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1부 11장 3
나와 덕배의 설명이 일부 끝났다.
아직 설명은 한참 남아있었지만, 너무 많은 이들이 궁금증에 미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기, 나는 꼭 질문해야겠다고 하는 사람만 손을...."
아무도 손을 내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강하게 목소리에 마력을 실었다.
"나는 죽어도 질문해야겠다고 하는 사람 빼고는 손을 내려요."
몇몇 이들이 슬그머니 손을 내렸지만, 거의 대부분이 아직도 손을 들고있었다.
"어쩔 수 없네요. 몇 명만 지명해서 질문 받을게요."
나는 가장 먼저 원탁 중에서도 안달이 나있는 가웨인을 지목했다. 모두의 이목이 가웨인에게 쏠렸다.
"크흠."
가웨인은 이런 상황이 어색한지, 헛기침을 하고 내게 질문했다.
"혹시 그 성주라는 자가 우리 원탁의 숙적, <어둠속에서 속삭이는 자>가 맞는가?"
"예."
"음......."
가웨인이 잠시 침묵했다. 나는 청화단과 원탁, 그리고 히어로들이 공투해야할 당위성을 설파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자료로 화면을 넘겼다.
* * *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 이명은 되게 긴데, 본명은 제가 직접 이름을 부르지 못해요. 그래서 대신 별의 주인이라는 짧은 이름, 성주(星主)라고 부르고 있죠. 1999년 12월 25일부터 약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곱 괴수에 의한 대학살, <피의 일주일>을 일으킨 원흉이기도 하고요.
덧붙여서 그 소동의 실행범은 간부들이라고 하더라. 세뇌당한 간부들.
네. 저도 마찬가지고,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죠. 아무튼 그래서 미친듯이 날뛴 간부들은 마력이 다 고갈되는 바람에 휴식이 필요했고, 간부들은 각자 자신이 날뛰던 곳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어요. 저는 어, 그러니까, 아마 마그마 속?
하와이 화산 폭발 일으키고 태평양 횡단하다가 중국에서 운장이랑 한 판 붙고 미사일 맞고 인천에 상륙했지.
조교 2호, 역시 정리를 참 잘하네요. 조금 듣기 껄끄러운 부분은 있지만. 어쨌든 각 간부들은 잠들어있다가 활동을 재개했어요. 그럼 성주라는 자가 왜 직접 나서지 않고 도망쳤냐. 그건 원탁-지금보다 이전의 원탁인 1기와 깊은 관련이 있어요.
얘들이 혼자 지구에 왔던 성주를 잡았다고 하더라.
전귀, 그러니까 후에 무신이라고 불릴 이능력자가 성주에게 큰 피해를 입혔어요. 다른 세계를 파괴할 외계의 신을 불러올 신물(神物)을 부숴버렸거든요. 그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비밀. 거기는 우리가 좀 더 신뢰가 쌓이면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그걸로 혹시나 자기 해코지할까봐 두려워하는 거니까 그냥 넘어가.
씨이. 그래서 성주는 요양을 위해 방주로 도망쳤고, 대신 차원문을 열어 간부들을 보낸 것이에요. 그게 원탁이 만들어진 배경이자 비밀.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혼자 남게된 가웨인은 예언에 따라 다시 나타나게 될 성주를 대처하고자, 지금의 원탁을 만들었죠.
겸사겸사 이 간부들도 견제하고 말이야. 설마 간부 하나가 세뇌를 풀고 돌아다닐 거라고는 예상 못한 듯 하지만.
* * *
"잠깐. 왜 사족을 달아요. 그거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얘기하려 했는데."
"뭐 어때? 미리미리 얘기해야 사람들 이해하기 편하지."
"좋아요. 추가 질문은 안 받겠습니다. 다음, 집행관 백희아 아가씨."
호명받은 백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며 질문할 준비를 마쳤다. 아직까지도 백희아의 눈에는 혼란이 가득해보였다.
"그럼 당신은 세계를 구하려고 한 거고.... 그 과정에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거고...."
"그게 질문이에요? 네, 맞아요. 그럼 다음-"
"잠깐만요! 제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녜요!"
백희아는 내 말을 끊으며 자신의 질문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그런 위험한 존재가 있었다면, 우리는 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죠?! 성주니 뭐니, 다크 레기온이니 뭐니, 저는 생전 처음 듣는 거라고요!"
"어...."
나는 그제서야 사람들의 혼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몰랐어요?"
"당연하죠!"
"......저기, 가웨인 씨. 오라클의 '예언'은 민간에 공개하는 게 아니었나요?"
"......당신의 말에 따른 그, 성주에 대한 부분은 철저히 비밀로 하였습니다. 그도 그럴게."
"5년 5개월 뒤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냐?"
