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200화 (200/1,497)

〈 200화 〉1부 10장 3

신서울.

선의철의 몰락 이후 신서울은 매일매일 폭락을 반복하는 주가마냥 여론이 들끓었다.

그 폭발하기 직전의 열기에 차디찬 냉수를 쏟아 폭발을 잠재운 원동력은 중국에서 있었던 히어로들의 활약이었다.

SS급인 설화령은 그 위용을 전세계에 떨쳤으며, 화권을 비롯한 많은 히어로들이 조 단위가 넘는 코어를 벌어왔다.

흑전갈 소동 덕분에 청화가 벌어온 코어 두 개는 상대적으로 빛을 바랬으나, 청화는 중국의 핵심적인 인재를 빼내오는데 성공했다.

군신 샤오린. 두 번째 SS급 이능력자.

여전히 국적은 중국이고 소속은 원탁이었으나, 샤오린은 청화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서울까지 따라왔다.

선의철의 몰락 이후 한국은 이상하리만큼 호재가 잇따르기 시작했다.

신서울은 그야말로 축제의 도가니였다.

* * *

<오전 7시 27분, 신서울 유성일가 저택.>

"그래서 신서울까지 오신 이유가 뭐예요? 설마 아침부터 제 얼굴보러 오신 건 아닐테고."

"겸사겸사죠. 오랜만이에요, 백 사장님."

"...사장도 아닌데 사장이라고 하시면 제가 곤란합니다만."

백상우는 땀을 삐질 흘리며 은유하의 눈치를 봤다. 백상우는 나와 은유하를 연결시켜준 공로가 있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사장이라는 자리는 얻지 못했다.

"왜요? 블랙마켓 공식적으로 뜨기 시작하면 사장으로 내세울 거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만 아직 그럴 때가 아니네요. 백상우 씨 아직 사장 아녜요. 고객님께서 벌이신 일이 어디 한 두가지여야죠."

은유하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문지르며 투정을 부렸다.

중국에서 벌어온 코어들의 가치에 기쁨의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이 과도한 노동의 스트레스로 인한 절규로 바뀌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종도 호텔 건축, 인천대교 재건, 서울에 보낼 각종 기자재들 확보, 협회를 통한 코어 구매, 구입한 코어의 활용. 정말 몸이 일곱 개라도 모자란 지경입니다. 아세요?"

"몸이야 일곱 개 잖아요."

은유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신경질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장난해요? 인형들까지 24시간 돌리고 있는데도 계속 일이 쌓이니까 그러죠. 고객님이 중국 떠나기 전에 저한테 주신 일 기억해요?"

"물론. 그것 때문에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왔잖죠."

나는 은유하가 내 앞에 내민 계획서를 살폈다.

내가 중국에 있는 동안 은유하에게 보낸 청화단의 두 간부, <하늘성> 류천성과 <아키택트> 제임스 리는 은유하와 논의를 통해 거대 아카데미를 만드는 계획의 끝맺음을 지었다.

"대학...?"

"예. 아카데미라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대학교로 가는 거죠. 이능력자들을 위한 대학."

"어차피 대학 부지에다 짓는 거니까 대학이면 좋기는 하죠. 그런데."

나는 계획서에 X자로 붉은 빗금이 쳐진 곳을 지적했다.

"'청화대학교'는 왜 기각이죠?"

"당신 이름을 따는 건 좋은데, 어감상 많이 걸리지 않아요?"

"...그럼 어쩔 수 없고."

은유하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다. 나는 아쉬움에 절로 목이 타들어갔다.

"그래서 다른 이름은?"

"아직 미정이에요. 어차피 시작하려면 한 달은 넘게남았으니까, 이름 정도야 차근차근 생각해도 되잖아요? 고객님이 제일 신경쓰는게 이거잖아요."

은유하는 표정없이 내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분명 은유하는 광속성 이능력자인데 어쩐지 냉기가 풀풀 휘날렸다.

"신입생 모집요강."

"......백 사장님. 잠깐 자리 좀 비워주실래요?"

나는 백상우에게 양해를 구했고, 나와 은유하 사이의 심상찮은 기류를 감지한 백상우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넌 너무 머리가 좋아서 탈이야."

백상우가 나가자마자 나는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은유하도 가타부타 하지않고 정곡을 찔러왔다.

"신입생 모집요강? 그냥 '아내를 찾습니다'로 바꾸시는 게 어떠세요?"

"...너 왠지 이 얘기를 할 때면 조금 까탈스러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럼 안 까탈스러워요?"

은유하가 의자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치며 내게 시위했다.

"S급 코어 십 수개, 아니 그 따위 것을 넘어서 이런 걸 맡기신 분이 지금 저 말고 다른 여자한테 눈독을 들이고 계신데!"

