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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17화 (217/1,497)

〈 217화 〉1부 10장 20

피닉스가 백희아와 단 둘이 방에 들어간지도 벌써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생각보다 길어지는 대화에 몹시 초조해졌고, 그들 중 가장 안의 상황이 궁금해 안달이 난 사람은 다름아닌 화권 이승형이었다.

'설마 집행관마저 회유를?'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청화의 비밀을 자신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청화가 설마 회의실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방에서 집행관과 독대를 하겠다고 나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당했어.'

피닉스는 VIP 시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승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며, 최대한 청각을 강화해 VIP 전용 방에서 약간의 소음이라도 들려오지 않을까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 밖에 없었다.

피이익.

"오, 열린다!"

철옹성처럼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노심초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반갑게 집행관을 맞이했다.

"얼마나 회의가 길어진 거야?"

"...세 시간."

뒤에 있던 히어로들의 잡담을 들은 이승형은 시계를 확인했다. 제법 긴 시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무려 세 시간에 이를 정도로 회의가 길어질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무슨 말을 나누었을까. 그리고 혹시나 집행관은 피닉스와 뒷거래를 한 게 아닐까.

또각. 또각.

백희아는 그 어느때보다도 당찬 걸음으로 방을 나와 이승형의 앞에 섰다.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퀭한 눈동자와 푸석푸석한 피부는 어디 숙면이라도 취한 듯, 눈은 말똥말똥하고 피부는 탱글탱글했다.

"......이승형 씨."

백희아는 평소 공식 석상에서 히어로들을 이명으로 부르던 것도 집어치우고, 이승형의 이름을 불렀다.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울분과 분노와 쪽팔림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예?"

덥썩. 백희아가 까치발을 들어올리며 이승형의 멱살을 쥐었다.

"왜 진작 말 안 했냐고!"

"자, 잠깐, 으헉?!"

백희아는 이승형의 옷을 앞뒤로 흔들며 울분을 토해냈다. 베레모 아래 걸쳐진 귀는 시뻘게져서 금방이라도 터질것만 같았다.

"당신이 진작에 얘기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아아!!!"

"그, 그러니까 도대체 뭘?! 집행관, 지,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 사람 잘못이 아녜요."

피닉스가 백희아를 뒤따라 나왔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애처롭게 웃는 그의 표정에서 사람들은 무언가 큰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그냥, 이승형 씨가 너무 착해서 그런 거니까."

"예?!"

이승형은 목소리까지 높이며 질색했다. 속에 구렁이라도 들었는지, 피닉스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것 마냥 우수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제 잘못이니까 너무 그러지 마요."

"아, 아으, 진짜.... 이승형 씨. 당신 나중에 나랑 따로 얘기해요. 알겠어?!"

"예, 예예."

백희아는 겨우 진정한 듯 숨을 고르며 헛기침을 했다. 좌중의 이목이 백희아에게 쏠렸고, 백희아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피닉스에게.

"아무쪼록 편안히 쉬시길 바랍니다. 오늘 있었던 협의에 대해서는 정리하여 먼저 말씀드리도록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해요. 집행관 님."

피닉스는 처연한 얼굴로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백희아는 굳게 닫힌 문을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손뼉을 쳤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금방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각자 위치로 돌아가셔서 발표를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운사!"

"여기있습니다."

벽에 조용히 서있던 박라온이 백희아의 앞에 섰다. 백희아는 VIP 룸의 문앞을 가리켰다.

"죄송하지만 내일 아침까지 경계를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지, 집행관."

박라온은 명령을 듣다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저 혼자서 해야합니까...?"

"무슨 문제라도?"

"그야, 그, 그러니까...."

박라온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백희아는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으나, 애써 찌그러지려는 얼굴을 펴고 문을 가리켰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테니까, 저 믿고 경계 서세요."

"그, 그러나 말입니다. 혹시 제가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그럴 일 없다니까요. 정 불안하면 풍백과 우사를 같이 붙여드릴게요. 됐죠? 청화 양이 무슨 부탁을 하든 다 들어주세요. 당신이니까 믿고 맡기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건 전혀 해결책이 되지 않잖습니까...."

박라온은 울상을 지으며 문앞에 서야 했다. 또한 의도치 않게 일찍 잠든 중년 사내와 막걸리를 대작하고 있던 노인은 정장을 차려입고 밤샘 경계에 투입되어야 했다.

"운사야. 이거 가혹행위 아니냐? 영감도 그리 생각하지 않수?"

"껄껄껄, 앞으로는 입조심 해야지. 끄응."

"도, 도와주십시오, 선배님들. 저 잘못하면 오늘...."

박라온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 자리를 떠나려던 히어로들은 VIP 룸을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해산해야 했다.

"도대체 3시간 동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공허한 이승형의 말만이 복도를 울렸다.

* * *

30분 전.

