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1부 10장 29
<?????>
나는 의식을 잃었다.
정확히는 의식을 누군가에게 소환당했다. 히드라의 뱃속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퓨즈가 끊어진 전자기기 마냥 의식이 암전되었다.
'그래서 여기는 어디-'
"......?"
시야가 다르다. 피닉스의 인간형 신장과는 달리, 시야의 눈높이가 괴인형일 때와 엇비슷했다.
'뭐지.'
이게 히드라의 뱃속? 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주변이 화려했다. 내 발밑에는 레드카펫이 깔려있었고, 레드카펫의 끝에는 황금의 옥좌가 있었다.
"푸흐흐."
그 옥좌에는 왕이-아니 신이 앉아있었다. 언제나처럼 내가 챙겨입던 사제복과는 달리, 안이 슬며시 비치는 하얀 드레스에 금색의 장신구만 끼고 있었다.
옥좌의 끝.
창염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불러도 되는 거냐? ......음?"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입을 만졌다.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이의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
"어, 음, 음...?"
"......."
웃고있던 창염의 입꼬리가 슬며시 내려갔다. 옥좌의 팔걸이에 올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긁는 게 상당히 초조한 기색이였다. 나는 앞으로 한 발자국 걸었다.
화륵.
양 옆으로 자리잡은 독수리의 석상이 하늘을 향해 횃불을 들어올렸다. 내가 석상을 지나가자마자 횃불에는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확신했다.
내 의식을 끊어버리고, 창염은 나를 이곳으로 불러온 것이라고. 하필이면 내가 반격을 하려고 마음먹은 시점에.
"미안하지만."
나는 저 멀리 있는 창염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지금 다른 세 명이랑 선약이 있어서. 마저 그 놈들 패죽이고 다시 오지."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레드카펫을 뒤로 걸었다. 신전인지 옥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창염이 앉은 반대편이 탈출구 같다는 느낌은 들었다.
'누가 오란다고 갈 줄 아나.'
화륵.
텅 비어있던 문에 푸른 불꽃이 생겼다. 불꽃은 내 앞길을 가로막았고, 어느새 날아온 독수리 가면의 석상이 문을 창으로 틀어막았다.
"알았다. 그래. 간다, 가."
"......푸흐흐."
굳이 멀리까지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나는 먼저 이것부터 따져야했다.
"야."
"......야?"
"한창 이기고 있던 와중인데 스위치 내리니까 좋더냐?"
"......."
창염은 고개를 피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창염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질렀다.
"당장 나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해! 내가 당장 밖으로 돌아가서, 그 간부들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개 쳐발리고 있었잖아요!"
"안 발렸거든!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할 때 쯤에 반격하려 했거든! 네가 방해해서 히드라 뱃속에 빠졌잖아! 지금쯤이면 땅에 묻혔을 거라고!"
"어차피 걔들 힘으로는 내 몸 건드리지도 못해요! 그러길래 누가 남의 몸 그렇게 험하게 굴리래요?!"
"괴인형으로 싸웠다!"
"그것도 내 몸이에요! 내가 당신 전용으로 빌려준 거지!"
나와 창염은 인사도 하기 전에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밖의 몸이 콘크리트에 공구리쳐져 강속으로 처박히건 말건, 일단 나는 따질 건 따져야됐다.
"인간적으로 괴인형으로 싸울 때는 좀 이해해줘야지! 어! 히드라 뱃속에서 나도 괴수형으로 변신해서 몸통을 확! 찢어버리면서 나올 생각이었다고!"
"미쳤어요? 누구 토하게 만들 생각이에요? 히드라는 히로인 아녜요? 당신은 히로인 배를 찢으면서 그렇게 인성질을 하고싶어요?"
"인성질이라니! 안 그러면 지잖아! 내가 지는 건 네가 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멍청아!"
"멍청이? 누구보고 멍청이래! 맨날 답답하게 사람 속만 터지게 하는 건빵같은게!"
"건빵? 지금 건빵 무시하냐? 너 내가 몸으로 돌아가면 건빵 열 개 물없이 먹어봐?"
"딸기나 그렇게 처먹어요! 젠장, 아, 좀 닥쳐봐요! 내가 이럴려고 부른 줄 아나!"
창염이 신경질을 부리며 옥좌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까지 갈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래. 내가 계속 불러도 아무 대답없던 분이 집까지 초대해줬는데 이해해줘야지. 왜 불렀냐?"
