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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27화 (227/1,497)

〈 227화 〉1부 10장 30

나는 창염의 환대아닌 환대를 받은 뒤, 드디어 창염이 나를 부른 이유에 대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신이 지금까지 싸워온 과정이에요. 보여요?"

창염은 TV 리모컨을 누르며 채널을 돌렸다. 001번부터 시작하여 위로 올라가는 채널은 무려 200이 넘었다.

"도대체 활동 시작한지 고작 3개월 남짓한 시간만에 얼마나 많이 치고박고 했는지. 일단 그 중에서도 제가 잔소리 좀 할 것만 몇 개 뽑아봤어요."

창염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한 채널에서 멈췄다. 나는 창염의 명령에 의해, 그를 내 허벅지 위에 앉혀놓고 쓰다듬어야 하는 고문을 당했다.

"우선 첫번째. 이거 언제 싸웠게요?"

"광검이랑 싸웠을 때인가?"

영상은 내가 바라보는 시야가 곧 화면이었으며, 루살카의 힘을 폭주시키기 전의 광검이 나를 향해 쌍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피가 난자하고, 내 주먹이 광검의 옷깃을 스쳤다.

"역시 잘 싸워. 역시 나야."

"지금 싸우는 테크닉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봐요."

전투가 잠시 멈추고, 내가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말 많다고 화내려는 거냐? 나 너보다 적게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 이렇게 말이 많나 싶었지만, 창염이 가리키는 건 그게 아니었나보다.

"무슨 상처가 이렇게 많아요?"

"아."

나는 설마설마하던 가정을 하나 생각해냈다. 하지만 창염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그냥 조용히 하기로 했다.

"다음 채널."

창염은 금방 다른 화면으로 채널을 돌렸다. 장강에서의 전투, 그러니까 폭주하는 혼돈을 상대로 약점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던 순간이었다.

"보이죠?"

"음, 잘 보이네. 피닉스가 혼돈을 아주 쉽게 공략하는 모습이."

혼돈에 의해 장강 물속을 몇 번이고 처박혔다 뛰쳐나오며 도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창염은 내가 말하는 답이 오답이라는 듯, 뒷통수를 위로 밀며 내 턱을 턱턱 건드렸다.

"내가 뭘 말하려고 하는 지 알면서 자꾸 모른척 하네. 좋아요.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죠."

이윽고 창염이 마지막 채널을 재생했다. 방금 전까지 싸우고 있던 세 간부들과의 전투였다.

"저 ㄴ...녀석들 이랑 싸울 때, 뭐 히드라한테 그 짓거리한 건 뭐라고 안 해요."

"그러면?"

"그걸 굳이 제 입으로 얘기해야해요?"

영상 속 나-괴인형의 피닉스는 손목이 칼바람에 잘려나가고, 가슴에는 흑요석의 검 십 수개가 꽂혀있었고, 발목에는 돌뱀들이 휘감겨 이빨을 박아넣고 있었다.

"마조에요? 왜 무식하게 싸워요?"

"무식하다니. 저렇게 상처를 입어봐야 뭐 문제 되는 거라도 있나?"

나는 창염이 걱정하는-진짜 걱정을 하는 걸까, 설마?-부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재생시키면 되는데."

"이봐요."

창염이 자신의 허리를 감싼 내 팔을 꼬집었다. 세계 최강의 이능력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내 팔을 꼬집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당신이 고통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고, 저거 다 쇼크사할 만큼 아픈 것들이거든요?"

"그건 그렇지."

"당신, 블랙아웃 몇 번이나 됐어요?"

"......광검이랑 싸울 때 이후로는 귀찮아서 안 헤아렸는데."

"이거봐. 아주 그냥 자기 멋대로라니까?"

창염이 몸을 돌렸다. 소파에 서로를 마주보며 앉는 형국이 되었지만, 창염은 내 멱살을 잡기 위해 몸을 뒤집었다.

