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220화 (220/1,497)

〈 220화 〉1부 10장 23

그 시각, 영국 런던 왕성.

피닉스가 민초 캔들에 불을 붙인 때.

왕실의 주방에도 때아닌 민트초코 열풍이 불고 있었다.

"거 아직 멀었느냐."

주방을 점거한 금발의 소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요리사들을 재촉했다. 이미 급히 공수해 온 US라빈스의 민트초코는 벌써 일곱 통이나 사라져버렸다.

"나도 아직 민초가 고프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전에 만들었던 음식이라."

주방장은 순순히 사과했다. 요리 실력 하나만으로 작위까지 받은 그였으나, 상대는 그 작위를 내리는 왕가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만들라면 만들어야했다.

"공주님. 제발 체통을...."

금발 소녀의 옆에 따라붙은 메이드는 난감한 얼굴로 주방을 훑었다. 평소에도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 금발 소녀-공주가 보이는 행동은 조금 과할 정도였다.

"여왕폐하께서 걱정하실지도 모릅니다. 너무 많은 후식을 드시면 후의 석찬에서...."

"나만 먹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이 모든 후식은 전부."

공주는 식탁위에 올라와 그릇에 고개를 처박은 검은 고양이의 등을 손으로 쓸었다.

"이 아이가 먹는 것이거늘."

냐아앙.

고양이는 화답하듯 고개를 들며 울었다. 어찌나 행복하게 먹어치우는 지 얼굴 옆 수염에는 녹아내린 민트초코가 한 가득 묻어있었다.

"이런. 닦아주마."

공주는 손수건을 꺼내 수염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내려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녹색으로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혀를 날름거렸다.

할짝.

고양이는 삽시간에 제 얼굴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아먹었다. 공주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오래살고 볼 일이군. 고양이가 이렇게 사람을 잘 따르다니 말이야."

"......."

메이드는 말을 할까말까 심각한 고민을 했다. 세상에 초콜릿을 먹을 수 있는 고양이는 없다고.

하지만 공주가 북유럽에서 주워온 고양이를 기른 것도 벌써 어언 20년이다. 인간으로 치면 무려 100살을 눈앞에 두고 있는 노묘(老猫)는 공주를 지키는 보디가드처럼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흠흠. 그래서 가웨인 경은 언제 오는가?"

공주는 근엄한 목소리로 원탁의 기사를 찾았다.

원탁의 일원이자 나라의 영웅을 고작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사는데 심부름을 보낸 것은 폭정에 가까웠지만, 정작 기뻐하며 순순히 명령을 받고 떠났던 장본인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곧 도착할 겁니다. 공주님, 그러니 부디 방에 들어가셔서...."

띠링.

공주가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에서 알람이 울렸다. 공주는 눈을 화들짝 뜨며 주변을 살폈고, 최대한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배경으로 호출에 응했다.

"......네, 여왕폐하."

[아르엘? 여왕폐하라뇨? 지금 방에 있는게 아닌가요?]

"......예, 어머님."

공주, 아르엘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쥐락펴락하며 오글거리는 말을 꺼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숨을 삼켰다.

[그래요. 남들 없을 때는 편안하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알겠죠?]

"예...."

남들이 옆에서 숨을 참고 킥킥거리고 있지만, 아르엘은 차마 자신의 위치를 말할 수 없었다. 민트초코가 너무 먹고싶어서 주방을 습격했다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경을 치리라.

[아무리 왕가의 일원이라고 해도 때로는 티아라를 내려놓을 때가 있는 법이랍니다. ......그런데 공주. 주방은 그럴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

"......."

아르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순순히 시인했다.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입가에 초콜릿 묻었어요. 그리고 지금 급한 상황이니 빨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로 돌아가세요.]

"자리라뇨...?"

[한국의 SS급 빌런, <피닉스>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냐앙?

민트초코를 한가득 입에 물던 고양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르엘은 자신의 어머니가 보낸 중계 영상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영상 속.

검은 갑주의 괴인은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의 위에 불을 붙여 불태우고 있었다.

"이, 이런-"

"아무래도 죽여야만 정신을 차릴 녀석이외다."

"???"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가 울렸다. 아르엘 공주는 주방의 요리사들을 살폈지만, 그 누구도 그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앗, '카트시 경'이?!"

검은 고양이는 환기를 위해 열려있던 창문으로 훌쩍 뛰었다. 아르엘 공주는 놀라서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그보다 우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했다.

[공주. 지금 당장 자리로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어마마마."

[지금은 뭐라고 해야할까요?]

"......예, 여왕님."

아르엘은 모친의 종잡을 수 없는 언행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탁 <가웨인 경>의 에스콰이어, 아르엘 엘리자베스 메어리. ......<프린세스>로 복귀하겠습니다."

