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1부 10장 9
"그래서 원탁은 언제쯤 서울에서 회의를 진행할 거지?"
나는 샤워를 마치고 온 루살카에게 질문했다. 원탁의 일원인 <운디네>가 다른 도시를 놔두고 굳이 서울로 온 이유는 곧 있을 '원탁 회의'가 서울에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글쎄? 나는 애초에 신서울에서 진행될 줄 알았단다."
"그러게. 부산도 아니고 서울이라."
원탁이 모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들을 보겠다고 따라오는 수많은 인파가 문제다. 더욱이 석하랑이 13번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모든 원탁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감에 빠져 있었다.
"새로 한 명이 들어오면 신고식 겸 모이는 게 관례긴하지. 하지만 왜 그 장소가 서울이냐, 그 말이다."
"글쎄. 너 때문 아니련?"
"허, 내가 왜?"
루살카가 화살을 내게 돌렸다. 나는 얼척이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청화 때문인 거냐, 아니면 피닉스 때문인 거냐?"
"반반."
"반?"
"각자 오는 이유가 달라. 어차피 장소는 가웨인 경이 정하기 나름이지만, 참가하는 아이들의 생각은 다르단다. 나만 하더라도."
루살카가 부산을 가리켰다.
"여기있기 껄끄러워서 서울로 올라왔잖니."
"그래. 덕분에 내 방은 정액과 애액으로 테러당했지."
"잡소리 말렴. 아무튼 당장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원탁만 세 명 아니니. <운디네>, <군신>, 그리고 <오라클>."
"<질풍객>은 무사수행을 떠났으니 참가가 불분명할 터."
샤오린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겪은 질풍객, 히메지 하야테는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다며 전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자신의 오빠를 위해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투명 무기를 만든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질풍객이 SS급 되면 너도 위험한 거 아니니? 피닉스 죽이려 들텐데."
"인질이 있잖나. ...농담이고 덤비면 싸워야지. 대신 혼자서 싸우지는 않아."
나는 심장을 엄지로 두드렸다.
"이 몸에 딸린 식구가 어디 한 둘이여야 말이지. 나 혼자 죽으면 모를까, 다른 애들까지 나 따라서 저세상 보낼 수는 없잖아."
"그래, 창염의 피닉스 님께서 사도들 굽어살피는 마음씨는 이해하겠어. 그런데 너 그거는 확실히 알아야 한단다?"
루살카가 원탁의 프로필을 띄웠다.
"너, 그러니까 빌런 <피닉스>에 대한 원탁의 입장은 크게 네 부류란다."
"많기도 하군."
"좀 닥쳐볼래? 첫번째는 완전한 아군. <군신>이 유일하지."
내 기준으로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일단 조용히 루살카의 말을 듣기로 했다.
"두번째로 우군. <설화령>, <운디네>, <질풍객>이 대표적이야. 이해관계가 일치하면 너와 손을 잡을 수는 있지만, 문제가 있다면 싸우게 되겠지?"
"너도 우군인가?"
"당연하지. 내가 왜 너를 돕겠니? 네가 아직 우리 서방님 목줄 쥐고 있으니까 그렇지."
괴인 광검에 대한 목줄은 사실상 풀어놓았지만, 내가 죽으면 그 또한 죽는 건 다른 괴인들과 마찬가지였다.
루살카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 목숨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루살카에게 절대적인 충성이나 강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제 아홉 명 남았군."
"그렇단다. 그 중에서도 중립적인 사람을 꼽아보자면.... <오라클>이랑 <가웨인 경>. 끝이란다."
"원탁의 일곱 명이 적이란 말인가. 흠. 난적이군."
"가웨인 경도 어떻게 될 지 모르지? 사실상 여덟이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원탁과 청화단의 전력을 비교했다. 나와 원탁 개개인이 1:1로 붙는다면 내 압승이지만, 원탁은 히어로의 정점인 만큼 동료애가 아주 끈끈하다.
"설마 시너지 버프까지 걸리려나?"
"무슨 소리니?"
"혼잣말이다. 끄응."
<제로니모>나 <살라딘>을 포함한 원탁 일곱. SS급 괴인인 피닉스가 상대한다면 어떨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수 시간의 격전 끝에 '신승(辛勝)'을 하게 되겠지만, 역시 변수는 중립인 <가웨인 경>이다.
"역시 SS급이 하나 끼니까 계산이 복잡해져."
"...? 그 인간 SS급이라는 소리니?"
"S+. SS급 되기 직전이다."
나 때문에 공식적인 인류 최초의 SS는 석하랑이 되었지만, 원작에서 최초의 SS는 가웨인이 차지했다. 2025년의 미래보다 3년이나 이른 2022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년 뒤에.
