 비해 바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오산입니다. 머리색을 보아하니 외국분 같은데, 잘 들으십시오. 광검 허윤환, S급 이능력자로서 20년 넘게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으로써, 2012년 평양 사태 이후로 홀로 신서울과 대한민국을 지키신 영웅으로서...."
백금발 청년은 서서 죽었다.
"...하신 이 나라의 대들보셨습니다. 아, 언제 한 번 함께 고인을 모신 곳으로 같이 가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화자찬이라 조금 부끄럽지만.... 그 분의 추도사를 제가 작성했습니다."
우리는 차마 백희아에게 백금발 청년이 누구인지 밝힐 수 없었다.
이로써 청화단의 조직 개편이 완료되었다.
<창염의 피닉스>, <바위괴인>, <광검>은 청화단을 이탈.
<청화>를 비롯한 나머지는 전부 청화단에 남아, 헌터 길드의 이능력자로서 집행유예 기간동안 세계 평화를 위해 이바지하는 이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