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1부 10장 13
괴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기존에 사람들이 살고 있던 도시는 점점 황폐화되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에 살지 않던 곳을 찾아다녔고, 이능력의 힘은 척박한 자연 속에서도 인류 문명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지하왕국.
공중정원.
남극요새.
사막궁전.
아키택트가 동작 지하에 토굴을 만들어 괴수들을 피한 것 처럼, 아키택트와 비슷한 이능력을 가진 이능력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괴수들을 피해 인간이 살아갈 터전을 만들었다.
서울의 부동산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기존의 주민들과 청화단을 위한 별세계를 만들면 그만일 일이었다.
서울의 지하 1km 구역에 서울 면적의 새로운 공터를 만든다거나.
서울의 상공에 부유섬을 띄운다거나.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는 방법이었지만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
서울의 위나 아래 중 하나로 가기 때문에 멀리 떠날 필요가 없었으며, 청화단의 입장에서도 관리하기가 몹시 쉬울 것이다.
서울의 위 또는 아래에 만들어지는 청화단만의 도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내가 원작에서 끌고온 개념이며, 신서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었다.
"일단 질문."
간부들을 대표해 천가을이 손을 들어 물었다.
"그거 실현 가능해?"
"당연하지."
나는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렸다.
"큐브만 있으면. 다만 이게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나는 말이 길어질 것 같아 간부들의 눈치를 봤다.
단장인 내가 간부들의 상태를 봐가며 말을 해야한다는게 아이러니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간부들이 내 말을 끊는다거나 앞지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일단 설명부터 해보게나."
"실현이 가능한지 부터."
간부들은 내가 꺼낸 개념에 상당히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음료로 목을 축인 뒤, 최대한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풀었다.
"석하랑이 부산의 바다 일대를 얼리고 장강을 자유자재로 조종했던 걸 기억하나?"
"그래. SS급의 힘이잖아?"
"정확히는 '정령'의 힘이지. 나나 석하랑, 그리고 다른 둘이 속한 '지수화풍'의 카테고리는 자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나는 속성론에 대해 더 차근차근 풀어내고 싶었지만, 썩어들어가는 덕배의 표정에 본제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각각의 정령은 해당 자연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지속성인 '지륜(地輪)의 히드라'가 정령으로 각성한다면, 여의도 만한 섬을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지."
"반대로 지하에 그만큼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거네?"
"정답이다, 아키택트."
마력과 이능력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며, 그 정점에 있는 이들이 정령이다. 히드라는 땅 전체를 뒤엎을 수도, 땅 전체를 새로이 개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왕 여의도로 예시를 든 거, 계속 여의도를 바탕으로 설명하도록 하지. 그러면 이제 다음 단계. 부유섬이든 지하공동이든 토지가 마련되었다. 그러면 건물은 어떻게 하면 될까?"
내 질문에 간부들이 고민에 빠졌다.
"아키택트의 능력은 복원 아닙니까? 지상이나 지하에 건물이 새로 지어지나요?"
"아니. 불가능해. 새롭게 만들어내려면 한참 고생해야 할 거다."
"그럼 어떻게 해? 건물이 있는 째로 땅을 들어올려?"
"그랬다가는 하늘까지 쫓아와서 건물을 내어놓으라고 주장할 거다."
"......니들 바보냐?"
덕배가 테이블을 손으로 텅텅 내리쳤다.
"지속성 '정령'이라며? 그럼 나랑 아키택트 S급으로 각성시켜주면 되겠네?"
"......돼?"
"물론. 가능하다."
덕배는 은근슬쩍 자신도 S급이 되기를 바라며 어필했다. 평소라면 면박을 줬겠지만 그는 정확히 내 말의 맥을 짚었고, 나는 입이 떡 벌어진 아키택트에게 부연설명을 했다.
"네 이능력이 S급으로 각성한다면 아마 건물을 점토 주무르듯 다루게 될 거다. 지금의 복원 속도와 비슷하게, 네 머릿속의 새로운 건물을 만들어내겠지. 당연히 마력이 그만큼 소비되겠지만."
"그만큼 코어를 충당할 능력이 있죠. 저희 청화단은."
이미 서울을 복구하는 것만으로도 아키택트의 이능력과 청화단의 코어 수급력은 진가를증명해냈다.