"내가 예전에 나왔을 때 뭐라고 그랬어요. 내 몸 아껴쓰라고 했죠?"

"그래서 괴인형으로 계속 싸웠잖냐."

"다치지 말고 싸우라는 생각은 안해봤어요?"

"......아."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구나.

"너 그게 나 걱정해서 그렇게 말했던 거냐? 나 다치지 말라고?"

"괜히 말 돌리면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질테니까 부정은 안 할게요. 좋든 싫든 일단 당신이 내 몸의 주인이 되었는데, 내 몸 마구잡이로 뒹구르게 하는 것도 그렇지만 자꾸 고통을 받게 하는 것도 보기 싫단 말이에요."

창염은 툴툴거리며 내 멱살을 흔들었다.

"당신이 느끼는 고통, 안에서 저한테도 흘러들어온다는 거 몰라요?"

"......진짜?"

그건 몰랐는데.

"와, 어이없네."

창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금까지 그걸 몰랐어요?"

"네가 안 알려줬으니까. 아프면 얘기하지 그랬냐."

"당신이 개떡으로 알아들어놓고 무슨 헛소리에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몰라. 나는 누가 말한대로 답답이라서,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들으니까."

"......."

창염이 내 멱살을 풀었다. 팔짱을 낀 채, 나를 지긋이 노려봤다.

"이봐요, 세입자님."

"오, 무단 주거 침입자에서 세입자로 격상했다."

"자꾸 헛소리로 말 끊지 말고."

"예, 집주인님."

창염은 자신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당신이 사랑해마지않는 <창염의 피닉스>의 전투 스타일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아, 안 돼. 그건 나 양보 못한다."

나는 창염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닫고 먼저 선수를 쳤다. 내 동문서답에 창염도 내 말뜻을 깨닫고는 기가막혀했다.

"이런 건 또 기깔나게 알아들으시네. 그렇게 주먹질하고 싶어요? 예?"

"그, 뭐냐, 이왕 최강에 빙의한 거 내가 가장 잘 알고있는 방식으로 싸워보고 싶은 건 당연지사 아니냐."

"그건 좋은데, 그걸 왜 내 몸으로 하냐 이 말이에요."

"그야...."

나는 엄지로 나를, 검지로 창염을 번갈아 가리켰다.

"죽으면 부활하잖아. 피닉스니까."

"그래서 칼침맞고 목이 잘려도 부활할 수 있으니까 맞으면서 싸울 거다?"

"그렇지. 아까 채널 돌려볼까?"

나는 히드라의 엉덩이 위에 올라타 등에 돋아난 머리를 뽑아내던 장면으로 영상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창염은 리모컨을 내어놓지 않고, 자기가 직접 화면을 돌렸다.

"봐봐. 내가 만약에 피하기만 하면서 원거리에서 공략하려 했잖아? 그러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렸을 거다. 그런데 지금 보면."

"한 시간 걸릴 바에야 5분만에 바로 다 뽑아버리시겠다?"

"그래. 얼마나 시간 아끼고 좋냐."

"덕분에 안 겪어도 될 고통을 느꼈죠. 손목 날아가고, 몸에 칼침 맞고, 마력을 녹이는 극독에 중독되고."

"......."

나와 창염의 대화는 또다시 평행선을 달릴 기미가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먼저 포기하는 것은 나였다.

......언제나?

"알았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어. 대신 완전히 모두 피할 수는 없어. 다른 셋이라면 모를까, 개천광 상대로는 근접전이 필수니까."

"막고 흘리고 반격하세요. 괜히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마!' 이러면서 어디 얻어터지지 말고. 알겠죠?"

"......잔소리는 백희아 전문인데."

"어디서 다른 여자 얘기를."

창염이 내 인중에 손가락을 튕겼다. 분명 정신상태일텐데, 아픈 건 또 엄청나게 아팠다. 주로 마음이 아팠다.

"알겠다. 선처하지."

