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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197화 (197/1,497)

〈 197화 〉1부 9장 31

전투는 아주 수월하게 끝났다. 이승형이 날뛰고, 삼사가 그 뒤를 받치며, 온갖 A급 이능력자들이 강변에 상륙하는 흑전갈들을 사냥했다.

걱정했던만큼 사고는 없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무일도 없기를 바랐고, 정말로 다행스럽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자가 환염을 터트리며 흑전갈들을 몸소 때려잡으며 히어로들을 북돋았다거나, 이승형이 천자와 등을 맞대고 쌍으로 불꽃을 날리며 흑전갈들을 불태웠다거나 하는 일은 몹시 사소한 일이었다.

운사 박라온. 경상을 입었지만 흑전갈 수십마리를 먹어치웠으며, 우사와 풍백과 힘을 모아 S급 흑전갈을 무려 다섯 마리나 잡는데 성공했다.

집행관 백희아. 졸지에 최전방이 되어버린 와중에도 그는 히어로들을 빠르게 재편성하여 진을 구축해 흑전갈들을 무사히 상대해냈다.

설화령 석하랑. 얼음의 성벽 위에서 전장 전체를 내려다보며, 히어로들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얼음창을 쏘아 그 어떤 히어로도 중상을 입지 않게 지원했다.

내게 있어서 다른 히어로들이 다치는 건 그닥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청해를 뒤덮은 흑전갈 무리들이 모조리 호수에 수장되는 것을 영상으로 지켜보며 시름을 놓았다.

"괜히 걱정했네."

놀랍게도 사고는 없었다. 나는 덕배, 가을과 함께 야식을 집어먹으며 그들의 활약상을 반복하는 영상을 몇 번이고 봐야만 했다.

괴인이 될 히어로들.

그냥 빌런이 될 자들.

눈에 익은 자들도 있었고, 아직은 보이지 않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을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는 없었고, 나는 눈에 띄는 놈들만 우선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6월 15일 새벽 4시 44분.

1만의 중국 히어로들이 직접 눈으로 본 것과 워치의 데이터를 대조해 각국의 코어 정산이이 완료된 것을 끝으로, 청해호 에서의 전투는 끝을 고했다.

* * *

<6월 15일 오전 8시, 협회 특실.>

"그래서 은유하 양. 얼마나 벌었어요?"

[후후, 놀라지 마세요. 자그마치 S급 코어 21개! A급 107개! 그 밑으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많답니다.]

스크린 너머 은유하는 모닝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렸다. 그는 한국 히어로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양의 코어에 상당히 기쁜 듯 했다.

[다들 저걸 한국으로 들여오게 되면 제가 다 사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일부는 연구에 쓰고, 나머지는 가공해서 판매하고…. 이상한 곳에 배치 받았을 때 정말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니까요.]

"다행이군. 흑전갈들이 제일 먼저 덮친 곳이 한국 히어로들의 위치라서."

[그러게요. 어떻게 우연히도 그런 위치에 딱 자리를 잡았을까요? 누가 거기에 흑전갈들이 갈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어요?]

"그러게."

은유하는 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나는 모른척 고개를 돌렸다. 굳이 은유하에게 빚을 지울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 반응은?"

[두 가지 반응이 주류예요. 하나는 '될놈될'. 하필이면 흑전갈들이 우리 히어로들이 친 방어선으로 달려왔잖아요? 각국에서 압박을 넣어서 제일 안 좋은 자리로 배정을 당했는데, 알고보니 거기가 제일 좋은 명당이었다는 거에 기가 찬 노릇이죠.]

"조금이라도 코어를 얻었으니 체면치레는 한 건가."

한국의 이능력자들이 얻은 코어는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S급 코어만 오백이 넘었고, 집행관을 위시한 히어로들은 고작 스무 개밖에 얻지 못했다.

"애초에 흑전갈보다 사람 수가 더 많았는데 그럴 수밖에. 그정도면 충분히 성공했다. 안 다치고 돌아온게 최고야."

[아쉽지는 않으세요? 고객님 생각이랑 다르게 된 것 같은데.]

"무슨 생각?"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저는 고객님이 직접 다 죽이고 코어 모아서 저한테 파실 줄 알았거든요?]

은유하는 섭섭함을 토로했다. 흑전갈 토벌에 많은 이능력자들이 참여할 당위성을 설파했음에도, 역시 자신이 얻지 못한 코어들이 뭇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큐브를 얻었잖나."

[......하. 그거 말인데요.]

[단장님! 그거 내가 연구하면 안 돼요? 궁금하단 말야! 응?!]

은유하의 옆에는 흑발의 미소녀가 붉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밤새 연구라도 한 듯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있었다.

히메지 히카리. 연구계 히로인인 그가 큐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히카리에게 큐브 얘기는 안 한 것 같은데?"

