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1부 10장 2
세계 최초의 EX 등급 이능력자, <비스트 테이머> 청화는 낮에는 활동 자체를 하지 않는 야행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있었던 공식적인 활동을 제외하면, 서울에서 청화가 발견되는 때는 거의 대부분 해가 떨어진 저녁부터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간혹 낮에 보일 때가 있다면 그 때는 딸기 음료를 입에 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사람들은 청화의 습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나, 정작 청화가 낮에 무엇을 하는 지 전혀 알지 못했다.
-밤에 움직이니까 자고 있는게 아닐까?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 날.
마력까지 동원해 햇빛에 숨겨 한반도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으이라고는.
* * *
<아침 5시 57분, 영종도 옛 공항 터 인근.>
"그때 나한테 토하던 아가씨가 이런 대단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저도 어르신께서 이렇게 개방적인 분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요."
내가 서해에서 미사일을 맞고 서해무기에게 먹혔던 그 날, 나를 도와줬던 박 노인은 영종도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나는 교복을 빌렸던 은혜를 갚을 겸, 그에게 새로운 터를 마련해줬다.
"아가씨 덕분에 건물주가 돼버렸구만. 허허,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은혜는 갚아야죠. 차비 2만원 고마웠어요."
"...끄응, 알고 있었구만."
박 노인은 쑥쓰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나는 그에게 옛 공항 터 바로 앞에 세워진 높은 호텔 건물을 가리켰다.
"어때요? 2만원이 20층짜리 호텔로 바뀐 소감은?"
"엄청 부담스러운데. 이게 은혜를 갚는 게냐? 부담을 지워서 노인을 부려먹으려 하는 게지."
"에이, 그냥 해수욕장 청소하시기만 하시면 적적하시잖아요. 어르신은 그냥 여관 주인 됐다고 생각하시고 지내시면 돼요. 일이야 저것들이 다 할테니까."
나는 청화단의 제복을 입은 이들을 가리켰다. 호텔리어 복장을 입은 그들은 하나같이 헬멧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정정.
얼굴을 가린게 아니라 얼굴-머리가 없다. 머리는 염장이 되어 전직 대통령 선의철에게 보내졌고, 머리가 다시 돋아나려면 한 단계 높은 경지로 올라야했으니까.
"마음껏 부려먹으세요. 쟤들도 X로이드들도 다 어르신 밑에 딸린 직원들이니까."
"거 참."
박 노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간판을 올려다봤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유성호텔 지점장이 될 줄은."
"그게 다 사람 잘 만나서 그런 거예요. 푸흐흐."
그 뒤에 이어진 인연은 최악이었지만, 적어도 박 노인은 내게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괴수 걱정은 하지 마시고. 쟤들 다 이능력자구요, 여기 쟤들 부리는 대장도 있으니까."
나는 정장을 차려입은 서해무기의 등을 탕탕 두드렸다. 다른 괴인들과는 달리 진짜 괴인의 머리를 한 서해무기는 놀랍게도 당당히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거 젊은 친구가 취향 참 특이하구만."
"유성 특제 핼멧이에요. 오더메이드죠."
"끙. 안타깝군, 괴수랑 싸우다 얼굴이 갈려버렸다니."
속세에서 많이 떨어져 초연한 삶을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박 노인은 괴인에 대한 내 궁색한 변명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젊은이가 딱하군. 안 됐어."
"괜찮습니다."
서해무기는 담담히 웃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착잡할 따름이었으나, 서해무기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밝히고 싶어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 살아있었으면 말이야, 어? 딱 자네만 하겠.... 으허허! 미안하네, 젊은이! 내 아들놈보다 자네가 훨씬 더 잘생겼어! 크흐흐."
"......."
서해무기는 침묵했다. 나는 우울해지려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호텔의 북쪽에 넓게 펼쳐진 공항 터미널을 가리켰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와서 저것도 복구시킬 거예요. 그러면 진짜 인천 공항이 부활하겠죠?"
"이능력이란 거 정말 신기하구만. 마력만 있으면 이런 건물도 뚝딱 복구하고 말이야."
"...간판만 새로 박았지만요."
나는 알고 있다. 사실 저 간판은 원래 유성의 것이 아니라는 걸. 돈귀신 하나가 자기 몫의 코어를 희생해 여러 호텔들을 복구하면서 간판만 새로 만들어 유성의 것으로 박아버렸다.
"......세 달 정도 걸리겠지만, 영종도의 인프라는 금방 복구될 거예요. 이 호텔도 그 때부터 요긴하게 사용되겠죠."
"히야, 자네 정말 대단한 아가씨구만. 크, 내가 10년, 아니 1년만 젊었어도 어떻게든 해봤을텐데."
"왜 1년이에요?"