"선서하세요."

"오냐."

"흠흠."

창염은 헛기침을 하며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남의 몸에 멋대로 들어오신 인간, 임시 가칭 <피닉스>님은 제 몸을 돌보며 싸울 것을 맹새하십니까?"

"......."

장난스럽지만 왠지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에, 나는 군말없이 창염에게 맹새했다.

"예.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몸을 아끼면서 싸우겠습니다."

"......그럼 여기에 맹세의 증거를."

"맹세의 증거라니, 무슨-"

창염이 갑자기 내 눈을 가렸다.

그리고 의식이 또 끊어졌다.

* * *

"그럼 지금부터 작전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갑자기?"

"이미 쉴만큼 쉬셨잖아요?"

창염은 두 팔을 벌려 주변을 가리켰다. 우리는 여의도의 한강공원 둔치에서 바람을 맞으며 산책로를 걸었다.

"정령들 각성시키는게 당신 돕는 꼴이라 조오오오오금 아니꼽기는 한데, 뭐 어쩌겠어요. 걔들도 결국에는 불쌍한 제 가족들인데."

"언니 언니 하던게 진짜 친자매라서 그런건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자세한 건 당신이 몰라도 돼요. 진짜로, 그건 우리들만의 사정이니까."

"......내가 모르는 뒷배경이 있는 거야, 아니면 네가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거야?"

내가 걸음을 멈추고 묻자, 뒷짐을 지고 걷던 창염도 나를 향해 돌아섰다.

"둘 다예요. 당신이 말하는 원작, 그곳에서도 의도적으로 은폐된 설정이고, 그건 당신에게 말할 의무도 필요도 없어요."

창염은 잠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가 눈썹을 찌푸리며 내게 화를 냈다.

"씨이, 당신 이해하기 좋게 설명하려다보니까 또 이렇게 저를 깎아내리잖아요. 잘 들어요.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이 하던 게임 속 캐릭터 따위가 아녜요. 알겠어요?"

"이미 통감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너는 너다. 충분히 이해해."

"......그렇게 시원하게 받아들이니까 외려 열받네. 아무튼, 그 뒷배경에 대해서는.... 아."

창염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신화에 이르면 자연히 알게되겠네요."

"일부러 그렇게 흘리는 건 나보고 신화에 이르라는 언질이냐?"

"아뇨. 그냥 그렇다고요. 어차피 이곳에 있는 동안은 서로 숨기지도 못하는 걸요. 알몸으로 있는 것 보다 더 부끄러운 상태잖아요?"

"일방적으로 나만 까발려지고 있지만."

"푸흐흐. 잘 봤어요. 동생들이랑 어떤 체위로 하는지. 뭐, 약 한 명 당신의 마수를 벗어난 존재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광검 부부네 정사를 눈으로 봤으니 다 채운셈 아닌가...?"

막상 창염이 이렇게 직접 언급하니 더 부끄러워졌다. 창염은 내가 플레이를 했던 데이터를 모두 가지고 있는 만큼, 내가 히로인들과 했던 그렇고 그런 행위도 모두 가지고 있다.

"......너 아까 TV도 혹시 그거 돌려보거나 하는 거냐?"

"수집하는 재미가 쏠쏠하던데요. 왜 당신이 그렇게 100% 수집에 집착하는 지 알겠더라고요. 아, 참고로 하나 말하자면."

창염은 자신의 얼굴에 바이저를 끼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

"간접체험 잘 했어요. 남자는 어떻게 하는지."

"......이거 NTR 당한 거 맞지? 그렇지?"

"하여튼 생각 하고는. 그러니까 미리 경고하는데."

창염은 내게 검지를 들어올리며 좌우로 흔들었다.

"섹스 테크닉으로 저 어떻게 해보려면 아무 소용없을 거예요. 당신의 모든 패턴은 다 알고 있으니까. 애초에...."

창염이 새끼손가락만 들고 흔들었다.