덕배가 어깨를 좌우로 으쓱였다. 과연 류천성에게도 때때로 막말을 하는 막되먹은 놈 답게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아이고, 인류 여러분! 우리 모두 힘을 합해서 성주를 막아야 해요! 막 이럴 것 같아?"
"당연하죠! 멸망을 앞에 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어."
덕배가 엄지로 나를 가리키며 백희아의 말에 반박했다.
"얘 말로는 그렇다던데."
"......가만히 있기라도 하면 다행이고, 오히려 멸망에 동조하면서 무법자 행세를 하는 자들이 늘어났죠. 예, 괴인이 되면서."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잠자코 있던 <집행관> 유영호가 손을 들었다. 협회의 대표이자 '높으신 분'으로 이 자리에 찾은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추궁했다.
"너 왜 꼭 미래를 아는 것 처럼 이야기하냐?"
"그렇게 느끼셨어요?"
"어. 뭐라고 해야하나,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꼭 미래에서 과거로 온 것 같은 느낌이야."
"맞아요, 그 느낌."
나는 다른 이들 또한 궁금해할 부분을 이 기회를 빌어 못을 박았다. 은유하는 조금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내가 미리 준비한 나의 '설정'을 읊기 시작했다.
"저, 창염의 피닉스. 2025년 미래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본격적인 거짓말의 시작이었다.
역시 또 사람들의 표정이 대단해졌다.
* * *
2025년.
원탁은 간부들을 쓰러뜨리기는 커녕, 표면으로 나오기까지 한 다크 레기온을 이기지도 못했어요. 지구는 인류와 괴인들의 싸움으로 바뀌었죠.
그러던 와중에 한 줄기 희망이 생겼어요. 후에 인류의 희망이라고 불리게 될 남자가 한국땅을 방문하게 되죠.
아, 저 남자는 아니에요. 편의상 그를 <신관>이라고 부를 게요.
신관은 한국에서 둥지를 트고, 여러 이능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세력을 만들었어요. 신관 본인의 능력 또한 상당했죠. 지금 여기에 있는 집정관보다도 더. 어느 정도였냐면 C급 이하의 이능력자 넷으로 S급 괴인-간부 하나를 잡았을 정도로.
거짓말같죠? 진짜에요. 그리고 그 잡힌 S급 괴인은 <절풍의 펜릴>. 신관 일행은 절풍의 펜릴을 잡는 것으로 시작해, 간부들을 하나하나 잡아나갔어요.
아지다하카, 히드라, 카르나.
네 명에 이어 중국에서 '혼돈환룡'이라는 간부까지 잡은 뒤, 신관 일행은 여섯 번째 정령의 행방을 찾아 나섰죠.
설마 그 여섯 번째 정령이 진작에 한국에 있었다는 걸 꿈도 꾸지 못한 채.
* * *
"그 여섯 번째 정령이 설화령, 석하랑입니다."
"반가워요, 모두들. <설야의 루살카> 2대째, 석하랑입니다."
석하랑의 진짜 정체에 대해 히어로들이 경악했다. S급 천재라고는 들었지만, 설마-
"하랑이 너 외계인이었어?"
"어쩐지 어려서부터 좀 유별나다 싶더라."
"아니거든요? 이상한 소리 하지마요. 따지고보면 반만 외계인, 아니 정령이라고요!"
석하랑이 역정을 내며 자신의 종족 정체성을 정정했다. 석하랑이 물속성 정령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나는 석하랑이 민감해 할 정보를 숨기고 진실을 설명했다.
"설야의 루살카, 그러니까 석하랑의 어머니는 잠들지 못하고 한국에 도착했어요. 동해 바다에서 쓰러진 설야를 한 청년이 구했죠. 그리고 그 청년은 얼음장같은 설야의 마음을 녹이는 데 성공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는데-"
"그 청년이랑 물속성 정령이랑 배맞아서 애 낳은 게 석하랑이다 이거야."
퍽!
조덕배의 심장에 얼음 파편과 금빛의 검이 꽂혔다. 갑작스레 벌어진 살인 사건에 히어로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덕배를 재빨리 부활시켰다.
"창염개진!"
"으허억?!"
덕배는 부활했다. 죽었다 살아난 권능에 히어로들은 사색이 되었다.
"괴인이 되면 부활이 가능합니다. 아무튼 석하랑은 정령의 힘을 이어받은 존재다, 이 말이에요. 부모님은 두분 다 돌아가셨지만."
"아......."
회의장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나는 나를 향해 눈짓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낸 세 가족에게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구의 말마따나 이런 장소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예고도 없이 저지르기에는 조금 많이 미안했다.
"그래서 저는 2대 설야, 석하랑을 정령으로 각성시켰습니다."
"그, 그러면 광검은 왜 죽인 겁니까? 석하랑을 동료로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랑이의 스승님이셨던 광검 님을 죽인 거죠?!"
