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화 〉1부 11장 4
세계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정작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히어로들과의 공투는 역시 쉽지 않았고, 나는 그들이 수긍할 수 있을만큼 질문에 답변하며 그들의 신뢰를 얻고자 했다.
협회의 히어로들은 서울을 떠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던 청화가 빌런 피닉스라는 것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았다.
- 광검님을 죽인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빌런으로서 한 악행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들은 시간이 필요했고, 나 또한 시간이 필요했다.
협회의 인원들이 생각에 잠긴 사이, 나는 원탁-특히 유일하게 내 정체에 대해 방금 알게 된 남자, <가웨인 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가웨인 경."
나는 가웨인과 대화를 하기를 원했고, 가웨인 또한 나와 이야기를 하기를 원했다.
"둘이서 따로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좋아요."
나는 가웨인과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만한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시간은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는 때였고, 하늘에는 달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경기도 파주.
아직은 청화단의 복구 인력이 미치지 못해 십 수년 가량 방치된 주인없는 땅은 도심 전체가 넓은 평야이며, 혹시나 모를 사태에 있을 전장이기도 했다.
과연 이곳이 협상장이 될 지, 전장이 될 지는 가웨인의 답변에 달린 일.
나는 석양을 등지고 서서, 가장 먼저 가웨인을 추궁했다.
"영국 왕실묘 <캐트시 경>. 그게 <절풍의 펜릴>이라는 걸 아시고 계셨나요?"
"......몰랐습니다."
S급 능력자인 가웨인이 몰랐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원작에서 인류 최초로 SS급을 달았던 그가, 자기 앞마당에 드나드는 간부를 놓쳤을 리가 없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뭐예요?"
"......역시 속이기는 어렵군요."
가웨인은 계속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가웨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가웨인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실히 밝혀주고 있었다.
가웨인은 거짓을 말한 것이다.
"굳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당신이 거짓말을 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죠?"
"그, 그게 그러니까...."
가웨인은 뭔가 대답을 꺼리는 눈치였다.
"했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거죠?"
"......제가 만날 때면 항상 '공주님'과 함께 계셔서."
"공주님?"
설마.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또 내 '설마'는 미래 예언이 되었다.
"아르엘 엘리자베스 메어리.... 공주님께서 기르는 왕실묘였습니다."
"이런."
가웨인이 쉽게 건드리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간다. 또한 가웨인이 왜 굳이 거짓말로 스스로 확답을 하지 않는 지 이해가 갔다. 가웨인은 내가 '미래에서 왔는지' 테스트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짧게 말씀드려요, 아니면 길게 말씀드려요?"
"가급적이면 짧게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당신 딸, 엄마는 지금 여왕님."
카앙!
가웨인이 검을 뽑아들었다.
"너무 생략했잖습니까!!"
"아니, 짧게 말해달라면서요? 가웨인 경. 아, 아니다."
나는 그가 여왕에 의해 빼앗긴 진짜 이름을 불렀다.
"불륜남 랑슬로 뒤 라크, 줄여서 랜슬롯 경?"
"......!!"
가웨인, 아니 랜슬롯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도대체 내가 얼마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지 파악하고자 했고, 나는 순순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밝혔다.
"...아, 본인의 의지로 불륜한 건 아닌가?"
"아, 아닙니다! 내 의지로 불륜한 겁니다!"
"뭔 소리에요?"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파주의 폐허에서 랜슬롯의 치부를 전부 드러냈다.
"지금 여왕한테 강간당해서 애 생겨서 영국으로 귀화당한-"
본인의 앞에서.
랜슬롯이 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
원탁의 모티브는 당연히 영국의 '아서왕 전설'이다. 1기 원탁이 그저 성주를 이기기 위해 비밀리에 모였던 12인의 영웅들이었고, 이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성주와 싸웠다가 전투의 후유증으로 다 죽어버렸다.
랜슬롯은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그리고 공식적으로 활동하며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원탁'을 만들었다.
프랑스의 히어로, 랜슬롯은 자신을 포함해 12명을 주축으로 하는 기사단을 만들고자 했다. 세계를 지키는 정의로운 기사단. 이름이나 명칭은 아무래도 좋으니, 랜슬롯은 무신을 비롯한 다른 11명의 이능력자들을 기리기 위해 기사단의 정원을 12인으로 맞췄다.
하지만 당시 랜슬롯의 나이 20대 초반.
혼자 살아남았을 뿐인 그에게는 전세계를 아우르는 기사단을 만들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고, 결국 친하게 지내던 영국의 지인에게 상담을 했다.
하필이면 그 지인이 여자고,
당시 정체를 숨기고 프랑스에 유학을 와있던 공주였고,
심지어 혼약자까지 있었으며,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랜슬롯을 덮쳐서 아이를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가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비사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랜슬롯이 가웨인으로 둔갑되는 순간이었고, 덜컥 여왕의 사생아를 낳게 된 그는 책임감을 느껴 여왕의 옆에서 그를 지키는 원탁의 기사가 된 것이다.