"이유나랑 한 것만 봐도 다 알겠던데요? 푸흐흐."

"그, 그만."

더는 부끄러워서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창염의 입을 막기 위해 창염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 15명보다 이유나랑 한 횟수가 더 많을 수, 앙."

내가 창염의 입을 손으로 막자, 창염은 내 손가락을 깨물고 도망쳤다.

"흥, 어디서 제 말을 끊으려고."

".....아니, 고작 손가락 하나 물렸을 뿐인데 왜 이렇게 아파?"

"열손가락 중에 아픈 손가락 하나 쯤은 있는 모양이죠. 아, 또 이야기가 새버렸네. 그러니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작전회의."

창염이 손가락을 튕기며 반색했다.

"그래요! 그 말을 해야했는데. 흠흠, 그러면 각 정령들을 어떻게 공략할 지 논의해볼까요?"

"지금 이 상황에서? 애초에 내 계획은 다 박살이났는데? 누가 20년 전부터 함정을 파놓는 바람에 말이야."

"......."

나는 진심으로 빈정거렸고, 창염은 그저 입꼬리만 슬며시 들어올리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뭐...그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해명할게요. 애초에 해명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는 말이지만."

"......하긴, 나같아도 내 몸을 차지하러 웬 하찮은 인간 따위가 들어온다고 알게 되면 온갖 난리를 치겠지. 알았어. 대신 나중에 꼭 얘기해줘라. 적어도 오늘 같은 일은 당하기 싫거든."

"그야 당연하죠. 대신 '정령들 공략하는 상황'에 한해서 도와드리는 거예요. 만약에 당신이 펜릴이나 아지다하카 같은 애들을 일깨우려 한 게 아니라, 지난 번처럼 백희아한테 반지나 끼우고 있었으면 저는 입 닥치고 있을 겁니다."

"......알겠다."

창염이 스스로 입을 닥치겠다고 언급했다. 저건 진심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군말없이 수긍했다.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작전회의를 하죠. 그 전에."

"또 뭐가 남아있어?"

"네. 당신이 얼마나 제 말을 잘 듣는지, 우선 테스트부터 해보려고요."

"......주변 환경을 여기로 만들 때부터 뭔가 악취미다 싶더라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곳은 여의도 한강공원.

비록 정신세계 안에 구현된 공간이지만, 그 상징성은 변하지 않는다.

"네, 제가 죽는 장소죠.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주인공'과 제가 싸우는 장소이기도 하고."

"주인공은 뒤에서 입만 뻥긋거리며 싸우는 데."

"잔말말고 팔이나 들어요. 모처럼 기회잖아요? 언제부터 계속 자꾸 때리고 싶다고 했으면서. 푸흐흐."

"정신세계 속에서 내면의 자아와 싸우게 되는 건 주인공들 특징 아니었나?"

나는 창염의 말대로 순순히 가드를 들어올렸다. 창염은 옷자락을 양옆으로 들어올리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너무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지 마요. 당신은 이 세계에서 만큼은 주인공이니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인데. 애초에 그 뭐냐, 창염의 피닉스 상대로 싸웠던 건 원작 극 후반이라고. 최소 권장 레벨이 SS급만 7명이 투입되는 전투다. 그걸 나보고 혼자 하라고?"

"어머, 그래서 쫄려요? 동기부여가 필요하나?"

창염은 왼쪽 어깨위로 뻗은 오른손 위에 불꽃을 피어올렸다.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그 얼굴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저한테 이기면 아주 좋은 거 하나 선물해드릴게요. 뭐...키스라도 해드릴까?"

"아주 적절한 동기부여군. 한 70% 정도 의욕이 생겼어."

창염은 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70%? 제가 하사하는 키스인데도?"

"이왕 키스하는 거 100%까지 올라가게 섹-"

창염이 선공을 날렸다. 나는 뒷 말을 잇지도 못한 채, 창염과의 전투에 돌입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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