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1부 11장 6
광검이 진실을 전해듣고 죄악감에 질식사하던 그 시각.
등대, 김지화는 쉬지 않고 청화단 조직원들의 전력을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A급 전력은 이걸로 커버하고, S급인 화권은 이제 단장님이 치트 안 쓰신다고 하셨으니...."
"좀 드시면서 쉬세요."
궁성, 유이신은 일하면서 먹을 간식거리를 가져와 지화에게 내밀었다. 지화는 고개만 까딱 숙인 뒤 샌드위치를 한 손으로 잡고 입으로 크게 베어물었다.
"잘 먹을게."
"아니, 좀 쉬시지 않고."
해산 이후에도 쉬지 않고 추가 근무를 하는 지화의 태도에 이신은 영 못마땅했다.
"내일 당장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요?"
"모르지. 선전포고를 하고 바로 기습공격을 할 수도 있잖아."
옆에서 지화의 배치를 구경중이던 조덕배가 샌드위치 두 개를 집어들었다. 이신의 표정이 험상궂어졌으나, 덕배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요즘 당신 보고 뭐라고 뭐라는 지 알아요, 덕배 씨?"
"뭔데? 대머리? 그 정도야 익숙해져있으니까 괜찮아."
"아무한테나 막나가는 게 꼭 단장님 닮아간데요. 남자 피닉스라고."
툭.
덕배가 입에 넣으려던 샌드위치를 떨어트렸다.
"기껏 손으로 만든 건데 떨어뜨리면 어떡해요?!"
이신은 자신의 수제 음식이 땅과 키스하자 역정을 냈다. 하지만 덕배는 이신이 말한 충격에 넋이 나가버렸다.
"아무리 죽었다 부활한다고 해도 적당히 깝쳤어야지. 으휴."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높아서 더이상 진행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지화는 기지개를 켜며 아이스티를 집어들었다.
"영감들은?"
"아키택트와 하늘성은 한 잔 하러갔어요. 둘은 전투원까지는 아니라면서."
"여차하면 정부에 붙어버리면 그만인 양반들이니. 끙, 하늘성 그 양반, 강남 핵주먹 시절에는 앞에서 양아치들 손수 후드려 패고 다니던 양반이...쯧."
지화는 혀를 차며 '하늘성'이라고 붙은 2D 캐리커쳐 인형을 치워버렸다. 지화의 앞에는 이능력자들을 모사한 수많은 인형들이 서울 지도 위에 병정처럼 늘어져있었다.
"반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왕으로 군림하던 양반이 아주 신세가 처량해졌어."
"너도 구로에서 왕 아니었냐? 쫄보 왕."
"그렇긴 하지. 다 단장님 만나서 이렇게 됐고 말이다."
지화는 여의도에 배치된 푸른 소녀 인형을 플라스틱 컵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러니까 단장님을 위해서라도 내일을 열심히 준비해야하는데, 하아."
"어깨에 긴장 좀 풀어라. 어? 하늘성이랑 아키택트가 둘이서 술마시러 갔겠냐? 두 명 노리는 서울 주민들이 한 트럭이야. 분명 질펀하게 놀고 있을 걸?"
"퍽이나. 너는 그런 거 싫어하면서 꼭 나 놀릴 땐 잘만 얘기하더라? 어?"
"동정 놀리는 것 만큼 재미있는게 없지. 크흐흐. 야, 유이신아."
덕배가 지화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어깨를 두드렸다.
"내일 청화단이 멸망할 수 있으니까, 얘 딱지 때주는 건 어떠냐?"
"조덕배, 너 이건 선을 좀 넘은-"
"좋네요. 덕배 씨 의견 치고는 제법 그럴 듯한 의견이군요."
"헉."
덕배와 지화가 동시에 숨을 참았다.
"농담이지?"
"나쁠 건 없죠. 닳는 것도 아니고."
굳어버린 지화를 이신이 번쩍 들어올렸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지화를 노리는 이신의 눈은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어, 음, 어.... 좋은 시간 돼라...?"
"예. 제가 한 몸 희생해야지요."
이신은 분명히 웃고있었다. 덕배는 졸지에 매파 노릇을 하게 되어 민망해졌다.
"아 씨, 천가을이랑 다른 애들은 어디서 뭐 하는 거야?"
"파자마 파티요."
"뭐?"
덕배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나이 처먹고 무슨 파자마 파티를.... 아."
덕배가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아내들끼리 서열 정리 하려는 거네."
괜히 불똥이 튀기 전, 덕배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 * *
<7월 18일 오후 8시, 천가을의 아파트.>
간부들은 여의도의 호텔에 각자 배정된 숙소가 있으나, 천가을은 때때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고 일어나며 출퇴근을 하고는 했다.
