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1부 10장 5
백희아는 변장을 하고 신서울의 버스 터미널로 들어왔다.
협회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임무였으나, 흰 베레모에 제복을 차려입은 집행관 모습을 하고 터미널에 나타나면 큰 곤란을 겪을 것 같았다.
정계 최고 권력자의 외손녀이자, 협회 한국 지부의 실질적 2인자.
<집행관>이라는 이름값은 백희아 스스로 높인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시위대의 눈에 띄었다가는 시위가 겉잡을 수 없이 번질 수 있었다.
그래서 백희아를 위시한 협회의 히어로들은 일반인으로 변장해 터미널 곳곳에 잠입했다.
"거 히어로 복권 다섯 장 자동으로 주쇼."
점퍼 차림의 우사는 담뱃내를 풀풀 날리며 복권을 사고 있었고,
"어이고.... 나라꼴이 우예 돌아갈라고. 쯧즛. 하여튼 선가놈 꼬라지보고는. 쯧."
후줄근한 조끼를 입은 풍백은 의자에 걸터앉아 모니터에 나오는 선의철을 보고 혀를 차고 있었으며,
"강릉으로 가는 버스표 한 장 주시길 바랍니다."
군복 차림을 한 운사는 오지의 자대로 복귀하는 간부 행색을 하고 있었다.
히어로들은 정말로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고 있었고, 오히려 백희아만 어색하게 터미널 한 가운데서 쭈볏대고 있었다.
"......흐읏."
남들의 시선이 자꾸만 걸린다. 평소에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하던 화장도 여성스럽게 바꾸었고, 바지만 고수하던 옷차림도 나이대에 어울리는 스타일로 바꿨다.
"이런 걸 부끄러워서 어떻게 입고다니는 거야...?"
백희아는 허벅지 위에 끝자락이 걸린 미니스커트가 자꾸만 신경쓰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한 두번씩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백희아는 자꾸만 얼굴이 붉어졌다.
"......운사."
백희아는 귓구멍에 들어간 작은 무전기에 손을 올렸다. 운사는 곤란한 얼굴로 검지를 귀에 올렸다.
[예.]
"잠깐 손좀 씻고 올게요."
[알겠습니다. VIP가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손만 씻고 올 거예요."
백희아는 빠른 걸음으로 대합실을 떠나 여자화장실로 들어갔다. 반쯤 차있는 칸 중에서 가장 안 쪽, 비어있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걸어잠궜다.
"휴우."
백희아는 크게 숨을 골랐다. 아무리 변장이라고는 해도 미니스커트는 백희아에게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 아가씨는 리무진타고 올 것이지 왜 버스를 타고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이런 곤란을 겪게 만드는 거야?'
백희아는 워치를 들어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30분. 서울을 출발해 관악을 넘어 이곳까지 도착하게 될 예정 시각까지 앞으로 30분은 남아있었다.
'옷도 신경쓰이고....'
시위만 없었으면 다들 정복을 차려입고 터미널에서 청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위를 격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히어로들은 변장을 하여 터미널 승강장에서 청화를 맞이한 뒤 바로 준비된 차량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조금만 진정하고 다시 밖으로-'
[백희아.]
섬뜩한 목소리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미성이 백희아의 몸을 흔들었다.
"귀신?!"
[귀신일 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군.]
"......설마 당신."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있다. 그리고 중국에 가면서 북경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그런 자가 어째서 여기에?
[진정해라. 해를 끼치고자 온 것은 아니니.]
"당신이 해를 끼치려고 했으면 신서울은 불바다가 되었겠죠."
백희아는 대전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광검을 죽였던 빌런-피닉스는 삽시간에 신서울을 잿더미로 만들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
"......문 열어드릴테니까, 모습을 드러내세요."
[.......]
끼이익.
백희아는 걸어잠근 문을 열었고, 검은 갑주가 백희아가 서있던 칸 안으로 들어왔다.
철컥.
문이 다시 잠겼고, 검은 갑주의 빌런-피닉스는 백희아와 사람 한 명 정도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했다.
"무슨 의도로 이렇게 접근한 거죠?"
[무슨 생각으로 빌런을 이렇게 쉽게 접근시킨 거지?]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상, 문을 두고 얘기해봐야 아무 소용없잖아요."
[그것도 그렇군.]
피닉스는 손가락을 튕겼다. 백희아는 피닉스의 께름칙한 마력이 화장실 칸을 감싸는 걸 느꼈다. 극비 보고서에 읽었던 불꽃의 결계는 백희아를 가두었다.
[이걸로 좀 더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겠어.]
