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1부 10장 15
2020년 6월 30일 밤 11시.
신서울 종합버스터미널에는 연일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시위대가 흩어지고, 그들이 남기고 떠난 쓰레기를 정리하는 히어로들로 북적거렸다.
"노인네 밤 늦게까지 일 시키고 말이야. 끙."
풍백은 손으로 허리를 두드리며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어지간한 젊은 청년들보다 훨씬 신체능력이 뛰어난 이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는 모습에 주변인들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영감. 헛짓거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하쇼. 사진 다 찍으면 바로 이능력 쓰게 될 테니."
"끄응."
우사가 집게로 찌그러진 캔음료를 망태기에 집어넣었다. 제법 나이가 지긋한 두 베테랑 이능력자들은 의도치않게 솔선수범하며 쓰레기를 치웠다.
"저 놈은 지치지도 않나."
"젊으니까 그런 게지.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나이보다는 S급이라 그런 거 아닙니까?"
운사는 양 손에 100L 쓰레기봉투를 들고 가다가 둘의 말에 반박했다. 질책이나 일침같아 보였으나, 운사의 말에는 결코 악의가 없었다.
"저희보다 화권의 마력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그 마력으로 저희보다 많은 양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건 능률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운사야. 원래 일이라는 건 중간만 가면 되는 거다. 이런 동원 작업에 열심히 할 필요는 없어."
"그 넘치는 마력으로 저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우리가 뭐가 되겠느냐?"
"열심히 일하는 히어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풍백과 우사는 말문이 막혔다. 운사는 100L 봉지를 쓰레기로 꽉꽉 채워서 쓰레기차에 실은 뒤, 새로운 봉지를 받아 자리를 떠났다.
"쟤는 태생이 군바리 체질이야, 끌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미쳤수? 저런 간부 있었으면 난 아마 탈영했을거요. FM도 저런 FM이 어디에 있겠수?"
"저기 하나 있고, 저기도 하나 있고, 저기 최고 왕고도 있네. 으허허!"
풍백의 스틱은 운사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화권과 집행관을 가리켰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었다.
"집행관 아가씨는 대단도 하지. 마력으로 신체능력도 강화 잘 못하는데 저렇게까지 일하고 말이야."
"아, 인터뷰한다. 영감. 끝났수."
우사가 집게를 슬쩍 바닥에 내려놓았다. 풍백도 허리를 곧게 피며 밀짚모자를 벗었다. 히어로들을 촬영하던 기자 하나가 땀을 닦는 집행관 백희아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어...집행관 님. 좀 쉬시고 인터뷰할까요?"
"아뇨. 바로 하셔도 괜찮습니다."
집행관은 베레모를 고쳐쓰며 헛기침을 했다. 보다못한 템페스트 레이디가 삽시간에 집행관의 흐트러진 모습을 정리했다. 풍백과 우사는 멀찍이 떨어져 자양강장제를 들이키며 구경했다.
"예. 그러면 인터뷰를…."
"네. 광장에 모이신 분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떠나신 자리는 아름답게…."
집행관은 시위대가 떠난 이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들을 가리키며 그들에게 당부했다. 시위를 위한 물품부터 시작하여 도시락, 음식 잔여물이 든 박스, 심지어 캔맥주까지 늘어져있었다.
"양갓집 규수인 줄 알았는데 이런 일도 잘 하네. 끙."
"속지마쇼. 저거 다 이미지 메이킹이니까. 선의철 하단 짓거리랑 다를 게 없구만."
"흐허허, 그래도 그 놈은 위에서 시키기만 하지, 집행관 아가씨마냥 직접 나서서 하지는 않잖느냐."
"똑같이 여우같은 놈들이면 차라리 그게 낫지. 집행관은 고문관이오. 가라로 하려고 하면 셋 중에 하나는 자꾸 눈앞에 지나가니 원 쉴 수가 있나."
"그건 그렇지. 참 대단한 아가씨야. 이 늦은 시간에 노인네 건강도 챙겨주고 말이야. 끌끌."
집행관은 히어로들을 동원해 시위대가 남기고 간 쓰레기들을 치웠다. 밤 10시가 지난 시간에 작업에 동원된 히어로들 입장에서야 볼 멘 소리가 안 나올 수 없었지만, 정작 그 당사자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광장을 청소하니 대놓고 불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예. 인터뷰는 그럼 여기까지 할까요?"