"오히려 더 쉬울 거다. 막말로 6만 서울 주민들과 청화단만 들어갈 도시를 만들면 되는 셈이니."
"......."
아키택트는 넋이 나가있었다. 자신이 S급이 되어 도시를 하나 세운다는 상상으로 기뻐서 혼이 나간 듯 했다.
"아하. 그래서 단장님께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까? 지속성 정령을 각성시킬 때 까지?"
"그래. 아마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건 2년 뒤가 될 터. 그렇다면 아무리 빨라도 2년 뒤에나 나올 녀석이다."
"그 전에 잡을 수는 없나?"
"불가능. 어디있는지 몰라. 전세계를 이잡듯이 뒤져야 하겠지."
내가 행방을 아는 유일한 정령은 지속성이 아니다. 덕배가 상당히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니, 2년으로도 부족해."
정신을 차린 아키택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외쳤다.
"도시를 하나 만드는 데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만들 수는 없어! 서울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할 건 아니잖아! 보스, 마지노선은 언제까지로 잡을 거지?!"
"......한 번 말했지만, 5년하고도 6개월 뒤다. 그 때는 마지노선이고 나발이고 세계가 끝날 수도 있다."
"그럼 충분하네. 나 내일부터 바로 신도시 작업 들어간다."
"아직 완전히 정해진 게 아니잖아."
가을이 아키택트를 진정시켰다.
"지하나 지상에 도시를 만들었다고 쳐. 이동은? 식수는? 사람 오다닐 때마다 네가 날아서 이동시켜줄 거야?"
"엘레베이터를 만들어야지. 원래 서울과 신도시를 위아래로 오다니는 엘레베이터. 도시를 하나 새로 만드는 데 그게 어려울까."
"부르즈 칼리파에 엘레베이터가 올라가는 최상층이 500m인가 그럴 겁니다. 그 두 배 길이는 코어 공정이 들어가면 쉽게 제작되겠죠."
"최첨단 코어 도시라는 건가요? ...그건 좀 매력적이군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시게."
달콤한 꿈에 부풀은 간부들에 하늘성이 찬물을 끼얹었다.
"식수는? 공기는? 햇빛은? 아무리 코어에 큐브가 만능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도시로서의 기능이 망가지지 않나?"
"......류천성."
나는 여전히 인간의 사고로 판단하는 그에게 확실히 대답했다.
"땅의 정령이 섬을 만들고, 바람의 정령이 대기를 순환시키고, 물의 정령이 강을 만들면 끝 아닌가?"
"......그건 또 그렇군."
류천성은 혼란스러워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판단으로 류천성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말로 해도 와닿지가 않으니 원."
간부들 또한 내 말에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괴인형으로 바꾸었다.
[음. 잠깐만 기다려봐라.]
나는 간부들에게서 여섯 발자국 정도 멀찍이 떨어져, 양손으로 공을 잡듯 허공을 쥐었다.
화륵, 화르륵.
푸른 불꽃이 손의 가운데로 모여 뭉치기 시작했고, 간부들은 따사로운 불빛에 넋을 잃고 감탄했다. 나는 테니스공만큼 커진 푸른 공을 허공에 던졌다 잡으며 간부들에게 보였다.
[이러면 대충 가늠이 오나?]
"그게 뭔데?"
"그냥 화염구 아녜요?"
간부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S급인 가을 마저도 내가 손에 든 푸른 불꽃 구체의 정체에 대해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듯 했다.
[그냥 화염구는 아니고, 이게 내 궁극기다.]
"......뭐?"
간부들이 모두 굳었다. 나는 농구공으로 묘기를 부리듯 창염의 구체를 검지 위에서 빙그르르 돌렸다.
[광검의 투기장처럼, SS급들은 저마다 필살기를 하나 가지고 있지. S급 들도 그렇지 않나? 각자 가진 시그니쳐 기술. 그게 SS급에 이르면 진짜 극에 달한 오의로 승화되는 거다. ]
"그, 그런 오의가 그 조그만 구체라고요...?"
[그래. 지금이야 보여 준다고 작게 만들었지만.]
나는 구체를 테이블 위에 살포시 굴렸다.
[태양핵(太陽核). 무한히 핵융합을 일으키는 태양이다. 지금이야 보여준다고 크기를 줄였지만 터지면 어지간한 원자 폭탄 수준으로-]
"으아아악?!?!"