백희아는 그 어느때보다 편안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약 40시간 가까이 깨어있던 육체의 피로는 그 어느곳보다 푹신하고 편안한 곳에서 말끔히 날아갔다.

"흐으응...."

더 자고 싶다. 10분, 아니 5분만이라도. 백희아는 푹신한 배게에 볼을 비비며 말랑말랑한 감촉을 만끽했다.

"거기서 더 들어오면 화낼 거예요."

"......어라."

백희아는 자신의 이마를 가로막는 무언가에 의식을 서서히 되찾아갔다.

눈앞에는 하얀 손가락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고개를 돌리니 푸른 색의 여인이 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무슨...."

"잘 잤어요?"

"잠이야 잘 잤-"

사삭!

백희아가 빛처럼 몸을 일으켰다.

"무, 무슨?!"

"별 거 아니고. 피곤해보여서 잠깐 재웠어요."

피닉스는 손날을 세워 수도를 내치리는 시늉을 했다. 그에 백희아는 괜히 목 뒤가 얼얼한 느낌을 받았다.

"어,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슨...?"

"당신 자기 전에 상태가 영 말이 아닌 것 같아서, 조금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했어요."

피닉스는 자신의 허벅지를 탕탕 두드렸다. 백희아는 자신이 저 허벅지에 머리를 이고 있었다는 것에 부끄러워졌지만, 잠들기 전의 상황이 떠올라 부끄러워 할 겨를도 없었다.

"당신...누구에요?"

"이제 좀 말이 통하게 생겼네."

피닉스는 백희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눈 깜짝할 새에 피닉스의 팔은 괴인의 건틀릿으로 바뀌어 있었다.

"짜잔! 서프라이즈! 이제 잠 좀 깼어요, 어머님?"

"누가 어머니에요. 으...."

백희아는 머리를 한참동안 누르고 있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기 물이요."

"고맙...."

백희아는 적당히 데워진 물컵을 잡았다가 그대로 멈췄다.

"......."

"왜요?"

순간, 백희아는 싱글벙글 웃는 피닉스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쳐올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아, 물을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후우. 좋아요. 그럼 우선 첫번째 질문."

"아, 저 스무고개 진짜로 좋아하는데."

"......."

백희아는 손에 들린 컵을 집어던질까봐 조심스레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당신은 SS급 빌런, 인가요?"

"네, 맞아요."

피닉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괴인의 것으로 변한 손이 그 증거였다.

"여자화장실에서 나타난 것도 이유가 있었네.... 하아."

"......어, 음, 그건 몰래 숨어있다가 뒤를 밟은 거니까 신경쓰지마요. 꼭 화장실이 아니었어도, 다른 으슥한 골목이었어도 당신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을테니."

"알겠어요. 그러면 다음 질문. 도대체 어떻게 다시 버스로 나타났.... 아니, 의미는 없겠네요. 당신이 진짜로 SS급이라면 버스보다 먼저 도착하는 건 일도 아니겠네요."

"......."

피닉스는 침묵했다. 아직 천가을이 이능력 뿐만 아니라 몸까지 완전히 복사가 가능한, '완전변신능력'을 지닌 이능력자라고 협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닉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희아는 자신이 진짜로 궁금한 것부터 묻기 시작했다.

"제게 정체를 드러낸 이유는?"

"괜히 이상한 오해를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예를 들어 피닉스가 사실은 2m 대머리 거한이라거나."

"고작 그런 이유로 정체를 드러냈다는 말이에요?"

"아뇨. 겸사겸사긴 한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죠."

피닉스는 침대 시트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백희아 아가씨. 저랑 손 잡을래요?"

"......거절합니다. 당신은 지금에와서 또 저를 회유하려고 드는 건가요?"

"당연하죠. 당신같은 인재를 놓치면 너무 아까우니까."

"사람에 대한 욕심이 참 과하시네요. 만나는 사람마다 다 그렇게 추파를 던지고 다니시나요?"

"아뇨. 당신이 백희아니까. 푸흐흐."

피닉스는 이해하지 못할 말만 주구장창 늘어놓았다. 백희아는 이대로 계속 이야기를 했다가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저는 절대로 빌런과 손을 잡지 않아요."

"하지만 청화를 상대로는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면서 협회로 끌어드리려고 했잖아요?"

"그건 당신이 빌런인 걸 몰랐을 때의 이야기죠. 그러니까 왜 정체를 밝혔어요? 조용히 닥치고 있었으면 저를 마음껏 기만하실 수 있었을텐데."

백희아는 살짝 거친 말까지 섞어가며 피닉스에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피닉스는 여유로운 얼굴로 백희아의 분노를 흘려냈다.

"제가 얘기 안했으면 당신, 아마 앞으로도 잠 못자고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을 걸요?"

"......그럴 리가."

"아뇨. 전 확신해요. 매일 걱정으로 잠을 못자는 나날이 지속되고, 언젠가는 수면제에 의존해 자는 미래를 겪게 될 거예요."

"아주 저주를 퍼부으시네요."