[제가 얘기했어요. ...설마 이 정도로 집착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단장님, 그리고 있잔아요, 저 그 누구죠? 샤오린? 그 분이 사용하는 무기들도 궁금해요! 무기가 투명화된 거예요, 아니면 단장님처럼 난반사를 일으키는 건가요?! 원리가 뭐죠? 궁금하니까 가르쳐 주세요! 당장! 당자아아앙!!]

나는 스크린을 내려버렸다. 아마도 히카리는 은유하를 닥달하며 나와의 통화를 원하겠지만, 히카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한국으로 돌아간 뒤의 일이었다.

"문자는 남겨두고...."

나중에 따로 연락할테니 히카리는 알아서 제압하라고 문자를 남겼다. 나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천가을이 정말 화장은 잘 한단 말이야."

안주머니에 넣어둔 코어를 손으로 쓱 쓰다듬은 나는 방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SS급 히어로, 석하랑과 샤오린이 있었다.

"결국에 3주는 커녕 사흘도 못 있다가 가네?"

"그러게요."

나는 뒷편에 다가오는 협회의 직원을 향해 눈짓했다. 석하랑은 알겠다며 손을 들었다.

"예, 예. 공식석상이니까 예의차릴게요. 원하시면 존댓말도 해드리고. 그래서 비스트 테이머 님, 진짜로 귀국하실 거?"

"당연하죠."

여유를 가지고 돌아다니려던 일정은 금방 끝이 나버렸다. 호로관에 잠든 메뚜기 한 마리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건 놔둔다고 절대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니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여유있을 때 챙기기로 하고,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갑시다."

"청화 양!!"

멀리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복도 끝에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청년은 <환염>이라는 이명을 얻게된 주석, 천자였다.

"하아, 하아."

붉은색을 기조로 한 정장을 입은 천자는 이능력의 영향으로 머리칼이 회색으로 물들어버렸다.

"왜 벌써 가시려고 하십니까? 적어도 하루 정도는 계시다 가시지 않고!"

"S급 괴수들은 다 처리가 됐으니까요. 천자 님의 호의는 감사하오나, 정중히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독이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며칠이라도 푹 쉬시고 돌아가시는게-"

"천자 님."

나는 마력까지 살짝 풀며 입꼬리를 간신히 들어올렸다. 천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언젠가 이번 일과 같은 S급 괴수들이 날뛰는 일이 있다면, 한국의 협회를 통해 정식으로 파견 요청을 보내주십시오. 저도 이 땅에 남아있는 괴수가 있다면 남아서 마저 처리하고 가겠사오나, 아직 전 세계에는 퇴치되지 않은 S급 괴수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그런...!"

내 논리정연한 거절에 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나는 그가 인상을 쓰는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비틀렸고,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당황한 건지 마력이 상당히 흐트러지고 얼굴이 붉어졌다.

"처, 청화 양!"

덥썩.

천자가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진짜 잘라버릴까.

"마, 만약에 또 괴수가 날뛰게 된다면, 그 때는 다시 한 번 더 초청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런 일이 있다면."

나는 천자의 뒤에 따라온 모택평을 지긋이 노려봤다.

"후후."

여전히 모택평의 안에 들어간 환룡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내 시선을 흘려보냈다. 그의 옆에 보좌하듯 따라붙은 미청년, 백청영은 동창의 제독을 나타내는 의복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행여나 괴수가 있는지 백방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끄응."

환룡의 반대편에 서있던 유황숙은 환룡과 백청영의 태도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내 비행기 격추 건을 계기로 갑자기 천자를 따르는 노선으로 바뀌어버렸으니, 의심많은 그에게서 신뢰를 받으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괴수 나오기만 해봐라. 내 선까지 안 넘어오도록 잘 처리해.]

[귀찮은데.... 그냥 너 날아와서 잡고 가. 그러면 되잖아.]

환룡은 앙탈을 부리듯 눈을 찡그렸다. 모택평의 얼굴로 저런 짓을 하니 순간적으로 토가 쏠렸다. 그건 옆에 있던 샤오린도 별반 다를게 없어보였다.

"아쉽군요.... 모처럼 축제를 마련했는데."

"몸은 떠나지만 마음이나마 남아서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끄응."

흑전갈 파티를 통해 가장 많은 코어를 번 국가는 단연 중국이었다. 애초에 중국 땅에서 나왔던 괴수였던 만큼, 흑전갈 토벌은 얼마나 많은 코어를 중국의 지분에서 '뺏어오는가'에 대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한국은 단연 1위를 차지했고, 화권과 설화령의 활약에 반발 여론은 없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

나는 백청영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지파룡의 코어까지 양도받았다. 덕분에 지파룡과 물지기 두 마리의 코어를 아주 깔끔하게 청화의 공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음...."

나는 싱글벙글 웃는 백청영의 미소가 섬뜩해졌다.

[환룡.]

[왜?]

[백청영에게 나중에 전해라. 그.... 너무 불쌍하니까 적당히 하라고.]