***
"그러니까 너무 자기 탓으로 돌리지 마요. 어디까지나 당신은 일방적으로 당한-"
"아닙니다! 여왕님은 결코 그런 상스러운 짓을 할 분이 아녜요!"
가웨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나를 제압해 내 입을 틀어막을 속셈인 듯 했으나, 당연히 나는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좋아요. 그래, 당신이 강제로 여왕님을 취했다고 칩시다. 됐죠?"
"하아, 하아."
가웨인은 검을 땅에 꽂은 채 숨을 헐떡였다. 이미 그의 정신은 흐트러져있었고, 나는 그저 세치 혀만 놀려 가웨인의 평정심을 무너뜨렸다.
"계속 그렇게 무의미하게 힘 빼실 거예요? 저는 지금 당신과 협력을 하려고 하는 거지, 싸우려는 게 아니거든요?"
"......약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웨인은 절박한 얼굴로 내게 부탁했다. 금발의 중년 남자가 저자세로 나오는 건 분명 보기가 그랬지만, 나는 그의 순수한 사랑을 응원하는 입장으로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걱정마요. 혹시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저는 당신이 불륜을 저지른 범인이라고 증언할 게요. 여왕폐하의 명예를 지켜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뭘 고맙기 까지야. 그래서 이렇게 따로 나와서 얘기하고자 한 거 잖아요. 혹시나 내가 그 자리에서 다 까발려 버릴까봐."
안 그래도 내 정체에 대해 충격을 받은 사람들 앞에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원탁의 필두와 여왕 사이의 질척한 이야기를 밝히기에는 나로서도 께름칙했다.
광검과 루살카 부부의 밤꽃향기 가득한 이야기도 적당히 주물러 애틋하고 슬픈 드라마로 각색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이제 제가 미래에서 왔다는 건 아시겠죠?"
"예. 그 정도면 믿을만 하군요."
"그럼 이제 제가 겪고있는 혼란을 좀 해결해주시겠어요?"
나는 네트워크 검색을 통해 찾아낸 영국 왕실묘 <캐트시 경>에 대해 추궁했다.
"어쩌다 펜릴이 공주님 곁에 있게 된 거죠?"
"......한 가지 확실하게 언급하고 가겠습니다. 저는 캐트시 경이 그저 이능력을 각성한 고양이 정도로 생각했지, 다크 레기온의 간부라고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못했습니다. 운장의 적토처럼 말이죠."
"어째서죠?"
"본인이 그런 쪽으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요."
"......?"
말이 앞뒤가 맞지 않기 시작했다.
"펜릴은 20년 전부터 돌아다녔다고 하던데?"
"예. 공주님이 갓 태어나던 해, 아기였던 공주님이 창문을 열고 들어온 고양이의 꼬리를 잡고 있었죠. 아직도 눈에 생생합니다. 꼬리를 잡혀 어쩔 줄 몰라하던 캐트시 경의 당황한 눈이."
"......헐. 걔가 인간을 그냥 놔뒀다고요? 꼬리 잡혔는데? 인간만 보면 죽이도록 세뇌된 암살자인데?"
"암살자기는 하죠. 상대의 심장을 폭행하는 심각한 귀여움으로 무장한. 하지만 캐트시 경은 결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악질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주님을 아기때부터 옆에서 지켜온 유모나 다름 없는 고양이였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나는 가웨인이 하는 말을 간단히 정리했다.
"그러니까 펜릴이 깨어있으면서 20년 동안 악당 짓을 하기는 커녕, 공주님을 아기때부터 옆에서 지키면서 친구로 자랐다? 지금 그 말입니까?"
"정확합니다."
김펜릴 가만히 안 놔둔다. 간부로서 활동하기는 커녕 20년 동안 농땡이나 피우고 있었을 줄이야.
"진짜 개수작 부리지 않았어요? 몰래 세력을 규합한다거나?"
"왕성 근처의 길고양이들을 한 곳에 모아 쓰레기 청소는 하던데요."
"막 괴인들 양산하면서 어디 몰래 테러 단체 만들거나 그런 적은 없고?"
"오히려 길고양이들 동원해서 쥐떼를 잡고 다녔습니다만."
"야 이 씁…."
기가 차서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야 간부나 정령은 커녕 그냥 집고양이잖아요?"
"이능력이 있는 집고양이였죠. 말씀하신 테러는 커녕 오히려 테러 집단의 납치에서 공주님을 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까지 받았죠."
"허."
나중에 따로 김펜릴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살펴봐야겠다. 나는 진심으로 얼척이 없어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럼 진짜 그냥 왕성에서 살다가 민초향에 열받아서 튀어나온 건데…. 애초에 말이 안 돼요. 다른 간부 두 명이랑 연계도 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고양이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제가 일일이 어떻게 확인하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냥 고양이였는데요."