"흥, 이제는 소용없어. 우리 하랑이가 SS잖니."
"그래, 석하랑이 대단하지. 그럼 됐다. 원탁은 걱정할 필요없겠어."
"왜?"
나는 잠정적 적이나 다름없는 일곱 히어로를 가리켰다.
"나 혼자서 이 놈들을 상대하고, 샤오린에게 가웨인을 맞 상대시키면 되니까."
"그래. 좋을대로 하렴. 당장 원탁 회의가 서울에 잡힌 건 아니니 느긋하게 있어도 좋을 거란다. 아마 예상은...8월 중순?"
"그런가. 그럼 충분하다."
환룡에 더불어 또 다른 정령도 각성시켜 아군으로 만들면 상대하기 훨씬 수월할 것이다. 원탁이 아직 적이라고 확정은 할 수 없지만, 항상 최악의 상황은 가정해야 했다.
"그 사이에 하나라도 더 찾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얘."
루살카가 목소리를 낮췄다. 샤워실에서 한창 씻고 있을 광검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였다.
".....나 중국 좀 다녀오려고 하는데."
"그걸 나한테 허락받을 이유는 없지 않나?"
"서방님 못 데려가니까 그러지."
"아하."
아나스타샤로서 왠 이상한 괴인을 데리고 다닌다면 전세계의 가십거리가 될 게 뻔하고, 인간이 된 루살카는 가문의 가족들에 상당히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환룡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나?"
"그럼. 걔 사실은 세뇌 안 당했다며?"
"세뇌 당한 걸 아는데 풀기 귀찮아서 세뇌당한 상태로 있던 거다. 정신은 세뇌당한 게 아니야."
"뭐 그리 복잡하니? 어쨌든 지금은 멀쩡한 상태라는 얘기잖니."
"그래. 모택평에게 깃들어있지만."
"......뭐? 그 유부녀 헌터?"
쬬의 악명은 러시아까지 이르렀나보다. 루살카는 환룡이 그에게 깃들었다는 것에 상당히 난색을 표했지만, 나는 루살카가 걱정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만약에 환룡이 모택평에게 먹히면 어떻게 해? 나랑은 다른 경우잖니."
"......흐음."
루살카는 영혼만 남아 아나스타샤의 몸에 깃들었다. 이미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처녀의 몸이었기에 정착이 쉬웠고, 원래 신체 주인인 아나스타샤는 이미 영혼이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모택평의 경우는 다르다.
"환룡이 모택평과 섞이거나 모택평에게 역으로 잡아먹힐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다."
"...뭔가 조치를 취해두고 온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 안에 고이 모셔둔 검은색 코어 하나를 꺼냈다. 루살카는 전직 간부답게 내 손에 들린 코어의 정체를 금방 깨달았다.
"흑전갈 코어네?"
"그래. 오늘 아침에 갓 낳은 따끈따끈한 알이지."
"......스무 고개하니? 그냥 한 번에 얘기해주련?"
루살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나는 더이상 말을 끌었다가는 루살카가 화를 낼 것 같아, 한 번에 정답을 밝혔다.
"모택평이 흑사갈이 되었다. 됐지?"
"......설명하렴."
그럼 그렇지. 나는 냉장고에 들어있던 딸기 음료로 목을 축인 뒤, 환룡과 봉효가 저지른 참상에 대해 전했다.
* * *
환룡의 빙의 매커니즘에 대해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환룡이 살아있는 대상에 빙의를 하게 되면, 원래 몸 주인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환룡이 몸을 강탈했지만 아직도 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질풍객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였다.
그래서 내가 홧김에 내뱉은 '모택평 빙의'에 대해 봉효는 다양한 조건들을 탐구한 끝에, 한 가지 충격적인 계책을 생각해냈다.
- 모택평의 몸에 빙의해 그 혼을 끄집어낸 뒤, 다른 어딘가에 빙의시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나와 환룡은 그 계책에 두려움을 느꼈다. 다크 레기온의 간부나 저지를 법한 비인외도의 계책을 생각한 봉효는 충분히 악인이었다.
- 모택평은 네 아버지가 아닌가?
-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이지요. 자기 아들의 심장에 벌레를 박고 딸의 심장을 터뜨리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있단 말입니까?
봉효는 봉효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동창의 제독으로 일을 하면서 많이 시달리기도 했겠지만, 친동생처럼 아끼던 샤오린이 모택평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그는 완전히 모택평과 절연했다.
- 저는 주군께서 저를 괴인으로 만들어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몸에 흐르는 더러운 피 절반을 버릴 수 있지 않았습니까? 하하.