"자꾸 틱틱거릴래요? 쫌생이같이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 언제는 사랑한다면서 죽고는 못 살 것 같더라니."
"그건 맞다. 그건 맞는데."
나는 창염을 향해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손등은 창염을 향해 놓았다.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일단 이것부터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할 것 같아서."
"좋아요. 넓은 아량으로 들어드리죠."
창염은 옥좌에서 두 팔을 벌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먼저 하나. 너 왜 환룡 각성 시키고 큐브 먹튀했냐?"
"......그래서 지금 돌려드렸잖아요."
"뭘?"
"당신 육성."
"이게?"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이 안 가는 목소리인데, 이게 내 원래 목소리란 말인가.
"그럼 나 이제 밖에서도 내 목소리 낼 수 있는 거냐?"
"아뇨. 여기서만 할 수 있어요. 이곳, 제가 당신을 초대한 저의 '영역'에서."
"그럼 아무짝에도 쓸모 없네. 용건 끝내면 당장 밖으로 내보내. 일단 세 간부들 팬 다음에 정령으로 만들어서 이야기하자. 그럼 되지?"
"아뇨. 누구 마음대로 나갈려고 해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닌 거 몰라요?"
"내가 왔냐? 네가 불렀지."
"당신이 멋대로 내 몸에 들어왔잖아요. 시작부터."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없다. 창염은 따박따박 내 말을 맞받아치며 화를 냈다. 계속 서로 말꼬리를 잡으면 도저히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먼저 꼬리를 내렸다.
"그래서 왜 먹튀했냐고."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듣지못했다. 창염은 콧방귀를 뀌며 내게 빈정거렸다.
"대놓고 떡치고 싶다고 얘기하는 사람 상대로 그러면 거기서 더 어떻게 얘기해요?"
"대놓고 내 기억 다 읽으신 분이면 그보다 더한 것도 아실텐데."
"입 다물어요."
"좋아. 부끄러워서 도망갔다. 인정. 그럼 어쩔 수 없지."
창염은 울컥한 듯 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꼬우면 자기가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면 다음 질문."
나는 엄지를 접었다. 검지와 중지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두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창염의 이목을 끌었다.
"한창 이기고 있던 타이밍에 나를 이렇게 부른 이유는 뭐야?"
"보고싶어서 그랬다고 하면 안 돼요?"
이번에는 창염이 역으로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런 싸움에서는 내가 더 유리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히드라? 펜릴? 아지다하카? 다 꺼지라고 하지 뭐. 그래, 드디어 나와 신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든 거야?"
"아뇨. 죽었다 깨어나면 모를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안 드네요."
"지금은이라면 언젠가는 그럴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당신 하는 거 봐서요. 물론."
창염은 역으로 검지를 두 개 들어올리며 나를 비웃었다.
"그 때는 당신에게 두 가지 선택권이 놓여있게 되겠지만요. 푸흐흐."
"그럼 그 때 가보면 알 일이고. 다시, 나를 부른 이유는?"
"말했잖아요? 보고싶어서라고. 구체적으로 이유가 필요해요?"
"그냥 부르지는 않았을 거 아냐."
"이유가 필요하다라.... 좋아요."
창염은 역으로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하나는 당신의 목소리. 나만 들을 수 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당신도 당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예요."
"다음."
"......다른 하나는 당신이 질 것 같아서. 너무 몸을 막쓰는 전투, 보기 흉해요. 아무리 치료하면 된다고 해도 마구잡이로 쓰지 말라고요."
"좋아. 다음."
"야."
창염이 말을 놓으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자기는 뭐만 말하면 삼천포로 빠지면서, 왜 내가 답하는 거에는 바로 다음 질문을 요구하는 건데...요?"
"반말해도 좋은데. 새롭기도 하고."
"입 닥쳐...주십시오."
극존칭으로 바꿨다. 삐진 게 틀림없다.
"흠흠. 이거 보십시오. 제가 묻는 말에는 이상한 대답으로 질문을 흘리면서, 어찌 저는 당신에게 곧이곧대로 답을 해야한단 말입니까?"
"마지막 이유는?"
"아, 씨. 진짜. 자꾸 이럴래요?"
"이럴 건데? 푸흐흐."
나는 일부러 창염의 웃음소리를 따라했다. 창염은 울컥하여 옥좌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간신히 화를 참으며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나는 아직 옥좌의 지척까지 다가가지 않았다. 불을 밝히는 석상의 열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됐어요. 그냥 내가 말하지 뭐. 세번째 이유. 그건 비밀이에요."