"의심한 적 없어요?"
"의심했죠. 혹시 이 고양이는 신께서 공주님을 위해 내려주신 영혼의 보디가드가 아닐까."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요."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캐트시 경이 다크 레기온의 간부였다는 건, 저는 20년 동안 SS급 암살자를 제 딸의 옆에 뒀다는 말이 아닙니까."
"......."
"......."
우리는 잠시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 가지 공감대를 형성해냈다.
"그럼 펜릴이 나쁜 거네요. 그러게 왜 진짜 고양이인 척 행동해서 사람을 속이고 그래요!"
"그러게 말입니다. 악의 조직 간부이면 그 맡은 역할에 걸맞게 행동했으면 제가 진작에 조치를 했겠죠!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럼 김펜릴 잡으러 갑시다. 오케이?"
"예. 그 부분에 관해서 이견은 없습니다."
나를 결계속에 집어넣은 뒤, <캐트시 경>과 <절풍의 펜릴>은 동시에 행방불명되었다. 본색을 드러낸 만큼 아무리 펜릴이라도 왕성에서 계속 버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탁이 빌런 <피닉스>와 함께 싸운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당신은 영국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악당이니까요."
"좋아요. 애초에 적이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럼 역시 그쪽도 회의가 필요하죠?"
"예. 당신이 전면에 나서서 이슈를 일으킨 이상, 다크 레기온에 대해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간에 공개하면 간부들은 더 꽁꽁 숨어버릴텐데요."
"그렇다면 우선 원탁끼리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원탁들 중에는 빌런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원탁 모두가 회색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악당들에게 가족을 잃은 이도 있는 만큼, 원탁 내에서도 협의가 필요했다.
"잊지마요. 우리가 가는 길은 서로 달라도, 결국 최종 목적지는 같다는 걸."
"명심하죠. 대신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십시오."
가웨인은 내게 검을 겨눴다.
"여왕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생긴다면, 제가 즉시 당신을 베겠습니다."
"알겠어요."
나에게 있어 창염이 절대존엄인 만큼, 그 또한 여왕을 태양처럼 우러러 보는 사람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장인어른."
차캉!
검이 검집에서 뽑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검기를 피한 뒤, 파주 일대까지 따라온 갤러리들을 눈으로 흘기며 괴인형으로 몸을 바꾸었다.
[하여튼 딸가진 아버지들은 왜 이렇게 다들 열을 내는지 모르겠어.]
나는 가웨인의 검을 피하며 주먹을 뻗었다.
***
그리고 다시 시간은 현재.
가웨인과의 결착에서 '무승부'를 낸 나는 회의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벽의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이리저리 확인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오늘 잘 됐으면 좋겠네요."
"안 되면 어떻게 하려고?"
"음…."
나는 회의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시각은 정확히 8시 59분. 이미 본회의장에는 청화단의 간부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 뉴페이스다. 안녕하세요, <암흑 정무관>? 푸흐흐."
"......그건 급하게 만들어낸 이명이다. 젠장, 영호 놈은 어떻게 쉽게 이명을 만들어내는지 모르겠군."
"그럼 제가 지어드릴게요. <광견> 어때요?"
"......차라리 죽고말지."
광검은 질색을 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본격적으로 앞에 나서기로한 새로운 간부의 합류에 기존 간부들은 상당히 떨떠름한 눈치였다.
"저런 자신감으로 딸내미 앞에나 나설, 커흑!"
덕배의 배에 금빛의 검이 꽂혔다. 비공식 SS급의 검은 빛보다 빨리 덕배를 쓰러뜨렸다.
"SS급이 B급 괴롭히니 좋아요?"
"지는."
"제가 하는 건 단장으로서의 사랑인 거죠. 간부들끼리 반목하는 걸 볼 수는 없어요. 지양하세요."
"쳇."
나는 엎어진 조덕배의 등을 토탁이며 검을 빼냈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기 전에 마력을 불어넣어 상처를 복구했다.
"그러면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부하 2호. 자리 착석 안 하면 지각비 나오는 거 알죠?"
8시 59분 57초.
나는 본회의장의 의장석에 앉았다.
"야 이!"
"3, 2, 1, 땡."
나는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7월 18일. 청화단 아침회의를 시작합니다. 일단 지각자는 조덕배 1명. 전부 참가했으니 인원 파악은 생략. 회의 주제는…."
-협회의 히어로들이 어떤 승부를 걸어올 것인가.
협회는 청화단과 세계 평화를 위한 공투의 조건으로 '승부'를 걸었다.
나는 책상을 두 손으로 내리치며 입을 열었다.
"예상가는 거 있으신 분?"
얄밉게도, 집행관 백희아는 무엇으로 승부를 낼 지는 알려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