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208화 (208/1,497)

〈 208화 〉1부 10장 11

이승형에게 내 정체를 드러낸 순간.

그는 전신에 마력을 실어 전력으로 정권을 내질렀다.

"히어로 답네요."

정면에서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해 곧게 뻗어진다. 나는 팔을 X자로 교차해 위로 처올렸다.

파-앙!

이승형의 주먹은 내 정수리 위로 스쳤다.

"뭐?!"

자신이 원하던 곳을 공격하지 못해 당황한 건지, 아니면 내가 진짜로 그 공격을 받아낼 거라 예상하지 못한 건지, 이승형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팔을 앞으로 밀었다.

카가가강!

호신강기처럼 둘러진 나와 이승형의 마력이 부딪히며 불똥이 튀었다. 나는 삽시간에 이승형의 안으로 파고들었고, 교차시킨 팔을 풀어 짧게 주먹을 내질렀다.

"큭!"

복부를 노린 스트레이트. 하지만 이승형은 다른쪽 손을 뻗어 간신히 내 주먹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제법이네요."

배우로 활동했어도 기본적인 전투 훈련은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붙잡힌 주먹에 마력을 불어넣어 살짝 당겼다.

"그럼 어디 이것도!"

허리를 살짝 비틀어 회전력을 실었다. 짧은 촌경이지만 그 파괴력은 이승형이 처음 내지른 주먹보다 더 강했다.

쿠웅!

이승형은 몸을 뒤로 빼는 걸로 내 공격을 흘리려했다. 반발자국 물러나며 촌경은 힘을 잃었지만, 거리를 벌리면 한 걸음 더 다가가면 그만이었다.

"흥!"

다시 한 걸음 더. 내지른 주먹과 똑같은 자세로 주먹을 찔렀다. 이번에는 이승형도 팔을 교차해 가드를 세웠다.

쿠---웅!

이승형의 몸이 반 보 뒤로 밀려났다. 이승형은 내가 그의 주먹을 막았던 방식과 똑같이 내 주먹을 막아냈다.

"흡!"

합을 주고받는다면 이제 내가 그의 공격을 받아낼 차례. 이승형은 교차한 가드를 풀어 내 손목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승형 따위가 이 몸을 쉽게 터치하게 놔둘 수 없다.

카앙!

"헛?!"

이승형은 내 손목을 잡았다. 부분 괴인화로 바꾼 검은 건틀릿을 잡았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다리를 들어올렸다.

"피닉스 펀치!"

"?!?!"

이승형은 내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해 가드를 내리지 못했다. 나는 접었던 다리를 쭉 펼치며 이승형의 다리를 걷어찼다.

"크윽!"

오금 옆을 걷어찬 덕분에 이승형의 몸이 주저앉았다. 걷어차인 다리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고, 드디어 위에서 내려다보던 시선이 나와 수평을 이루었다.

"흠."

이승형의 동공은 하얗게 불타고 있었다. S급 화속성 이능력자로 각성하며 자신만의 색(色)을 가지게 된 그는 순백(純白)의 불꽃을 가지고 있었다.

"흐음."

그런 그의 불꽃 속에 내 색깔이 약간 스며들었다. 창염은 흰 불꽃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SS급에 이르면 청색과 백색이 하나로 어우러지지 않을까.

"잘 들어요. 내가 구로에서 당신을 각혈시킨 건 당신을 못 이겨서가 아니라."

쿵!

나는 손날을 세워 이승형의 어깨를 찍었다. 한쪽 팔을 들어올리며 가드를 세웠지만, 이승형은 가드 째로 상체가 숙여졌다.

"당신을 상대할 시간이 없어서예요."

"......강하네. 정말."

내가 빌런임을 드러낸 순간부터 이승형은 예의를 멀리 집어치웠다. 히어로가 빌런에게 존댓말을 할 이유는 없었지만, 말을 놓자마자 살짝 심사가 뒤틀렸다.

"왜 말 놓아요? 누가 맘대로 놓아도 된다고 허락했어요?"

"...? 혼잣말이었는데요."

"왜 혼잣말을 대놓고 말해요? 사람 오해하게."

"그럼 정정하죠. 역시 강합니다. 당신은."

이승형은 전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나는 더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만. 당신이랑 붙으면 저기 길막고 있는 사람 달래줘야한단 말예요."

"군신 말입니까?"

"예."

"......SS급은 SS급 끼리 논다 이건가."

"논다기보다는 합이 맞아야죠. 당신 10초만에 한 번 죽었어요."

