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1부 10장 21
부동의 1위가 창염의 피닉스라고 한다면, 인기투표 부동의 17위는 단연코 <집행관>이자 <함장>인 백희아가 차지하고 있다.
캐릭터가 가지는 성격과는 별개로, 백희아라는 캐릭터가 보이는 행보에 대해 사람들이 상당한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 국뽕도 이정도면 치사량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게임이 전세계에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외국인 플레이어들은 상당한 불평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그 불만의 대상은 자연히 애국심 고취를 주장하는 캐릭터인 백희아에게로 집약되었다.
- 백꼰대 삭제 좀
- 이게 말로만 듣던 김치맛인가
- 저는 그녀에게서 네오나치를 보았습니다
물론 외국인들의 의지가 반영된 인기투표는 그렇고, 한국 자체 내에서의 인기는 의외로 준수한 편이었다.
선의철이라는 거목을 상대로 뒤에서 암약해 주인공 일행을 정치적으로 크게 지원하며, 후에 모종의 사건으로 전 세계의 추격을 받는 주인공 일행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배의 키를 내어주기까지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의감 넘치는 캐릭터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백희아의 본성은 개인 루트를 타고 난 다음에서야 드러나게 된다.
표리부동(表裏不同).
천가을이 연예계의 탑을 꿈꾸고, 은유하가 자본주의의 끝판왕을 추구한다면, 백희아는 한 나라의 정치적 지배자가 되기를 바라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내가 원작 시점에서 5년도 전에 선의철을 실각시키면서 베일을 드러내고 전면에 나선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정도(正道)를 추구하는 괴물.
은유하가 자신의 정체를 일곱 인형에 나누어 숨겼다면, 백희아는 자신의 본심을 가면 아래에 철저히 숨기는 타입이었다.
...결국에는 히로인 중의 한 명이라, 주인공을 사랑하게 되어 주인공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침대 정치를 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는, 아주 복잡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암속성' 히로인이다.
* * *
서로가 정체를 드러낸 이후.
우리의 협상은 제법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고 싶은 국가는 제가 정합니다."
"좋습니다. 대신 우선순위는 감안해주세요. 외교적으로 트러블이 있는 국가에 대해서는 지원해드리기 어렵습니다."
"가야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가야하는 데도요?"
"그러면 적어도 최대한 우리에게 이득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지난 번 처럼 회담 중에 뛰쳐나가지 말고."
국가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었다. 다음은 백희아가 제안할 차례.
"당연히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거기 때문에 당신의 사조직, <청화단>은 제 배에 오를 수 없어요."
"빌런이 협회의 배에 타고 있으면 문제가 되니까. 알겠습니다. 수용하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꿍꿍이가 있으면 뭐 어쩌시려고요. 걱정마요. 절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 일은 없을테니."
백희아는 외국으로 출장을 나가는 괴수 레이드에 한국 히어로들이 참가하기를 원했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바였다.
"대신 그 인원수 중 일부는 제가 선택할 수 있게 해줘요. 예를들자면 서울에서 만들어질 아카데미에 들어올 학생들이라거나."
"실력이 보장되지 않은 이들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아시죠?"
"걱정마요. 협회 히어로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실력을 가진 사람들로 뽑을 테니까."
"빌런은 안 됩니다."
참가 인원에 대한 배분을 정했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최대한 양보를 많이 했고, 백희아는 자신몫의 지분이 8할까지 늘어난 것에 상당히 미심쩍어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별거 아녜요. 당신도 제가 뽑는 2할의 면면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니까. 그럼 사소한 건 집어치우고."
나는 지도를 펼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에 배를 정박시켜줘요."
"영종도?"
내가 이 땅에 가장 먼저 도착한 장소이자, 지금은 괴수 하나 없는 청정구역이 되었다. 서해무기를 영종도에 군림시켜 일부러 정보를 은폐했기에, 신서울은 커녕 서울에서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샤오린이 적토를 타고 영종도에 상륙하며 다 말짱 도로묵이 되어버렸지만.
"당신을 위해 깔끔히 청소해뒀어요. 영종도에 인천대교까지. 이제 자가용으로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 당신의 비행정을 상시 대기 시켜두는 거예요."
"국제공항을 전용 비행장으로 쓸 생각이에요? 안 돼요. 저기는 서울 복구 이후에 과거의 영광과 명성을 되찾기 위한 교두보라고요."
"거 인류 유일의 괴수 조종사를 위해서 전용 활주로 하나 정도는 내어줘도 되잖아요?"
