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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201화 (201/1,497)

〈 201화 〉1부 10장 4

흑전갈 소동 이후, 전세계 히어로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만든 이슈 중 하나로 '흑사갈의 외형'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흑사갈의 외형을 두고 인간으로 봐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괴수로 봐야하는 것인가?

전세계 방송국의 중계 영상을 내려버린 흑사갈의 파괴력은 그 크기만큼이나 강대했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흑사갈의 흉부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몇몇 이들은 자신의 X로이드를 흑전갈처럼 개조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유성은 소비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새로운 모델을 판매하기를 바랐지만, 정부는 유성의 특허 신청을 빠르게 반려했다.

그리고 그 의사에는 집행관 백희아의 의사가 분명히 담겨있었다.

-괴수를 성적 대상으로 보게 만드는 저속한 물품이 대중에 노출되는 걸 보기 불편합니다. 흑사갈은 인간의 모습을 본뜬 괴수일 뿐입니다. 유성은 괴수를 성상품화하는 일을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백희아는 상당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유성은 어쩔 수 없이 소비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못했다.

-만약 유성에서 흑사갈을 본딴 X로이드들을 판매할 생각이라면 심심한 유감을 표하겠습니다.

백희아는 성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관념을 가진 여자였다. 그래서 백희아가 은유하와 썸을 탄다는 얘기는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레즈비언은 따로 있는데, 갑자기 백희아가 은유하와 썸을 탄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객님. 지금 엄청 당황하셨네요? 아하. 혹시 신부인가봐요? 백희아도 1/16인가요?"

"자세하게 말해보지? 썸이라는 게 내가 알고 있는 그건가?"

"...너무 당황하시니까 제가 갑자기 미안해지네요. 백희아 가문이 어떤 곳인지는 알죠?"

"알다마다."

백희아의 가문은 대대로 모계의 핏줄이 강한 가문이다. 선의철이 몰락하며 총리가 된 백세준은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며 스스로 성을 '백'으로 바꿔야 했을 정도로 여성의 지위가 높은 가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좋아하거나 하지는 않을텐데?"

"고객님. 당황하니까 생각이 엄청 단순해지시네요. 제가 여자가 아닐 수 있잖아요?"

"......아. 은재민이냐."

나는 시름을 놓았다. 은유하도 더는 장난칠 생각이 없는지, 은재민과 백희아의 관계를 밝혔다.

"백희아가 유성을 집어삼키려고 차기 회장으로 점쳐지는 은재민을 자기 치마폭에 넣으려 하는 거죠."

"과연. 너는 그걸 이용하려고 했군."

"끈은 많을수록 좋죠. 음, 백희아도 고객님 타깃일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하죠? 고객님이랑 한 여자를 두고 사랑 싸움을 할 생각은 없는데."

"나도 너와 그러고 싶지는 않아."

"다행이네요."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관계인 만큼, 우리는 서로의 이용가치를 최대한 활용하며 나아가야할 전략적 동반자의 관계다. 백희아에 관한 문제로 은유하와 유성을 잃는다면 내 계획은 상당한 애로사항이 펼쳐질 것이다.

"좋아요. 백희아는 제가 서울로 보내드릴게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대학 학부생으로? 그도 아니면 교수?"

"아니. 내 전용기 함장으로."

"......고객님?"

"비행기 계속 터지는 것도 불편하지 않나. 백희아가 모는 비행정만큼 안전한 것도 없지. 하나 빼고는 다 마음에 들어. 진짜 내 소유로 만들고 싶을 만큼."

은유하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유성에서 만든 비행정 아닌데요?"

"그래서 더 안전…. 미안."

"......."

하여튼 입이 웬수다.

***

<오전 9시 55분, 신서울 제 2구역 공원.>

-모처럼 오셨으니까, 신서울에 신부들 있으면 보고 가시는 게 어때요?

은유하의 가시돋힌 제안에 따라, 나는 모처럼 온 신서울의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휴식을 취했다. 백희아에 대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당장은 은유하에게서 건네받은 큐브에 대해 생각해야했다.

'이거 그냥 써버릴까.'

"단장님?"

어디에 사용했냐고 추궁은 조금 받겠지만, 감히 큐브를 소위 '먹튀'한 괘씸한 히로인에게 받아낼 건 받아내야했다. 아무리 호로관 메뚜기가 있다고 해도 언제 또 큐브를 얻을 지 모르는….

"단장님?"

벤치 옆에 앉은 흰 가운의 소녀가 안경을 튕겼다. 나는 고개를 슬쩍 하늘로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라 햇빛은 아주 쨍쨍하게 비쳤다.

"단장니이이임? 저 이걸로 다 보이는데요?"

"......또 뭘 개발한 거예요?"