<화권> 이승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그에게 발언을 허한적이 없지만, 모두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광검은 괴인 루살카의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폭주하는 걸 억누르고 살고 있었죠."
"광검이 죽고 나서야 석하랑이 각성할 수 있었지."
나와 덕배는 아주 일부분의 진실만 흘렸다. 전말을 아는 이들-특히 한 부부와 은유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히어로들은 옆 자리의 이들과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광검 님이 하랑이에게 일부러 접근한 건가...?"
"그 정령의 힘이라는 걸 빼앗으려고 한 걸 수도 있겠구만. 에잉, 그 친구. 참."
"아니면 진짜 스승님으로서 가르쳐주려고 했던 걸 수도 있죠. 빌런으로 자라지 않도록, 히어로로 계도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온갖 음해가 난무했지만 나는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괴인 루살카의 힘이 광검에게 있고, 광검을 죽임으로써 석하랑이 정령으로 각성하는 매커니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즉.
'석하랑이 광검 딸이라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거기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광검이 사실은 유부남에 20살에 애를 낳고 보육원에 맡겼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 있는 세 가족의 존엄을 위해 광검 한 명만 풍평피해가 일어나도록 유도했다. 본인도 지은 죄를 알고 있는지 침묵했다.
"자, 자, 별 거 아녜요. 이능력자라는게 다 특이한 사람들이잖아요? 저는 남들보다 조금 더 특이할 뿐이에요. 저는 사람이라고요, 사람."
석하랑이 손뼉까지 치며 자신의 정체성을 어필했다. 반령을 자각한 순간보다 인간으로 살아온 시간이 더 많은 만큼, 석하랑은 그저 정령의 힘을 온전히 사용하는 인간 이능력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제 2대째 설야를 각성시킨 신관은 일행은 마지막 간부이자 정령인 <창염의 피닉스>를 각성시켰죠. 대신, 그 힘으로도 성주 뒤에 있던 흑막-이계신을 이길 수는 없었답니다."
나는 스크린 속 그래프에 화살표를 그렸다.
"그래서 저는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2025년까지의 미래 지식과 함께."
나는 회귀자가 되기로 사기를 쳤다. 원작 게임을 하다가 과거 시점에 전생해 히로인에 빙의했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다.
"<창염의 피닉스>는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거죠. 그러면서 세뇌는 풀었는데, 몇 가지 제약이 걸려서 온전한 힘을 낼 수 없어요."
"......'온전한'?"
나와 한 번 이상 붙어본, 또는 내 힘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이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특히 그중에서도 간부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태양을 폭파시키는 사람이 그보다 더 강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몰라. 그냥 듣기나 해."
"......저기요. 단장님?"
히카리가 손을 들었다. 최연소의 나이지만 흰 가운을 입고 당차게 손을 든 그의 손짓에 나는 히카리를 호명했다.
"네. 말씀해보세요."
"과거로 어떻게 돌아왔어요?"
"......만능의 물건이 하나 있잖아요. 당신에게 연구하라고 줬던 물건이."
"네?!"
히카리는 비명을 질렀다. 큐브에 대해 아는 자도 있고 모르는 자도 있고, 또 큐브의 한계와 진실에 대해 아는 자도 있고 모르는 자도 있었다.
"그러면 이참에 큐브에 관해서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나는 헛기침을 하여 이목을 모은 뒤, 설명을 마무리했다.
큐브의 가능성과 위험성.
나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절대 큐브를 가지고 욕심을 내지 않으리라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 보험 장치를 하나 마련해두었다.
"큐브는 말이에요, 사용자에게 엄청난 권능을 주지만 동시에 파멸을 불러오는 일종의 발신기에요. 성주가 사용하면 이계신을 불러오는 거고, 성주가 아니더라도 이계신이 찾아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라도 이 세계에 남아있으면, 언젠가 이계신이 찾아온다.
"전부 찾아서 부숴야하는 거죠. 그리고 그걸 없앨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저인 것이에요."
이렇게 나는 나를 쉽게 적대하지 못하게 할 당위성을 확보했다.
"그러면 얼추 중요한 설명은 다 끝난 것 같은데, 저랑 같이 간부들 잡으러 다니실 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내 행보에 대해 질문하는 것들을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누구도 영입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귀하의 의견에 대해서는 잘 알겠으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만 남긴 채 다 떠나버렸다.
결국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저 잠재적 적이 될 존재들에게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푼 것 말고는.
"어.... 다들 도와주겠죠? 히어로들인데?"
"빌런이 씨부리는 이야기를 퍽이나 믿겠다. 몰라, 아군이 될 지 적이 될 지."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네요."
나는 품안에 있는 코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아군이면 키우고, 적이 되면 죽여서 괴인으로 만들 뿐."
명쾌한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