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235화 (235/1,497)

〈 235화 〉1부 11장 5

국가와 인종을 초월해 순수한 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리는 원탁과는 달리, 한국의 히어로들은 협회라는 소속 아래 하나의 조직으로서 움직였다.

그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집행관 백희아.

다크 레기온, 원탁의 비밀, 세계의 멸망 등등. 히어로들은 내가 알려준 세계의 진실을 받아들이는데 무려 2주라는 시간이 걸렸고, 7월 17일에 이르러서야 청화단이 제안한 공투에 답변을 가져왔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빌런들과 쉽게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그들은 건곤일척의 단판 승부를 청화단에게 걸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들이 너무 혼란스러워하는 나머지, 그것이 정확히 '어떤 승부'임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

우리는 머리를 맞대어 히어로들이, 백희아가 선택한 승부의 방식이 어떤 건지 미리 예상해 대처해야만 했다.

* * *

"역시 집단전 아니겠습니까?"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등대였다.

"그들은 서울수복작전에서 한 번 크게 패배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저들은 저희를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역시 승부라고 하는 건, 제 2차 서울수복작전이 될 겁니다. 히어로들은 다시 여의도로 진격할 것이고, 이 기회에 청화단을 완전히 제압하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죠. 예전에 선의철이 악당들을 잡아다가 소나무 부대로 부렸던 것 처럼 말입니다."

"힘으로 찍어 눌러서 목줄을 쥐게 하려는 건가요.... 흠, 오케이. 그럼 그에 따른 대책은 더 쉽겠네요."

협회 측의 전력은 줄어든 반면, 청화단의 전력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간부진들도 그 때와는 달리 S~A급으로 편성되어있고, 청화단에 조직원으로서 합류한 서울의 주민들도 직접 나서서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 아닐까? 한 번 대패를 했는데 다시 그런 악수를 쓸 것 같지는 않아."

팬텀은 그 의견에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뭣보다 우리를 상대로 또다시 대규모 작전을 펼치면 결과는 눈에 뻔하잖아? 그러니까 승부라고 해봐야 소수정예를 이용한 1:1대결일 거야. 일종의 토너먼트지."

"간부진과 히어로들의 1:1대결? 흠, 제법 그럴 듯 하네요."

대중들의 이목에 크게 노출되지 않으며, 청화단과 힘겨루기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승부였다. 또다시 괴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발이 묶이는 것보다, 간부들을 정면으로 끌어내어 1:1 대결을 펼친다면 그건 히어로들에게 큰 메리트였다.

"하지만 그건 안될 걸? 애초에 수가 맞지 않잖아. 내 생각에는 1:1보다는 자기들 쪽수로 밀어붙일 걸? 예를 들어, 보스를 다구리치는 거지. 이른바 피닉스 레이드. 어때?"

"꽤나 그럴듯한 의견이네요. 간부진을 잡아도 결국에는 저를 잡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저를 레이드 하려고 한다. 음, 히어로들 입장에서 가장 빠른 해결책이네요."

"그건 어디까지나 단장님을 이길 수 있다는 전제하에 그런 것 아닙니까."

궁성은 전제조건 자체를 지적했다.

"애초에 단장님에게 유일하게 걸림돌이 되신 분이 진작부터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광검은 책상에 발을 올리며 다리까지 꼬았다. 확실히 그가 괴인이 되기 전, 생전에는 내 걸림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히어로들의 편이 아니야."

"그렇다고 청화단의 편에 서서 싸워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하지만 내 아내가 부탁하면 싸울 것이다."

광검은 고개를 치켜들며 자랑스러워했다. 이미 간부들은 내 아래층의 방에서 이루어진 부부가 내는 소음에 시달린 만큼, 그가 아내 없이는 죽고 못사는 공처가임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부럽구만. 한 여자의 처녀를 두 번이나 탐하다니."

"애까지 낳았지. 그런데 그 애랑은 어떻게 하려고? 보스, 설화령도 따지고 보면 한국 히어로 아니야? 그 아가씨가 적으로 올 가능성은 없어?"