"1년 전부터 잘 안 서더라고! 흐허허! 아, 요즘 이런 말 하면 잡혀가는감?"
"됐어요. 그리고 어르신이 저 어떻게 해보려고 했으면...."
나는 손날을 세워 목을 슥 그었다.
"지구가 멸망했을 걸요? 푸흐흐."
"......농담 참 살벌하게 하는 군. 허허."
과연 농담일까.
아.
호텔은 아키택트가 10분만에 복구했다.
* * *
<아침 6시 36분, 인천대교 위.>
영종도가 한 눈에 보인다. 나는 주탑의 위에 올라서서 지평선 위로 떠오른 태양을 맞이했다. 언제나 그렇듯, 태양을 향한 포즈는 단 하나 뿐이었다.
"그 요상한 포즈는 안 하면 안 되냐?"
"함께하십시오, 부하 2호."
"명령을 여기서, 으아악!"
바위괴인 조덕배는 입으로는 질색을 했지만, 내 명령에 따라 태양을 마주보고 양팔을 사선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조덕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지만, 햇빛은 그의 매끈한 머리를 선명히 밝히고 있었다.
"여기서 맞이하는 아침햇살도 좋네요."
"젠장...."
조덕배는 주탑위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이제는 높은 곳에 익숙해졌는지, 200m를 훌쩍 넘는 주탑의 위에서도 편안한 자세로 앉아 캔음료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나도 편의점에서 사온 딸기우유의 입구를 열었다.
"영종도 부활시켜서 어쩔 생각이냐?"
인프라 대부분이 괴수에 의해 파괴된 영종도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다리까지 폭파되었으니 영종도는 진짜 섬이 되었고, 서해무기가 청소를 했다고는 하나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니었다.
"영종도라기보다는 공항 인프라를 다시 부활시키는 거죠. 서울에서 김해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여기서 바로 비행정타고 외국으로 돌아다닐 수 있게."
"이제는 공항까지 먹으려 하네. 잠깐만, 비행정?"
"예. 비행정."
나는 손목에 찬 검은 밴드를 검지로 문질렀다. 유리같은 재질의 표면에서 마력 반응이 일어나 내 앞에 넓은 홀로그램 스크린을 띄웠고, 나는 그 스크린을 눌러 영종도의 위성 사진을 전방에 펼쳤다.
"오, 대박. 그게 그거냐?"
"네. 마도기어 프로토타입."
연구에 미친 천재 과학자에게 예산과 시설과 재료가 무한정 투입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까. 히메지 히카리는 막대한 재료에 비명을 지르며 밤샘 철야로 연구를 시작했고, 결국 자신이 머리속으로만 구상하던 희대의 아이템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우와. 이건 진짜...."
덕배는 내 손목에 찬 마도기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검은 코팅이 손목 전체를 감싸는 디자인은 프로토타입 치고는 내가 봐도 심미성이 있었다.
"나도 하나 만들어주라. 어?"
"양산형이 아니라서 안 돼요. 이거 하나에 S급 흑전갈이 한 마리 통째로 들어간 걸요."
"뭐? 미친."
"네. 미쳤죠. 제작 비용도 미쳤고 성능도 미쳤고."
원작에서도 후반부에나 나올법한 온갖 기능들이 1cm 너비만한 손목장식에 전부 들어가있다. 스마트폰의 평면 화면을 허공에 투사하는 수준의 스마트 워치와는 달리, 마도기어는 영종도 전체를 조감하는 3D 홀로그램 화면은 한 차원 높은 기술력을 보이고 있었다.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뒤면 양산형이 나올 거예요. 그 때 청화단 전체에 나눠줄 거니까 기다리세요."
"끄응."
덕배는 계속 내 손목과 홀로그램을 번갈아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히카리가 이 마도기어를 만들고 쉬겠다며 연구실을 나가버렸으니 강제로 만들라고 재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제 저 넓은 영종도 땅을 백나로 호의 전용 활주로로 쓰려합니다."
"그리고 너는 그걸 타고 외국 돌아다니고?"
"네. 다른 거 탔다가 또 비행기 터질 것 같아서."
내가 탄 상태로 비행기가 터진 건 아니지만, 외국에 나갈 때마다 비행기가 하이잭을 당한다거나 폭발하거나 하면 은유하를 볼 면목이 없다. 은유하는 투자의 리스크는 감수하더라도 손해에 상당히 민감한 투자자였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비행정을 전용기로 삼는 거죠."
"중국에서 올 때 그거 타고 온 이유가 있었구만. 그런데 그게 진짜로 안전해?"
"네. 이능력의 힘으로 움직이는 거니까요."
나는 마도기어에서 프로필 하나를 꺼냈다. 흰 베레모에 검은 단발을 한 차가운 인상의 여인, <집행관> 백희아에 대한 신상명세였다.
