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1부 11장 2
<7월 2일, 카스피 해 강변.>
세 간부의 삼중결계에서 빠져나온 나는 석하랑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내 분령이나 마찬가지였던 머리핀이 반으로 쪼개진 이후-후에 들은 말로는 환룡에게 준 것도 깨졌다고 했다-, 석하랑은 카스피 해 전체를 훑어 내 흔적을 찾았다고 했다.
"근데 니 흔적은 없고, 왠 야시꾸리한 이상한 흔적이 느껴지는 거 아이가. 일단 찝찝해서 건져놨더니 왠 걸, 누가 쌔맨에다가 공구리 쳐놨더구만."
나는 석하랑의 스마트 워치에 남은 영상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세 간부는 나를 드럼통에 시멘트를 담아 굳혀 카스피 해 한 가운데에 투기한 채 도망가버렸다.
"다행이네요. 안에서 뭐라고 했는지 안 들려서."
"그게 지금 할 소리가? 니 지금 얼마나 난리를 피웠는지 아나? 어떻게 됐으면 우짤라켔는데?"
"어떻게 안 됐으니까 걱정마요. 그런데 말이에요."
나는 석하랑의 뒤에 선 금발 남자를 가리켰다.
"당신 뒤에 당신 대장님 있는데, 그렇게 본색을 드러내도 돼요?"
"뭔 빙구같은 소리를-"
"설화령."
석하랑의 뒤에는 물에 빠쥔 생쥐 꼴로 나타난 금발의 미중년, 가웨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석하랑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둘이 연인 관계가 아니라면 무슨 관계인지 자세히 설명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만...?"
가웨인은 내 정체를 한 눈에 파악했다. 나는 결계를 탈출하면서 내 마력을 숨기지 않았고, 가웨인은 비스트 테이머 청화의 실체를 알아채버렸다.
"이, 이건 말이에요. 그러니까."
석하랑은 말투를 공손하게 하는 정신은 있었으나, 변명할만한 정신머리는 없었다. 나는 횡설수설하려는 석하랑의 손을 잡고 고개를 가로저은 뒤, 가웨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러모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걸로 알아요. 하지만 나도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뭡니까?"
"왜 다크 레기온의 간부, 절풍의 펜릴이 영국 왕실에서 튀어나온 거죠?"
"......."
가웨인은 침묵했다. 나와 가웨인은 서로를 추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다행히 가웨인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가웨인의 입으로 펜릴과 관련된 진실을 듣고싶었으나, 속속들이 날아오는 SS급과 S급 이능력자들의 등장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너 어떻게 된 거니?!"
"......흔적이 느껴지는데.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저도 냄새가 납니다. 지렁이랑 고양이랑 뱀...?"
"땅뱀이랑 늑대랑 드래곤이에요. ...나 참, 뭐 큰일 났다고 이렇게까지 몰려왔어요?"
내 말에 많은 이들이 역정을 냈다. 아나스타샤는 바로 옆에 석하랑이 있는 것도 잊고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빨리 설명하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 알았으니까 이 손 좀 놔요. ......일단 다같이 서울로 돌아가요. 거기서 말씀드릴게요."
나도 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서울에서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말할 수 있는 모든 진실을 말하겠다는 내 확약을 받고 나서야, 다른 이들은 나를 향해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청화단, 원탁의 히어로, 그 외 기타 등등.
나는 여의도로 그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세계의 이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야했다.
물론, 당연히.
이 세계는 사실 게임 속이었고, 내가 게임속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창염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 * *
<7월 2일 오후 5시, 여의도 청화단 아지트 미팅룸.>
회의장에 모인 이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나의 프레젠테이션에 좌중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세계의 비사를 이렇게 간단히...."
<등대> 김지화는 내 프레젠테이션이 뭔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고, 특히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이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모니터에 뜬 화면을 다시금 확인하고 기지화에게 물었다.
"일일이 설명하면 길어질 것 같아서 최대한 줄여봤는데 문제라도?"
"너무 줄였어. 너무."
<팬텀> 천가을은 내가 요약한 것을 위에서 아래로 읽어내렸다.
"1999년, 12월 25일. 성주가 차원문을 열어 다크 레기온의 간부들을 파견. '피의 일주일' 발생.
2020년, 현재.
2025년 12월 25일. 성주가 지구로 재방문. 세뇌한 간부들을 폭주시켜 지구를 멸망시킴. 끗."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완벽한 요약 아니에요?"
"거 맞춤법 틀렸네만."
<하늘성> 류천성이 삿대질을 하며 지적했다. 나는 그에게 한 차례 코를 찡그려준 뒤, 그를 무시했다.
"질문 받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설명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궁성> 유이신이 손을 바짝 들고 내 진행을 가로막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다른 이들도 유이신의 말에 동감하는 듯,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보스. 여기 있는 사람마다 아는 게 있고 모르는 게 있잖아. 우리야 주워들은 게 있다고 쳐. 근데 저 사람들은 어쩔 거냐?"