간부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파 뒤로 숨었다. 나는 괜시리 무안해졌다.
[뭘 그렇게까지 질색을.]
"미쳤어?! 터지면 어쩌려고 그래?!"
가을이 역정을 내며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태양핵을 손으로 으스러뜨렸다.
까득, 까드득!
"꺄아아아악!"
"미친 씨발!"
간부들이 호들갑을 떨며 라운지를 벗어났다. 태양핵은 내 손에서 피어오른 창염에 먹혀 소멸했고, 나는 손을 슬쩍 털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크흠.]
나는 인간형으로 바꾸어 도망친 간부들을 다시 제자리에 불러모았다.
"뭐.... 놀래켜서 미안하긴 한데, 화속성 정령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보여준 거다. 그렇게까지 놀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다, 단장님. 진짜로 원폭 수준입니까?"
김지화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넘어지면서 밟았는지 테가 살짝 휘어져 있었다.
"그럴 리가."
"그렇죠?"
"원폭은 훨씬 넘지. 궁극기인데 원폭 정도의 화력으로 끝날까? 그 보다 훨씬 강하지."
신화에 이르면 그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데, 이게 내 지금의 한계였다.
"다, 단장님. 그러면 말입니다."
유이신이 손을 벌벌 떨며 내게 물었다.
"평소에 박투술로 싸우시는 이유는...?"
"아. 그게."
나는 부끄러워져서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쨌든 지구를 지키려고 하는 건데, 정작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하는 자가 지구를 파괴해서야 되겠나?"
"......."
간부들은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에 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아,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내 이능력을 사용하면 지하에도 태양을 만들어내는게 가능해. 진짜와는 다르겠지만 거의 똑같이 재현해내지.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부유대륙이든 지하왕국이든 진짜로 실현 가능한 거니까 이야기를 하는 거다."
"하, 하하, 하...."
간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마력과 이능력과 정령의 삼위일체 덕분에 현실이 되면서, 그들은 정신을 챙길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정에 따른 플랜일 뿐이다. 서울의 주민들과 신서울의 주민들이 극적으로 화해한다거나 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상상일 뿐이지.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니까, 너무 귀담아듣지 말고-"
"하자."
"나도 찬성."
"저도 동의합니다."
"나도 좋다고 생각한다네."
"콜."
"이건 안 할 수 없는 거네요."
"......?"
간부들이 모두 스트레이트로 내 의견을 채택했다.
"뭐, 뭐야? 너희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냐? 언제 내 마지노선에 가까운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이렇게 다같이 작당이라도 한 것 마냥 찬성을 하면 내가 뭐가 돼?"
"단장님. 흑염룡도 찬성할 겁니다. 물어보고 올까요?"
"그, 그래."
유이신은 쏜살같이 달려 흑염룡의 의사를 물은 영상을 가져왔다. 흑염룡은 날개까지 펼치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께서 만드시는 유토피아라면 얼마든지 환영.]
"뭐...라고...."
"오케이. 일곱 간부 모두 찬성이야. 어쩔래, 대장님?"
가을은 대표로 나를 압박했다. 그들 모두 내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반란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아니, 뭐. 너희들이 좋다면 그렇게 하지."
나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버린 회의에 얼떨떨했다. 서울의 문제가 설마 이리도 가볍게 해결될 줄이야. 이제부터는 마음 편안히 정령의 공략을-
"무조건 공중정원이야. 하늘을 떠다니는 도시라니, 얼마나 낭만적이니?"
"낭만은 개뿔. 당연히 지저왕국 아니냐?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펼쳐지는 이세계같은 공간이...."
"내 이명이 운명을 부르는 군. 무조건 하늘이다. 하늘에 성을 만드는 게야."
"거 노욕은 그만 부리고. 건물 짓는 건 나다? 나중에 땅 늘릴 생각도 해야지. 안 그래?"
회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후회했지만, 논리정연하게 상대방을 설득하며 제 논리를 주장하는 간부들의 토론은 아테네 학당에 모인 철학자들을 보는 것 같았다.
"후우."
나는 그들의 열띤 토론을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동했다.
'다른 얘기를 꺼냈으면 큰일날 뻔 했군.'
내 입에서 테라포밍 얘기가 나오지 않아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