"백희아는 전장 지휘관이기도 하지만, 이능력이 아주 특이하죠. '타는 것'과 동기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뭐...자전거나 자동차 같은 거?"
"예. 이능력 등급이 올라갈수록 제어가능한 탈 것의 카데고리가 확장되는 거죠."
"와. 그러면 쟤는 면허 딸 필요 없겠네?"
"......."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덕배의 심심한 감상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부하 2호. 당신은 집행관의 이능력이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대해 고작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어요? 참 상상력이 부족하네요."
"조금 울컥하기는 한데, 그러면 그 대단한 상상력으로 무슨 발상을 하고 있는 거냐?"
나는 손가락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우주 여행 좋아해요?"
"해본 적도 없는데 무...."
덕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상력은 빈약해도 이해력은 뛰어난 만큼, 내가 말한 아주 작은 단서 만으로도 덕배는 정답을 유추해냈다.
"우주선만 있으면 우주 여행 하는 거냐?"
"그쵸. 대신 마력이 연료라서 마력 다 닳으면 우주 미아가 되겠지만."
"굉장하네. 네가 일부러 한국 돌아올 때 비행정 타고 온 이유가...아."
덕배가 새끼손가락만 들고 능글맞게 웃었다.
"쟤는 몇 번째냐?"
"10번째요."
"...미친?!"
덕배가 몸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소리가 워낙에 커서 사장교로 이어진 케이블이 흔들릴 정도였다.
"전 여친이 10명이나 된다고?!"
"아뇨."
나는 덕배의 말을 정정했다.
"16명인데요."
"야 이 ㅅㅂ□ㅇ!!"
덕배는 아주 시원하게 욕을 내뱉었지만, 여전히 욕설을 하지 말라는 필터링은 제대로 걸렸다. B급으로 진화해서 슬슬 어떤 욕을 하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그럴 수도 있지."
"그냥 전 여친 수준이 아니잖아! 천가을한테 대충 썰 들어보니까 거의 인생 반려 수준이더구만! 은유하랑은 애도 7쌍둥이 낳았다며?!"
"......조덕배."
나는 목을 가다듬고 그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에 있을 가능성이 이야기다. 지금은 아니지. 그렇지 않나?"
"이 쓰레기 새끼."
"......필터링 어디갔지?"
덕배는 나를 오물 바라보듯 보고 있었고, 나는 다시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오해하지 마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니까. 그냥 제 뇌내 망상이라고 생각하세요. 알겠죠? 피닉스 머릿속 10번째 부인은 백희아. 뭐 그런거죠."
"허어, 허. 그래.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라. 16명이든 17명이든 마음대로 다리 뻗다가 배에 칼빵 찔려도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알아서 잘 할게요. 당신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랬으면 제가 그 날 당신 죽였겠어요?"
"그건 그렇네. 어휴, 다행이다."
덕배는 가슴을 두드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덕배와의 만남은 최악의 인연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덕배가 도움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D급 코어 하나로 이렇게까지 뽕을 뽑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는데."
"그러면 활동비 좀 높여주던가. 어? 나도 나름 청화단 간부인데 언제까지 김지화 눈치 보면서 돈 써야하냐?"
"돈 별로 쓰지도 않으면서 무슨. 좋아요."
나는 덕배를 향해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당신 몸값을 연봉으로 쳐드릴게요. 연봉 3천. 좋죠?"
"이.... 지들은 억 단위 조 단위로 놀고있으면서...! 장난하냐!"
"뭐래요. 불만있으면 죽은 변호사 아줌마한테 따지던가."
"아아아악!!"
덕배는 바닥을 발로 쾅쾅 두드리며 짜증을 부렸다. 높은 주탑이 크게 흔들렸고, 나는 덕배의 후드 뒷덜미를 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껏 재건한 다리 무너뜨리지 말고, 가서 일합시다. 예? 월급으로 따져도 250만원이잖아요?"
"야! B급 이능력자 평균 연봉 따지면 20억이다!"
"그건 일반적인 얘기고, 여기는 제 소유 악당 조직이니까 꼬우면 강해지세요. 그거 알아요?"
나는 신서울을 향해 날개를 펼치며 바다를 가로질렀다.
"간부중에 B급은 당신밖에 없어요. 다 A급이지."
"으아아! 억울하다! 물지기 코어 내놔! 그거 내가 화염거인으로 잡은 거잖아!!"
"뭔 개소리래. "
나는 덕배를 갯벌에 집어던질까 하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신서울을 향해 날개를 움직였다. 덕배는 계속 코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시끄럽게 굴었다.
"에잇."
덕배는 덕배(트)가 되었다.
아.
인천대교는 아키택트가 세 시간만에 복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