[...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환룡이 과연 백청영을 제어할 수 있을까. 백청영의 과잉 충성에 대한 견제책으로 양도한 황제도 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는 졸지에 환룡을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 5년 반만 고생하자. 성주와 이계신만 물리치면 된다.]

[알았어. ......▣.]

"뭐?"

나는 모택평의 멱살을 붙잡을 뻔 했다. 방금 환룡이 뭐라고 한 거지? 나는 그가 나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들을 수 없었다.

[역시. 그렇구나. 음. 그런 거였어.]

환룡은 진짜 의미심장하게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나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거, 타깃이 가을이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더 늘어난 기분이네...? 후후.]

"......두 분 언제부터 그렇게 뜨겁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가 되셨습니까?"

샤오린이 눈쌀을 찌푸리며 나와 환룡의 대화를 끊었다. 나는 환룡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환룡은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 천자 님. 저는 칭하이 인근에서 자극을 받아 날뛸 괴수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그, 그러세요. 아. 그러면 배웅은-"

"주석께서 직접 하심이? 후후."

환룡은 포권까지 취하며 뒤로 물러섰다. 거머리같은 천자를 끝까지 내게 따라붙인 환룡은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러면 가시죠. 제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자는 밍기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답답해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회담장을 지나, 흑염룡을 부활시켰던 공터에는 눈에 익숙한 비행정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 저벅.

오열 종대로 도열한 한국 히어로들의 앞에, 흰 베레모를 쓴 검은 단발의 소녀가 우리를 향해 경례했다.

"비스트 테이머 청화, 설화령 석하랑, 운장 샤오린.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한국까지 모실 <백나로 호>의 함장, 백희아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백희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행정으로 올랐다.

"어, 어?"

"저기, 갑자기 승선하시면 안 되는-"

"피곤해요. 빨리 한국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앞을 막아서려는 이승형의 허리를 잡고 벽으로 밀쳤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나를 위해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야, 야!"

석하랑이 황급히 뛰어와 내 뒤를 따랐다. 천자를 무시하고 인사를 건성으로 받은 내 막무가내같은 행동에 당황한 것 처럼 보였다.

"니 우얄라카는데! 싸가지없다는 소리 들으면 어쩌려고!"

"빨리 서울 돌아가고 싶다. 거추장스러운 행사는 사양이야."

"아오, 저거 진짜. 나도 동감이다. 으히히."

석하랑은 문을 닫으며 의자에 앉았다.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고, 샤오린은 문이 막혀 영체가 되어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왔다.

"왜 문을 닫습니까?"

"알아서 잘만 들어오시네요."

"......."

"......."

'나도 이젠 모르겠다.'

누가 어디서 뭘하든 내 일이나 신경써야지.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 새가 없었다.

[아까 둘이서 얘기한 게 무슨 내용이야?]

[가는 길에 설명해주마.]

옆에있던 석하랑이 내게 대화의 내용에 대해 물었다. 나는 추후에 설명해주겠다고 했지만, 나도 이해가지 않는 내용이 잠시 마음에 걸렸다.

'...나중에 물어봐야겠어.'

나는 천가을에게 맡겨두었다가 내가 다시 챙겨 안주머니에 넣어둔 큐브-무신의 유해로부터 얻었던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먹튀 당한 거 챙겨야지. 암.'

창염의 피닉스는 약속했다.

정령 하나를 각성시킬 때마다 나에게 무언가를 주기로. 실제로 설야의 루살카를 해방함에 따라, 창염의 피닉스는 내게 '말투'라는 제약을 풀어줬다.

'환룡을 각성시켰는데, 내가 흑사갈한테서 큐브 털어서 지한테 써줬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튀었어.'

신장에서 북경까지 창염을 안고 날아오는 비행 데이트는 창염이 내 명치를 쌔게 때리는 걸로 끝났다. 물론 내가 너무 직설적으로 내 본심을 드러낸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거짓말을 하면 죽이겠다고 했던 것도 창염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하나 구해서 따져야 해.'

내가 큐브를 품고 있음에도 창염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빨리 큐브의 지분에 대해 은유하, 히카리와 함께 논의를 하거나 새로운 큐브를 찾아야했다.

"주무십니까? 어쩔 수 없군요. 뒷수습은 제가 하겠습니다."

샤오린은 다시 벽을 통과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석하랑이 그 틈을 타서 내가 누운 침대에 함께 누우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설명해줘봐. 뭔데? 뭔데뭔데? 환룡이랑 둘이서 뭔 얘기를 한 거야?"

"그냥 한 마디로 정리하마."

나는 석하랑의 손가락을 잡고 문으로 집어던졌다.

"쬬가 뾰가 되었다. 됐지? 난 잔다."

"뭔 개소리를, 흐아악?!"

잠시 뒤.

비행정의 코어 엔진이 마력을 뿜기 시작하며, 비행정이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한국까지 도착하기 전까지 불과 서너 시간, 나는 원작에서 사용하던 '나의 방'에서 오랜만에 깊게 잠들 수 있었다.

장소에서 오는 편안함 때문일까.

나는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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