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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07화 (207/1,497)

〈 207화 〉1부 10장 10

광검 루살카 부부를 상대로 승리를 따낸 이후.

나는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다는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직접 차를 몰고 내려가야 했다.

"하여튼 이승형 그 놈이 진짜 문제야."

"어쩌겠냐? 그 놈 얼굴이 잘 생긴 걸."

조수석에 앉은 조덕배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깐족거렸지만, 마음이 넓은 나는 그의 도발을 참고 운전에 집중했다.

"이승형 잘 생긴 건 인정합니다."

덕배는 이제 자신이 죽는 것에 이골이 났는지 목숨을 걸고 희희덕거렸지만, 그게 더 아니꼬와서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승형은 잘생기기는 했다.

"잘 생긴 건 알겠는데, 왜 그 상판떼기를 서울에 들이밀려고 하는지."

"왜. 또 서울 오면 각혈시키려고?"

"안 해요, 이제. ...천가을한테 집적거리면 안 하고, 나한테 집적거리면 할 거예요."

중국으로 가기 전부터 이 몸을 흘깃거리던 그 건방진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세간의 등을 업고 청화와 썸을 타보려는 개수작이라고요. 흥, 절대 안 넘어가요."

"그러면서 버스는 손수 몰고가네."

"가을이가 지금 터미널에 잡혀버렸잖아요."

나는 내비게이션 위에 배치한 스크린을 통해 실시간 중계 영상을 확인했다. 신서울의 터미널을 비추는 영상은 기자가 흥분한 얼굴로 마음껏 지껄이고 있었다.

[비스트 테이머 청화 양의 갑작스러운 신서울 방문을 두고 그 목적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서울로 귀환하는 버스를 두고 시민들은 협회에서 제공한 특혜가 아니냐며....]

"젠장."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차로 내려가면 톨게이트부터 나와서 난리를 피우면서, 버스로 내려가면 또 이 난리람."

"그러길래 그냥 협회에서 차 보낸다고 할 때 태워서 보내지 그랬냐."

"그러면 또 이승형이 서울에 올라오는, 아 젠장. 그만해요. 결국에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이승형이라고요."

나는 가을이 보낸 마지막 메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이승형이 너한테 할 말 있다던데? 그 청...무슨 거신? 그걸로 얘기를 나누고 싶대.]

"기억 완전히 지워진 줄 알았는데."

"너를 너무 사랑해서 기억이 되살아 난 거 아니냐? 크흐흐, 너 아무래도 걸릴 것 같다."

"청화의 거신은 조용히 닥치고 있으십쇼. 정말. 비스트 테이머 능력도 지금 난리인데."

나는 엑셀러레이터를 밟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어야했다.

"이능력자까지 강화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되면 사람들 기어서라도 올 게 뻔하잖아요!!"

"그래서 이승형 죽이러 가는 거냐? 살인멸구?"

"그 인간 하는 거 봐서요!"

만약 어줍잖게 협박하면 진짜 죽여서 괴인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나는 이를 악 물고 마력까지 실어 엑셀을 밟았다.

아직 시간은 오후 5시 30분.

해가 떨어지기까지는 약 1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 * *

<오후 6시 27분, 한국 히어로 협회 본부 대기실.>

"큰일났네."

"제가 안아서 돌파할까요?"

샤오린은 두 다리로 협회에 몰려든 인파를 뚫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고 촬영을 마친 가을은 사람들 몰래 버스를 탈 생각이었으나, 이승형이 바래다주겠다며 따라붙은 게 화근이었다.

- 앗! 저 어색한 변장은 화권 이승형?!"

- 옆에 파란 머리는 청화일 거다! 언제 또 신서울에 왔대?

- 긴급! 신서울에 온 게 아니야! 지금 신서울에서 나가려고 하는 거다!

마침 그 소식은 밖에 있던 시위대의 귀에도 들어갔다.

졸지에 승강장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버린 가을은 인명 사고가 나기 전에 버스 터미널에서 협회 본부로 피신해야했고, 결국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수 없었다.

"실례합니다."

문 밖에서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가을은 재빨리 청화로 변신하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들어오셔도 돼요."

"면목이 없습니다. 청화 님."

백희아는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거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아녜요. 따지고 보면 제가 고집을 피워서 그런 걸요."

청화는 협회의 차로 이동하기를 거부했다. 차마 따라붙는 호위가 불편하다는 말을 할 수 없던 한 빌런의 의향 때문이었지만, 일단 그 의향 때문에 버스를 타려다 이 사단이 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백희아는 그 혼란을 제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청화 양. 실례가 안 된다면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 새벽이나 아침에 올라가심이...."

"......."