나는 주변에 마력을 흩뿌려 보이지 않는 결계를 쳤다. 내 몸은 투명화가 되었으니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을테고, 평일 아침의 공원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연구 가운의 소녀-히메지 히카리는 안경을 까딱거리며 히히덕거렸다.

"스카우터죠! 이것만 있으면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요. 단장님 오셨다는 얘기 듣고 바로 뒤쫓아 왔죠. 히히."

히카리는 씻지도 않고 나온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안 잤어요?"

"자다가 일어났죠. 단장님. 저 큐브 연구하게 해주시면 안 돼요? 네?"

"끄응."

연구야 마음껏 시켜줄 수 있다. 내가 마력으로 조치를 하면 큐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러면 창염과의 만남이 더 뒤로 미뤄지게 된다.

당장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히카리에게 대여하여 연구를 시킬 것인가. 답은 간단했다.

"안 돼요."

"왜요?"

"써야할 곳이 있어요."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실지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시겠어요? 큐브를 조금만 더 연구하면 획기적인 발명품이 나올 것 같은데요. 단장님께서 요구하신 마력 검사기라던가, 마력 검사기라던가, 마력 검사기라던다."

"지금 단장을 상대로 협박하는 거예요?"

"에이, 하늘같은 분을 상대로 제가 어떻게 그래요? 저는 단지."

히카리가 침울한 얼굴로 가운 끝을 만지작거렸다.

"큐브를 연구하지 않으면 조금 의욕이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느낌?"

"자요."

나는 큐브를 히카리에게 집어던졌다. 히카리는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큐브를 낚아챘다.

"단장님?!"

"알아서 잘 연구해봐요. 폭주할 수 없게 해놨으니까 마음껏."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로 했다. 내가 비록 창염만을 바라보는 사람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큐브 하나를 먹어놓고 이야기만 하다가 쏙 들어간 건 창염이 나빴다.

"고마워요!"

히카리가 방방뛰며 나를 끌어안았다. 가운에 스며들어있는 진한 컵라면 냄새에 나는 아찔해져서 히카리를 멀찍이 밀어냈다.

"또 컵라면으로 밥 때웠어요?"

"아뇨!"

히카리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자랑스레 말했다.

"봉지라면이요!"

"......은유하가 뭐라고 안 해요?"

"음."

히카리는 흘러내린 안경을 살짝 들어올렸다.

"규칙적인 식습관을 들여야 고르게 발달한다고 하시긴 했는데…."

"누가 누구한테 식습관 지적을. 식사보다 커피를 더 많이 마시는 사람이니 귀담아 듣지 마요. 라면 백날 먹어봤자, 당신은 살 안찔테니까."

"진짜요? 근거는요?"

"당신 오빠."

히카리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지금 단장님도 오빠가 저보다 예쁘다고 저를 구박하는 건가요? 그런 거죠? 예?"

"설마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

나는 히카리의 연구 가운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돈해주며 부탁했다.

"오빠가 오빠일 때 잘 해줘요. 알겠죠?"

"......??"

미성년자에게 더이상의 설명은 할 수 없었다. 나는 히카리에게 큐브를 양도하고 공원을 떠났다. 아쉽게도 신서울에 살고 있을 히로인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은 그냥 지나가다가 사람이랑 부딪히기만 해도 히로인이던데. 나는 공원을 빠져나와 신서울의 인도를 걸어 목적지로 움직였다.

"사람 많네."

내가 도착한 곳은 신서울의 종합버스터미널. 그곳에는 푸른 머리띠를 두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광장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백세준은 서울로 올라가는 노선을 확충하라!"

"""확충하라! 확충하라!!"""

눈으로 세어도 기백은 넘어보이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푸른 머리띠를 한 시위대의 옆, 하얀 머리띠를 한 시위대들이 함성을 질렀다.

"백세준은 부산으로 내려가는 노선을 확충하라!"

""확충하라! 확충하라!!"""

"쯧."

시위대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나는 시끄러운 시위대를 피해 골목길로 빠졌다.

"하여튼 이기적인 사람들."

서울과 부산이 안전해짐에따라 신서울을 버리고 떠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시위였다. 그리고 시위대의 간부로 보이는 이들 중에는 내게도 낯이 익은 얼굴이 하나 보였다.

'외국인이네.'

전형적인 한국인 모습이지만 외국인이다. 국적을 버리고 외국에 갔던 자들 몇몇이 시위대의 틈바구니에 섞여 대중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목소리에 마력까지 실어 사람들을 현혹시키다 은근슬쩍 사람들 사이로 흩어졌다.

'따로 빠져나간다?'

나는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머리띠를 풀어낸 외국인들은 카페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 처럼 꾸몄고, 나는 실내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은 카페에서 미리 앉아있던 이들과 접선했다.