스크린 아래, 공주의 손은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하얗게 질려있었다.

* * *

[벌써 난리군. 난리야.]

나는 광장 아래에 모여든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아이스크림 통을 더 높이 들어올렸다. 민트초코가 타들어가며 피어오르는 연기에 광장의 사람들은 경악과 공포에 빠졌다.

[누가 영국 아니랄까봐.]

혹시나 내용물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들을 위해, 나는 친절히 빅 벤의 양옆으로 푸른 불꽃을 피웠다.

시차 때문에 아직 태양이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저녁 노을이 지는 런던 상공에는 푸른 불꽃으로 된 문구가 크게 걸려있었다.

I HATE THIS MINT

[진짜로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민트초코라면 사족을 못쓰는 놈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지금 바람의 정령, 절풍의 펜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그냥 스칸디나비아 반도부터 돌 걸 그랬나.]

민초캔들을 태울 도시로 일단 가장 익숙한 나라부터 찾아왔다. 이곳에는 원탁의 (원) 최강자와 더불어, 또 한 명의 히로인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설마 가웨인이 저기서 저러고 있을 줄이야.]

나는 광장에서 사람들의 혼란을 진정시키며 건물 옥상에 오른 가웨인을 내려다봤다. 그는 테러리스트를 상대하는 협상전문가처럼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당장 내려와라! 그곳은 네가 서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그냥 높은 곳 찾아서 왔을 뿐인데. 막상 와보니 그리 높지도 않군.]

나도 목소리를 높여 지상을 향해 읊조렸다. 마력을 실어 전달된 내 의지는 런던에 모여든 사람들의 화를 돋구기에는 충분했다.

"빅 벤을 무시하는 거냐!!"

"15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인데 당연하지!!"

자존심을 건드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격하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혼잣말로 내게 동조하는 이들도 몇몇 있었다.

"얼마나 민트초코가 거지같았으면 영국까지 와서 시위를 하는 걸까...?"

"누구야, 도대체. 저 자에게 민트초코를 선물한 무뢰배는?"

역시 나의 계획대로 대중은 내 시위를 오해하고 있다.

- 민트초코를 선물받은 빌런 피닉스는 불만의 표시로 유럽까지 날아와 민트초코를 태우는 시위를 벌인다.

그 첫번째 도시로 원작에서 몇 차례 드나든 영국을 왔을 뿐이고, 나는 여러 도시를 드나들며 민트초코를 태워 펜릴을 끌어낼 계획이었다.

[민초 살살 녹는군.]

녹아내리다 못해 타들어가는 민트초코는 허공으로 흩어져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자고 있다면 바람에 섞인 냄새를 맡고 일어날테고,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다면 눈에 불을켜고 달려와 나를 공격할 것이다.

[나올 때 까지 해주지.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펜릴이 몸을 드러내지 않으면 이 세상의 모든 민트초코를 녹일 때 까지 시위를 벌이면 그만이다. 나는 아래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가웨인을 무시하며, 타들어가는 아이스크림의 양을 확인했다.

[이런, 벌써 절반이나 타버렸나.]

불꽃의 온도를 최대한 낮추어 천천히 녹일 생각이었음에도 생각보다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나는 지상을 훑어 민트초코를 공급할 장소를 찾았다.

다행히 아직까지 문을 닫지 않은 US라빈스가 하나 눈에 띄었다.

[모자라면 내려가서 하나 더 사야겠-]

순간.

연기의 바람이 꺾였다.

[......흐.]

나는 생각보다 빨리 나타난 적의 존재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역시 사람은 뭐든지 일을 미루면 안 되는 법이었다.

[자, 와라!]

나는 민트초코를 하늘 높이 던지며 통 째로 불태웠다. 내 주변에는 이미 살기가 흉흉한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철컥.

시침과 분침이 나란히 선 6시 정각.

시계탑의 첨탑에서 칼바람이 용오름치기 시작했다.

* * *

영국의 공주이자 히어로인 <프린세스> 아르엘은 급히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가웨인 경이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가웨인 경!"

"공주님!"

가웨인은 어느때보다도 긴장한 얼굴로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행여나 전투의 여파로 빅 벤이 무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하는 행색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모르겠습니다."

가웨인은 진심으로 저 불사조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피닉스가 빅 벤 꼭대기를 점거해 민트초코 테러를 일으킨다는 예언같은 건 전혀 없었다.

"진짜 모르겠습니다. 설마 민트초코가 싫다고 이런 테러를 자행할 리는 없잖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가웨인은 피닉스, 그리고 청화단과의 관계에 대해 재고를 해야할지도 몰랐다.

민트초코를 혐오해서가 아니라, 고작 그런 이유로 시민들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만드는 행동은 평화에 해를 끼치는 테러이자 악행이었다.