"편하게? 빌런을 앞에 두고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런. 이것도 불편한가. 그럼 어쩔 수 없지. 불편한대로 대화하지.]
피닉스는 상체를 숙여 백희아와 시선을 맞췄다. 독수리 머리 모양의 투구 사이로 빛나는 푸른 불꽃이 백희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흑사갈이 진짜로 괴수라고 생각하나?]
"당연하죠. 그건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괴수일 뿐이에요."
[그럼 왜 화권이 흑사갈의 젖을 흔드는 것에 과민반응했지?]
"...너무 적나라하게 얘기하지 말아주실래요?"
[......그럼 유방.]
"......."
[...가슴.]
"......."
[흉부.]
"크흠."
백희아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말을 이어나가겠다는 신호였고, 피닉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하나 뿐이에요. 나라의 에이스나 다름없는 이능력자가 우스운 꼴이 되는 걸 보기 싫었으니까."
[너도 화권을 좋아하나?]
"아뇨? 제가 그 사람을 왜 좋아해요? 저희 가문 괴롭히던 선가놈 조카인데."
[그럼 왜 중국에 갈 때 화권을 데리고 갔지?]
"궁금한 게 진짜 많으시네요."
백희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궁금한 게 많은 피닉스의 질문에 백희아는 당황하지 않고 집행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일 수 있었다.
"그 또한 히어로이기 때문이죠."
[과연. 집정관의 뒤를 이어받은 지휘관이라 이건가. 그러면 다음-]
"이제 제가 질문 하나 하죠?"
[......그래.]
피닉스는 말을 끊고 들어온 백희아에게 어서 해보라는 듯 손짓을 했고, 백희아는 정말로 궁금했던 것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광검은 왜 죽였어요? 선의철이 당신한테 뭘 잘못했길래 실각시켰고? 중국에는 왜 나타난 거예요? 설화령이랑은 무슨 관계죠? 혹시 밀월관계인가요?"
[죽일 이유가 있어서 죽였다. 방해가 되어서 실각시켰어. 중국에 갈 이유가 있었으니 그랬고, 설화령과는 불구대천의 원수다. 그런 원수지간을 감안하더라도 협력할 수 밖에 없는 공공의 적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해두지.]
"......설마 다 대답해줄 줄은."
[대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자세한 설명도 할 필요가 없고. 그럼 내 차례인가?]
피닉스가 손으로 벽을 짚으며 몸을 가까이했다. 백희아는 그의 몸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튈까봐 잠깐 겁에 질렸다. 도대체 무엇을 질문하려고 하는 걸까 싶었고, 그의 입에서 곧 나오게 될 질문이 결계까지 치며 밀담을 나눠야 할 본론임을 확신했다.
[유성의 차기 회장, 은재민과는 무슨 관계지?]
"......?"
[은재민과 사이가 돈독하다고 들었다만.]
"...저기요."
백희아는 도끼눈을 치켜떴다.
"그게 지금 여자화장실까지 들어와서 저를 가두고 할 질문이에요?"
[내가 또 궁금한 건 못참는 성격이라서.]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어쩌시게요? 사랑하는 사이라면?"
[.......]
피닉스는 침묵했다. 백희아는 피닉스의 당황에 콧방귀를 뀌며 피닉스를 슬쩍 밀어냈다. 하얀 손가락이 검은 갑주를 서서히 떨어뜨렸다.
"고작 그런 의도로 오신 거라면 유감이네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래. 그렇겠지.]
백희아의 이성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피닉스는 외려 여유를 부렸다. 상당히 깔보는 듯한 말투에 백희아는 심사가 뒤틀렸으나, 빌런을 상대하고 있는 만큼 최대한 진정하려 애를 썼다.
"......그래서 진짜 본론이 뭐예요?"
[본론? …...아아, 음. 그래. 그렇지.]
피닉스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허리를 숙여 위협하듯 내려보던 방금 전과는 달리, 피닉스는 벽에 미끄러지듯 기대며 백희아와 시선을 맞췄다.
"......."
백희아는 은글슬쩍 뒷꿈치를 들었다. 팔짱을 낀 피닉스의 여유로움에 자존심이 상하는 듯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손을 잡을 생각 없나?]
"네. 없어요."
[내가 말하는 의미가 뭔지 알고 있을텐데?]
"빌런과 손을 잡으라니 말도 안 돼요. 당신은 광검을 죽인 사람이에요. 설화령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몰라도, 저는 당신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아요. 당신은."
백희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체포해야할 악당일 뿐입니다."
[네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서울의 모든 인프라, 그건 모두 내가 재건한 거다. 서울의 부활을 위해서는 내 힘이 상당히 필요할텐데?]