나와 환룡은 결국 봉효의 계책을 승인하고 말았다. 봉효는 그 대상을 물색하다가 마침 아주 좋은 소체를 손에 넣은 것이다.
- 피닉스 님. 저 흑사갈을 손에 넣었습니다.
- ????
- 아무래도 도망치다가 황제의 코어를 취하려고 이쪽으로 온 것 같습니다만.
봉효는 자신이 잡은 인간형이 된 흑사갈을 잡았음을 내게 즉각 보고했다. 그리고 지파룡의 코어를 넘기는 대신, 흑사갈을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냐고 허락을 요구했다.
- 흑사갈을 어떻게 쓰려고?
- 그야 이 안에 모택평을 넣은 거죠!
당연히 봉효는 모택평의 영혼을 집어넣는 소체로 흑사갈을 선택했다. 수많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을 자기 입맛대로 부리다가, 그 자식 중 살아남은 이에게 반격을 당하고 새끼나 낳는 코어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 아, 안 돼에에에! 전세계를 지배할 이 몸이, 이런 젖통 덩어리나 달, 으으읍?!
모택평은 흑사갈의 몸에 깃들었다.
정확히는 '괴인이 된 흑사갈의 몸'에 깃들었다.
- 환룡아. 네 부하 말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 ...말리기 귀찮아.
- 주군! 이번에는 이렇게!
- ...일일이 명령하기도 귀찮네. 세상의 혼돈을 관장하는 환룡이 명한다. 괴인 흑사갈은 괴인 백청영의 명령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 이상. 끝.
환룡은 흑사갈에 대한 절대 명령권을 가지고 있었고, 모택평은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환룡의 입을 빌린 봉효의 명령에 따라 온갖 능욕을 당해야했다.
- 꺄아아악! 시, 싫어어어! 그, 그만!
그야말로 외도 그 자체.
- 심하구만.
물론 나는 그걸 말리지 않았다.
- 그래서 하루에 몇 개까지 코어를 만들 수 있는 거지?
- 일단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하루에 S급으로 2~3개는 충분히 낳을 것 같습니다.
매일같이 S급 코어를 낳는 정기 공급책이 들어왔는데, 굳이 그걸 말릴 이유는 없었다.
* * *
"그래서 이게 오늘 새벽에 흑사갈이 낳은 따끈따끈한 알이다, 이 말이지."
"웁."
루살카는 인상을 찌푸리며 진심으로 역겨워했다. '괴인 루살카'는 허윤환의 몸에 깃들어있다 내가 없애버렸으니, 온전한 영혼만 남은 아나스타샤는 괴인들의 행각에 상당히 질색했다.
"너 정말.... 어휴. 됐어."
루살카는 상종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코어를 다시 서랍속에 집어넣으며 한 마디 첨언했다.
"덧붙여서 코어를 낳는 방법은 그거다. 너와 광검이 자주 하는 그거."
"......."
"섹ㅅ-"
"입 닥치렴!"
루살카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며 루살카의 앞에 마주앉았다.
"뭘 남사스럽게."
"나랑 서방님은 사랑을 나누는 거라고!"
"그럼 인정하지."
"이게 정말...!"
"진정해라, 루살카."
샤워를 마치고 나온 광검이 소파의 뒤에서 루살카를 끌어안았다. 상체를 숙여 얼굴을 맞댄 둘은 정말 자연스럽게 내가 보는 앞에서 입을 맞췄다.
"거 참."
괜히 오지랖을 부렸나 싶었다. 내 말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그들의 사랑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줘서 그런지, 부부가 내 앞에서 하는 행위는 점점 에스컬레이터를 타듯 그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확신이 들었다. 석하랑은 허윤환과 루살카의 딸이 확실하다고.
"그래도 사람 보는 앞에서 거기까지 하려는 건 조금 사양하지? 조금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인데."
"쯉, 하아. 이거 봐봐. 나랑 서방님은 그냥 사랑을 나누는 거라니까? 밥 먹을 시간이 어디있어? 사랑하기도 바쁜데. 흐흐."
"루살카, 네가 이해해라. 사랑을 모르는.... 아니, 그것도 아닌가."
광검은 막 샤워 가운을 벗으려다가 나를 보며 갑자기 핼쓱해졌다.
"너,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거지?"
"알고 있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그냥 아는 수준이 아니었어. 경험담이었지? 당장 말하렴."
"......해본 것만 얘기해 준 것 뿐이야. 그리고."
두 부부는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기에 진실을 말했다.
"아까전에 알려준 것들, 전부 석하랑이랑도 해본 체위-"
또 싸웠다.
다행히 망가지기전에 결계를 쳐서 건물이 파괴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