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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14화 (214/1,497)

〈 214화 〉1부 10장 17

<2020년 7월 1일 오전 10시 48분, US라빈스 31.>

가게의 오픈 준비를 하던 이기우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의자에 털썩주저앉았다.

"아이고 내 신세야…."

두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천에서 부모님 소유의 편의점을 운영하던 그는 관악에서 차원문이 열린 이후, 인천을 떠나 신서울로 내려가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기우의 부모 또한 차원문까지 터진 이상 인천도 위험할 것이라 직감했으나 부동산을 포기하지 못했다. 결국 기우의 부모는 남은 현금을 싸그리 모아 기우만 신서울로 내려보냈다.

"그냥 인천에서 살 걸 그랬나…?"

광검의 사망과 시청사의 뱀 공략에 따라, 한국 내에서 안전한 도시는 서울과 부산이 되었다. 기우는 신서울로 내려오는 건 성공했으나, 신서울에서 빠져나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헌터를 고용해서라도 인천으로 올라오라고 얘기했지만, 그에게는 그럴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에이, 빨리 돈이나 모아야지."

서울로 향하는 암표를 구하면 인천으로 가기는 쉬울 것이다. 기우는 버스 암표가 올라온 게 있나 네트워크를 뒤졌으나, 이미 기우가 내기 힘들 정도로 암표값은 하늘을 찔렀다.

"이거 시위대 놈들을 응원해야하나…."

하루에 버스 다섯 대. 약 200명 정도 오다닐 수 있는 버스에 대한 수요는 수 백배에 이르렀다. 정부와 협회는 협의를 통해 의도적으로 버스 운행 대수를 제한했고, 시민들은 더 많은 버스가 운행 되기를 원했다.

"신서울 인구 다 빠져나가버릴까봐 무서운 거지, 더러운 놈들."

기우는 확신했다.

과연 서울로 올라가는 이들 중 몇이나 신서울로 돌아올까.

하루에 200명씩 서울에 올라가도, 그 200명 중 신서울로 돌아오는 이들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히어로나 헌터를 동반하여 서울에 올라가는 자가용 차량까지 포함하면 하루에 500명 가까이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쯧. 오픈 준비나 해야지."

기우는 31개의 아이스크림 통을 살폈다. 31가지 맛 중 7월을 맞이하여 새롭게 들어온 통을 확인하고 눈을 찡그렸다.

"아무리 돈을 벌고 싶더라도 그렇지 치약을 팔아서야 원…."

기우는 혀를 내두르며 복장을 점검했다. 이제는 제법 접객업에 익숙해진 그는 모자를 정돈하고 불을 켠 다음, 잠궈놓은 정문을 열기 위해 판매대를 나섰다.

"......뭐야?"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북적거릴까. 가게 앞은 엄청난 수의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기우는 혹시 오늘 시위대의 시위 장소가 자신의 가게 앞이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히어로들이 통제...하네?"

기우는 평소 자주 보던 U튜브에서 자주 보던 히어로들이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늘어진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높으신 분이라도 오는 걸까. 기우는 잠궈놓았던 문을 열면서도 주변을 살폈다.

오픈 시간 11시.

시계바늘이 정각에 이르자, 어수선하던 바깥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딸랑딸랑.

문이 열리자 베레모를 쓴 여인이 먼저 가게에 들어왔다. 핏발이 선 눈 아래 다크서클까지 짙게 서린 여인, 집행관 백희아는 영혼이 나간 상태로 뒤따라 오는 여인에게 매대를 가리켰다.

"드시고 싶은 것 고르세요...."

백희아는 분명히 얼이 빠져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머리가 지끈거려 당장 휴식을 필요로 했지만,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집행관으로서의 사명감이었다.

"음. 잠시만요."

백희아를 뒤따라 들어온 청발의 여인, 청화는 31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몇 가지 아이스크림을 확인하고는 손뼉을 치며 계산대로 다가갔다.

"제 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선물용으로 하나 사도 돼요?"

"마음대로 사세요. 원하시는 대로."

"고마워요, 집행관 님. 푸흐흐."

힘없이 손목의 워치를 들어올리는 집행관의 태도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청화는 싱글벙글 웃으며 눈앞에 놓인 통을 가리켰다.

"하프갤런 사이즈로 하나 포장할게요."

찰칵! 찰칵!