은유하는 테이블 위에 각설탕 크기의 물건을 내려놓으며 으르렁거렸다.

"......32개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32개 중의 하나라도 그렇죠! 고객님이랑 앞으로 영원히 나아가면 이런 보물이 앞으로 서른 개 가까이 들어온단 얘기잖아요! 이런 걸 어떻게 가치를 메겨요!"

은유하는 큐브의 경제적 가치를 헤아리는 걸 포기했다.

"고객님이랑 큐브만 있으면 세계 정복, 아니 우주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따라 텐션이 높군. 그래. 큐브의 가치는 무한대에 가깝지. 그럼 짜증을 부릴 게 아니라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

"그런 고객님이!"

은유하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상체를 내게 쭉 뻗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은유하의 눈에는 미약한 광기까지 엿보였다.

"자꾸 다른 여자들 만들어서 제 지분이 낮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어요!"

"내 마음이 주식이냐?"

"주식이에요?! 주당 얼만데요?! 당장 파세요! 웃돈 얼마든 다 사버릴 테니까!"

정말로 돈욕심이 과한 여자다. 행여나 내가 벌어다 주는 금전적 가치가 다른 이에게 향할까봐 걱정이 되어, 흥분해 집착까지 보일 정도로 나를 압박하고 있다.

원작 속 은유하는 이보다 더 감정 조절을 잘 하지만, 은유하는 은유하였다.

"걱정마라.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나는 너와 끝까지 간다."

"그건 비즈니스적인 의미죠? 그렇죠?"

"그렇지."

"쓰레기, 진짜."

"......왜 가는 곳마다 쓰레기라고 소리를 듣는지. 원."

은유하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엄지로 은유하의 눈밑을 슥 쓸어낸 뒤, 은유하의 등을 다독이며 그를 진정시켰다.

"걱정마라. 나는 누구 차별하지 않아. 정확히 6.25%만큼 똑같이 대해줄 거다."

"...16? 고객님, 저 16명 중에 한 명이었어요?"

"그래."

"제 인형술사 이능력 생각해서 제가 7/16이라는 미래는?"

"그런 미래는 없어. 딱 1/16이다."

3P나 4P씬이 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이벤트일 뿐이지, 원작에서 개별 루트를 타는 순간부터는 한 명만 끝까지 바라보고 가는 엔딩으로 직결된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니까 확실히 얘기하지. 나는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는 박애주의자다. 누구를 편애하지 않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짜인데."

"됐어요. 흥, 당신 속에 있는 내 지분 100%로 만들면 되니까."

과연 경제적 세계 정복을 꿈꾸는 여자 답다. 내 마음을 돈으로 살 수 있었다면, 아마 은유하는 지금쯤 유성 전체를 매각해서라도 사려고 들었을 것이다.

"저런. 안타깝군."

"왜요?"

"대주주께서 지분을 파실 생각이 없으셔서."

"......비상장이에요?"

은유하는 아연실색했고, 나는 쓰게 웃었다.

"아니."

"그러면요?"

"대주주님이 99% 가지고 계시거든."

"99%? 잠깐만요. 방금 전에는 6.25%라면서요?"

"아. 정정하지."

나는 검지를 들었다.

"1%의 6.25%다. 네 지분은 0.0625야."

"......."

은유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분....1%라도...! 얻으면 봅시다...!"

그 조금이라도 욕심을 내는게 참 은유하답다고 생각했다.

"어디 한 번...두고 보자고요!"

"아."

거의 울렸다.

* * *

피닉스가 은유하를 상대로 진땀을 빼고 있을 그 시각.

둘의 담화에서 빠져나온 백상우는 은유하가 지시한 일을 처리하느라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예, 가구는 당연히 그쪽으로 해야죠. 거기에 들어가있는 유성 지분이 얼마인데. 전부 다 코어 공정 들어간 제품들로 하세요. 예. 그렇게 하시고. 시설팀 연결해서 우리 쪽에서 뺄 수 있는 사람들 찾아봐요. 기술자들이 서울 잘 안올라가려 하잖아. 최대한 유성 사람들로. 알겠죠?"

백상우가 지시받은 업무는 이능력자 양성 아카데미의 실질적인 준비였다. 건물은 아주 빠르게 지어진다해도 그 안에 들어가는 설비나 가구는 수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백상우는 적어도 두 달 안에 아카데미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준비해야했다.

"이게 뭔 개고생이람."

예전에 비해 하는 일은 엄청 많아졌다. 잠깐 눈 붙일 새도 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백상우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래도 짤리는 것 보다는 낫지.'