"......음."

나는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삼중결계에 갇혀 외부와의 연결이 차단된 동안, 석하랑과 연결해주던 분령은 반으로 쪼개져버렸다.

의도치않게 석하랑을 두 부모와 한 자리에 앉혀놓고 설명을 했으니, 셋은 불편한 첫만남을 한 채 아직까지도 서로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고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아마도...100% 적이 될 가능성이 높죠."

나를 상대로 싸우거나, 광검을 상대로 싸우거나.

어느쪽이든 석하랑이 청화단에 붙을 가능성은 낮았다.

"샤오린이 자리를 비운게 치명적이군."

"이제는 환룡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되었잖아?"

"군신을 다시 중국으로 파견하신 건 단장님이시고요."

나니까 세 간부의 합공을 버티며 결계에서 탈출했지, 환룡이나 석하랑이 잡히면 누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본인의 전투력이 전무한 환룡을 위해, 나는 세계 최강의 호위인 샤오린을 환룡의 곁에 두었다.

"광검, 만약에 하랑이가 당신에게 창끝을 겨누면 어쩌실 거예요?"

"싸워야지."

광검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말로써 전하기 힘든 게 있다면 힘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수밖에."

"저기요. 이거 소년만화 아니거든요? 적이었지만 싸우면서 싹트는 우정으로 동료가 되는 세상이었으면 제가 진작에 다 패고 다녔을 거예요."

"우정이 아니라 심장에 코어를 박아서 괴인으로 만들고 다녔지만 말이지. ...나도 괴인인 이상 네 명령에 따를 생각이다. 적어도 네가 루살카를 가족으로 생각해준다면 말이야."

"그거야 당연하죠."

어떤 루살카든 내게는 상당히 중요한 동료였다. 둘 다 성주에 대항하는데 동의를 한 사람들 아닌가.

"그럼 일단 정리하죠. 최악의 경우는 전면전. 차악은 그에 준하는 전투나 레이드. 어느쪽이 되던지 각자 풀 컨디션으로 싸울 준비는 마쳐놓으시길 바랍니다. 막말로 그들이 도착하는 내일 아침, 바로 전투가 시작될 수 있으니 말이에요."

어떤 식이든 청화단은, 창염의 피닉스는 걸어오는 승부를 피하지 않는다.

"오늘은 이만 해산. 다들 수고하셨어요. 내일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르니, 오늘은 각자 자유시간을 가지고록 해요."

우리는 모든 전투 가능성을 열어두고 등대의 주도하에, 제 2차 서울 수복 작전에 대한 갖은 대응 방안을 구상했다.

* * *

<오후 4시, 피닉스 펜트하우스.>

김지화에게 청화단 동원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 나는 따로 광검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루살카가 지금 러시아 갔는데 쓸쓸하지 않아요?"

"쓸쓸하지."

광검은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내일 있을 일이 청화단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지, 평소 그렇게 부어라 마시던 술도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

"결전 하루 정도는 맘껏 쉬어도 돼요. 그게 청화단 전통이니까."

"결전 하루 전에 이렇게 풀어주는 네가 이상한 거다."

"언제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전에 임하는 거죠. 죽기 전에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이건 꼭 해보고 죽고 싶었는데....' 하는 일이 없게 말이에요."

"그건 그렇군."

광검은 창가에 붙어 서울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쓰레기, 네가 정말로 모든 걸 알고 있다면 말이야."

"알고 있는 것만 대답해드릴게요."

"서울에 내 지인이 한 명 있었는데.... 혹시 어떻게 됐는지 아는가?"

"당신 부랄친구요?"

광검의 표정이 울긋불긋해졌다.

"그 얼굴로 부랄친구라고 하니 좀 듣기 그런데, 어쨌든 안다는 거지? 혹시 어떻게 됐나."

"선의철에게서 큐브를 지키려다 괴수가 되었죠. 제 손으로 죽였어요."