둘을 따라 들어온 기자들이 벽에 붙어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청화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화권을 위시한 히어로들은 기자들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도록 청화와 집행관을 둘러싸는 벽을 만들었고, 청화는 별다른 방해 없이 아이스크림을 고를 수 있었다.

"와."

기우는 유리창 너머 몰려든 인파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어제 퇴근하기 전에 기껏 다 닦아놓은 유리창에 사람들이 얼굴과 손을 들이밀며 온갖 자국이 생겼고, 기우는 저 막대한 인파를 몰고 온 한 명의 VIP를 상대로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떤 맛으로 하시겠어요? 첫 번째 맛 선택부탁드립니다."

기우는 딱딱한 목소리로 스크린에 손을 올렸다. 청화의 입에서 어떤 맛의 아이스크림이 나올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기회를 잘 활용해 아이스크림을 싹다 팔아치울 계획이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다.

"...트초코요."

"예?"

기우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서울로 올라가 인천에서 부모님과 만날 생각에 잘못들었나 긴가민가하여, 기우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한 번 더 질문했다.

"......푸흐흐."

청화는 또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방글거리며 신메뉴가 찍힌 포스터를 가리켰다.

"민트초코요."

"......."

기우는 애써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고 안간힘을 썼다. 신메뉴 포스터를 붙이면서도 욕지기를 내뱉었고, 맛이 궁금해서 시식을 하던 순간에도 그는 육성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어, 음, 새로나온 메뉴는 맛보기가 가능하신데, 한 번 맛 보기를-"

"민트초코."

청화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청화가 살짝 빈정이 상했다는 표정을 짓자, 정신이 나가있던 백희아가 청화의 뒤에서 도끼눈을 부라리며 기우에게 눈치를 줬다. 다행히 기우는 금방 정신을 가다듬고 주문을 이어나갔다.

"민트초코 선택하셨습니다. 다음 맛은-"

"민트초코."

"......."

기우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여섯 가지나 되니까 둘 정도는 같은 맛으로 선택할 수 있지. 그렇게 속으로 자신을 세뇌하며, 매대의 다른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목을 가다듬었다.

"두번째 민트초코 선택하셨습니다. 그, 세 번째 맛으로 저희 지난 달에 나온 메뉴 어떠세요? 딸기가 듬뿍 들어간 건데."

"그럼 그 ㄱ...민트초코."

"허."

백희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프갤런 통의 절반을 민트와 초코로 가득 채우는 청화의 행동은 그야말로 만행에 가까웠다. 어떤 맛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민트와 초코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새로나온 건데 그렇게까지 하셔도 되겠습니까...? 청화 양 다른 메뉴도 같이 주문해보심이."

"왜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집행관 님. 한 번 시식해보시겠어요?"

청화가 눈을 반짝이며 아이스크림 통을 가리켰다. 백희아는 입꼬리가 비틀렸지만 차마 청화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비유하자면 청화라는 최우선순위 바이어를 모시고 접대를 해야하는 입장에 불과했다.

"예. ...조금만."

백희아는 기우가 컵에 작게 퍼담아준 아이스크림을 한참동안 노려봤다. 청화는 더없이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을 보였고, 히어로들과 기자들 또한 새로 나온 메뉴에 수근거리며 그 맛을 상상했다.

"민트가 뭐야?"

"녹차 맛 아이스크림인가?"

"초콜렛 들어갔으니 초코겠지."

"......."

기자들은 카메라를 백희아의 손과 입에 집중시켰다. 이미 누군가는 <청화의 제안에 따라 아이스크림을 먹는 집행관>이라는 제목까지 뽑을 기세로 백희아의 시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음."

백희아는 용기를 내어 한 스푼 크게 입에 집어넣었다.

"......."

탁.

백희아는 입안에 든 아이스크림을 꿀떡 삼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잠이 확 달아나는 맛이네요. 예, 비유하자면.... 자다가 양치하고 온 맛입니다."

백희아의 비유는 기자들의 손에 의해 데이터가 되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베레모 아래 삐져나온 백희아의 흑발이 경련하듯 떨리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

"푸흐흐, 양치하고 온 맛이라. 그렇네요. 아, 죄송해요. 네 번째 맛 선택할게요."

청화는 백희아가 먹다 담긴 컵을 들어올렸다.

"민트초코요."