백상우는 급한 일거리를 끝내고 벽에 기대 호흡을 골랐다. 새벽의 일과는 끝이 났으니, 이제 백상우에게는 하루 종일 해야할 새로운 일이 남아 있었다.

"내가 스카우터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백상우는 대학에 들어갈 신입생들을 찾으러 다녀야했다.

"그런데...."

그는 다시 한 번 더 문제의 '신입생 모집 요강'을 살폈다. 대학이라는 이름이 가진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대학의 신입생 조건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이능력의 재능."

재능만 있다면 누구든지 입학이 가능하다. 그것이 청화-피닉스가 내세운 입학 조건이었다.

"......역시 이승형이 제일이려나?"

아쉽게도 그는 피닉스의 복잡한 관계 까지는 전해듣지 못했다.

* * *

은유하가 간신히 진정해 이성을 되찾은 뒤.

우리는 큐브의 용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저는 못 쓰겠어요."

"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물건 같거든요."

은유하는 큐브에 대해 상당히 께름칙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엄청난 가치를 가진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큐브가 가진 리스크에 대해 경계하는 태도였다.

"사용할 수 있는 곳은 많지만, 쉽사리 사용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런가."

갑자기 뜨끔했다.

"행여나 큐브의 존재를 저희 말고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선의철도 강소연도 결국은 큐브의 망집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된 거 잖아요? 저는 싫어요, 그렇게 몰락하는 거. 막말로 제가 큐브에 홀리게 된다면 고객님은 어떻게 하겠어요?"

"죽이겠지."

"봐봐요. 그러니까 저는 이거 안 쓸래요."

그게 은유하가 큐브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결국 나는 은유하에게 큐브 대신 다른 가치 있는 것을 제시하기로 하고, 은유하는 금방 대답했다.

"그럼 고객님 마음."

"안 돼."

"칫. 그러면 다른 걸로 할게요."

은유하는 계획서를 들어올렸다.

"저 여기 이사장 할래요."

"예?"

"갑자기 왠 존대? 뭘 그렇게 놀라요?"

은유하는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비웃었다.

"망나니가 깽판 좀 치겠다는데 불만있어요?"

"잠깐만, 잠깐만. 너 설마 네가 직접 이사장을 하겠다는 건가? 은하수 회장이나 은재민이 아니라?"

"예. 유하대학교 어때요? 이름 깔끔하고 좋은데요."

"......이사장이 되려는 이유가 뭐야?"

이건 원작 기출 범위에서도 벗어난 사태다. 나는 은유하의 속내를 읽어야했고, 은유하는 아주 침착한 태도로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마력을 읽어서는 도저히 그 속내를 알아챌 수 없었다.

"별 거 있어요?"

은유하는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객님이 키우는 인재들, 제가 다 낼름 먹으려고 하는 거죠."

"유성 그룹에서 채용한다는 얘기지?"

"그럼요. 누구처럼 신부 모집 하려고 학교 세우는 줄 알아요?"

"......."

계속 내 속을 살살 긁고 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렇군."

그래서 솔직하게 대하기로 했다.

"그러면 내가 신서울 돌아다니면서 직접 영업을 할까."

"그룹의 사원으로 만들겠다는 확약 받으시면 저도 신경써드릴게요. 그래서 누구누구 있어요?"

은유하는 손을 들어올려 하나 둘 헤아리기 시작했다.

"저, 천가을, 석하랑, 샤오린, 거기에...."

"......."

손가락이 하나하나 접힐 때마다 나는 목이 타들어갔다. 내가 앉은 의자에서 가시가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히카리, 이유나. 그리고 천가을한테 들었어요. 환룡이라고 하던가? 그 환속성 정령."

은유하가 눈을 반짝였다.

"왜 광속성 정령은 안 잡아와요?"

"어디있는지 모르는데."

이게 바가지 긁히는 기분인가. 하지만 나는 진짜로 광속성 정령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걔는 떠돌이야. 어디 한 곳에 있지를 못하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꼬셔서 아내로 만드셨을까?"

"왜 아내인게 기정사실이지?"

"흐름상 정령들 고객님이 다 꼬신 거 아녜요?"

은유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짚어냈다. 나는 평정을 가장하며 요거트를 한입 크게 삼켰다.

"정령은 그렇다치고, 사람이라면 고객님이 원하시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아볼게요. 뭐 알아서 해코지 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제가 미쳤다고 고객님같은 분을 적으로 만들겠어요?"

"그런가."

라고는 하지만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보험삼아 은유하가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 존재를 언급했다.

"그러면 이 아가씨, 서울로 보내줄 수 있나?"

"누구...어머."

내가 꺼낸 프로필을 보고 은유하의 눈에 당황이 깃들었다.

"희아랑 저랑 썸타는 사이인데."

"어?"

나는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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