당초 일정은 광고 촬영만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청화는 귀찮은 일을 상당히 싫어했고, 협회는 청화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 청화의 스케쥴에 최대한 맞추고자 했다.

하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해버렸다. 가을은 눈치를 보는 백희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쪽은 범인이 아닌 것 같고.'

굳이 따지자면 임기응변으로 제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이끌려는 기책인 모양이었다.

"그, 촬영하시느라 피로도 쌓이셨을테고, 이대로 서울로 올라가시기에는 상당히 곤란하시잖습니까? 내일 협회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차량을 수배할테니-"

"집행관 님."

가을은 난처한 얼굴로 백희아의 말을 끊었다.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은데...."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 나가시면-"

"괜찮아요. 신서울에 온 김에 석양도 한 번 보고싶은 걸요."

"그렇습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옥상의 야외 테라스가 정말 전망이 좋습니다."

백희아는 아무 의심없이 가을을 야외테라스로 안내했다. 전망이 좋다는 백희아의 말대로 옥상은 사람 한 명 없이 아주 조용했다.

"해가 이제 지려고 하네요."

"네. 해가 지는 군요. 이제 밤이 되면 돌아가시는 길도 위험해질 것 같고요."

"꽃도 예쁘구요."

"...예. 히어로들의 심신 안정을 위해 복지 차원에서 마련한 장소입니다. 머리가 아플 때는 휴식을 취하기 정말 좋은 곳이죠."

가을은 아무 말이나 내뱉었고, 백희아는 그 실없는 말에 하나하나 맞받아치며 속내를 드러냈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만 가서 가을은 초조해졌고, 백희아는 신이 나서 마음껏 떠들기 시작했다.

"아."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정수기는...?"

"제가 음료를 사오도록 하겠습니다. 야외 자판기도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백희아는 몸을 돌려 자판기로 향했고, 가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했다.]

"늦었잖아."

[날아오고 싶었는데 그건 어렵더군. 먼저 들어가있어라.]

석양이 짐과 동시에 가을의 몸이 흩어졌다. 가을은 검은색 코팅에 회색 유전자 무늬가 들어간 코어로 변했고, 그 코어를 든 검은 갑주의 괴인-피닉스는 바로 청화로 변신했다.

"여기 음료...어?"

백희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있는 청화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청화는 안주머니에 잠시 손을 집어넣었다가 차가운 음료를 받았다.

"고마워요."

"예. 음, 어...."

"바람 좀 쐬니까 훨씬 좋네요. 원래 이 시간에서야 일어나서."

청화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눈에 활기를 띄웠다. 백희아는 생동감까지 넘치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왼손 약지의 검은 반지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시간을 맞춰드렸을텐데."

"아녜요. 그러면 자고 가야 했을테니까. 지금부터 할 일이 있거든요. 흑염룡 밥도 줘야하고."

"......그렇습니까."

S급 괴수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청화의 말에 백희아는 살짝 기가 죽었다.

누구는 어떻게 하면 S급 괴수를 공략할 지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와중에, 누구는 S급 괴수에게 어떤 먹이를 줄 지 고민하고 있는 현실에 백희아는 자괴감이 들었다.

"함장님."

"......예?"

뜻밖의 호칭에 백희아는 당황했다.

"저 두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마, 말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청화가 처음으로 공손하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태도를 보이자, 백희아는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장이라도 있으면 청화가 하는 말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받아 적을 기세였다.

"다음에 혹시 외국에 나가게 된다면 말이에요, 저는 함장님이 모는 배를 타고 나가고 싶어요."

"......<백나로 호> 말씀입니까? 그건...."

청화의 요구에 백희아는 난색을 표했다.

"다음에는 히어로들을 대동하고 외국으로 가시겠다는 말씀인가요?"

"예. 하지만 갈 때는 제가 직접 선별해서 데리고 가고 싶긴 하네요. 꼭 히어로가 아니더라도."

"......그건 논의를 해봐야하는 문제입니다."

"네. 논의. 그러면 꼭 태워주시는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해가 떨어지면서 사람이 생기가 돌아서 그런지 몰라도, 서서히 텐션이 올라가기 시작하는 청화의 페이스에 백희아는 그만 말려버렸다. 백희아가 난감해하자 청화는 싱글벙글 웃다가 표정을 굳혔다.

"그럼 두 번째 부탁."

청화는 방금 전까지의 미소를 싹 지운 채, 약간 짜증이 서린 얼굴로 표정을 굳혔다.

"이승형 좀 불러와줄래요?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백희아는 실망한 눈치로 몸을 돌려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직접 내려오실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천가을도 고생했을테니. 너도 고생했다."