"믿을 수가 없네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니, 네 번째 맛 민트초코로 선택하셨습니다."

"민트초코."

"...다섯번째 맛도 민트초코 선택하셨구요."

기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스크린을 확인했다. 하얀 스크린에는 다섯 개의 에메랄드색 덩어리들이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의 공간만 하얗게 남겨두고 있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기우는 마음을 비우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여섯 번째 맛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마지막은."

모두의 시선이 청화의 입으로 모였다. 이제 선택지는 1/31이 아니라, 하냐 하지 않느냐의 1/2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민트초코요."

"예."

기우는 무덤덤하게 빈 통을 꺼내 아이스크림 스쿱을 들어올렸다. 일하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마음이 편한 손님이었다.

그는 하얀 도화지같은 통을 한가득 에메랄드 빛으로 가득 채웠다. 중간중간 박힌 초코칩은 푸른 바다에 작게 자리잡은 군도처럼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기우는 무념무상의 마음가짐으로 민트초코를 한 통 가득 담아 매대에 올렸다.

"선물 포장 해드릴까요?"

"네. 이거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 있거든요. 아."

청화는 화사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렸다.

"박스 포장은 해주시되, 드라이 아이스는 안 넣으셔도 돼요."

"예?"

"그렇게 해주세요. 어차피 앉은 자리에서 한 통 다 퍼먹으니까. 푸흐흐."

청화의 말을 들은 백희아는 당장이라도 입안을 헹구고 싶은 이 맛을 선물하겠다는 청화의 모습을 보며 직감했다.

이 자는 명실상부한 악인이라고.

"아. 집행관 님. 여기까지 온 김에 저도 하나 따로 사먹어도 돼요?"

"예. 얼마든지요."

"그럼 저 콘으로 하나 살게요."

청화는 그 어느때보다도 신중하게 아이스크림을 고르기 시작했다.

"음…. 뭐였더라…."

청화가 고개를 이리저리 굴리는 사이, 백희아는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설마 선물포장이고 해놓고, 서울에 올라가서 자신이 저걸 전부 퍼먹을 생각인가? 아니면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따라다니는 군신의 취향이 이런 건가?

"아. 이거였지. 까먹을 뻔 했네. 푸흐흐."

약 5분. 무려 5분이라는 시간을 고민하던 청화는 기어이 한 가지 맛을 고르는 데 성공했다.

"저 이거 주세요."

"예. 싱글 사이즈로, 컵, <사랑을 하는 딸기> 드리겠습니다."

기우는 하나라도 다른 종류가 선택되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청화는 그 어느때보다도 행복한 얼굴로 스푼을 들어올렸다.

"흐흐흥~"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청화는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

한 가지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민트초코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하도 많이 먹다보니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을 뿐이다.

창염의 피닉스는 딸기.

설야의 루살카-에 해당하는 석하랑은 블루베리.

히로인 공략을 위한 선물에는 당연히 호감도를 높이고 낮추는 게 있기 마련이다. 개인의 호불호가 다양하게 있는 만큼, 히로인들도 선물-특히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다양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민트초코에 미친 인간, 아니 정령이 하나 있다.

<절풍의 펜릴>.

풍속성의 정령인 동시에 원작에서 최초로 조우하는 간부로서, 펜릴은 최초의 공략부터 민트초코우유에 낚여 주인공 일행을 따르게 된다.

스파이로서 접근했지만 주인공 일행과 지냈던 따뜻한 경험 때문에 전투를 망설이게 됐고, 주인공 일행의 강력한 설득에 의해 약화된 상태로 전투를 벌여 아군으로 영입됐다.

나는 펜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저 북유럽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알고, 혹은 북유럽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펜릴이 잠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공복'이라는 것. 오랜 시간 괴수 형태로 잠들어있다가 마력이 다 소모되었고, 먹을 것을 찾아나서는 걸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최초의 먹이가 러시아의 원탁이었고 그게 루살카가 빙의한 아나스타샤였다는 건 상당히 의외였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당장 깨울 수 있는 펜릴을 찾아 각성시키고자 했다.

그 첫 단추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나는 전 세계에 민트초코 신드롬을 일으키는 것으로 펜릴 스스로 일어나도록 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프로젝트 명 <민트초코 챌린지>.

당연히, 이 6민트 러쉬를 하는 사람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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