'접선'이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질 정도로, 그들의 만남은 은밀했다. 적어도 소개팅을 하거나 친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자리는 절대 아니었다.

"쯧."

야외가 아닌 실내-그것도 안쪽 자리로 가는 바람에 가까이는 가지 못했다. 대신 야외 테라스의 자리는 햇빛이 잘 들어, 나는 빈자리에 앉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하는 거야? 귀찮아 죽겠는데."

"야. 서울에 놔두고 떠난 집 되찾아야지. 너 종로에 있는 상가들 눈뜨고 빼앗길 셈이냐? 마침 아...뭐시기가 다 복구했잖아?"

'아하.'

나는 그들의 의도를 깨달았다. 저들은 지금 법에 의해 몰수당한 자신들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여론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총리 선의철 옆에서 알랑방귀나 뀌던 놈이라며? 그럼 더 쉽겠네. 너도 나도 서울에 부동산 잃어버린 사람들 아니냐."

"뭔 소리야. 나는 신서울로 내려온 거고, 너희들은 외국으로 도망쳤잖아."

"그거나 그거나. 그래서 지금 서울에 네 땅 누구 거? 청화단인가 뭔가하는 빌런 놈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 모르냐?"

'과연. 복구된 인프라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놈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건가.'

예상했던 충돌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울을 재건한 건 청화단과 난민들이었지만, 서울의 각종 부동산에 대한 법적 소유권은 아직 원 주인들에게 대부분 남아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 아지트도 불법으로 점거한 거나 마찬가지긴 하지.'

아키택트의 이능력이 '건물 복구'에 가깝다보니 빚어지는 문제였다. 차라리 폐허가 된 땅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면 모르겠으나, 서울을 떠나기 전의 형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건물들이 들어서니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인 놈들은 거기에 편승해서 자기들 재산도 되찾으려 하는 거고.'

청화단이 아무리 서울을 복구했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빌런 조직이다. 법적으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서울을 떠나 위로 올라가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괴수가 드글대는 북녘으로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

'또 큐브 쓰게 생겼네.'

서울의 인프라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날 생각은 없다.

"히드라 빨리 잡아야겠네요."

'땅문제에는 지속성 정령만큼 가장 정통한 자가 없지.'

안타깝게도 소재를 파악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나는 지속성의 간부이자 정령, <지륜의 히드라>에 대한 문제와 그를 통해 해결할 부동산 논쟁은 추후에 해결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으니까.'

"원탁들도 지금 한국 주시하고 있다니까? 쭉쩡이나 다름없는 오라클만 신서울에서 죽치고 있고, 운디네나 군신은 지금 서울에 있잖아."

"석하랑 그 년은 부산에서 움직이지를 않지. 그럼 신서울에 남는 건 누가 있어? 생각해봐."

외국인들이 카페 벽에 걸린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금발의 미중년-원탁의 우두머리인 <가웨인 경>이 공식 발표를 위해 연단에 오르고 있었다.

"왜 원탁이 신서울도 아니고 서울에 모이겠어. 안 그래?"

가웨인은 원탁을 소집했다.

신서울이 아닌 서울에.

'그게 루살카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유지.'

루살카 뿐만 아니다. 군신 샤오린, 질풍객 하야테도 현재 서울에 머무르고 있다.

"크, 청화라는 그 년. 이능력 하나는 진짜 대단하다는 말이야."

"너는 어디로 갈 것 같냐? 미국? 아니면 네 나라인 인도?"

"모르지. 사람들 구하는데 미친 거렁뱅이 생각을 어떻게 알겠냐?"

"......."

살짝 심사가 뒤틀렸다. 원탁이 모이는 회의 주제 상 내가 언급이 안 될 수가 없었지만, 청화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저들의 말이 상당히 아니꼬왔다.

'얼굴 기억해둬야지.'

언젠가 서울에서 크게 경을 치를 일이 있을 것이다. 나는 자리를 떠나 다시 원래의 목적지인 터미널로 돌아갔다.

"확충하라! 확충하라!"

여전히 사람들은 노선을 늘리기를 바라고 있었고, 시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피해 터미널 지붕에 뛰어올라 난간 위에 올라섰다.

'버스 올 때 까지 기다려야지.'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버스. 원래는 '청화'가 타고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시간이 아까워 아침부터 급히 내려와 용건을 마쳤다.

"어?"

낯이 익은, 그리고 반가운 얼굴이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잽싸게 터미널 안으로 숨어들었다.

'쟤가 이 시간에 여기에 나타날 줄은.'

역시 존재감을 지우고 버티니까 하나는 나오는 구나. 나는 군중 속에 어색하게 숨은 검은 단발의 여인을 보며 절로 미소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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