이승형에게 붙잡힌 내 건틀릿의 손톱은 그의 목젖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검지로 그의 목을 툭툭 건드리고 뒤로 거리를 벌렸다.

"아무튼 이제 힘의 차이를 여실히 느꼈을테니까, 함부로 덤비지 마요. 수틀리면 다 죽여버릴테니."

"......광검 님을 죽인 빌런이니 신서울 정도야 금방 불태우겠죠. 하지만."

이승형은 여전히 주먹을 들어올리며 투지를 내려놓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히어로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의기는 좋은데, 나 초대한 건 히어로 협회거든요?"

"그건 당신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글쎄요. 내 정체는 짐작하지 못해도, 청화와 피닉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얼핏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던데? 푸흐흐."

애초에 둘 다 서울의 빌런으로 나타난 이들이다. 완전히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도, 인간 청화와 빌런 피닉스가 적어도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어지간한 사람들은 눈치채고 있다.

"모르면 바보죠. 당신도 얘기했잖아요. 푸른 불꽃. 딱 보면 모르겠어요?"

나는 푸르게 웨이브진 머리칼을 손으로 들어올렸다. 이승형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상에 이런 허무맹랑한 일을 믿는 사람들이 어디있습니까?"

"하지만 현실이죠. 제가 피닉스고, 피닉스가 저예요."

"......정정하겠습니다."

이승형은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내게 선언했다.

"가을 씨를 구해준 것도 고맙고, 제게 힘을 준 것도 고맙고, 선의철 숙부의 악행을 드러내 준 건 고맙습니다. 하지만!"

"방식이 잘못됐다?"

"...예!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고요!"

"죽일만해서 죽였는데. ...뭐 그쪽 생각은 잘 알겠어요."

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히어로에게는 히어로의 방식이, 빌런에게는 빌런의 방식이, 그리고 제게는 저만의 방식이 있어요."

"가을 씨는 그걸 이해한다는 말입니까?"

"이해하니까 제 옆에 있겠죠? 여러 가지로 태클은 걸지만...뭐 그걸 당신이 알 필요는 없고."

나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때로는 법보다 주먹이 더 빠른 법이에요. 그렇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도 저 피닉스인 걸 알자마자 주먹을 날렸잖아요? 준법정신이 그렇게 투철했으면 신고를 했어야지. 푸흐흐."

"......."

이승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마력을 풀고 헛기침을 해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당신의 뜻은 잘 알겠어요. 집행관과 마찬가지로 빌런과는 손을 잡을 생각 없다 이거죠?"

"설마 당신.... 벌써 몇 명을 회유한 겁니까?"

"푸흐흐. 누구와 밀월관계인지는 잘 생각해봐요. 집행관이랑 둘이서 한 번 잘 찾아보라고요."

나는 옥상 난간으로 뛰었다. 이승형은 당황해 손을 뻗었고, 나는 달을 등지고 그를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선언했다.

"남들에게 청화의 정체를 알리면 재미 없을 줄 알아요. 그 때는 이 땅에 신서울이라는 도시는 없게 될 겁니다."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빌런이 히어로 상대로 겁박하는 데 뭐 문제 될 거라도? 그리고."

나는 두 팔을 벌렸다.

"저의 조직, 청화단은 누구든지 인재를 영입하고 있습니다. 생각있으면 서울로 와요. 꼭 가입하지 않아도, 동맹이나 우군 정도로도 받아들여주니까."

"......힘을 미끼로 회유하는 거군요."

"그렇죠. 예를 들어서."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승형의 심장에 박아둔 불꽃의 폭탄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이전보다 더 크게 타올랐다.

"이렇게 당신의 힘을 빼앗아갈수도 더 늘려줄수도 있어요. 어쩌면...SS급으로 올려줄수도?"

"평생을 S급, 아니 원래의 A급으로 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빌런과는 손을 잡지 않을 겁니다. 만약 당신의 유혹에 넘어가 손을 잡게 된다면."

이승형의 눈에는 하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건 당신이 제게 제 2의 선의철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겠죠. 저는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싶지 않습니다."

"그 놈이랑 같은 취급 받는 건 조금 빡치는데."

이승형 입장에서는 나나 선의철이나 다를 게 없는 사람이라 반박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아쉬움이 들었다.

'거의 히로인급 포텐셜이긴 한데.'

세계 최강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재능을 가진 10명의 인간 히로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재능이었다.

그가 먼저 공격을 해온 건 예상외였지만, 나는 그와 일부러 주먹다짐까지 하며 잠재력을 확인했다.