"감사합니다, 기자님."
인터뷰가 끝났다. 풍백과 우사는 퇴근을 위해 청소도구를 정리하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정말 용의주도하시네요. 집행관 님, 말 그대로 광장을 '청소'하시고. 흐흐."
"중요한 손님 오시니까요. 기자님. 사진 잘 찍어주세요."
"아유,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자에게 양해를 구한 집행관은 화권을 불러 아주 조용히 둘이서 무언가를 논의했다. 화권은 마력을 주변에 뿌리면서까지 다른 이들이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막았다.
"...선배님들, 들었죠?"
템페스트 레이디가 집행관과 화권을 가리켰다. 작업에 동원된 히어로들이 하나 둘 심상찮은 기류를 감지했다. 시위대가 전부 빠져나가 아무도 남지 않은 광장에는 집행관이 직접 동원한 히어로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서울에서 오는 중요한 손님…? 영감, 짐작가슈?"
"......하늘성인감?"
풍백은 자신이 말하고도 아니다 싶었는지 손사래를 쳤다. 히어로들의 분위기가 서서히 긴장되는 가운데, 집행관이 워치를 통해 히어로들에게 이동 명령을 내렸다.
"전 히어로들은 해당 위치로 이동."
"......!!"
히어로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배치에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장에 2열로 길게 도열한 그들은 누군가를 맞이하는 듯 했고, 또 그 중요한 손님을 외부 요인으로부터 보호하는 듯 했다.
"어...이거?"
"차도 오는데?"
히어로들이 혼란스러운 만큼 주변을 지나던 시민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터미널 안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아아악?! 청화다아아!"
"뭣."
터미널의 정문이 열리고, 푸른 머리칼에 특유의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신서울의 광장에 나타났다. 집행관은 가장 먼저 앞에 나서서 청화를 맞이했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뭘요. 막차타고 두 시간이면 오는데. 푸흐흐."
청화는 능글맞게 웃으며 히어로들의 사이를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히어로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동원된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마, 막아!"
"지, 진정하세요! 저희도 지금 진정하려고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청화를 보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들었고, 소식을 듣게된 이들이 일반인 이능력자 할 것 없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허허."
풍백은 방어선을 뚫고 흰종이를 내미는 중년의 앞에 스틱을 겨누며 막아섰다.
"저 아가씨는 무슨 기별도 없이 이리 갑자기 튀어나오는감. 허허."
"서울에서 신서울 오는 건데 뭐 어때요? 어디 외국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청화는 풍백의 옆을 스치며 싱긋 웃었다. 풍백은 순간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정말 신출귀몰한 아가씨일세."
찰칵.
집행관의 인터뷰를 따던 기자는 청화의 뒤를 따르며, 그가 협회에서 마련한 차에 오를 때 까지 수 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청화 양! 무슨 일로 신서울에 방문하신 겁니까?!"
기어코 히어로들의 저지선을 뚫고 들어온 기자 하나가 스마트 워치를 들이밀었다. 손목에서 벗을 생각도 못한 채 청화를 향해 주먹을 겨눈 형상이 되었지만, 차에 타려던 청화는 손을 흔들며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아이스크림 사먹으러요."
잠시 뒤.
협회는 청화의 신서울 방문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
<2020년 7월 1일 새벽 1시, 협회 VIP 전용 객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금방 내려온 겁니까?"
이승형은 내게 신서울에 온 이유를 추궁했다. 백희아가 언론과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침대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아온 캔을 하나 던졌다.
"마시면서 이야기하죠. 편하게 앉아요. 너무 그렇게 마력 풀풀 풍기면서 투지를 불태우지 말고."
"신서울에 온 목적을 말하시면 그러겠습니다."
이승형은 여전히 나를 향한 적의를 풀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 호위를 자처하며 옆에 온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설마 내가 천가을인줄 알았다거나?"
"그럴 리가 없죠. 가을 씨는 제가 보면 대번에 압니다. 당신은 아녜요."
"그런가요. 그러면 설마 내가 악행을 저지르러 온 거라고 생각했다거나?"
"의심을 안 할 수 없죠. 온다고 말도 안하고 왔으니."
"방문을 예고하는 건 괴도구요, 저는 그냥 평범한 악당입니다. 지금은 비즈니스차 '청화'로 온 거니까 안심하세요."