"그래? 그러면 됐어."
"안 궁금해요?"
"그거보다 다른 게 궁금하거든."
나는 검지를 마저 접었다. 이윽고 중지만 남았고, 손등은 창염을 향해있었다. 창염은 그제서야 내 손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죽을라고."
"내가 진짜 궁금한 건 말이야, 다른 거야."
나는 엄지만 꺼내 내 등 뒤를 가리켰다.
"너 20년 전에 도대체 뭔 난리를 피운 거야?"
"......비밀이에요. 원래 여자는 다들 속에 비밀 몇 가지는 가지고 있는 법이라고요. 그걸 지금 당장 이야기할 필요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거래를 하자 이거지? 그래, 이번에 거래를 할 대상은 정령이냐, 아니면 큐브냐?"
아무래도 창염은 분명히 20년전-그러니까 잠들기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하고 잠든 모양이었다.
"내가 빙의할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하고 사전조치를 취한 건가? 아니면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거나? 그도 아니면 '흐아앙 주인공 님 갱장한 거시에요오오!'하는 상태가 될수도 있으니 미리 주의를 준거라거나."
"진짜 죽을래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깐족거려요?"
"야, 너도 내 기억을 읽었으니 알아듣겠지? 내가 지금 무슨 상황이냐면."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는 문을 가리켰다.
"승급전 승리 직전에 사랑하는 와이프가 PC 전원 내려버린 택이라고. 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어차피 승급전 다음 기회도 있는 상황이고, 누가 와이프래요? 혼인신고서 썼어요? 원작에서 저랑 떡이라도 치셨나? 그냥 썸만 탔을 뿐이잖아요."
"써주랴?"
"되게 건방지게 말하네. 됐어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창염은 손을 들어 내게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창염의 앞에 섰다.
"내가 뭔 소리를 하든 넌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지. 여기는 온전히 '네 공간'이니까."
"예. 100이라는 정신 공간 중에 유일하게 남은 1의 구역. 이곳이 바로 당신이 지배하지 못한 제 집이랍니다."
"집을 아주 화려하게 꾸리셨네. 무슨 신전이냐?"
"당연하죠. 신이라고요. 여.신."
"예, 예. 알겠습니다. 신이시여, 그러면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두 손을 합장하며 허리를 숙였다.
"당장 다른 간부들 후드려패서 성주 잡을 수 있게, 저를 이 신전에서 내보내 주십시오."
"아, 쫌.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해요?"
"야 이 바보같은 신아. 너랑 나랑은 큐브만 있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지만, 저것들은 아니잖아. 막말로."
나는 허리를 펴고 잠시 숨을 골랐다.
"히드라가 지구 내핵까지 숨으면 어쩔 거야? 펜릴이 대기권 뛰어다니며 도망치면 어쩔 거야? 아지다하카가 매일같이 자전하면서 밤만 돌아다니면 어쩔 거야? 응? 걔들 도망치기 전에 싹다 잡아야 한다고."
"그래서 펜릴 잡으려고 시계탑 위에서 민트초코에 향 피워서 펜릴 불러세웠어요? 나 참. 만약에 다른 애한테 빙의했으면 저 부르려고 딸기케이크에다가 불질렀겠네요?"
"뭔 헛소리야. 내가 미쳤다고 그랬겠냐?"
"미친 놈이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거죠."
"그래. 나 미친 놈이다. 됐지? 그럼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봐."
탁.
내 발걸음이 마지막 석상의 불을 밝혔다. 나는 창염을 열 발자국을 앞에 두고 계단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질릴 때 까지 들어줄게. 그래,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 상황에 나를 부른 거야?"
"일단 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모처럼 이곳에 처음 왔으니까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창염은 헛기침까지 하며 근엄한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창염의 신전에 온 걸 환영하오, 필멸자여. 나는 만천하를 비추는 영원불명의 태양, 창염이요."
"......."
"어, 이거 꼭 하고 싶었던 건데.... 기억 읽은 게 잘못됐나요? 멘트가 틀렸나?"
"......야."
나는 창염의 표정을 읽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너 지금 그거 하려고 부른 건 아니지?"
"......."
창염이 슬쩍 내 고개를 피했다.
"허, 허허, 허허허허."
아무래도, 나는 그와 조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