"그러면 가웨인 경."

아르엘의 손은 피닉스를 향해 달려드는 또다른 괴인을 가리켰다.

"아무리봐도 동료로 보이는 자와 싸우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짚이는 바는 있으십니까?"

"......전혀요."

가웨인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서 하늘에서 싸우고 난리입니까…!"

가웨인은 괜히 억울했다. 한 때 인류 최강의 남자라 불리우던 그도, 하늘을 날며 허공에서 싸우는 둘에게는 그 어떤 힘도 미치지 못했다.

결국 가웨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 밖에는 없었다.

"우와, 공중 UFC!"

"어디서 저런 이능력자가 또…."

"구경할 때가 아닙니다! 다들 대피하세요!! 제발!!"

…아무래도 대피는 조금 늦어질 것 같았다. 두 명의 SS급 빌런이 벌이는 각축전을 구경하느라.

***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다. 피닉스는 불꽃의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활공했고, 피닉스를 습격한 괴인은 허공을 박차고 달리며 피닉스를 쫓았다.

[어딜!]

피닉스는 자신을 뒤쫓아 달려오는 괴인을 향해 화염구를 쏘았다. 집채만한 화염구는 괴인을 집어삼킬 만큼 커다랬고, 괴인이 달리는 속도 이상으로 빠르게 아래로 쏘아졌다.

파앙!

괴인은 화염구에 닿기 직전, 발을 살짝 기울여 허공을 발로 찼다. 화염구는 괴인을 스치듯 아래로 떨어졌다.

[역시 이 정도 스피드로는 안 되나.]

피닉스는 두 팔을 양 옆으로 펼쳤다. 화염의 날개는 하늘을 덮을 기세로 펼쳐졌다. 석양을 등지고 선 피닉스의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던 괴인은 스리슬쩍 속도를 늦췄다.

[그럼 이쪽도 속도를 올리는 수밖에.]

피닉스가 치켜올린 손을 아래로 강하게 내렸다. 동시에 날개에서 푸른 깃털이 허공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풀나풀거리던 깃털들은 불꽃이 피어올라, 푸른 불꽃의 매가 되었다.

[탄막놀이 좋아하나?]

피닉스가 아래로 내린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수 백마리의 매 떼가 날개를 펄럭이며 괴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허공에 멈춘 괴인은 허공에 발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고오오오--!!

괴인에게서 거대한 용권이 치솟았다. 최전방에서 괴인을 향해 날아가던 불꽃의 매들이 칼바람에 찢겨나가 소멸했다.

[하지만 양 옆은 어떻게 할 거지?]

피닉스가 손가락을 휘저으며 매들을 좌우로 펼쳤다. 호선을 그리며 좌우로 흩어진 불꽃의 매 떼는 금세 괴인의 지척에 닿았다.

화륵.

각각의 매의 몸이 들끓기 시작했고, 매는 매의 형상을 한 폭탄이 되었다. 괴인은 자신의 좌우를 틀어막는 폭발의 여파를 눈으로 훑었다.

키긱.

괴인은 전방을 강하게 발로 차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폭발의 여파로 튀어오른 불똥이 괴인을 덮쳤으나, 괴인은 연신 전방을 발로 차내며 바람을 일으켰다.

쾅! 콰광!

마지막으로 폭발하던 매까지 발로 쳐낸 괴인은 공중에서 백덤블링을 하며 허공에 멈췄다. 등 뒤로 작은 날개를 펼친 피닉스는 유유히 수직으로 내려와 괴인과 눈을 마주했다.

[인사차 들렀는데 환대가 격하군.]

[이 몸의 영토에 허락도 없이 방문한 자를 반길 연유는 없지.]

괴인이 손을 들어올려 주먹을 쥐었다. 주먹에서 휘몰아친 강렬한 녹색의 마력풍이 주변 일대를 휘감았다.

두 괴인은 칼바람의 결계 안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서로 괴인형으로 한참을 노려보던 둘 중 먼저 변신을 해제한 쪽은 피닉스였다.

"...푸른 하늘에 걸린 영원불변의 태양. 다크 레기온의 필두, 창염의 피닉스."

[흠….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 건 이 몸의 착각인가.]

괴인의 몸에서 연녹빛의 바람이 몰아쳤다. 괴인은 피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

"세상을 찢어발기는 칼바람의 신살랑(神殺狼), 다크 레기온의 일좌(一座), 절풍의 펜릴."

스스로를 절풍의 펜릴이라 소개한 녹발 녹안의 소녀는 고양이 귀를 쫑긋 세우며 메이드복 치마의 끝자락을 잡았다.

"20년 만에 본다냥!"

"......."

피닉스의 표정은 썩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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