광검은 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고, 나는 그 살기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당신에게 있어서는 파트너이자 동반자였죠? 당신이 사고를 치면 항상 수습을 해주고는 그랬다고 들었는데."

"......여러모로 많은 신세를 진 녀석이다. 조금 삐뚤어진 성욕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쯧, 안타깝군. 내가 목줄이 채이는 바람에...."

"......그러면 말이에요."

나는 딸기쥬스를 한 모금 마신 뒤, 광검에게 진실을 밝혔다.

"천가을한테 앞으로 잘 하세요. 그 사람의 코어, 지금 천가을한테 들어가있으니까."

"......그 배우 아가씨? 잠깐만. 괴인은 원본의 코어에서 특징이 나온다고 했는데."

광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천가을의 아홉 꼬리가 생각나기라도 했는지, 광검은 몸서리를 쳤다.

"그런 놈이었을 줄이야."

"덧붙여서 석하랑 괴인체도 더듬이를 촉수로 사용한답니다."

"너는 진짜 쓸데없이 말이 많아. 이왕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지."

광검은 나를 삿대질하며 신경질을 부렸다.

"일부러 자꾸 사람 속을 박박 긁는 이유는 뭐냐? 사실은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글쎄요. 왜 그럴까."

나는 의자의 뒤로 몸을 눕히며 빙그르르 돌렸다. 천장이 360도로 돌기 시작했다.

"그냥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알리고 싶은 느낌?"

"그건 무슨 느낌이야?"

"몰라요. 그냥 튀어나오는 걸 어떻게 해요. 너무 신경쓰지말고 고마워하세요. 내가 당신 죽인 덕분에, 석하랑이 나비 괴인이 되는 일이 사라졌으니까."

"......그건 고맙군."

한 번 나비 괴인을 직접 보고 죽인 그의 입장으로서, 아내에 이어 딸조차 나비 괴인이 되어버리는 미래는 그야말로 지옥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미래에서 자살을 선택했어요. 자신이 죽으면 모든게 해결될 줄 알고."

"......미래에는 하랑이의 폭주를 막아 줄 사람들이 있었나?"

"네. 아주 멋진 동료들이었죠."

물론 동료들은 매번 바뀌긴 했지만, 그 모두가 하나하나 적재적소에서 에이스의 역할을 했다. 왠지 광검과 이야기를 하니 늙은이들끼리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광검. 당신 도대체 언제 하랑이랑 화해할 거예요?"

"화해라니. 나는 그저-"

"그냥 가서 무릎꿇고 사과하면 안 되요?"

"......아주 쉽게 말하는 군. 사람 속도 모르면서."

"네. 몰라요. 모르는데,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지도를 펼쳐 한반도의 북쪽, 평양을 가리켰다.

"SS급 넷이 투입되어야 아무 피해없이 막을 수 있는 괴수가 있어요. 심지어 큐브까지 가지고 있고, 날이 갈수록 더 강해지겠죠. 지금은 S급이지만 5년 뒤면 SS급이 되는, 아주 흉악한 괴수가."

"그거 말하는 거면 외형은 별로 흉악하지는 않잖나?"

"외형이 문제에요? 성능이 문제지. 걔 폭주하기 시작하면 주변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잖아요."

"......그래, 잘 알지."

직접 그 참상을 눈앞에서 본 만큼, 광검도 뉴클리언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 당신, 석하랑, 샤오린. 딱 넷이서 레이드 뛰면 되는데, 당신이랑 석하랑이 트러블이 있으니까 지금 못 잡고 있잖아요. 큐브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면서."

"......시간을 좀 줘라.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 나 죽은지 이제 두 달 좀 지나지 않았냐."

"하랑이는 21년을 기다려왔어요. 지금도 기다리고 있고."

"......너 진짜 하랑이랑 미래에서 무슨 관계였냐?"

내 의자가 멈췄다. 광검은 검까지 들며 의자를 막아세웠다.

"그냥 단순히 같은 정령이나 조카로서의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고, 네가 나를 엿먹이려고 하는 말들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짜같거든?"