히어로들에 대한 대처를 논의한 이후, 피닉스는 각자 간부들에게 자유시간을 보장했다. 가을은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자 집으로 돌아와 먹고 마실 음식을 준비했다.
"흥, 그래봐야 저희 회사가 지은 아파트인 걸 잊지마요."
가을을 따라 들어온 은유하는 파자마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가을은 자신이 배우 생활을 하며 번 돈의 일부가 유하에게 들어갔다는 게 영 아니꼬왔지만, 자신의 아파트에 무상으로 가구를 채워준 물주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았다.
"그래. 아파트 좋네. 그럼 아예 한 채 따로 살지 그러니?"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
"그걸 말이라고 하니? 너 청화단 물주만 아니었어도 반쯤 죽였어 내가, 아주."
가을은 음식을 조리를 하던 칼을 유하에게 겨눴지만, 유하는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양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가을은 S급 이능력자이기는 했으나, 서울에 있는 유하는 본체가 아닌 인형이었다.
"하여튼 너는 은재민이나 다른 인형을 보내지, 왜 네가 오고 난리야?"
"그야 버림패로 쓰기에 좋고, 막나가기에 저만큼 좋은 인재가 없잖아요? 이래뵈도 저, 유성건설의 사장이라고요. 사장."
"네, 사장님. 그럼 사장 격에 어울리게 이런 중산층 아파트말고 여의도에 좋은 호텔로 가시겠어요? 거기 꼭대기에 당신 사랑하는 사람 하나 있잖아요."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이죠."
유하와 가을의 시선이 맞닿았다. 둘은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다, 동시에 피식 웃었다.
"소박맞은 사람끼리 뭘하나."
"그쵸? 동지끼리 싸워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동지라니, 그런 표현은 삼가해줄래?"
"아. 그러면 동서 어때요? 구멍동서. 우리 사랑하는 고객님의 안에다가 한 번씩은 박아볼 사람들로서-"
"야 은유하!!"
가을이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당장 본체 데려와! 애가 뭐 더러워서 말을 못하겠네! 너 원래 이런 사람이었니?"
"가을 언니 댓글로 저 개망나니라고 악플달던 데이터, 제가 다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고소해드려요?"
"이건 한 마디를 안 지네. 야, 진짜로 진지한 이야기 할 거니까 본체 불러와. 망나니는 좀 들어가고."
"칫."
유하는 잠시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잠시 뒤, 유하의 눈에는 일곱 개의 별무늬가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솔직히 구멍동서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아요? 저는 은재민이나 다른 남자 인형 쓰면 되고, 언니는 남자로 변신해서 박으면 되잖아요."
"걔가 잘도 박혀주겠다. 너 걔 괴인형 못봤어? 그게 어디 여자 몸이니?"
"성주한테 세뇌당한 간부로서의 몸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본인의 진짜 정체성이 아니겠죠. 그리고 말이에요…."
유하는 음흉한 얼굴로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고객님은 저희가 원하는 쪽으로 맞춰주실 걸요? 외계에서 온 정령이 그 정도도 못하실까봐."
"그거 가능성 있는 얘기에요, 회장님."
안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히카리가 유하의 의견에 동조했다.
"단장님의 육체는 마력으로 이루어져있어요. 아마 단장님이 바라신다면 남자로도 바꾸실 수 있을 걸요? 이능력학적으로도 가능하고, 큐브를 사용해도 가능할 거예요."
"고객님의…."
"남자모습…?"
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에 은유하의 옆에 놓여있던 스크린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나왔다.
[둘 다 입에 침 고이는 소리가 부산까지 들리네요. 그렇게 좋아요? 피닉스가 여자여도 직진할 거라면서 마음 굳히신 분들이.]
스크린 너머에는 백발의 여인-석하랑이 오징어를 입에 물고 질겅거리고 있었다. 또 빈백에 누워있는 듯 배경은 곤색의 쿠션이었다.
"그래서 하랑이 너는 고객님이 남자인게 싫어?"
[언니야.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안 카나. 내가 언제 싫다고 했는데?]
하랑도 이제 대놓고 본색을 드러냈다. 가을과 유하는 한 명 또 늘어버린 경쟁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떻게 하나같이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만…. 어휴."
[그래도 우리는 낫죠. 후발주자들 생각해봐요. 우리보다 훨씬 안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잖아요.]
"그럼 뭐하니? 어차피 우리 싹다 소액주주야. 지분 1%가지고 서로 아귀다툼하는 거라고."
셋은 우울해졌다.
[예전에 자기 사랑한다고 했던 건 그냥 나르시스트로서 하는 말이겠지?]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푹 빠진 거야."
"누군지라도 알면 견제를 넣든 포섭을 하든 하겠는데, 이건 뭐 도저히 알 방법이 없으니…."