"...좋아요. 이건 추후 협의를 하도록 하죠. 대신 공항까지 다닐 이동수단이 필요한데-"
"흑염룡이 있으니까 문제없습니다."
"좋아요."
졸지에 흑염룡이 공항을 오다니는 자가용 리무진이 되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흑염룡이 진짜 S급의 경지에 올라 용괴인의 형상을 가지기 전까지 흑염룡은 계속 거대 드래곤-'탈 것'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럼 괴수를 쓰러뜨리고 난 다음에 얻을 정산 문제는...."
"당신 다 가지세요. 저는 따로 챙기면 되니까."
"......그럼 그쪽은 뭘 챙기려는 거죠?"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굳이 큐브에 관해서 백희아에게 당장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백희아는 또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듯 했다.
"......좋아요. 그거라면 충분하겠죠."
"응?"
"처음이지만...그래도 가문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갑자기 백희아가 혼자 북치고 장단치며 얼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제 몸 정도는 당신에게, 아얏!"
"뭐래."
나는 손가락을 튕겨 백희아의 이마를 때렸다.
"당신 빈약한 가슴에는 흥미없고, 저는 당신의 배에 흥미가 있을 뿐이에요."
"...배에 패티시 있어요?"
"함선, 공중전함, 비행정, 기타 등등!"
"그럼 사람 오해하게 만들지 말아줄래요? 아까 차에서도 그렇고-"
이마를 문지르던 백희아는 무언가 떠올랐다는듯 얼굴이 핼쓱해졌다.
"다, 다다, 당신, 설마 저 기절시켜놓고 무슨 짓을 한 거죠?!"
"......이건 또 뭔 패턴이래."
나는 백희아가 보이는 숫처녀같은 행동에 얼척이 없었다. 처녀는 맞지만.
"무슨 짓을 했을 것 같아요?"
"이렇고 저렇고 그런 짓이요!"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거 정신줄 붙잡고 있길래 기절시켜서 두 시간 편안하게 재웠어요. 그것도 아니면 당신 지금쯤 입원했을 걸요? 그러길래 밤샘을 왜 했대."
"누가 이상한 말을 해서 그런 거 아녜요...! 대체 저건 무슨 의미에요!"
백희아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아이스박스를 가리켰다. 예쁜 리본까지 달린 분홍색 박스는 아직까지도 내용물을 원형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선물인데요."
"누구를 위한? 역시 설화령인가요? 아니면 선의철에게 했던 것처럼 상자에 사람 목이라도 잘라서 담아 보낼 생각이에요? 민트초코를 고른 건 방부제죠?!"
"어...."
생각해보니 밤을 샐만 했다.
"일단 한 가지 오해를 풀자면, 저건 진짜로 선물이에요.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애가 하나 있어서."
"저걸 어떻게 먹는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니까 무시하지 마요. 저게 세계를 구하는 일곱 열쇠 중 하나가 될테니."
"허."
백희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하긴 민트초코로 세계를 구한다는 걸 누가 믿겠는가.
"세계를 구해? 당신 목적이 무슨 세계 평화라도 돼요?"
"어, 정답."
백희아는 더욱 기가막힌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빌런 입에서 세계 평화를 말하는 게 참 어이가 없네요. 그럼 히어로 하지 왜 악당 노릇 하고 있어요?"
"이쪽이 제가 움직이기 더 편하니까요. 그 건에 관해서는 우리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나는 백희아의 왼손을 들어올려 약지의 반지를 살살 문질렀다.
"......진짜 궁금했는데 이거 무슨 의미죠?"
"피로회복에 좋을 거예요. 자기전에 문지르고 자면 네 시간만 자도 여덟 시간을 잔 것 같은 효과가 있을 겁니다."
"거짓말."
"진짠데."
게르마늄 팔찌나 황토 옥장판보다 훨씬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그 정도 호감도를 쌓을 만한 단계는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벗겨줄 생각 없으니까 계속 차고 다녀요. 당신 색깔이랑 잘 어울려서 보기 좋으니까."
백희아가 내 어깨를 밀치며 두 팔로 몸을 끌어안았다. 침대에 밀쳐져 아프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나를 밀어낸 게 어이가 없었다.
"역시 무슨 짓 했잖아요!"
"뭔 소리래. 그 정도로 검ㅇ...."
나는 간신히 뒷 말을 삼켰다. 여기서 더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가는 협상이고 뭐고 전부 파토가 나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검은 머리에 음란마귀가 강해서야 원."
"방금 말 바꾸신 것 같은데."