나는 그 누구에게도 신서울에 오는 걸 밝히지 않았다. 그저 버스에 탄 뒤에 모종의 루트를 통해서 백희아에게 정보를 흘렸을 뿐이다.
'청화가 서울에서 신서울로 내려오는 마지막 버스를 탔다'고. 한국 내에서 뒷공작 하나 만큼은 도가 튼 한 아가씨의 도움을 받아, 나는 제법 그럴싸한 정보를 백희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하는데 성공했다. 백희아는 미끼를 물었고, 나는 백희아가 준비한 차를 타고 협회 건물로 들어왔다.
"아까도 차 타기 전에 얘기했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아이스크림 사먹으러 왔을 뿐이에요."
"그걸 지금 믿으라는 말입니까?"
"안 믿으면요? 여름이잖아요? 서울은 아직 아이스크림 가게가 들어올 정도로 번창하지 않았단 말예요."
한 달 정도는 더 시간이 지나야 여의도와 동작 부근을 중심으로 도시로서의 기능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래서 생각은 해봤어요? 서울로 올라올 지 말 지?"
"......그건 나중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이승형의 대답에는 뭔가 꿍꿍이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이승형은 내게 차선책이 아니었고, S급 화속성 이능력자야 잠재력만 조금 높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좋아요. 고민하고 고민할수록 더 생각나게 되겠죠. 그런데."
나는 손뼉을 쳐서 샤오린을 불러냈다. 푸른 전포를 입은 샤오린은 이승형의 바로 앞에서 나를 지키듯 서 있었다.
"호위는 샤오린으로 충분하니까, 이만 제 방에서 나가주시겠어요?"
"......입구를 지키겠습니다."
"뭘 지키겠다는 건지. 푸흐흐."
"당신이 혹시나 미쳐 날뛰게 된다면, 제가 바로 옆에서 문을 부수고 달려들 겁니다. 그리고 군신 님."
이승형은 샤오린에게 허리까지 숙이며 간곡히 부탁했다.
"저 자와 어떤 말을 하셨길래 스스로 호위를 자처하는 지 모르겠지만,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샤오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이승형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승형은 순순히 물러서며 문을 열고 나갔다. 이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견실하지만 건방진 자 입니다. 감히 무슨 주제로 저런 말을."
"저 놈 입장에서야 원탁이 빌런과 손을 잡은 거니까 그런 거죠. 이해해요. 당신도 반대 입장이었으면 아마 싸우려들었을 걸요?"
"아뇨.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샤오린은 허공에 칼질을 하며 문 건너에 있을 이승형을 위협했다.
"약한 주제에 건방지게 어디서 그런 말을 하는지."
"S급인데요?"
"당신의 힘으로 강해진 이능력자가 아닙니까? 주어진 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일 뿐입니다."
마력감응이 뛰어난 샤오린은 금방 이승형의 속에 있는 내 마력을 눈치챘다. 더불어 샤오린은 이승형의 S급 등극이 나에 의해 강화된 것임을 한번에 읽어냈다.
"각성한 지 이제 두 달밖에 안 된 걸요."
"정신은 여전히 A급 수준에 불과합니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죠. 육체의 스펙이 우수해도 정신이 그를 따라가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
그건 내게도 조금 상처가 되는 말이기는 했지만,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신체 스펙과 정신적 경지의 괴리가 가장 심한 건 다름아닌 나였다.
"뭐...저런 친구들을 위해 아카데미를 만드는 거잖아요?"
"화권을 정말로 제자로 들이실 생각이세요?"
샤오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터뜨렸다.
"보면 화속성만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가재는 게 편이에요.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화속성 아니니까. 굳이 따지자면 이제는 환속성이잖아요? 가서 환룡에게 예쁨받으세요."
"환룡님께서는 모택평 몸에 계속 깃들어계신단 말입니다. 보기 좀 그래요."
"그런가.... 푸흐흐."
나는 환룡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역으로 몹시 기대가 되었다.
"그럼 더 잘 됐네요. 내일...날짜가 지났으니 오늘인가. 아무튼 해 뜨면 모택평이 어떻게 될 지 기대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말씀해주십시오. 신서울에 이렇게 방문하신 이유를."
"......? 아까부터 주구장창 얘기하고 있었는데요?"
나는 나를 의심하는 샤오린에게 확언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왔다니까?"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