<아키택트> 제임스 리가 한 가운데 앉은 원형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말그대로 원형테이블, 원탁에 앉은 원탁의 관계자들은 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아나스타샤 마저도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저기. 나 진짜 하고싶은 말이 하나 있는데."
아나스타샤의 옆에 앉은 석하랑이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발언권을 요구했다. 나는 이야기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발언을 허가했고, 석하랑의 손가락이 좌중을 쭉 훑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처음 보거나, 아니면 누가 누군지 모르잖아. 그래, 자기 소개 할 사이는 아니라고 쳐. 타이밍도 아니고. 근데 다들 신경쓰여서 지금 전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거든?"
"......."
석하랑의 손가락이 검은 가면에 멈췄다. 의도치않게 청화단의 간부 테이블에 앉은 검은 마스크의 사나이는 석하랑의 시선을 피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석하랑은 차마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말을 정령으로서 내게 전했다.
"저 사람 말이야."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눈물의 가족 상봉을 해야되냐?]
"......."
석하랑도 석하랑 나름의 가족 상봉을 그리고 있었을텐데, 어쩌다보니 내가 싹다 모아 한 자리에 앉혀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른 이들이 광검이 광검인 걸 모른다는 것.
"어쩔 수 없잖아요. 제일 중요한 관계자인 걸. 이 남자의 테크닉 덕분에 인류는 구원받은 걸요. 자, 일어나요. 인류의 구원자."
다른 이들은 상관없지만, 나는 손뼉을 쳐서 검은 마스크의 괴인을 일으켜세웠다. 그는 정말로 싫은듯 내 손을 뿌리칠 정도였지만,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마스크에 손을 올렸다.
"......."
그는 투구같은 마스크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생전과 달리 하얗게 백금발로 새어버린 머리칼 아래, 그의 얼굴은 죽었을 때와 달리 20대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있었다.
"누구세요?"
사람들이 물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에 잠깐이나마 안도한 듯 했다. 나는 그에게 자기 소개를 재촉했다.
"당신 이름은?"
"......<암흑 정무관>. 지금은 그렇게 불러주시게."
20대 청년의 입에서 나온 연식있는 말투에 사람들은 위화감에 빠졌다. 석하랑은 맥없이 주저앉았고,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얼굴이 시뻘게진게 엄청 부끄러운 모양새였다.
"잠깐만요. 저희는 그럼 왜 부른 거죠?"
히어로 측의 인사들이 손을 들었다. <집행관> 백희아를 위시한 협회 측 소수 인원은 원탁측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우리와 바로 싸울만한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내가 피닉스임을 밝히는 걸 전제하에 이야기를 진행하는 이상.
"원래라면 당신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었는데."
간부진들이 셋이나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는 걸 알게 된 이상, 오해를 풀고 협력을 구해야했다. 내가 피닉스인 걸 히어로들이 알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차피 대중들만 모르면 그만이었다.
"지금부터 세계의 이면에 대한 진실을 듣는 이상, 당신들도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구하는 공범이 되는 것이에요. 히어로나 빌런으로 투닥거리기 전에, 우선 지구부터 지키고 보자는 거죠. 알겠죠? 그 이후에 빌런을 체포하든 히어로를 능욕하든 하자고요. 오케이?"
그 누구 하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원활한 설명을 위해 강의를 도와줄 조교를 불렀다.
"자, 그러면 부하 2호. 나오세요."
"졸지에 사람들 앞에서 역사 설명도 해보네. 씁."
조덕배는 정장을 입고 스크린 맞은편에 섰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천가을이 덕배의 위치에 의문을 표했다. S급의 수가 즐비한 이능력자들 사이에서, 고작 B급 괴인에 불과한 덕배가 내 옆에 자리잡은 것은 얼핏 보면 분명 이상해보였다.
"제가 혹시나 설명하다가 까먹을 수 있잖아요?"
"얘가 틈만나면 나 불러서 떠들어대느라, 내 귀가 아주 피가 철철 흐를 정도였지."
덕배는 나 다음으로 이 세계의 이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잘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리 당신이 청화단의 간부라도 해도, 고객님의 옆에서 설명할 만큼의 지식은-"
"나 참고로 16명, 이름 나이 속성까지도 다들었다?"
"충분하시네요. 좋아요. 계속 하세요."
은유하, 천가을, 석하랑, 샤오린, 히카리, 백희아, 환룡, 박라온.
이 자리에 모인 히로인들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고, 나는 괜히 찔려서 입이 바짝 말랐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요."
"네가 알려준 거잖아."
"......일단 어쩌다 이 세계가 이렇게 되었는지 설명부터 하죠."
나는 화제를 돌렸다. 모두가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지만, 이어지는 서두에 모두가 목소리를 낮추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2025년 12월 25일. 세계는 멸망합니다. 지구를 흔적도 남김없이 파괴할 일곱 명의 괴인에 의해. 그리고 그 괴인 중의 하나가 저, <창염의 피닉스>인 것이에요."
* * *
먼저 이능력의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것부터 설명해야할 것 같네요.