샤오린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피닉스도 본색을 드러냈다.

"화권과 단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불청객들을 막아줬으면 한다."

"알겠습니다."

옥상의 문이 열렸고, 백발의 미청년이 어물쩡거리며 들어왔다. 샤오린은 성큼성큼 걸어가 승형을 한 번 째려본 뒤, 뒤따라 오려던 백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독대를 원하십니다."

"네? 자, 잠시만요?!"

샤오린은 뒤따르려던 백희아를 다소 격하게 건물 안으로 밀어보낸 뒤, 피닉스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화권 이승형."

난간 바로 앞에 선 피닉스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이승형을 올려다보며 대놓고 인상을 썼다.

"그래서 저는 왜 보자고 한 거죠?"

이승형은 푸르게 타오르는 피닉스의 눈동자를 보고 대번에 그 정체를 깨달았다.

"...설마 벌써 이렇게 만날 줄이야."

"제가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거든요."

"불이라. 그렇습니까...."

이승형이 씩 미소지었다.

"다시금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승형의 얼굴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 * *

이승형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나는 온갖 예상을 했지만, 설마 이승형이 관악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기억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분명 힘을 다 쓰면 기억이 안 나도록 조정했을텐데."

"떠올렸을 뿐입니다. 그 날의 기억을."

"도대체 어떻게요?"

이승형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창염개진! 그거 보자마자 바로 머리가 아프더라고요. 그리고 그 날 자고 일어나니까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습니다. 청화의 거신과 관련된 기억."

"......."

그냥 도망칠까. 내 정체고 뭐고 일단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태양의 사도! 여명을 밝히는 창염의 기사! 물지기를 쓰러뜨리는 거인을 봤을 때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 저 자가 바로 '청화의 거신'이구나."

"......."

"생각해보니 접점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청화(靑火)나 창염(蒼炎)이나 둘다 '푸른 불꽃'아닙니까? 그 푸른 불꽃은 지금."

"당신의 심장에 들어가있죠."

나는 순순히 진실을 실토했다.

"예. 맞아요. 제가 당신을 각성시켰어요. S급 이능력자로."

"......역시."

"S급 괴수인 흑염룡도 부리는데 이능력자라고 각성 못 시킬까."

나는 마력을 피워 그를 압박했다. 이승형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 살기를 받아냈다.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가을...씨를 구해준 건 당신인가요?"

"......예."

숨길 이유가 없었다. 나는 쓸데없는 말을 굳이 덧붙일까 고민했다가, 그냥 덧붙이기로 했다.

"당신이 구하지 못했던 천가을. 제가 구했죠. 죽기 직전에."

"그런가요...."

이승형은 씁쓸하고 상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가을 씨를 구해주셔서. 제게 힘을 주셔서. 그리고...제 숙부의 악행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해주셔서."

"선의철 관련해서 왜 저라고 생각하죠?"

"그야 청화단아닙니까. 저도 마냥 바보는 아닙니다."

"쳇."

하긴. 이름을 이렇게까지 지었는데 연관을 못 시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하지만 나는 이름에 후회가 없었다. 청화라는 이름은 '창염'의 또다른 이면이 될 테니.

"그래서 잘난 S급 히어로 <화권> 이승형 씨.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저를 찾아온 건 가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당신에게서 힘을 거둬갈 수 있는데도?"

"예.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놈은 도대체 뭐지. 나는 전형적인 영웅상을 빼다박은 이승형의 모습에 절로 짜증이 일었다.

"......얘도 역시 그건가."

"예?"

"아무것도 아녜요. 그럼 감사 인사 들었으니 이제 끝났죠? 저는 서울로 올라갑니다."

"저기, 하나 더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는데요...."

"제가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생각보다 많았다.

"아, 그래요. 어디 한 번 해봐요. 들어는 줄게요."

"혹시."

이승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SS급으로 성장시켜 주실 수 있으십니까?"

"'도'?"

내 물음에 이승형은 주먹을 불끈 쥐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

"SS급 빌런 <피닉스>! 당신께서 강화시켜 주신게 아닙니까!"

"......."

얘는 또 왜 이상한 오해를 하고 그럴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눌러 이승형을 추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 때 한 분 더 있었잖습니까. 청화의 거신 님. 그...머리가 태양처럼 빛나던 그 분."

"맞아요. 머리가 반짝이는 친구가 하나 더 있었죠. 걔는 청화의 거신이 맞아요."

"과연."

이승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화답하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피닉스>는 접니다."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승형에게 오해를 만들어 곤란을 겪을 필요도 없었고,

"청화의 거신은 <피닉스>가 아닙니다. 알겠어요?"

조덕배를 창염의 피닉스로 오해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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