"누가 갑자기 밀치는 바람에 잠깐 목에 사레가 들려서. 아무튼 지금은 당신 상대로 해코지할 생각 없어요. 당신은 이 세계에서 유일한 제 전용기 함장이니까."
"사람을 진짜 뭘로 보고.... 하아."
백희아는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컵에 물을 담았다.
"아무튼 앞으로 잘 지내봐요. 당신과 저는 이제 한 배를 탄 입장이니까."
"어디까지나 당신이 이 나라에 당장은 도움이 되니까 하는 거예요. 괴수 조종사는 도울 수 있어도, 빌런 <피닉스>를 도울 때는 절대로 돕지 않겠습니다. 알겠어요? 설령."
백희아는 컵을 받으며 단언했다.
"비행정을 공중폭파시키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타고 있으면?"
"탄 채로 폭파하겠어요."
"좋아요. 그 결의,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도록 하죠."
협상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백희아는 이제 나를 대상으로 한 온갖 걱정과 망상에서 풀려나, 최소한 잠은 제대로 자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온갖 근심걱정을 한다면 어쩔 수 없고.
"그런데 참 웃기네요. 당신이 제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대화하기 훨씬 편했을텐데."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래요?"
"아뇨. 그."
나는 백희아의 속에 잠재되어있는 울분을 내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쏟아내도록 유도했다.
"이승형한테는 밝혔거든요. 저 피닉스인 거."
"......."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지 말라고 얘기는 하긴 했는데-"
"잠깐만요."
백희아는 워치를 조작해 빠르게 타이핑을 할 준비를 마쳤다.
타다다닥.
백희아는 엄청난 속도로 우리가 협상한 내용을 정치적인 수사와 공식적인 표현으로 정제해냈고, 나는 그걸 적절히 수정하여 내가 최대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끔 조정했다.
"좋아요. 이렇게 합의문을 발표하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좀 더 놀다가도 되는데."
"당신은 지금 저랑 놀고 싶으신 거죠? 저 놀리면서."
"들켰나? 푸흐흐."
반응이 워낙 재미있어서 장난을 치는 것도 이제는 끝이다. 내 의도대로 백희아는 지금 화풀이를 하기 위해 빨리 방을 나가고 싶은 거다.
"이승형이랑 좀 이야기를 해봐야겠어요."
그게 방향이 잘못된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한테 화를 낼 걸 왜 걔한테 짜증내요?"
"당신이 말이 통할 사람이면 그랬겠죠."
"이렇게 좋은 협상을 했는데?"
"퍽이나. 협박으로 맺어진 조약이 잘도 협상이겠다."
백희아는 이제 대놓고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백희아에게 다가가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뭐, 뭐예요?"
"한 가지 부탁을 하자면요."
톡톡. 나는 백희아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쓰다듬었다.
"절대로 빼지마요. 알겠죠? 이건 당신과 나의 약속-"
"문 열어요!"
백희아가 화냈다. 나는 순순히 문을 열어 입구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확 자다가 민트초코나 퍼먹어라."
"누구한테 하는 소리에요?"
"몰라요!"
백희아는 내게 마지막으로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이후의 상황은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악당이 가져야 할 소양의 기본 중 기본은 끈끈한 신뢰로 다져질 히어로들의 사이에 대한 이간질이니.
7월 1일.
나는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공투할 정치적 동반자와 밀월 관계를 맺었다.
'이제 국적 버리지도 못하겠네.'
"버리는 순간 만천하에 정체를 떠들고 다니겠죠?"
나는 문을 닫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백희아가 자고 떠나간 자리는 내 마력으로 따뜻하게 데워져있었다.
"아."
까먹었다.
'온 김에 박라온도 공략해야하는데.'
문 밖에 박라온의 마력이 느껴진다. 서울에서 코어가 파괴되지 않은 온전한 마력의 기운은 분명 풍속성과 수속성을 동시에 가진 박라온의 것이었다.
'박라온은 공략 쉬운데 어떻게하지.'
"...아직 시간은 많으니 급한 불부터 끄도록 할까요."
......신서울에 올 일은 많으니 나중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나는 미니 피닉스를 한 마리 만들어 침대에 고이 뉘인뒤, 그 옆에 머리를 이고 잠시간의 휴식을 위해 눈을 감았다.
- 이제 쉬는 거시야?
"...아뇨. 내일부터요. 내일."
빨리 이 무전취식범의 본체를 불러내야할텐데. 나는 내 옆에 머리를 비비는 작은 카나리아를 품에 안고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