피닉스는 미래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들은 파편화된 정보를 모아 서로가 아는 부분에 대해 공유하며, 베일에 가려진 정체불명의 대주주가 누구인지 흔적을 찾으려했다.
"이유나 아냐? 자꾸 이유나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잖아."
"만약 진짜로 대주주라면 진작에 찾아갔겠죠. 신서울여자중학교에 버젓이 다니고 있던데."
유하는 몰래 찍은 여중생의 사진을 눈앞에 띄웠다.
"하."
"......정말 기가차서."
[금마 진짜 얼빠새끼 아니에요? 와, 무슨 여자를 얼굴만 보고 판단하나….]
20대 여성들은 이제 고작 16살이 된 중3 여중생에게 처음으로 '질투'라는 것을 느꼈다. 한 살 어린 15살 히카리만이 칼피스를 마시며 대주주 용의자 후보 1번, 이유나의 프로필을 살폈다.
"딱히 단장님이 신경쓸만한 재능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짚이는 거 있어?"
"단장님 얼굴이나 몸매보다 먼저 재능부터 판단하시잖아요. 애초에 다들 단장님한테 한 수 접고 들어가면서."
히카리의 사심없는 일침에 셋은 눈쌀을 찌푸렸다.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히카리는 순수한 얼굴을 한 채 혀로 셋의 심장을 후벼팠다.
".....그래도 나는 나아!"
가을이 허리에 손을 올리며 자부심을 강조했다.
"......내년이면 아홉-"
"그만!"
가을은 금방 패배를 선언했다. 28세는 분명 많은 나이가 아니었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주주 후보 중에서는 가을이 최연장자였다.
"어린 것들이 진짜…! 어려서 좋냐?"
"네. 좋아요. 엄청."
[.......]
"저는 2025년 즈음이면 딱 성인이네요. 단장님이 미래에서 오신 걸 생각하면 갓 성인이 된 사람들만-"
히카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뼉을 쳤다.
"아! 그러면 회장님이랑 설화령 님, 그리고 가을 언니까지 다 다섯 살 씩 더해야 하네요!"
"히카리."
유하가 나긋나긋한 얼굴로 웃었다.
"연구실 전원 내려버리기 전에 입 다물지 않으련?"
"......죄송합니다."
히카리는 금방 꼬리를 내렸다. 유하에게 물질적으로 협박을 당하는 것도 있었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을의 얼굴은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조차 없었다.
"......됐어. 이제 나는 괴인이니까 나이도 안 먹는 걸. 영원히 20대라 이거야."
"네, 좋으시겠네요. …...하암."
유하는 피곤한 지 인형으로도 하품을 했다. 커피를 입에 대지 않아 인형에 카페인이 부족했고, 여러모로 상당히 피곤해보였다.
[언니야 괘안나? 내 내일 올라갈 때 뭐 좀 사갈까?]
"괜찮아. 신서울에 있는 거로 하면 돼."
"......하랑이 너 서울 올라오니?"
가을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서려있었다. 한 정령을 두고 경쟁을 펼치는 불편한 관계 이상으로, 둘은 일단 내일 적이 될 지 동료가 될 지 모르는 관계였다.
[...아뇨? 저 신서울 대기 명령 떨어졌어요. 아, 가을 언니한테 얘기하면 안 되려나?]
"해도 문제없어. 가을 언니가 고객님한테 얘기 안 하면 되지."
"...너 무슨 꿍꿍이야? 그러고보니 회의 때도 별 말을 안 했던 것 같은데."
미심쩍어하는 가을을 향해 유하는 눈을 반짝이며 화사하게 웃었다.
"별 건 아니구요, 다른 소액주주 하나랑 연합하기로 했거든요."
"누구?"
"...누구겠어요?"
유하는 살벌한 얼굴로 자신의 왼쪽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아. 혹시나 모르니까 다른 사람들도 있을지 찾아보죠. 고객님한테 물어보면 될까요?"
"......조덕배가 다 알고 있지 않을까?"
[그 머리 벗겨진 아저씨? 진짜야?]
"단장님한테 누구누구 있는지 다 들으셨을 거예요. 지금 위치가.... 아, 지금 서울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진영, 이념, 종족, 나이를 초월한 여자들만의 파자마 파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뭔가 어디서 나를 향한 악의가 솟구치는 기분인데요…."
피닉스는 서울의 지도를 펼쳐놓고 모의 시뮬레이션을 하다가 몸을 으스스 떨었다.
'악의라고 해봐야 뭐 별 문제 있겠어.'
"......기껏해야 아지다하카가 저주라도 날리는 거겠죠."
피닉스는 히어로들과의 전투를 가정한 시뮬레이션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