"당신 덕분에 서울이 많이 복구되었다는 건 인정해요. 저도 듣는 귀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악행이 용납되는 건 아녜요. 당신은 광검을 죽였고, 옛 소나무 부대의 이능력자들을 학살했죠."
[죽을 만해서 죽었다면?]
"그렇다면 왜 법의 심판을 받게 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른 거죠?"
백희아는 피닉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제 의견을 따박따박 밝히며 맞받아쳤다. 피닉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내가 알고 있는대로 꽉 막힌 아가씨야. 혹시 주변에서 백꼰대라고 놀리지 않던가?]
"정론이잖아요? 꼰대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당신에게는 꼰대같은 존재가 되겠네요. 누구한테 이런 말을 들어보겠어요? 보아하니 자기 힘만 믿고 설치는 것 같은데, 그러다 나중에 크게 화를 입을 겁니다."
[잔소리까지 완벽해. 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군.]
"무슨 말이에요? 혹시 저 알아요?"
백희아는 피닉스의 말을 오해했다. 피닉스가 언급한 '옛날'의 진실에 대해 알지 못했고, 피닉스도 굳이 오해를 정정할 생각도 없었다.
[잘 알지. 밑가슴에 난 점 갯수까지.]
"......."
백희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악당의 노골적인 성희롱은 상당히 치욕스러웠으나, 당장 손짓 한 번으로 목을 뎅겅 날릴 수 있는 빌런 앞에서 거친 반항을 하기는 어려웠다.
"후우, 후으…."
백희아는 심호흡을 하며 분을 삭혔다. 피닉스는 갑주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화륵. 백희아의 시야는 푸른 불꽃으로 뒤덮였다.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줄 알고 마력을 일깨웠지만, 불꽃은 그저 자신을 따스하게 감쌀 뿐이었다.
"......?"
백희아는 자신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반지에 굳어버렸다.
"이건…?"
[흑사갈 소동을 봤더니 너무 앞에서 나대던 것 같다는 말이지.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선물이다. 나도 이왕이면 말이 통하는 아가씨와 동지가 되고 싶거든.]
"뇌물 안 받아요. 가져가요."
백희아는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바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검은 반지는 손가락에 고정이라도 된 것 마냥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네가 S급이라도 되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절대로 벗을 수 없다. 걱정마라. 절대로 나쁜 의도는 없어. 그 반지만 있으면 그 누가 와도 안전할 거다.]
"......저기요."
백희아는 벌게진 손을 들어올렸다.
"왜 이 손가락이에요?"
[......습관?]
"그쪽은 습관적으로 적에게 프로포즈하시나요?"
[......아무튼 협상은 결렬이군. 그쪽이 나와 협력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협력하게 만드는 수밖에.]
피닉스는 화제를 돌리고 결계를 해제했다. 백희아는 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나가는 피닉스의 뒷모습에 신고할 기력마저 사라졌다.
"도대체 저거 뭐야…?"
한국의 히어로 대표와 빌런 대표의 첫 만남은 신서울 버스 터미널의 여자화장실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 *
백희아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소감.
역시 히로인은 히로인, 집행관은 집행관이다 싶었다.
화장실에서 빌런이 습격을 하자마자 습격자의 정체를 파악한 뒤, 터미널의 히어로들을 모아도 승산이 없다는 걸 바로 깨닫고 내 의도를 읽으려했다.
내가 대화를 원한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바로 나를 문 안으로 끌어들이는 대담함까지 보이며 여유를 가장했다.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마력은 당황과 혼란과 공포가 뒤섞였지만, 적어도 백희아는 겉으로는 담담히 나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원작대로인가. 진심으로 은재민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유성을 끌어들여서 가문의 힘을 공고히 하려는 거다.'
그게 본론이었다. 은재민-은유하와 진짜로 썸을 타는 게 아닌지 궁금했다. 원작의 원숙한 모성을 가진 함장과는 달리, 5살이나 어린 지금의 백희아는 한창 연애에 관심이 많을 22살 아가씨였다.
'원작보다 꽉막히지는 않았지만 기질은 똑같아.'
백꼰대. 여러 모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백희아는 원작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보호기능 들어간 거 하나 쥐어 줬으니 이제 어디가서 다치지는 않겠지.'
나는 터미널의 옥상 난간에서 몸을 숨긴 채,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허."
버스 창문에서 나를 본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향해 화답하 듯 손을 흔들었다.
잠시 뒤.
신서울에 내린 청화는 집행관 백희아의 안내에 따라 협회로 가는 버스로 환승했다. 나는 그걸 터미널 옥상에서 내려다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6월 26일 오후 12시.
<비스트 테이머> 청화가 신서울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