광검의 눈은 날카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그 신관이라는 놈이 너 아니냐?"

"풋."

광검의 물음에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제는 쓰레기라고 안 부르네요?"

"말 돌리지마라."

"......쳇. 당신 제 마력을 읽어서 진위를 확인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적어도 이것에 대해서는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저는 신관이 아니에요."

걔는 지금 미국가있으니까. 하지만 광검은 내 말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맞는 것 같은데."

"아, 진짜. 당신 그러면 제가 알려드릴테니까, 절대로 안 죽이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내가 거래를 제안하자, 광검은 상당히 당황했다.

"명령도 아니고?"

"명령 해봐야 당신 수준이면 씹고 흘릴 수 있을테니까요. 제가 아는 진실을 얘기해드릴테니, 당신은 루살카를 걸어요."

"......루살카를 걸고? 지금 나를 능멸.... 진심이군."

"네. 누구랑 만나고 조금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되었거든요."

광검은 검을 거두었다. 내가 먼저 손을 들었다.

"저 자신-<창염의 피닉스>를 걸고 맹세합니다. 광검 허윤환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겠어요."

"나 또한.... 아니, 아무리 그래도 루살카는 못 걸겠다."

광검이 손을 들어 나를 따라 맹세하려다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로 입을 무겁게 하라는 말이에요. 그쯤은 할 수 있죠?"

"......나를 거는 걸로 만족한다면 맹세하지."

끝까지 루살카를 걸지 못하는 게 광검 답기는 다웠다. 여러모로 가웨인과 비슷한 사람들인 만큼, 정말 남부러울 정도로 사랑꾼이었다.

"좋아요. 대신 이 말 듣고 후회하지나 마요. 당신 미래의 석하랑 남편이 누군지 알게 되면,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할테니까."

"난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자, 그래. 내 딸을 임신시켰다고 하는 놈팡이는 누구지?"

"백청화."

광검이 굳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자, 잠깐만. 아니, 쓰, 아니, 여보세요. 백청화라고? 백청화?"

광검은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광검을 배려해서 말을 멈출 사람이 아니었다.

"네. 백청화(白靑花). 당신이 루살카의 힘을 써서 폭주할 때, 동귀어진으로 당신을 겨우 진정시켰다가 당신이 오른팔을 잘라버린 그 S급 소년 말이에요."

"허."

광검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은 게.... 아니었나?"

"걔 빼고는 다 죽었죠. 뭐.... 그 난리를 겪고도 목숨 하나는 질겨서 그런지, 오호츠크 해를 표류하다가 알래스카까지 다다랐죠. 나 참, S급이라 그런지 명줄도 길다."

"......그 아이가 진짜로 우리 하랑이 남편이라고?"

"네. 5년 뒤에 머리 노랗게 물들여서 올 예정이에요. 미래에서는."

나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딱 하나,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창염의 피닉스가 되기 전, 나는 백청화-주인공이 였'었'다.

그러므로 '나는 신관이 아니다'. 나는 창염의 피닉스니까.

"이, 이런 찢어죽일, 아, 아니, 내가 죽어야 하는.... 크으.... 이래서야 루살카에게 약속했던 게...!"

"뭘 약속했는데요?"

"하랑이 임신시킬 남편이라는 놈 좆대가리를 그냥 반으로 갈.... 크흠흠!"

광검은 체통을 되찾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광검에게 혼자서 삽질할 시간을 주었다.

"그러길래 땅을 치고 후회할 거라니까."

광검은 눈앞의 내가 석하랑을 임신시킨 것도 모른 채, 애꿎은 주인공에게만 사죄와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어찌됐든, 광검은 가까스로 전의를 다잡을 수 있었다.

광속성, SS급 검사 '허윤환'.

청화단의 간부로서 새로이 합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암흑 정무관>이니 <암흑 군주>니 하는 건 안 어울리니까 때려쳐요."

"......."

<광검> 허윤환 <- New!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