"저주일까? 푸흐흐. 뭐, 그건 그거대로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피닉스는 품에 손을 집어넣어, 두 개의 작은 구슬을 꺼냈다.

"여기 선물이에요."

"......이건?"

"보시는 바와 같이, 지파룡과 물지기 두 마리의 코어죠."

"지금 자기가 잡았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선물이라고 했잖아요?"

피닉스는 두 코어를 손가락으로 툭툭 굴렸다. S급 코어를 구슬치기 하는 것 마냥 튕기는 손짓에 백희아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선물을 이런식으로 주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여기요."

"...하아, 됐어요. 아무리 S급 코어라고 해도 안 받을 거예요. 이런 뇌물."

"뱃삯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피닉스는 손가락을 두 개 들어올렸다.

"당신의 비행정인 백나로 호. 그 왕복 티켓에 대한 값이에요."

"당신...설마?"

백희아는 내 의도를 곧장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백희아가 선수를 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비스트 테이머인 청화는 외국으로 많이 다녀야겠죠? 공식적인 방문이니 뭐 어디 하늘을 날아서 밀입국 할 것도 아니고. 그러면 당연히 비행기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건데, 지난 번처럼 공중폭파 당하는 건 사양이거든요."

피닉스는 은근슬쩍 백희아에게 다가갔다. 백희아는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지만, 금방 벽에 등이 부딪혔다.

"그래서 제가 돌아가는 길에는 당신이 모는 비행기를 탔잖아요? 세상에, 그렇게 편안한 곳이 있다니. 세상 그 어떤 전용기도 당신이 모든 배보다 더 편안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이걸로 저희 가문의 비행정을 사시겠다?"

"아뇨? 당신이 모는 비행정에 대한 푯값이라니까요. 제가 당신과 거래를 하고 싶은 건 이거에요."

피닉스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다음에 어디로 갈 지 모르겠지만, 괴수 퇴치를 위해 국외로 이동할 때 당신의 배를 타고싶다는 거예요. 당신이 함장으로서 직접 모는."

"......당신, 제 이능력을...!"

"네. 알죠. 너무나 잘 알죠. 푸흐흐. 어떻게 알았는지는 신경쓰지 마시고 결정이나 하세요. 좋아하시잖아요? 국익을 위한 선택."

피닉스는 백희아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을 강요했다.

"어머나! 청화를 따라다니는 것 만으로도 S급 코어가 수두둑! 이건 국가의 미래를 위해 큰 도움이 될 것만 같은 예감!"

"......당신이 아니더라도 저희는 얼마든지 코어를 얻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이번 흑전갈 소동만 하더라도-"

"그거 제가 일으킨 건데요."

피닉스는 품에서 구슬들을 여러개 꺼내 침대에 흘렸다.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S급 코어들이 눈앞에서 쏟아지자, 백희아는 다시금 눈앞이 아뜩해졌다.

"원래라면 싹다 독식하려고 했는데, 부하 한 명이 넓게 아량을 베풀어달라고 해서."

"......정말 미쳤군요."

피닉스가 숨결까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했음에도, 백희아는 피닉스에게 역정만 낼 뿐이었다.

"네. 미쳤죠. 제가 왜 미쳤냐면-"

"그런 걸 왜 나눈 거예요?! 싹다 쓸어와서 우리나라 것으로 해야지! 흑전갈 수 천마리가 있는 걸 알았으면, 남들 몰래 독점으로 처리했어야죠!"

"......아, 그쪽으로 미쳤냐고. 허."

피닉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요, 그게 당신 진짜 얼굴이죠.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낼 생각이 들었나봐요?"

"......당신이 정체를 드러냈으니까요. 단순히 광검을 죽인 빌런 라면 모를까, 그가 전세계에서 가장 러브콜을 많이 받는 라면 계산이 당연히 달라지는 거 아녜요?"

백희아는 여유까지 부리며 눈웃음을 쳤다.

"나라를 말아먹을 빌런이라면 몰라도, 국위선양할 히어로와는 거래할 수 있다?"

"빌런이든 히어로든, 피닉스는 한국인이잖아요? 그럼 됐어요."

"위선자네요. 제가 외국인이었으면?"

"그 때는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귀화시키거나, 아니면 사생결단을 냈겠죠."

피닉스는 표정을 굳히며 백희아와 눈을 마주했다.

"그럼 지금부터 진짜 협상을 시작해볼까요? 여자 선의철 님."

"누구보고 여자 선의철이래요? 제가 그렇게까지 미친 인간은 아니에요. 그거 엄청 실례되는 말이네."

"...아, 아직은 아닌가? 그럼 뭐."

피닉스는 웃으며 백희아를 비꼬았다.

"계속 얘기하도록 하죠, 희아대원군 님."

"진짜 때리고 싶다."

"비유일 뿐이에요. 푸흐흐."

서로가 가식적인 가면을 벗어던진 둘은 본격적인 '거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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