'아마도 S+. ......95?'

내가 조금만 더 봐주기만 해도 95의 문턱을 넘어 SS의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하지만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고, 이승형은 나와의 야합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아깝네요. 당신이 빌런이었으면 최고의 제자가 되었을텐데."

"아쉽습니다. 당신이 히어로였으면 최고의 스승이 되었을 겁니다."

천가을이라는 요소를 배재한 채, 원작 게임을 즐겨 플레이했던 '플레이어'로서 판단하자면, 이승형은 최우선적으로 영입해야 할 1군의 인재였다.

왜 항상 이런 인재는 정의감이 넘쳐서 외도를 걷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그런 정의감 덕분에 삐뚤어진 길을 걷지 않고 곧은 길로 쭉 나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흐음."

옆에서 길안내는 하지 않더라도 이정표 정도는 해줄 수 있다.

괴수를 상대할 S급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한 달 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는데, 서울에서 이능력자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를 만들 거예요."

"빌런 양성소가 아니고요?"

"예. 현직 히어로, 은퇴 히어로, 헌터, 빌런, 미각성 이능력자, 일반인. 재능만 있으면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이능력자 전용 아카데미죠. ......일단 '대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지만."

나는 불꽃을 하나 피워 이승형에게 던졌다. 적의없는 불꽃에 이승형은 담담히 그 불꽃을 받았고, 곧 불꽃은 작은 메달이 되었다.

"입학 프리패스 권이에요. 그거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격이니까, 생각 있으면 들려요. 알겠죠?"

"......."

이승형은 자신의 손에 들린 메달을 한참 동안 노려봤다. 나는 그가 고뇌에 잠긴 사이,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샤오린."

"예."

옥상 입구를 막고 있던 샤오린이 내 옆에 나타났다. 내가 부르자마자 문도 열지 않고 영체로 문을 통과해, 내 옆 난간에 서서 실체를 드러냈다.

쾅!

옥상 문이 거칠게 열리며 백희아를 비롯한 협회의 히어로들이 옥상으로 들어왔다.

"청화 양! 자, 잠시만-"

"저 통금 있는 사람이라서요. 죄송합니다. 먼저 갈게요."

샤오린은 내 허리를 손으로 감싸며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십수층 짜리 건물 옥상에서 가볍게 점프한 샤오린은 허공을 달려 내가 미리 세워둔 버스의 천장 위로 안착했다.

"주군."

"그래."

나는 버스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나를 뒤따라왔던 청화단의 정예병력이 저마다 지급받은 코어웨폰을 가다듬고 있었다.

"다들 헛걸음 시켜서 미안해요. 가을이 납치당하거나 그랬으면 협회고 뭐고 다 엎어버리려고 했는데."

나는 내 품안에 숨겨둔 괴인들을 부활시켰다. 가을이 가장 먼저 실체를 갖추어 의자에 착석했다.

"엄청 많이도 데려왔네. 나 혹시 잘못되면 테러라도 일으키려 했니?"

"테러가 아니라 전쟁이죠. 그러면 이제 서울로 돌아갑니다."

"휴우."

단원들은 서울로 귀환하겠다는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진짜 내가 신서울과 협회를 상대로 테러를 할 까봐 긴장한 눈치였다.

"......암만 그래도 진짜로 테러를 했을까봐."

"천가을 잘못됐으면 저질렀을 거면서."

"그건 인정합니다."

테러리스트 뿐만 아니라 테러의 배후까지 샅샅이 찾아내 모가지를 비틀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밸트를 착용하고 버스의 시동을 걸었다.

"아참. 엄청 중요한 임무를 까먹을 뻔 했네요. 자원자 받습니다."

내가 버스 뒤로 고개를 돌려 임무의 수행자를 찾았지만 아무도 쉽게 손을 들지 않았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활대를 잡은 유이신이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죽으라면 진짜로 죽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적진에 잠입하는 것은 제 주특기입니다. 어떤 임무든-"

"가는 길에 입 심심하니까 편의점에서 먹을 것좀 사와요."

"......."

"돈은 나중에 김지화한테 청구하고. 아, 휴게소 음식이 아니라서 실망했어요? 거기까지는 양해해줘요. 뭐 서울까지 올라가는데 휴게소가 있어야지."

유이신은 군말없이 떠났다.

서울로 올라가는 잠시.

나는 입에 핫바를 하나 물고 밤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천가을이 자꾸 눈으로 운전석을 흘깃거리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