강의 중에 질문하지마. 궁금해도 참아. 어차피 다 들어봐야 절반도 이해 못할 걸?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에 근접한 사람은 저기 앉아있는 <질풍객>의 여동생, 히메지 히카리 양이나 한국의 이능력연구자 도 교수의 가설이 정답이에요.
'이세계설'이라고 했던가. 그래. 우리가 쓰는 마력이란 거, 다른 세계의 힘이라더라.
애초에 '차원'문이라는 이름에서부터 그렇잖아요? 차원간의 문. 저희, 그러니까 정령들이 살던 세계는 '테라'라고 하는 행성이었는데요, 외계인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어요. 지금은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차원문에서 넘어오는 괴수들이 외계인에게 지배를 당하고 미쳐버린 괴인들이죠.
그러니까 외계인이 테라를 정복하고, 테라의 주민들로 지구도 정복하려 한다 이거야.
그럼 정령이라는 게 무엇이냐.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마력은 총 일곱 가지 속성으로 구분돼요. 지수화풍광암환. 각각의 속성별로 마력을 관장하는 근원이 있고, 그 근원이 자아를 가지고 실체를 가지게 된 존재가 정령인 것이에요. 저는 그 중에서도 불의 정령, <창염의 피닉스>구요.
그러니까 얘가 다른 세계에서 짱먹은 놈이라는 거지.
짱이라니, 당신 연배가…. 아무튼 정령들은 외계인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내려고 했어요. 하지만 지금 지구에서 차원문이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테라 또한 외계인의 침공을 전부 이겨낼 수 없었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패배했어요. 그리고 정령들은 또다른 차원을 침공하기 위한 첨병이 되었죠.
제일 강한 일곱 명의 뇌를 주물럭거려서 노예로 삼은 거지. 이른바 '흐아앙! 외계인님 자지 갱장해여엇!' 상태가 되는, 크헉!
맞는 말이긴 한데 품위를 좀 지켜요, 조교 2호. ...뭐 진짜로 맞는 말이라서 부정은 못해요. 아니, 그렇다고 진짜로 외계인들한테 윤간당했다는게 아니에요. 거기 오해하지 마요. 외계인, 그러니까 '성주'라는 놈이 다행히 그런 쪽으로 취향은 없었으니까. 대신 다른 쪽으로 조금 취향이 독특했어요.
악의 조직 <다크 레기온>!
…...거기 웃지마요. 특히 전직 간부 둘이랑 예비 간부 하나. 이 웃기는 조직에 지구가 멸망당하는 미래가 수두루 빽빽하니까. 성주는 세뇌한 정령들을 악의 조직 '간부'로 만들었죠.
창염의 피닉스.
설야의 루살카.
절풍의 펜릴.
지륜의 히드라.
개천광 카르나.
마암룡 아지다하카.
혼돈환룡. ...맞나?
정확해요. 이 일곱 정령들은 성주에 의해 세뇌당하고, 마력까지 오염되어 괴수가 되었죠.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수마룡이나 풍마룡같은 것들이 정령을 괴수로 만들면서 생긴 복제품들이에요. 복제가 S급, 괴수들이 SS급.
중국에서 나왔던 혼돈이라는 놈, 거기 설화령 아가씨가 안 잡았으면 아마 13억이 다 잡아먹혔을 걸?
강한 괴수들이에요. 정말. 괴수 하나에 S급 이능력자가 한 트럭은 달려들어야 제압이 가능한 무시무시한 놈들이에요. 다행히 제가 저랑 다른 두 명은 미리 조치를 취해뒀으니까, 이제 남은 간부는 넷 밖에 없어요. 걔들의 세뇌를 풀어야, 나중에 성주와 그 뒤에 있는 흑막을 완전히 쓰러뜨릴 수 있죠.
그래서 그 질풍인가 하는 놈을 잡으러 갔더니 어이쿠, 셋이 동시에 튀어나왔네? 얘가 혼자서는 뒤질 것 같아서 너희들 불러모은 거야. 니들한테 짬 때리려고.
전략적 공투라고 해주겠어요? 안 그래도 봉인 당할 뻔해서 기분 드럽, 크흠. 거 표정 험상궂게 째려보지마요. 저 스스로 탈출했잖아요? 아무튼 저나 제가 세뇌를 푼 다른 둘은 몰라도, 나머지 넷은 진짜로 세계를 멸망시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이 순간에도 지구를 정복할 생각만 하고 있겠죠. 펜릴이 영국 왕실에 숨어있던 건 정말 진짜 의외였지만 말이에요.
또 모르지. 다른 애들도 어디 정부나 기관, 아니면 조직의 뒤에 숨어있을지.
그러니까 저는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많은 여러분들의 도움을 구하고자 한 거에요. 아, 크흠. 잠시만요.
* * *
나는 텀블러에 놓인 딸기라떼로 목을 축인 뒤, 손을 들어올렸다.
"혹시 여기까지 궁금한 거 있는 사람?"
모두가 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